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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호 길드
파지지직. 파지직. 쨍그랑.
자주빛 게이트가 깨지더니 블러드 길드원들이 나타났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눈빛만큼은 여전히 적들을 깨부실 만큼 사나웠다.
날이 갈수록 길드원들의 실력이 일당백이 되어가는 중이었다.
특히 이번에 홍영기가 80레벨을 찍어서 더더욱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이제부터 나는 슈페리얼 등급의 헌터다. S급이라 불러다오.”
“하아... 근육바보가 힘만 세지고 있어.”
박이현이 고개를 젓자 모두들 웃음꽃이 피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 심각한 얼굴의 게이트 관리국 직원이 수혁에게 다가왔다.
“길드장님. 고생하셨습니다. 그런데 헌터관리법에 따른 협회의 비상소집이 이루어져있습니다.”
“비상소집?”
“지금 부산에서 슈페리얼 게이트 폭주사태가 일어나 고렙 헌터들은 모두 부산으로 가야합니다.”
게이트 관리국 직원의 말에 갸우뚱하던 수혁이 작게 입을 벌리며 손뼉을 쳤다.
“아~! 날짜가 벌써 그렇게 되었나? 요즘 게이트를 깨느라 시간개념이 너무 뒤죽박죽 되어있었네요. 다들 피곤하지만 한 번 더 사냥하러 가야겠다.”
“가시죠! 내가 처리해주마! 푸하하하!”
수혁의 말에 홍영기가 허리를 젖히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부산으로 향하는 차량에서 모두들 스마트폰으로 게이트 폭주사태의 몬스터를 확인하고 있었다.
“용?”
“용이 아니야. 와이번이군. 녹색 브레스를 뿜는 걸 보니 그린와이번이야.”
“맞습니다. 아주 골치 아픈 상대입니다. 영악하며 가죽은 미끈하고 두껍습니다.”
수혁이 몬스터에 관해 설명하자 마린느가 말을 덧붙였다.
“와이번중에서 제일 약한 녀석이지만 문제는 공중을 날아다닌다는 점이지. 이 헌터님이 힘을 좀 써줘야겠군요.”
“하하하. 길드장님 덕에 마법을 하나 배웠는데 드디어 써먹을 때가 됐군요.”
자신의 손아귀에 공기를 모아 회전시키던 이명한이 후하며 입을 불자 청량한 바람이 차 안을 맴돌았다.
화염과 바람 마법을 사용하는 듀얼리스트인 그는 수혁이 헌터옥션에서 구해다준 마법을 써먹을 생각에 싱글벙글했다.
차에서 휴식을 취한 그들이 부산에 도착하자 이미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상처 입은 헌터들이 바닥에 누워 끙끙대고 치유계열의 헌터들이 쉴 새 없이 힐을 하느라 구슬땀을 흘렸다.
게이트를 공략하느라 못 온 길드를 제외하면 전국에서 손꼽히는 길드가 죄다 모여 있었다.
그 중 발언권이 가장 센 길드는 최근 청룡길드가 무너지고 국내 1위라고 불리는 백호 길드였다.
백호 길드의 길드장인 장이산은 호랑이를 연상케하는 수염을 가진 사내로 건틀렛을 낀 근접계열의 헌터였다.
그런 그는 현재 궁수계열의 헌터와 마법헌터들을 사정없이 닦달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저 녀석을 밑으로 끌어내라고! 왜 못 맞추는 거야!”
“화살을 맞아도 피부가 두꺼워서 소용이 없습니다.”
“소용이 없으면 끝이야? 어떻게든 뚫어야지. 마법사들은 대체 뭐가 문제야?”
“움직임이 빨라서 타겟팅이 잘 안되는게...”
“아오씨. 돌아버리겠네.”
가장 큰 문제는 와이번이 헌터들만 다가오면 하늘로 떠올라서 브레스를 쏘아댄다는 점이었다.
지상으로 끌어내려야 공격이라도 할 텐데 그것부터 안 되니 참으로 답답할 노릇이었다.
거기에 정부에서도 어서 해결해달라고 쪼아대는 중이었다.
기존의 공중전력으로 몬스터에게 미사일과 포를 쏘아댔지만 전혀 먹히지 않아 헌터들만 바라보는 중이었다.
“다들 아이디어 없어?”
“끄응...”
백호 길드에서도 못하는 일을 다른 중소형 길드원들이 해낼 리가 만무했다.
임시로 막사를 친 회의장에서 다른 길드장들이 입을 다물고 있자 장이산은 부아가 치솟았다.
“아니! 다들 얘기를 안 하면 뭐 하러 모인 거야! 다들 입에 꿀 발라놨나? 맛보느라 입이 안 열려?”
그는 실력만큼이나 유명한 점이 불같은 성격이었다.
빙빙 돌려말하는 법을 모르는 그는 그만큼 호불호가 확실한 사람이었다.
