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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룡회
급격하게 팽창된 분위기에 정장의 남성이 가운데에 끼어들었다.
“누구든지 상대방을 공격한다면 우리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겁니다! 이곳에서 우리를 적으로 돌릴 생각은 아니겠죠? 선수금도 다시 뱉어야 할 겁니다.”
“퍽이나.”
룽하이와 올레스키 패밀리 모두가 잠시 고민하더니 무기를 내려놓았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돈으로 움직이는 그들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상대방을 공격해서 얻을 이익이 딱히 없었다.
단순히 자존심이 상했다는 이유만으로 지금 당장 칼을 뽑기에는 수지타산이 안 맞았다.
“어쨌든 파트너는 필요 없어.”
“그건 우리도 마찬가지.”
‘의뢰가 끝나고 전부 죽여주마.’
‘건방진 녀석. 피부를 산채로 벗겨버려야지.’
상대방을 죽이고 의뢰받은 금액까지 뺏어버린다면 제법 괜찮은 결말이었다.
그들은 의뢰를 실패한다는 생각은 애초에 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실력에 자신감이 충분했으니.
빌런의 본능을 잠시 미룬 그들이 거실에 마련된 소파에 앉았다.
정장의 남성은 진정된 분위기에 속이 끓어오름과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칫하다 작업도 시작하기 전에 손에 피를 먼저 묻힐 뻔했다.
‘이번 일만 끝나면 어차피 전부 죽일 거니까.’
서로가 서로의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상황에서 정장의 남성이 준비해둔 사진을 돌렸다.
사진 속에는 긴 흑발 생머리의 여성이 여러 각도에서 도촬된 사진이었다.
룽하이와 올레스키 패밀리 모두 사진 속 여성에 정신이 팔리자 말을 이었다.
“이름은 김예현, 검과 방패를 모두 다룰 줄 아는 헌터로 현재 67레벨입니다.”
“고작 한 명 상대로 나를 부르기엔 너무 과도한 것 같긴 하군. 나야 보수가 있으니 땡큐지만.”
룽하이와 올레스키 패밀리 모두 70레벨을 앞둔 자들이었다.
그만큼 수많은 헌터들과의 전투로 경험이 풍부한 자들이었고 빌런으로써 지금까지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실력이 입증되었다.
올레스키 역시 이번에는 룽하이의 말에 거들어주었다.
“으음... 고작 계집애 한 명 때문에 우리를 부른 건가? 청룡 길드가 한국 최고의 길드라더니 돈이 제법 많군.”
“하.하.하. 이래보여도 저희 청룡 길드의 최고 에이스인 최지헌과 동급의 실력으로...”
“누구? 최지헌? 이런 쪼그만 나라에서 에이스라고 해봤자지. 대국의 무수한 헌터들에 비하면 조족지혈에 불과하다.”
“크흠. 이번엔 나도 동감이군. 동생들과 즐거운 관광이나 하다 가야겠어.”
“...”
한국을 무시하는 발언에 속이 상한 정장의 남성이 간신히 자신의 속마음을 얼굴로 드러내지 않았다.
“...... 아무튼 여기까지입니다. 의뢰 기한은 일주일이고 완료시 한국을 빠져나갈 수단은 인천의 부둣가에 마련해놓을 겁니다. 하지만 실패하고도 뻔뻔하게 군다면...”
손을 목에 그으며 경고의 손짓을 날렸지만 오히려 모두의 비웃음만 살뿐이었다.
“한국의 자랑 최지누구?라도 부를 건가? 우릴 상대하려면 최소한 최고레벨이라는 홍영기 그 자 정도는 되야할텐데?”
올레스키의 말에 룽하이가 정장의 남성을 같이 비웃었다.
이제는 인내심이 다한 정장의 남성이 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는 그에게 올레스키가 소리 질렀다.
“여자는? 보드카는?”
“...... 2층에 가보시죠.”
“좋아. 넌 이제 가봐. 우리는 회포를 좀 풀고 일을 시작해야겠어.”
시시덕거리는 올레스키 패밀리가 계단으로 올라가는 모습에 룽하이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김예현의 사진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만지작거리던 룽하이는 소파에 누우며 사진을 얼굴 위에 덮었다.
길게 올라간 입꼬리가 사진으로 가려졌다.
룽하이는 항상 살인 직전이 제일 흥분되었다.
사진 속 여자가 비명을 지르며 울부짖는 모습을 상상한 그의 손이 바지춤으로 들어갔다.
다음 날, 술에 잔뜩 취한 올레스키 패밀리는 해가 중천에 떠있을 때 눈을 떴다.
“그 중국놈이 벌써 갔어! 선수를 빼앗겼다!”
1층에 있어야할 룽하이가 사라진 모습을 보게 되자 올레스키가 방방 뛰었다.
“형님.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그자식이 의뢰를 해결하게 놔두고 바로 죽여버리죠.”
“오오- 역시 모스크바 대학교 출신이야. 너의 두뇌는 우리의 자랑이다.”
