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거의 인연
출혈을 일으켜 상태이상(빈사)를 일으키는 붉은 장미덩쿨의 검에 스쳤으니 물약을 사용하는 것이 아닌 이상 치료가 쉽지 않을 터였다.
“명색이 헌터라더니 하는 짓은 치졸하구나!”
“다짜고짜 도끼부터 던지는 놈이 할 말은 아니지. 심지어 남의 나라에서 말이야.”
“대장부가 하는 일에 네까짓게?”
팔뚝에서 흐르는 피가 강뢰부를 적셨다.
피가 뚝뚝 땅을 적시자 수혁이 아쉬운 눈초리를 보였다.
‘정상적인 놈은 아니야.’
룽하이가 수혁에 관한 평가를 수정했다.
의심스러운 놈에서 이상한 놈으로.
하지만 실력만큼은 진짜였다.
그 틈에 자신의 갑옷과 무기를 챙긴 김예현이 건물 밖으로 나오며 합류했다.
“헌터들이 무기를 들고 싸운다!”
‘2명은 무리다.’
주변의 소란에 구경꾼들도 늘어나자 눈치를 살피던 룽하이가 몸을 뒤로 돌렸다.
“도망친다! 내가 쫓을게!”
“저도요!”
건물 외벽을 밟고 튀어올라 옥상으로 올라간 룽하이를 따라 수혁과 김예현이 뒤를 쫓았다.
피를 철철 흘리는 룽하이는 수혁에게 절대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수혁은 느긋하게 뒤를 쫓았다.
쫓기는 룽하이는 죽을 힘을 다하겠지만.
인적이 드문 곳으로 룽하이가 도달한다면 그때 잡아도 늦지 않았다.
오히려 옥상을 타넘던 김예현이 점점 뒤쳐졌다.
룽하이의 신형이 도심을 지나 작은 야산으로 들어가자 수혁의 발놀림이 더욱 빨라졌다.
“먼저 갈게-!”
“아...”
빛살처럼 수혁이 빠른 속도로 사라지자 김예현의 표정이 복잡해졌다.
‘또 뒤쳐져버렸네.’
게이트에서 겪었던 일이 떠오른 그녀는 자존심이 상하는지 이를 악다물었다.
룽하이의 도주실력은 김예현이 따라잡지 못할 만큼 상당했다.
그는 삼합회의 추적도 뿌리칠 만큼 도주하는 속도와 흔적 지우기에 자신이 있었다.
“후... 따돌렸나.”
상처를 치유하고 이 치욕을 배로 되갚아주면 될 거였다.
“다 도망친 건가?”
“치잇.”
어느새 옆에 나타난 수혁 때문에 룽하이가 다시 땅을 박찼다.
“끝이야?”
겨우 따돌린 줄 알고 야산의 바위 틈에 앉아 쉴 때에도, 나무 밑동에 숨어있을 때에도, 어김없이 수혁이 나타났다.
“헉. 헉. 헉.”
계속되는 출혈에 숨이 차오르며 눈앞이 깜깜해졌다.
얼마나 오랜 시간을 도망쳤는지 이제는 계산도 되지 않았다.
결국 한계직전까지 내몰린 룽하이가 임무를 마치고 한국을 뜨기 전까지 숨어있을 안가로 지정된 곳으로 도착했다.
“빌어먹을! 이 치욕은 잊지 않겠다!”
안가에 마련된 치유물약으로 상처를 치료하기 직전이었다.
“흐음... 재미있는 장소로군. 이런 곳에서 뒤가 구린 짓을 해온 건가?”
“!!! 어떻게 알고 왔지? 내가 흔적을 지우며 돌아왔는데?!”
상처를 찢은 옷으로 최대한 틀어막은 뒤 흔적을 최소화했다고 생각했지만 어김없이 수혁이 나타났다.
그러나 수혁은 그의 물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안가의 주변을 살피기 바빴다.