레벨이 부족한 길드원들이 괜히 몬스터를 잡다가 죽을까봐 불안한 중소 길드장들은 뒤로 물러나기 급급했다.
길드장으로 모인 자들이 눈치만 보며 자신들에게 일을 떠넘기니 더더욱 부아가 치솟았다.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진 장이산을 진정시키는 건 부길드장인 김이현이었다.
“길드장님. 다른 고렙 궁수들이 공략을 마치고 부산으로 모여들고 있으니 조금만 더 참아보죠.”
“다들 모여들기 전에 부산 시내가 녹아버리게 생겼는데 어찌 기다려!”
“블러드 길드도 곧 도착할 거에요. 그곳에 박이현이 있잖아요.”
“박이현? 으음... 언제 온다는데?”
성질이 누그러진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회의장 문이 열리며 수혁이 들어왔다.
길드장들의 시선이 쏠리는 가운데 장이산이 환하게 그를 반겼다.
“블러드 길드가 왔구나! 이봐 길드장! 박이현 헌터를 빨리 준비시켜!”
“...말이 좀 짧네?”
수혁의 불편한 심기를 본 김이현이 장이산의 앞을 막아섰다.
“블러드 길드장님. 호호호. 저희 길드장님이 지금 많이 예민해서 그래요. 이해 좀 해주세요.”
“아니 나는...”
“여보-! 그 입 좀 다물어요!”
“...”
함부로 말을 뱉던 장이산이 김이현의 말에 꼼짝을 못했다.
기죽은 호랑이의 모습에 만족한 수혁 역시 사사로운 감정은 잠시 접어두기로 했다.
지금은 저 와이번을 잡는 것이 우선이었으니까.
“블러드 길드는 준비되었으니 먼저 갑니다.”
“저희도 갈 겁니다. 다들 움직이죠.”
입을 다문 장이산 대신 김이현의 말에 모두들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실컷 브레스를 뿜어대며 도시를 녹이던 와이번은 고층아파트 옥상 위에 드러누워 햇빛을 쬐고 있었다.
헬기와 전투기를 곧장 녹여버리며 타격을 받지 않던 와이번은 제 세상에 온 듯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낯선 세상에 들어온 것도 잠시, 자신을 위협할만한 천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와이번은 무서울 것이 없었다.
와이번의 눈에 또다시 귀찮은 인간들이 자신을 공격하기 위해 모이자 자신의 흉포한 본성을 드러내려 입을 벌려 포효했다.
캬오오오오-
“제가 1시 방향에 마법을 사용할테니 그 쪽으로 몰아주시면 됩니다.”
이명한이 새로 익힌 마법은 에어 릴리즈로 일정 범위의 공기를 없애버리는 무서운 마법이었다.
공기를 없애버린다면 그 범위만큼의 존재는 숨을 쉬지 못해 죽음에 이를 뿐 아니라 비행몬스터들은 날개짓을 해도 날지 못하게 하는 마법이었다.
박이현이 활을 꺼내 시위를 당기자 마력으로 이루어진 화살이 만들어졌다.
“저 녀석을 떨어트릴 수 있는 거 맞죠?”
“두고 보시죠.”
각자의 무기를 집어든 다른 길드의 사람들이 긴가민가하는 표정으로 수혁을 바라보았다.
“별 다른 방법 있어? 다들 지정된 위치로 이동해!”
장이산의 말에 무기를 든 수십 명의 헌터들이 와이번의 주변을 넓게 둘러쌓다.
가소로운 표정의 와이번이 헌터들을 향해 브레스를 내뿜었다.
“브레스다!”
“내가 막지! 워 배리어!”
홍영기의 몸이 붉은 빛을 내뿜으며 브레스를 대형 사각방패로 막아섰다.
산성끼가 있는 브레스가 홍영기를 녹이지 못해 주변의 지형만 파괴했다.
자신의 브레스가 막히자 흠칫 놀란 와이번이 하늘로 날아올랐다.
“지금!”
쐐애애액-
하늘로 날아오르는 타이밍에 맞춰 박이현의 마력화살이 와이번에게 쇄도했다.
심상치 않은 화살에 고개를 젖힌 와이번의 목덜미에 상처가 생겼다.
“박이현을 도와서 화살을 날려!”
처음으로 입은 상처에 놀란 와이번이 도망가려 했지만 그 방향으로 쏟아지는 화살 세례에 방향을 틀었다.
방향을 바꾼 와이번이 이명한의 정해놓은 범위 안에 들어가자 그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에어 릴리즈!”
이명한이 손을 뻗자 와이번이 속한 공중이 무풍지대가 되어버렸다.
힘차게 날개짓을 해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던 와이번이 퍼덕거리며 하강했다.
끼에에에엑-
“오오오. 드디어 저 도마뱀 새끼가 떨어지는구나! 다들 모여라! 사냥하러 가자!”