올레스키 패밀리의 둘째인 이반의 어깨를 올레스키가 두들겼다.
이반이 모스크바 대학교에서 교내청소직원이었다는 것은 그들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비열한 미소와 함께 손에 보드카병을 쥔 그들은 집 밖으로 나갔다.
***
“참새가 방앗간을 벗어났습니다.”
선데이에게 받은 폰으로 빌런들의 실시간 위치가 수혁에게 보고되었다.
그들을 당장 처리하는 것보다 어째서 한국으로 들어왔는지 궁금했던 그는 잠시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여전히 타겟이 누군지는 모르는 거야?”
“청룡 길드에서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더군요. 그들의 세이프 하우스에는 감청을 막는 장비들과 함께 경계가 엄청났습니다. 빌런을 감시하는 활동과 달리 저희 측 요원을 투입시켰다가는 마스터의 행적이 노출될 우려가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청룡길드가 무슨 꿍꿍이인지 궁금하군. 내가 직접 그들을 뒤따라서 무얼 노리는지 보지. 그런데 참새와 부엉이는 같이 하지 않나보군?”
“아무래도 국적도 다르고 그들의 성향 상 뭉치지는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참새는 룽하이를, 부엉이는 올레스키 패밀리를 지칭했다.
오히려 따로 활동하는 것이 각개격파를 위해 수혁에게는 땡큐였다.
먹잇감이 괜히 뭉쳐서 저항한다면 그로서도 귀찮은 일이다.
물론 빌런들이 뭉쳐봤자지만.
“현재 참새가 경인고속도로를 타고 서울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자세한 건 폰을 켜시면 참새의 현재 위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수혁이 폰을 키자 지도와 함께 반짝이는 물체 하나가 도로를 이동 중인 모습이 보였다.
“이대로라면 신월IC를 통과하겠군. 내가 따라붙지.”
해외에서 경험치가 배송되었으니 직접 찾으러 가볼까.
부우우-웅.
수혁의 붉은 스포츠카가 배기음을 내뿜으며 목표물을 향해 움직였다.
실시간으로 미국의 위성이 수혁에게 정보를 제공해주었다.
낡은 아번떼 한 대 뒤로 수혁의 차가 따라붙었다.
너무 노골적으로 미행하는 걸 막기 위해 차를 앞질러가거나, 신호에 앞서 걸리는 등 교묘하게 따라붙었다.
다행히 룽하이는 수혁의 차를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상대가 누구든 이길 수 있다는 자만심이 가득 차있었다.
먼저 의뢰대상을 죽이고 머저리같은 러시아놈들은 그 다음이었다.
룽하이가 주차선을 무시한 채 차를 멈춘 뒤 원룸지역으로 들어갔다.
기척을 숨긴 수혁이 그 뒤를 쫓았다.
수혁의 갖은 특성으로 인해 룽하이는 그가 따라붙는 낌새를 전혀 알아차릴 수 없었다.
폰을 꺼내 정보를 확인하며 두리번거리던 룽하이의 발걸음이 4층짜리 빨간벽돌빌라에서 멈췄다.
한 번 더 확인을 거친 뒤, 손도끼를 집어든 룽하이가 곧장 건물 내부로 들어갔다.
그가 진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혁이 빌라입구에 멈춰 섰다.
뒤따라 가려던 그 때 익숙한 목소리가 수혁을 불렀다.
“길드장님?”
아침 운동을 마쳐 땀범벅이 된 샛노란 트레이닝복을 입은 김예현이었다.
“김예현 헌터님? 어떻게 여기에...”
“어떻게라뇨? 제가 사는 곳인데요. 그런데 회식 때 저한테 편하게 반말하기로 하지 않으셨나요?”
“그랬나요?!”
수혁은 이것이 우연의 일치라 생각되지 않았다.
청룡길드와 김예현의 접점이라...
도대체 뭐지?
전생의 기억을 더듬어보던 그의 뇌리를 스쳐지나가는 내용이 떠올랐다.
그러고보니 김예현이 헌터를 죽이고 빌런이 된 경우를 생각해보니 죽은 헌터는 청룡길드 소속이었다.
그래. 그녀가 수혁이 알 정도로 유명세를 떨친 이유는 청룡길드의 길드장을 살해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퍼즐의 일부가 맞춰졌다.
그녀가 청룡길드와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제가 빌런헌터로도 활동하는 거 아시죠?”
“반말!”
“...알지? 빌런헌터를 뒤쫓던 중이었어.”
“빌런?! 제가 도와야겠네요! 장비를 집에서 꺼내올게요!”
김예현이 의욕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수혁이 고개를 저었다.
“음... 그건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아. 그 빌런이 아무래도 너의 집으로 들어간 것 같네.”
“설마 내 장비를 노리고?! 아니면......”
무언가 짚이는 점이 생각났는지 그녀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김예현은 그간 본인이 겪었던 일들이 떠올랐다.
