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뱀파이어와의 조우
나침반을 꺼내 통로를 확인하던 박이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 방향이 맞아요.”
이어서 일반화살을 그대로 상자로 쏘았다.
모두들 어떠한 일이 벌어질지 집중하면서 쳐다봤지만,
틱.
상자와 부딪친 화살은 그대로 땅으로 떨어졌다.
“상자가 제법 단단하네요. 괜찮아 보이는데요?”
“그럼 가서 열어볼게요!”
내가 너무 민감했나?
고개를 끄덕이자 홍영기를 비롯한 헌터들이 성큼 다가갔다.
마린느가 수혁의 눈치를 보다 후다닥 그들의 뒤로 붙었다.
끼이익.
가까이 다가가자 상자의 뚜껑이 저절로 열리더니 번쩍거리는 마석이 무더기로 쌓여있었다.
“오! 마석이다.”
홍영기가 마석을 줍기 직전 마석 사이에서 보랏빛 촉수가 튀어나와 순식간에 그의 몸을 감쌌다.
곧이어 상자의 뚜껑과 몸체에서 커다랗고 위협적인 이빨이 튀어나왔다.
“미믹이다!”
수혁이 느꼈던 불안감이 현실이 되었다.
상자가 열리고 지독한 악취가 그의 코를 강타할 무렵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단검 하나를 꺼내 손에 들고 있었다.
미믹이 홍영기를 낚아챈 후 물기 직전 단검 하나가 빛살처럼 날았다.
퍽.
“끼익. 끽.”
단단한 상자의 겉면과 달리 상대적으로 약했던 내부에 수혁의 단검이 꽂혔다.
홍영기를 물기 직전 단검으로 인해 틈이 보인 사이 미믹을 향한 동료들의 집중공격이 이루어졌다.
거센 공격을 견디지 못한 미믹이 이명한의 마지막 불꽃에 맞아 재로 변했다.
재로 변한 자리에 수혁의 단검과 붉은 망토 하나가 나란히 놓여있었다.
“깜짝이야! 마석은?”
“미믹이 사람을 홀리기 위해 흉내 낸 허상이었어.”
“그래도 여기 망토가 하나 나왔다.”
[노스페라투의 망토 : ???]
“!”
익숙한 이름이 등장했다.
“노스페라투가 뭐야?”
다들 성능도 모르는 처음 보는 아이템에 어리둥절할 때 수혁만 홀로 이 아이템의 가치를 알아차렸다.
마린느마저도 흡혈 일족에 관한 내용만 알뿐 노스페라투라는 이름 자체는 모르는 듯 보였다.
“다들 미안한데 이 망토는 내가 가져도 될까? 값은 제대로 치루지.”
수혁의 말에 모두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야 상관없죠. 제 화살도 막혔는데 길드장님 단검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 했어요.”
“허허허. 애초에 길드장님 아니었으면 발견도 못했어요. 전 동의합니다.”
“경계하라는 말을 안들은 제 잘못이죠. 바보같이 물릴 뻔했으니, 길드장님 마음대로 하세요.”
“...전 괜찮아요.”
모두들 동의하자 수혁이 망토를 등에 걸쳤다.
피처럼 붉은 망토는 제 주인을 찾은 것처럼 찰싹 그의 등에 달라붙은 뒤 흐느적대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어떠한 능력을 가진 아이템인지 물음표만 존재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단검까지 챙긴 뒤, 자신을 바라보는 동료들에게 입을 떼었다.
“밥 먹던 거 먹고 갑시다.”
바닥을 짚은 손을 뗀 박이현이 확신에 찬 어투로 말했다.
“미로는 끝났어요. 길드장님 아니었으면 계속 헤맬 뻔했어요. 당분간은 일직선의 길뿐이에요. 끝까지 가다보면 뭐라도 나오겠죠.”
“좋아. 준비됐으면 다들 출발합시다. 통로가 좁으니 영기 네가 선두에 서.”
“넵!”
통로에 나지막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상당한 시간동안 몬스터의 존재가 보이지 않자 긴장감이 조금씩 풀려갔다.
정적을 견디지 못한 이명한의 입이 열렸다.
“...그때 그 길드장이 돈을 못준다고 막 뻐팅기는거지. 그래서 내가 바로 면상에다 화염구를 들이대면서 ‘맞고 줄래 그냥 줄래?’ 이러니까 막 벌벌 떨더라구요.”
“푸하핫. 재밌는 인간.”
“...그 다음은요?”
다행히 그의 수다가 모두에게 잘 먹혀들었다.
게이트에서 얼마나 오랜 시간을 보낼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주구장창 경계심만 가질 순 없었다.
적절한 페이스조절을 해야하는데 이명한이 그런 점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한참을 걷던 와중에 선두에 서 있던 홍영기가 멈춰 섰다.
“왜 그래?”
“뭔가 떨리는 소리 안 들려?”
“소리?”
귀를 집중하자 드드득하는 소리가 통로 뒤에서부터 들려왔다.