지금의 몸상태로 수혁을 이길 수는 없지만 룽하이에게는 남은 비장의 한 수가 있었다.
왼손의 약지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리던 그는 곧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안가로 다가오는 익숙한 인물들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늦었군! 올레스키~ 기다렸다고!”
“?”
짧은 머리에 푸른 눈의 남성들이 단단한 몸을 드러내며 다가왔다.
어제 일이야 어찌되었건 지금 당장 도움이 필요한 룽하이가 반갑게 쳐다보았다.
“적이 쳐들어왔다. 어서 저 놈을 죽여!”
“상처를 입었군. 고통을 덜어주지.”
“오- 그것 참 고맙. 켁.”
뿌지직.
올레스키의 부하들이 수혁과 대치하는 사이 룽하이에게 다가간 올레스키가 곧바로 맨손으로 룽하이의 목을 졸랐다.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룽하이의 목이 꺾이며 혀가 입 밖으로 빠져나왔다.
털썩.
올레스키가 축 늘어진 룽하이를 옆에 던져버렸다.
“퉤. 쓰레기 같은 자식이 어디서 친한 척이야? 어이. 한국인. 이대로 돌아가라. 내가 예전에 한국에서 산 정이 있으니 살려 보내주마. 여자의 복수는 포기해라.”
“복수?”
“그래. 이 짱개 녀석이 죽였을 여자의 복수.”
“안 죽었는데?”
“안 죽었다고? 블럇(Blyat)-!!! 시킨 일도 못하는 쓰레기 같은 자식!”
올레스키가 곧바로 바닥에 누운 룽하이의 머리통을 발로 세게 차버렸다.
너덜거리는 머리통이 몸과 분리되어 떨어지더니 허연 뇌수와 피가 흘러나왔다.
“차를 타고 가다 이 자식이 발정난 개처럼 뛰어가길래 임무를 끝낸 줄 알았는데 전혀 쓸모없는 짓만 했잖아?”
룽하이의 시체에 계속 발길질을 하며 화풀이를 하는 올레스키의 살벌한 모습에 같은 패밀리들이 말릴 생각조차 못했다.
그런 올레스키를 지긋이 지켜보던 수혁은 전생의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비셔스의 정예멤버라...”
“앙? 네가 그 이름을 어떻게 알지? 너! 살려보내는 건 취소다. 이 자식 다리를 잘라버려!”
올레스키의 명령에 패밀리들이 무기를 꺼내들었다.
“쑤까(сука)! 블럇!”
패밀리 중 한 명이 들고 있던 검을 휘두르자 공중에서 다른 2개의 검이 생성되며 수혁에게 쇄도했다.
채챙.
날아오는 검을 막는 사이 남은 두 사람이 수혁의 좌우로 갈라지며 검을 찔렀다.
빙그르르 몸을 돌리며 교차하는 검을 흘린 수혁이 한 쪽으로 주먹을, 반대편으로 발차기를 날렸다.
빠바박.
북치는 소리와 함께 안면이 부서진 올레스키의 부하들이 널부러졌다.
“쵸르트(чёрт)!”
검을 날렸던 부하가 욕설과 함께 검을 휘둘렀다.
아직 균형을 잡지 못한 수혁이 팔을 뻗어 손으로 검을 잡았다.
“?!”
아라크네의 실로 짜여진 장갑 덕분에 손에는 상처하나 생기지 않았다.
푹.
자신의 검이 붙잡히자 당황한 부하의 목에 검 하나가 관통했다.
순식간에 자신의 부하들이 당하는 것을 보자 올레스키가 화통한 웃음을 지었다.
“하하하하. 제법 싸울 줄 아는 녀석이구나. 비셔스의 이름을 들을 만하군. 너도 스카웃 제의가 온 거냐?”
“아주 머나먼 예전에 그런 적이 있었지.”
지금 생은 아닌 전생이지만.