고레벨 헌터로써 조그마한 원룸에 살 수 밖에 없는 이유와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시작된 청룡길드와의 악연까지.
잠시 망설이던 그녀의 두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어차피 저번 게이트에서 얘기하려고 했으니 차라리 지금 얘기하자.’
“실은 예전에...”
“여기 있었군.”
그녀의 말을 끊은 것은 빌라 밖으로 나온 룽하이였다.
“인기척이 없어서 혹시 미리 알고 도망갔나 싶었는데 잘됐군. 이제 죽어라-!”
룽하이가 들고 있던 손도끼를 김예현을 향해 빠르게 던졌다.
갑작스러운 기습에 김예현의 반응이 한발 늦어버렸다.
룽하이의 도끼가 슬로우모션처럼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자신의 얼굴로 날아오는 도끼를 피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의 두 눈이 질끈 감겼다.
‘왜 멀쩡하지?’
감긴 그녀의 두 눈이 떠지자 날아든 도끼의 칼날이 눈앞에 있었다.
도끼가 멈춘 이유는 수혁이 날아온 도끼의 칼자루를 잡았기 때문이었다.
“저 새끼는 중국말로 뭐라고 하더니 다짜고짜 도끼를 던지네?”
“내 도끼를 잡다니 제법이군.”
“한국말로 해 이 새끼야!”
하마터면 소중한 길드원이 죽을 뻔 했다.
화가 난 수혁이 잡은 도끼를 룽하이에게 거세게 집어 던졌다.
그러나 주문이 걸려있는지 도끼는 차분하게 룽하이의 뻗어진 손으로 되돌아갔다.
“기세는 사납지만 힘은 약하구나. 고작 그 정도로는 나의 강뢰부(强雷斧)를 다룰 수 없다.”
도끼를 잡은 룽하이가 멈칫하더니 손잡이부분을 눈으로 가져왔다.
나무로 이루어진 손잡이가 수혁의 악력에 찌그러져있었다.
“이이익-! 강뢰부(强雷斧)를 망가뜨리다니-! 널 용서할 수 없다!”
“뭐라는 거야? 시끄럽게 소리 지르고.”
“개새끼야-!”
“욕은 한국말로 하네?”
포효하는 룽하이가 훌쩍 뛰어올라 도끼를 내리찍었다.
아공간에서 검을 꺼낸 수혁이 질 수 없다는 듯 검으로 마주쳤다.
흥분한 모습의 룽하이는 어느새 냉철한 눈빛을 보이더니 수혁의 검과 마주치는 대신 공중에서 몸을 돌리며 옆에 있던 김예현을 찍으려했다.
그러나 수혁이 그것을 그저 지켜만 보지 않았다.
“어딜?!”
수혁이 검을 룽하이의 심장을 향해 찔러넣었다.
이대로라면 룽하이의 도끼가 김예현을 찍을 수 있어도 자신의 가슴이 꿰뚫릴 상황이었다.
결국 자신의 목숨을 포기할 수 없던 룽하이가 도끼로 수혁의 검과 맞부딪치고는 뒤로 물러났다.
“넌 누구냐?”
“이 새끼 한국말 할 줄 아네? 진작 한국말로 하지.”
“넌 누구냐고 내가 먼저 물었다.”
“너 같은 빌런들을 잡아먹는 정의로운 헌터지.”
“내 앞에서 그런 말을 했던 자들은 모두 내 도끼에 혀가 잘렸지. 너의 혀는 얼마나 길지 궁금하구나.”
곧이어 흉흉한 마력이 뒤덮인 도끼와 수혁의 핏빛 검기가 어우러지며 폭음을 일으켰다.
순식간에 공방이 이루어지며 도끼와 검이 공기를 가르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사방으로 울렸다.
허공을 가르는 도끼를 흘려보낸 수혁이 옆으로 몸을 돌리며 검을 휘두르자 룽하이의 팔뚝에 기다란 상처가 생겼다.
찢어진 옷 사이로 가려져있던 팔뚝의 기다란 용문신이 드러났다.
문신을 확인한 수혁의 눈에 이채가 생겼다.
“흑룡회(黑龍會)?”
“제법 눈썰미가 있구나.”
“삼합회한테 쫓겨 다닌다더니 이곳까지 기어들어왔구나.”
흑룡회는 중국에서도 약탈에 살인을 일삼는 무자비한 빌런 조직으로 악명을 떨쳤다.
서로의 이권다툼으로 인해 삼합회와 전쟁을 벌인 뒤, 쪽수에 밀려 흑룡회는 대부분 죽었지만 룽하이는 자신을 쫓는 자들을 모두 죽이며 고레벨로 성장한 빌런이었다.
옷소매를 찢고 자랑스럽게 자신의 문신을 드러내자 상처로 인해 용문신에서는 피가 계속 흘러나왔다.
“검은 용을 마주한 자는 죽음뿐이라는 격언을 너의 몸에 새겨주마.”
“아까운 피가 계속 흐르는데 가능하겠어?”
상처의 피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자 룽하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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