점점 소리가 커지며 벽과 바닥마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맵핑!”
박이현이 급히 바닥에 손을 짚었다.
“주변에 다른 공간은 없어요.”
“별 수 없다. 전부 달려!”
수혁의 외침에 긴박한 달리기가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박이현이 앞서나가더니 그 뒤로 홍영기가 따라붙었다.
마린느와 김예현이 그 다음으로 달렸고, 상대적으로 신체 능력치가 부족한 이명한이 뒤처졌다.
“내가 이명한 헌터와 같이 가지. 신경 쓰지 말고 달려!”
헉헉대는 이명한을 등에 강제로 업은 수혁의 발이 땅을 박찼다.
순식간에 동료들을 따라잡아 박이현까지 앞지르더니 어느새 통로의 끝에 다다랐다.
이명한을 내려다놓은 뒤 다시 길드원들에게 뛰어간 수혁은 제일 뒤처지는 김예현에게 다가갔다.
“업혀요!”
“헉. 헉...네?”
“시간 없어요. 빨리!”
누군가에게 기대본 적 없던 김예현이 머뭇거렸다.
결국 참지 못한 수혁이 강제로 어깨 위로 그녀를 둘러업었다.
“꺅!”
“사과는 나중에 합시다!”
다른 길드원들은 통로의 끝에 다다라 수혁을 기다렸다.
부지런히 뛴 후로 도착을 앞둔 무렵,
다시금 땅을 박차려던 그때 바닥이 전부 무너졌다.
공중에 뜬 돌을 밟으며 나아가려했지만 무저갱 같은 암흑이 그를 알 수 없는 힘으로 끌어당겼다.
“길드장님-!!!”
“형님-!”
암흑 속으로 떨어지는 수혁이 평온한 목소리로 길드원들을 안심시켰다.
“보스방에서 보자.”
“꺄아아악-!”
태연한 수혁과 비명을 지르던 김예현이 곧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망연자실한 길드원들이 정신을 못 차리는 와중에 마린느가 입을 열었다.
“출발하자. 인간.”
“이봐. 길드장님이 함정에 빠졌잖아! 넌 걱정도 안 돼?”
격하게 반응하는 홍영기에게 마린느가 코웃음을 쳤다.
“아이고. 홍영기 헌터님. 잠시 진정해보자구요.”
둘 사이에 끼어든 이명한의 이마에서 땀을 줄줄 흘러내렸다.
“너희들은 마스터하고 그렇게 오랜 시간 함께 했으면서 마스터의 실력을 모르나?”“형님의 실력은 내가 잘 알지! 그것과는 별개로 게이트에서 실종된 거잖아!”
“자칭 오른팔이라는 인간이 믿음이 없었군. 마스터가 알았다면 크게 실망했겠어.”
“뭐가 어째? 이 짐승 같은 년이?”
“짐승? 이 무식한 인간이?”
수혁이 없다고 벌써부터 삐그덕대기 시작했다.
서로 으르렁대는 둘을 한심한 듯 쳐다보던 박이현이 턱을 곰곰이 짚더니 마린느의 뒤로 향했다.
“언니 말이 맞아. 영기 오빠는 길드장님을 믿어봐. 보스방에서 기다리면 돼.”
“야! 언제부터 봤다고 그렇게 친한 척, 언니라니? 우리가 함께한 세월이 얼만데! 내 편을 들어야지!”
“난 합리적으로 생각했을 뿐이야. 길드장님도 이런 곳에서 죽을 실력이 아니고.”
“그게 아니야. 우리 모두 힘을 합쳐야지. 차라리 전부 저 암흑 속으로 뛰어들어서 형님과 김예현 헌터에게 합류하자!”
“...이 새끼 근육바보 맞네.”
마린느와 박이현의 두 눈이 마주치더니 동시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명한마저 눈치를 보다 두 사람의 곁으로 발을 슬쩍 옮겼다.
오직 홍영기만이 억울한 표정으로 두 눈을 부라렸다.
“아니 왜!”
“으으음...”
정신을 차린 김예현이 눈을 꿈뻑였다.
그러나 칠흑 같은 암흑 속에서 눈을 뜬 것과 감은 것이 별반 차이가 없었다.
“일어났어요?”
“앗! 길드장님! 죄송해요. 저 때문에...”
수혁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향해 그녀가 폴더인사로 사죄했다.
위급한 상황에서 길드장의 지시를 즉각 따르지 않은 본인의 잘못이 매우 컸다.
그 때문에 이런 위험한 상황까지 왔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수혁으로서는 재미있는 일을 겪었다.
자신의 등에 찬 노스페라투의 망토가 땅으로 떨어지는 그의 중력을 조종하듯이 속도를 줄여주며 느긋하게 땅으로 내려올 수 있게 해줬다.
어깨 위에 있던 김예현이 극심한 공포에 순간 기절한 상황에서 그는 여유롭게 땅에 발을 디뎠다.
“이런 상황은 익숙합니다. 일단 전진하죠.”
