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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궁
게이트를 통과하고 그들이 도착한 곳은 거대한 통로였다.
갈색빛 벽돌은 바닥부터 천장까지 모두 이어져있었고 통로의 중간마다 빛을 비추기 위한 횃불이 일정 간격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벽돌 곳곳에는 알 수 없는 동물과 몬스터의 그림이 새겨져있었으며 복잡한 무늬의 모양이 새겨져있었다.
박이현이 곧장 맵핑스킬로 지형을 탐지하는 동안 나머지 사람들은 장비를 재점검했다.
스킬을 사용한 박이현이 입술을 질끈거리며 수혁에게 다가왔다.
“길드장님. 이곳 범위가 너무 넓어서 한 번에 탐지가 안 되겠어요. 게다가 미로형식이라 일정 부분까지 길을 진행하면서 맵핑스킬을 계속 사용해야 할 것 같아요.”
“좋아. 우선은 앞으로 이동해보자. 박이현 선두에 서고 그녀의 뒤에서 영기 네가 대비하도록, 나와 김예현 헌터가 이명한 헌터 지키고, 후방에는 마린느가 선다.”
그의 말에 벽의 무늬를 관찰하던 마린느가 모닝스타를 번쩍 들며 걱정 말라는 듯 휘저었다.
마린느의 뛰어난 육체적 능력을 알기에 서브탱커 역할을 맡긴 수혁이었다.
나침판을 손에 든 박이현이 길을 안내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벽에 막히며 모두들 멈춰 섰다.
“으음... 방향은 여긴데 길이 막혔네요. 아무래도 나침판만으로 길을 찾기는 어려울 수도 있겠어요.”
그녀의 난감한 모습에 홍영기가 대신 앞으로 나섰다.
“길이 없으면 만들면 된다. 뒤로 물러나봐. 퉷.”
손에 침을 뱉는 시늉을 한 그가 망치를 힘껏 위로 들어올렸다.
그의 스킬인 부스터를 망치에 사용하자 공기가 뒤로 뿜어져 나오며 망치에 가속력을 더했다.
콰-앙.
“와씨. 겁나 단단하네.”
있는 힘껏 벽을 때렸지만 자그마한 흠집 말고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별 수 없이 곳곳을 돌아다니며 맵핑 스킬로 지도를 확보해야겠네.”
“아니면 미로에서 써먹기 쉬운 오른손 법칙을 써먹어볼까요?”
이명한이 손을 들며 의견을 제시했다.
쿠구구궁. 스르릉.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주변에 진동이 생기더니 홍영기가 때렸던 벽이 움직이며 통로를 만들어냈다.
“아니... 망치의 법칙인가?”
“일단 이동하자.”
“설마 때린 곳이 통로가 생겨나는 그런 법칙은 아니겠죠?”
멋쩍은 웃음을 지은 이명한과 블러드 길드원들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맨 뒤에 있던 마린느는 벽에 생긴 무늬와 벽화들을 관찰하며 작은 신음을 내고는 뒤따라갔다.
지루한 이동이 지속되었다.
통로 좌우에 설치된 횃불 덕에 시야에는 이상이 없었지만 어떠한 적이 나올지 모르는 긴장감은 더욱 커져갔다.
수혁은 이 조용한 미로 사방에서 쿰쿰한 악취와 악의를 느꼈다.
미로 속에 들어온 자들을 제물로 삼고자하는 그런 의지.
길드원들의 표정을 살펴보던 중 유독 마린느의 표정이 창백한 것을 발견했다.
“마린느. 표정이 안 좋아보이네. 악취가 지독하지?”
“그건 참을만 합니다. 단지...”
“단지?”
그녀가 말을 흐렸다.
“어쩌면 이곳이 어디인지 알 것 같습니다.”
“?!”
모두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는 자들과 달리 김예현과 이명한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외국에서는 게이트의 정체를 파헤쳤나?”
“뭐... 비슷합니다.”
“오! 그러고 보니 마린느 고향이 어딘지 안 물어봤었네. 마린느 고향이 어디에요?”
해맑은 이명한의 질문에 마린느가 수혁을 쳐다보았다.
미리 연습한대로 큐!
“나는 저 머나먼 이름도 알기힘든 작은 나라에서 왔습니다. 단지 제 특수스킬은 게이트에 들어왔을 때 이곳의 역사나 정보를 대강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의심하지 마십시오. 인간.”
“오오오. 엄청나군요. 역시 블러드 길드에 들어올 만한 엄청난 능력입니다. 제가 일부러 그러는 건 아닙니다. 흠. 흠.”
다행히 그녀의 말이 먹혀들었다.
무표정한 김예현마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벽화의 무늬와 갈색빛의 벽돌에 시간이 지날수록 공간이 변하는 미로, 키프로스의 8대 금지 중 한 곳 같습니다.”
“키뭐? 금지?”
수혁이 눈짓하자 마린느가 말을 이었다.
