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빌런의 무한 흡수 권능-31화 (31/63)

────────────────────────────────────

마린느

성의 내부는 투박하지만 옛스러웠다.

천장에 매달린 초로 이루어진 샹들리에 밑으로 고풍스러운 무늬의 대리석이 온 바닥에 깔려있었다.

성에 입장한 뒤로 귀를 기울였지만 아무런 생기가 없는 것이 단점이었다.

나침반이 빙글빙글 도는 것이 아무래도 계단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가야 하는 것 같았다.

“일단 1층을 한 번 돌아볼까.”

성의 내부를 탐사하기로 한 수혁이 가장 가까이에 있는 방문을 벌컥 열었다.

침대와 탁자 몇 개만 존재하는 조촐한 방으로 온기가 전혀 없었다.

방 안을 뒤져봐도 쓸 만한 아이템은 하나도 없었다.

“쓰-읍. 시작부터 꽝인데.”

빈 방만 벌써 몇 번째인지.

계속 성의 내부를 탐색하고 난 뒤 복도의 끝에는 커다란 식탁이 존재하는 연회장에 도착했다.

접시 위에 먹다 남은 알 수 없는 생고기들과 피가 담긴 주석잔을 보니 식사를 하다 자리를 급히 뜬 것처럼 보였다.

생고기와 주석잔에서 풍기는 새콤한 혈향이 수혁의 코를 맴돌았다.

“신선하군. 잡은 지 얼마 안 된.”

그 말은 성의 내부에는 아직 살아있는 웨어울프가 있다는 얘기였다.

성 밖에서 싸울 때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좀 더 높은 직책의 웨어울프임이 틀림없었다.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한 1층을 뒤로하고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2층에는 알현실로 보이는 웅장한 문 옆으로 성의 꼭대기로 올라갈 수 있는 작은 계단도 보였다.

나침반이 알현실을 가리켰으나 수혁은 성의 꼭대기로 향하는 계단이 왠지 마음에 쓰였다.

스텝 바이 스텝.

차분하게 2층 먼저 공략한 뒤 계단 위로 올라가기로 마음먹었다.

끼이익.

녹이 슨 문의 경첩소리와 함께 알현실에 들어가자 뼈목걸이를 주렁주렁 매단 늙은 웨어울프가 단상 위의 고풍스러운 의자에 앉아있었다.

그 밑에는 갑옷을 입은 웨어울프 몇 마리가 손톱을 내세우고 수혁에게 으르렁거렸다.

수혁이 검을 빼어들자 늙은 웨어울프가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주받은 일족이여. 검을 거두라.”

“내가 왜?”

“나는 평화를 원한다. 우리의 보물을 전부 가져가거라. 대신 보물과 함께 이 자리를 떠나다오.”

늙은 웨어울프의 손짓에 웨어울프 한 마리가 옆에 놓인 나무로 된 상자를 수혁의 앞에 놓고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에는 엘릭서를 비롯한 마석과 몇 가지 장신구들이 놓여있었다.

엘릭서는 필요한 것이지만 수혁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빠져있었다.

“내가 원하는 것이 하나 빠졌어.”

“무엇이더냐. 말해보라.”

“경험치.”

“경험치? 그게 무엇인가. 시간이 걸리더라고 줄 수 있는 것은 최대한 노력하겠다.”

“너희들의 피를 좀 빨겠다는 얘기지.”

“이이익... 고얀 놈. 역시 저주받은 일족답게 탐욕만 가득하구나. 너의 욕망에 언젠가 스스로 잡아먹힐 것이다.”

분노에 부들부들 떠는 늙은 웨어울프가 손톱을 세우자 병사 웨어울프들이 일제히 수혁에게 달려들었다.

눈 깜빡할 사이에 병사 웨어울프들은 톱날검의 제물이 되었다.

자신의 부하들이 당하자 늙은 웨어울프가 눈이 뒤집히며 아가리를 쩍 벌려 수혁을 물기 위해 도약했다.