“아- 네. 그런데 이렇게 어두워서...”
“어둠? 아! 그 생각을 못했군요. 검에 마력을 주입하면 앞이 보이지 않을까요?”
“그건 그런데 그러다가 적을 만났을 때 마력이 부족할 수도 있어서...”
“그럼 제가 검을 뽑죠. 이래보여도 한 마력량 한답니다.”
스르릉.
검이 뽑히는 소리가 들리더니 붉은 아지렁이가 피어오르며 주변을 밝게 만들었다.
핏빛 조명이 비추는 불그스르름한 수혁의 수려한 얼굴이 드러나자 김예현이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무섭고 섹시해...”
“? 뭐라구요?”
“아앗! 아무것도 아닙니다.”
“출발하죠.”
허둥지둥대던 김예현이 급히 수혁의 뒤로 따라붙었다.
창피해서 붉게 변한 얼굴을 그가 알아볼 수 없다는 걸 다행으로 생각하면서.
그러나 그녀는 수혁이 어둠 속을 대낮처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고개를 위로 들었을 때는 얼마나 밑으로 떨어졌는지 그의 시력으로도 천장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사방이 막힌 공간에 유일한 출구인 계단으로 향했다.
수혁은 어떻게 해야 이곳을 탈출할지 골똘히 생각하느라 말이 없었고, 김예현은 아까 자신이 말실수를 한 건 아닌지 마음을 졸이며 계단을 올랐다.
아무리 수혁의 마력이 방대하다고는 하나 지금 오르는 계단 역시 끝을 알 수 없었다.
결국 검의 마력을 회수한 수혁이었다.
“계단 잘 밟고 올라와요. 간격은 그래도 일정하네요.”
“네...넷. 잘 따라 붙을게요.”
어둠 속에서 수혁의 실루엣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묘한 상황에서 그녀의 얼굴이 수혁의 등에 그대로 부딪쳤다.
퍽.
“아앗. 왜...?”
“쉿. 어쩌면 계단의 끝에 다다랐나 봅니다. 저 위에서 기척이 느껴지네요. 검을 뽑죠.”
김예현은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지만 수혁의 말에 의심하지 않았다.
차분히 검을 빼든 그녀가 깊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전투에서는 냉정한 자가 이기는 법이니.
오른손으로 검을 수평으로 잡은 뒤, 왼손으로 검의 끝을 잡고 수혁을 베지 않기 위해 거리를 가늠했다.
좁은 어두운 계단에서 함부로 휘두를 수 없으니 여차하면 검의 손잡이로 공격할 자세를 취했다.
그녀의 검인 월광검(月光檢)은 손잡이 끝 초승달처럼 날카로운 부분도 무기로 사용할 수 있었다.
다행히 저 위에서 희미한 빛이 내려오며 좁은 계단에서 전투와 같은 난감한 일은 펼쳐지지 않았다.
그러나 계단 위에 오른 두 사람은 곧 검을 앞으로 겨눴다.
사람보다 훨씬 큰 거대한 박쥐가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려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쥐가 날개를 펴자 그 길이만으로 웬만한 코끼리보다도 컸다.
“이이인가아안? 마아아아시시싯느으은 내애앰새에에... 그으으리이우운 내애앰새에에...”
“말하는 박쥐라니, 기네스 감이네.”
실없는 농담을 한 수혁의 뒤에서 김예현이 검에 마력을 불어넣었다.
월광검에서 솟아오른 검기가 눈이 부신지 박쥐가 날개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가아아암히이이 부우우울르으으를 지이이펴어어?”
날개를 다시 걷자 그곳엔 박쥐대신 벌거벗은 창백한 피부의 미남자로 변해있었다.
“나의 잠을 깨우다니 대가리에 피가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구나.”
“사람? 뱀파이어?”
경계심을 높인 김예현이 검을 굳게 잡는 사이, 수혁은 흥미로운 얼굴로 뱀파이어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능력이 뱀파이어에게서 비롯된 것을 안 그로써는 처음 마주한 뱀파이어였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향기. 특이한 인간이군. 음? 그 망토는... 감히 네놈 따위가 입고 있다니... 그러나 일단은 저 건방진 여자부터다!”
등에 달린 날개가 펄럭이며 풍압을 일으키더니 뱀파이어가 순식간에 앞으로 쏘아졌다.
수혁을 지나친 뱀파이어의 손톱이 김예현의 검과 부딪치며 마찰음을 일으키는 사이 박쥐 날개가 그녀의 얼굴을 스쳤다.
수혁이 뱀파이어를 막기 위해 검을 내질렀으나, 놀라운 속도로 날개짓을 한 뱀파이어가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자신의 날개에 묻은 김예현의 피를 혀로 맛본 뱀파이어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달콤하구나. 얼마 만에 맛보는 신선한 피인지.”
“잠깐만. 달다고?”
뱀파이어의 말을 들은 수혁이 김예현을 힐끗 쳐다보았다.
달다고? 빌런 성향은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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