“으음... 동료가 될 자인가.”
“내가? 너 따위 빌런하고?”
“나 따위? 빌런? 너와 내가 다른 게 뭐지? 그렇게 사람을 쉽게 죽이고는, 입가의 미소부터 지우지 그래?”
“내가 빌런은 경험치로 보는 주의라.”
“껄껄껄. 그렇다면 나는 헌터들이 내 경험치다.”
올레스키의 몸이 붉어지더니 덩치가 순식간에 불어났다.
어느새 수혁을 어린아이처럼 바라볼 만큼 거대해진 몸으로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제법 검을 쓰지만 그것도 끝이다.”
“거대화 스킬이군. 하지만 생각보다 작네. 슈페리얼 등급도 못 올라간 수준이라 그런가?”
“...뭐라고? 이 쥐좆만한게-!”
포효하는 올레스키가 거대한 주먹을 휘둘렀다.
풍압을 일으키는 덕에 흙과 돌덩이들이 주변으로 비산했다.
수혁은 저 무식한 주먹을 마주하는 대신 스텝을 밟으며 올레스키의 다리로 접근했다.
“꺼져라-!”
자신의 다리로 붙은 수혁을 떨쳐내려 발을 휘둘렀지만 그는 이미 뒤까지 이동한 뒤였다.
자신보다 덩치가 큰 적을 상대하는데 이골이 난 수혁은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끄아아악-!”
그의 검이 양쪽 아킬레스건을 끊자 올레스키는 고통에 울부짖었다.
이를 꽉 깨문 올레스키가 곧장 뒤로 넘어지며 팔꿈치로 내리찍었다.
쿠-웅.
땅이 움푹 파였지만 수혁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비산하는 먼지 사이로 수혁을 찾기 위해 올레스키가 눈을 부라렸다.
“어딨느냐-!”
“여깄지.”
머리 위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기도 전 수혁의 검이 머리를 관통했다.
머리가 뚫린 올레스키는 그대로 절명했다.
이미 전생의 능력치에 가까운 수혁에게 만렙도 도달하지 못한 빌런들은 너무나 쉬운 상대였다.
자신의 상태창을 살피던 수혁은 거의 가득 찬 경험치 숫자에 뿌듯함을 느꼈다.
“조금만 더하면 1레벨은 올릴 수 있겠군.”
[언어 습득력이 강화됩니다.]
[미약한 검술을 얻었습니다.]
[쓸만한 박투술을 얻었습니다.]
[마력 운용 능력이 증가합니다.]
[고통 내성이 증가합니다.]
올레스키 패밀리와 룽하이의 피를 흡수하자 그들의 특성을 얻었다.
기존의 특성들은 강화되었고 새로 얻은 특성도 존재했다.
그 중 마력 운용 능력 특성이 강화된 점이 제일 만족스러웠다.
이어서 올레스키 패밀리의 주머니와 장비를 뒤져보았으나 쓸만한 물건이 나오지 않았다.
그들이 사용하던 무기는 초보자용 검에 불과했고, 올레스키는 맨주먹으로 그와 상대할 만큼 가진 것이 없었다.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룽하이의 몸을 수색하던 수혁의 눈에 손가락에 낀 검은 반지가 들어왔다.
[케르베로스의 반지 : 지옥의 수문장 케르베로스를 소환한다.(1회용)]
“이 녀석은 이렇게 좋은 걸 가지고 왜 사용하지 않았지?”
지옥의 열화를 내뿜는 케르베로스는 위급상황에서 사용하기 좋은 소환수였다.
흑룡회의 보물이었던 반지를 챙긴 룽하이는 사용도 하지 못하고 수혁에게 빼앗긴 셈이었다.
반지를 왼손 약지에 낀 수혁이 자리에서 일어났을 때 수풀을 헤치고 김예현이 나타났다.
“길드장님!”
“괜찮아. 다 끝났어.”