“대마법사 키프로스는 그... 일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그가 없어지자 그를 따랐던 부하들을 가두는 감옥을 만들었습니다. 그곳에 가두곤 보통사람은 풀 수 없는 저주를 걸었습니다. 그중 이곳은 키프로스의 미궁인 것 같습니다. 이곳에 갇힌 그의 부하였던 자들은 불멸 불사의 저주에 걸렸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들은 적이 있다고?”
이명한이 되묻자 마린느가 급히 말을 바꿨다.
“머릿속에 들어옵니다. 정보가 들어옵니다. 오오. 인간. 방해하지 말아라. 시끄럽다.”
“아니, 내가 뭐했다고...”
그녀가 말로 쏘아붙이자 이명한이 쭈굴하며 물러났다.
“불멸과 불사의 저주?”
“그것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는 모릅니다.”
수혁의 반문에 마린느가 친절히 답했다.
모두들 그녀가 한 말을 곱씹으며 사색에 잠겼다.
“불멸과 불사라니 그러면 몬스터들이 안 죽는다는 얘긴가?”
“설마... 그런 적은 없었는데.”
“일단은 앞으로 나아간다. 이곳은 게이트고 못 깰 이유는 없어. 박이현 앞장 서.”
불안에 떠는 길드원들의 정신을 일깨우며 수혁이 명령했다.
다들 눈을 또렷이 뜨고 주변을 경계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마린느의 얘기를 듣자 으스스한 기분이 올라왔다.
한참을 미로에서 헤매던 와중에 강한 악취가 수혁의 코를 찔렀다.
마치 독이라 느껴질 정도로.
그리고 그들이 나아가던 길목에 몬스터 한 마리가 나타났다.
“어? 생명체 감지를 못했는데.”
탐지스킬에 감지되지 않은 몬스터가 나타나자 박이현이 당혹스러워했다.
길목에 우두커니 서서 등을 돌리고 있던 몬스터는 인기척이 들려오자 몸을 돌렸다.
“앗!”
두 개의 뿔을 지니고 상체가 소, 하체가 사람의 모양을 한 미노타우르스였다.
단지 다들 탄식음을 낸 이유는 얼굴의 절반부분이 썩어 문드러졌기 때문이었다.
“음머어어-”
썩어빠진 성대에서 탁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불멸 불사의 저주라더니 몬스터의 좀비화였다.
“좀비 미노타우르스라. 썩은 내가 진동하더니 저것 때문이었네. 전투 준비.”
코를 틀어막은 수혁이 얼굴을 찌푸렸다.
그의 손짓에 이명한이 주문을 외우며 손을 뻗었다.
“모여라. 불의 화살!”
이명한의 손끝에서 화살모양의 불꽃이 쏘아지며 좀비 미노타우르스를 덮쳤다.
“폭발!”
연이은 외침에 불꽃이 터지며 좀비 미노타우르스의 상체가 터져버렸다.
마법의 강력한 위력에 다들 눈이 휘둥그레지자 이명한이 어깨를 으쓱였다.
“이 정도는 해야 블러드 길드에서 나름 밥값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어? 저거-!”
조용히 있던 김예현의 입에서 외침이 들려왔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자 상체가 날아간 좀비 미노타우르스가 여전히 그들에게 다가오는 중이었다.
질척이는 허리의 내장을 드러내며 두 다리만 걸어오는 모습은 섬뜩햇다.
“불멸 불사의 저주...”
죽여도 죽지 않는 저주의 본모습이었다.
“내가 처리할게. 하앗!”
다가온 하체를 홍영기가 망치로 후드려 팼다.
짓이겨진 하체는 더 이상 일어나지 못했지만 근육의 꿈틀거림은 멈추지 않았다.
발가락마저 계속 꼼지락거리는 광경에 홍영기마저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적들에게 죽음이 없다는 게 이런 얘기였네. 그렇다고 어려울 건 없어 보인다. 몬스터의 목을 날렸다고 좋아하지 말고 팔과 다리를 모두 자르도록. 이명한 헌터는 이제부터 마력을 아낍니다. 그다음부터 이현이 네가 선공이다. 다들 집중해.”
수혁의 냉철한 외침에 다들 정신을 번쩍 차렸다.
길드를 이끄는 참된 리더의 모습에 그를 바라보던 김예현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멋있어.’
정말로 가입하고 싶은 마음이 계속 커지는 블러드 길드였다.
그 뒤로도 이어진 전투는 수혁의 말을 착실하게 따른 길드원들의 일방적인 승리였다.
목을 따고 팔다리를 차분히 자른 뒤, 이명한이 마지막에 불을 질러 태웠다.
떼로 몰려온 좀비 미노타우르스를 전부 죽일 무렵, 철퇴에 갑옷을 갖춰입은 좀비 미노타우르스들이 나타났다.
깡.
박이현의 화살을 갑옷으로 튕겨낸 좀비 미노타우르스가 머리를 숙이며 돌진했다.