푹.

크게 벌린 아가리에 톱날검이 박혀 머리 위까지 튀어나오자 늙은 웨어울프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절명했다.

“마린느...”

[단단한 손톱을 얻었습니다.]

안 그래도 예리한 수혁의 손톱이 더욱 단단해졌다.

검으로 손톱을 튕겨보자 딱딱한 소리가 나는 것이 강도가 금강석보다 단단했다.

아라크네의 실로 짜여진 장갑을 착용하고 다니던 수혁은 안 그래도 손을 다칠 일이 없었는데 손톱이 검보다 더 튼튼해져버렸다.

그냥 검 대신 손으로 싸우는 게 나을 수도 있겠는데.

하지만 리치가 긴 검이 손톱보다 평상시에 더 유용하기에 더 좋은 검을 얻고 싶은 욕망이 생겨났다.

“검이라면 검성이 쓰던 엑스칼리버가 제법 쓸 만한데... 아니면 아론다이트나 바리사다를 얻으면 좋은데 전부 외국에서 얻었었지. 외국 빌런들이 검을 가지고 한국에 와주길 바란다면 내 욕심이 큰 거겠지. 쩝.”

웨어울프가 넘기려던 상자의 아이템을 뒤적거렸다.

“엘릭서와 마석들 그리고 목걸이와 반지라.”

[웨어울프의 손톱을 꿴 목걸이 : 웨어울프의 육체적 능력을 끌어올 수 있다. 신체x 1.5(1회용)]

[아공간 반지 : 작은 아공간이 담겨있는 반지]

“웨어울프로 변신할 수 있는 목걸이라... 긴급할 때 쓸 수 있으니 육체적 능력이 뛰어난 홍영기에게 넘겨줘야겠군. 아공간 반지는 새로운 길드원에게 넘겨주면 되겠고. 나쁘지 않네.”

모든 아이템들을 자신의 아공간에 집어넣은 수혁이 탈출 포탈로 들어가는 대신 알현실을 뒤적거렸다.

늙은 웨어울프가 앉아있던 의자를 더듬거리던 중 손 끝에 움푹 파인 곳이 느껴져 눌러보았다.

탁.

자그마한 나무서랍이 튀어나오더니 녹이 슨 열쇠 하나가 튀어나왔다.

“호오. 숨겨진 열쇠라.”

흥미가 돋은 수혁이 열쇠를 들곤 알현실 곳곳을 뒤져봤지만 딱히 꽂을 만한 곳은 보이지 않았다.

머리를 긁적거린 후 원래 가려던 계단으로 발을 옮겼다.

나선형의 좁은 계단을 한참을 올라가자 문이 잠긴 방 하나가 나왔다.

밑에서 획득한 열쇠를 꽂아보자 철커덕하며 문이 열렸다.

방 안에는 레이스로 장식된 침대에 금발의 젊은 여성이 누워있었다.

문이 열리자 천천히 상체를 일으킨 여성이 수혁을 노려보았다.

분명 사람의 모습이지만 수혁은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짙고도 오래된 혈향을 맡을 수 있었다.

“아버지의 피냄새가 느껴져요. 다른 종족의 원천을 빨아먹는 마물이 결국 이렇게 올 줄이야.”

“나도 마찬가지야. 너무나 오랫동안 묵힌 썩은 악취야. 얼마나 사람을 잡아먹었으면 이렇게 지독할까?”

“아아... 아버지 그들에게 무릎을 꿇었건만 이런 결과라니... 이 모든 일의 원흉은 저주받은 너 때문이다!!!”

찌지지직.

입고 있던 하얀 쉬폰 드레스가 찢어지며 침대의 여성이 웨어울프로 변했다.

기존의 다른 웨어울프보다도 더 작은 체구에 수혁이 방심하는 사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

까-아앙.