그 광경에 장이산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통쾌하게 쳐다보았다.
“날개! 날개를 노려! 다시는 못 뜨게 해!”
마침내 와이번이 쿵하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헌터들이 달려들자 이명한은 에어 릴리즈마법을 해제했다.
공기가 없으면 다른 헌터들도 숨을 쉴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공격하지 못해 안달이 났던 헌터들이 이때다 싶어 마구 달려들었다.
그 중 제일 앞장선 것은 건틀렛에 마력을 집중한 장이산이었다.
“이 도마뱀 새끼야! 호포권(虎咆拳)!”
주먹을 뻗자 호랑이 형상을 한 마력이 울부짖으며 와이번의 머리로 달려들었다.
와이번이 날개를 뻗어 머리를 막자 날개가 타격을 입은 듯 찢어지며 상처를 흘렸다.
크르르르르.
“마력을 아끼지 말고 퍼부어! 탱커들 시선 끌어!”
일반 무기가 먹히지 않아도 마력을 집중시킨 무기로는 와이번의 가죽에 상처를 입혔다.
근접 계열의 헌터들이 와이번의 손톱을 뭉쳐서 막아내며 검사들과 마법사들이 타격을 입혔다.
와이번이 휘두르는 꼬리에 여러 헌터들이 휩쓸렸지만 치유계열의 헌터들이 재빨리 붙어 힐을 날렸다.
상처를 치료한 헌터들이 다시금 스킬을 쓰며 와이번이 날아오를 틈을 주지 않았다.
캬오오오오-
쉴 새 없이 공격받던 와이번이 고통에 울부짖었다.
백호 길드를 주축으로 한 헌터들이 생각보다 와이번과 잘 싸워나가자 수혁이 만족스럽게 바라보았다.
“우리가 안 도와줘도 돼요?”
“다른 헌터들도 경험을 쌓아야지. 이만하면 우리가 할 일은 다 한 것 같네.”
“이현아! 어때? 내가 아까 브레스 막는 거 봤지? 이번에 얻은 스킬 쩔지?”
“늬에~ 늬에~”
“우리는 여기서 빠져주고 움직이자.”
블러드 길드원들을 모은 수혁이 그들을 데리고 이동했다.
“어디 가십니까?”
“게이트 깨러 가야죠.”
“???”
게이트 관리국 직원들과 헌터협회 관계자들이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블러드 길드가 향한 곳은 게이트 폭주사태를 일으킨 슈페리얼 등급의 게이트였다.
그들을 뒤쫓아온 관리국 직원들이 황당한 얼굴을 보였다.
“이걸 블러드 길드만 들어간다구요?”
“네. 이곳은 저희가 깰 테니 통제해 주세요.”
“아니... 다른 길드 연합도 못 깼는데 어떻게 깰 겁니까? 이건 자살행위나 다름없습니다! 하다 못해 백호 길드라도 연합해서 가야죠!”
그의 실력을 모르는 관리국 직원이 자기나름대로 희생을 막는다며 막아서자 수혁도 난감한 얼굴을 보였다.
결국 게이트 관리국장인 이창에게 연락한 폰을 넘겨주었다.
- 블러드 길드가 깬다니 말리지 말고 놔둬.
“국장님?!”
- 책임은 내가 지지. 진행시켜.
책임감 강한 관리국 직원의 어깨를 두들겨준 수혁이 블러드 길드원들을 이끌고 검은색 게이트 내부로 들어갔다.
부산 헌터들의 죽음을 목도했던 관리국 직원은 이대로 희생을 늘릴 수 없다고 생각하고는 다시 와이번 사냥이 이루어지는 곳으로 향했다.
“으랏챠아-!”
와이번의 머리 위에 올라탄 장이산의 주먹이 와이번의 두개골을 부수며 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죽음을 맞이한 와이번이 쿵하며 쓰러졌다.
“와아아아아-!”
“이겼다-!”
헌터들이 무기를 들고 승리의 환호성을 질렀다.
와이번의 머리 위에서 기념사진을 찍으려는 장이산에게 관리국 직원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헉. 헉. 백호 길드장님-!”
“응? 뭐야?”
“블러드 길드가 홀로 게이트에 들어갔습니다! 도움이 필요합니다!”
“뭐?! 이 자식들이 욕심에 미쳤네. 이렇게 사고를 쳐?”
청룡 길드를 꺾고 국내 1위 길드라는 자부심이 강한 장이산은 책임감도 컸다.
현재 정부로부터 현재 상황을 책임지던 그는 블러드 길드가 홀로 게이트에 들어가자 새로운 희생자가 늘어날 거라 생각했다.
“우리 백호 길드는 국내 최고의 길드로써 헌터들의 헛된 죽음을 바라볼 수 없다. 우리가 그들을 구출하러 간다! 다들 움직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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