“어딜!”
쾅!
좀비 미노타우르스의 머리통을 홍영기가 망치로 부쉈지만 돌진력을 줄어들지 않았다.
“큭.”
덩치에 밀린 홍영기가 그대로 벽과 부딪히며 밀려났다.
그 사이 생긴 빈틈으로 다른 좀비 미노타우르스들이 밀고들어오자 수혁과 김예현이 연달아 검을 날렸다.
“하압!”
뛰어오른 수혁이 머리를 가르는 사이 김예현은 빛이 솟아오른 검으로 다리를 잘라냈다.
착지한 수혁이 뒤돌며 좀비 미노타우르스의 양팔을 자르고, 김예현은 그를 지나쳐 다른 좀비 미노타우르스의 목을 베어냈다.
서로 얘기하지 않아도 호흡이 척척 맞으며 적들을 도륙하는 사이 적을 으깬 홍영기가 복귀했다.
“빌어먹을-! 쪽팔리다-앗!”
외침과 함께 부스터를 쓴 홍영기가 온몸을 모아 적들에게 돌진했다.
덩치가 더 컸던 좀비 미노타우르스들이 그에게 밀려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쓰러진 좀비 미노타우르스 위로 마린느의 모닝스타가 묵직한 소리와 함께 강타했다.
두더지 잡기 게임처럼 쉴새없이 밑으로 두드리며 전투가 끝났다.
“우웩.”
썩은 시체에서 풍기는 지독한 냄새에 다들 헛구역질을 날렸다.
수혁 역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좀비 미노타우르스에서 흐른 핏방울을 손가락으로 찍어 맛보았다가 급히 입을 헹궜다.
“마석만 챙기고 휴식합시다.”
좀비 미노타우르스가 입은 갑옷 가운데에 박힌 마석을 빼낸 뒤 다들 시체가 없는 곳으로 이동했다.
주변 정찰을 통해 적들이 없는 걸 확인한 후 막힌 통로의 구석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도는 만들어졌어?”
“나침반을 따라가고는 있는데 계속 미로가 바뀌니 맞지를 않네요. 시간이 오래 걸리겠어요.”
“괜찮아. 단기간에 끝날 곳이라고는 생각 안 했어. 식량과 식수는 넉넉히 가져왔으니 다들 걱정 말고 휴식을 취해. 경계는 내가 서지.”
‘따뜻하기까지!’
수혁이 먼저 솔선수범하며 길드원들을 챙기는 모습에 김예현의 눈매가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무표정했던 그녀의 표정변화를 발견한 이명한이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수혁이 애초에 자신과 김예현 헌터 모두를 길드원으로 받아들이고 싶었던 걸 잘 알았다.
“김예현 헌터님. 괜찮죠? 우리 길드장님.”
“에... 예?”
“사실...”
자신의 아팠던 와이프와 수혁이 엘릭서를 구해다준 일, 그로인해 블러드 길드에 가입하게 됐다는 사연을 듣자 김예현의 마음이 더욱 크게 움직였다.
‘심쿵이야. 저런 헌터는 본 적이 없어.’
이제는 한결 부드러워진 김예현의 얼굴을 본 이명한이 큰 할 일을 마쳤다는 듯 전투식량을 크게 한 술 떴다.
“아- 역시 일을 해야 밥맛이 끝내준다.”
지나왔던 통로를 경계하던 수혁의 청력이 둘의 이야기를 놓칠 리 없었다.
이명한 헌터의 자발적인 도움에 속으로 뿌듯해하던 그의 눈에 묘하게 거슬리는 부분이 들어왔다.
동물의 벽화 속 눈의 음각된 부분이 미세하게 앞으로 튀어나온 모양새였다.
그동안 봐왔던 것과 다른 미세한 차이를 그가 발견했다.
턱을 쓰다듬다 천천히 다가가 손으로 살포시 밀었다.
쿠구궁. 스르르릉.
막혀있던 벽이 움직이며 자그마한 통로가 열렸다.
“쿨럭. 쿨럭.”
밥을 먹던 일행 모두가 급하게 무기를 들고 일어섰다.
사람 2~3명이 간신히 지나갈 작은 통로의 중간에 황금빛 문양이 가득 박힌 상자하나가 자태를 뽐냈다.
“보물상자? 아이템 상자?”
번쩍이는 금빛 표면에 이성을 유지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수혁을 제외하고는.
닫힌 상자에서 풍겨오는 미세한 악취를 맡았다.
“다들 정지! 박이현. 상자에 화살 날려봐.”
악취를 맡은 수혁이 뒤에 있던 마린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후각이라면 자신과 같은 반응일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마린느의 두 눈은 상자에 붙은 번쩍거리는 보석에 정신이 팔린 듯 보였다.
수혁의 시선을 느낀 그녀가 민망한지 고개를 떨궜다.
웨어울프 이전에 마린느는 여자였다.
“제가 반짝이는 걸 좋아해서 그만, 죄...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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