야산을 많이 헤맸는지 얼굴과 갑옷이 가리지 못하는 부분에 나뭇가지에 긁힌 상처가 듬성듬성 나있었다.
수혁의 무사한 모습을 보자 마음이 놓인 그녀가 숨을 고르며 호흡을 다스렸다.
“하아...하아...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그렇게 어려운 상대는 아니었어. 너를 공격하는 것은 블러드 길드를 공격하는 것과 마찬가지야.”
“...길드 가입을 너무 잘했네요.”
“그렇지?”
수혁이 넉살 좋게 웃자 김예현도 따라 웃었다.
미소 짓는 모습도 잠시, 그녀는 침을 꿀꺽 삼켰다.
“사실 예전부터 이런...”
“잠깐!”
정색한 수혁이 아공간에서 단검 하나를 꺼내 재빠르게 수풀 속으로 던졌다.
검을 꺼내들고 단검을 던진 곳으로 향하자 김예현 역시 검을 뽑고는 그의 뒤를 쫓았다.
나무에 박혀있는 붉은 장미덩쿨의 단검에는 뜨거운 핏방울이 맺혀있었다.
단검이 스친 누군가는 급히 도망간 듯 움푹 파인 땅의 흔적만 존재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자신의 흔적을 지운 듯 그 외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
“염탐하는 녀석이 있었군.”
“도망갔네요. 하지만 흔적이...”
“괜찮아. 날 따라와.”
안개처럼 퍼지는 혈향이 수혁의 코끝을 맴돌았다.
정장을 입은 박세진은 대외적으로 청룡 길드의 잡무를 담당하는 지원팀장으로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길드장인 최용수의 심복이었다.
그가 시키는 각종 더러운 일을 도맡아하며 청룡 길드의 온갖 치부에 관해 모르는 것이 없었다.
의외로 박세진은 자신이 하는 일에 프라이드가 있었다.
그로 인해 청룡 길드가 양지에서 활약하며 국내 1위 길드를 달성했다는 자부심을 가졌다.
그런 그는 현재 미친 듯이 도망가는 중이었다.
옆구리에 난 상처에 포션을 부어 출혈은 멈추고는 입에서 나오려는 피를 억지로 삼켰다.
“지독한 독이다.”
블러드 길드장에게 자신이 준비한 자들이 모두 죽은 걸 목격한 그가 잠깐 방심한 사이 날아온 단검에 상처를 입었다.
옆구리부터 시작된 통증이 혈관을 타고 온 몸으로 퍼지자 그는 자신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인지했다.
이대로라면 기껏 일궈놓은 청룡 길드가 세계를 누비는 모습도 보지 못하고 죽게 생겼다.
하는 수 없이 그는 본능적으로 지금 상황을 타계할 실력자에게 갈 수 밖에 없었다.
청룡 길드의 최고 실력자인 최지헌에게 말이다.
청룡 길드가 마련해놓은 여러 수련장 가운데 최지헌 전용 수련장이 따로 있었다.
산공기를 맡아야 검술에 좋다고 박박 우기는 자신의 조카를 위해 봉제산에 단독 수련장 하나를 최용수가 만들어주었다.
그곳에서 가부좌를 틀고 명상을 하고 있던 최지헌의 한쪽 귀가 꿈틀거렸다.
수련장으로 빠르게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낀 탓이었다.
“지... 지헌아!”
“세진 팀장님? 괜찮아요?”
식은땀을 흘리는 박세진이 최지헌의 곁에 다가오더니 풀썩 쓰러졌다.
갑작스러운 일에도 침착함을 유지한 최지헌이 박세진의 코에 손가락을 갖다 댔다.
미약하지만 숨을 내쉬는 중이었다.
“위... 위험...”
“뭐라구요?”
“조... 심...”
이어서 자신의 수련장으로 다가오는 인원들을 확인한 그의 눈이 커졌다.
“예현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