본능적으로 검을 우측으로 들자 웨어울프의 손톱과 부딪쳤다.

연이어 뻗어지는 다른 손톱에 검 대신 맨손으로 맞부딪치자 손톱이 수혁의 손을 뚫지 못하고 오히려 물러났다.

“큭. 괴물.”

“괴물은 아무리 봐도 너고.”

수혁의 힘에 놀란 웨어울프가 저릿한 자신의 손을 붙잡았다.

수혁 역시 웨어울프의 빠른 움직임에 잠시나마 가슴이 뛰었다.

저 빠른 발을 먼저 잡아야하는데.

부-웅. 부-웅.

자신의 톱날검을 좌우로 휘두르며 웨어울프의 시선을 끌었다.

웨어울프가 자세를 낮추며 돌진할 자세를 취하자 수혁이 좀 더 안력을 돋구었다.

팟. 깡. 깡. 깡.

눈 깜빡할 새에 검과 손톱이 몇 번이나 교차하며 서로의 빈틈을 파고들려 했다.

야성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손톱이 검에 막히는 사이 뱀처럼 파고든 수혁의 손에는 어느새 장미가 새겨진 단검이 역수로 들려있었다.

단검이 손등을 찍으려하자 웨어울프가 손을 급히 뺐다.

그러나 단검은 멈추지 않고 밑으로 떨어지며 웨어울프의 허벅지를 스쳤다.

스친 부위에서 붉은장미독이 혈관을 타고 퍼지기 시작했다.

허벅지에 상처를 본 수혁이 뒤로 물러났다.

웨어울프 역시 자신의 다리가 마비되는 것을 느끼며 악에 바친 소리를 질렀다.

“이... 이... 비겁한!”

“진정하라고. 힘을 줄수록 독이 빨리 퍼질 뿐이야.”

“캬아악!”

수혁의 말을 무시한 웨어울프가 더욱 빠르고 힘 있게 날뛰었다.

그녀가 스쳐가는 방 구석구석 손톱자국으로 도배되었다.

흉포해진 그녀가 마구 날뛰어도 수혁은 최대한 방어에 집중했다.

지금 필요한 건 독이 퍼지는 시간이었고 오히려 더 빨리 퍼질 게 분명하니까.

그의 예상대로 오래 버티지 못한 웨어울프의 움직임이 점점 굼떠지더니 방 구석에서 격한 기침을 토해냈다.

“켈록. 그르르... 억울하다. 이렇게 죽을 순 없어.”

천천히 수혁이 다가오는 걸 보고만 있는 웨어울프의 눈에 깃든 분노가 점점 옅어지며 공포심으로 대체되었다.

수혁이 검을 목에 갔다대자 변신이 풀린 알몸의 금발 여성이 애처로운 눈빛을 보냈다.

흰 피부와 대조되는 독에 중독된 붉게 변한 혈관이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부디... 부디 자비를... 시키는 대로 다 하겠습니다. 짖으라면 짖고 엎드리라면 엎드리겠습니다. 제발...”

“목숨이라...”

이렇게 지성이 있어서 말이 통하는 몬스터는 오랜만이라 수혁은 그간 가진 궁금증을 해소하고 싶어졌다.

“왜 날 저주받은 일족이라고 부르는 거지?”

“히익... 제가 무례했습니다. 다시는 그렇게 부르지 않겠습니다.”

“아니. 그렇게 부르게 된 이유가 뭐냐고.”

“그건...”

그녀가 머뭇거리자 수혁이 목에 갖다 댄 검에 살짝 힘을 주었다.

“시간이 흐른다?”

“마...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래전 웨어울프와 뱀파이어간의 기나긴 전쟁 끝에 웨어울프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그러다보니...”“응? 웨어울프가 이겼다고?”

“네... 웨어울프의 강인한 육체로 밤에는 전투를 피하고 낮에만 급습하는 전략으로 승리를 거머쥐었습니다.

눈치를 보는 그녀에게 수혁이 고갯짓으로 계속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패배가 짙은 뱀파이어들이 자신들의 모든 피를 모으고 비술을 사용해 새로운 뱀파이어를 만들어내니 그것이 바로 ... 그 일족이 되겠습니다.”

“호오...”

지금껏 살아오면서 처음 듣는 얘기다.

애초에 몬스터와 이렇게 대화한다는 자체가 어려웠는데 독에 감염되고 자신의 목숨을 끔찍이 아끼는 몬스터는 웨어울프 뿐이었다.

아까 항복한다는 늙은 웨어울프도 그렇고 이 여자도 그렇고 목숨을 끔찍이 아끼는 것 같다.

이런 게 생존본능인건가. 하는 짓이 늑대가 아니라 개과 같은데.

“새롭게 태어난 뱀파이어는 주변의 모든 종족의 피를 흡수할 때마다 그 종족이 가진 고유능력도 가져가며 엄청난 존재로 성장했습니다. 결국 그 존재는 우리 웨어울프 뿐만 아니라 다른 종족에게도 큰 재앙으로 닥치게 되어서...”

“되어서?”

“모든 종족의 지도자가 모여 뱀파이어를 무찌를 수 있도록 염원을 담은 마법을 사용했습니다. 그 부름에 따라 저 머나먼 우주 너머에서 응답을 받은 외신(外神)은 격렬한 전투 끝에 그 뱀파이어를 없애주었습니다. 그 대가로 우리의 충성을 요구했으나 한동안은 아무런 요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수명이 짧은 종족들에게 외신이 잊혀져 가던 와중에 포탈이 나타나며 우리를 집어삼켰습니다. 그리고 나서 바로 당신께서 이곳에 오신 겁니다.”

“내가 바로 왔다고?”

“네.”

아마 그녀는 이 게이트의 히든 보스와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게이트의 시간 흐름이 워낙 제멋대로인 건 알았지만 몬스터들에게까지 적용되는 줄은 몰랐다.

애초에 이들을 경험치로만 봤지 살아있는 존재로 대할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으니.

자신의 권능에 대해 예상치 못한 얘기를 들은 수혁은 검을 아공간에 집어넣었다.

검을 휘두를 기분이 사라졌다고 해야 할까.

“좋아. 협조해 줘서 고맙군. 약속대로 목숨은 살려주지. 목을 이리 대.”

“감사합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전 마린느입니다.”

서슴없이 새하얗고 뽀얀 자신의 목덜미를 가져왔다.

수혁이 목덜미를 물어 그녀의 몸에 있던 붉은장미독을 빨아들이고 깨끗해진 피를 돌려보내주었다.

“하아...”

기력이 다한 그녀를 지켜보던 수혁이 복잡해진 마음을 간직한 채 알현실로 내려갔다.

“왜 내 뒤를 졸졸 따라와?”

“충성을 바친다고 했지 않습니까.”

“...맘대로 해라.”

그녀를 신경 쓸 여유가 없는 수혁이 탈출 포탈로 몸을 던졌다.

잠깐 눈을 감았다 뜨자 현대로 돌아온 수혁이 익숙한 공기에 코를 벌렁거렸다.

“후우-.”

게이트 관리국 직원들이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으로 수혁에게 다가왔다.

“저... 길드장님?”

“아. 공략은 잘 진행되었습니다. 마석에 관한 것은...”

“뒤에 분 신경을 좀...”

“?”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마린느가 그를 따라 게이트 밖으로 나와 있었다.

주변 경관이 신기한 듯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는 중이었다.

몬스터가 게이트를 통과했다고?

하긴, 게이트가 폭주하면 안에 있던 몬스터들이 튀어나기도 하는데 이상할 건 없는데...

“야! 오...옷 어딨어?!”

“네?”

수혁은 처음으로 당황해서 말을 떨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