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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끼를 던지다
부서진 창문 밑을 바라보던 수혁이 훌쩍 뛰어내리자 지켜보던 허기욱이 깜짝 놀랐다.
“여기 16층인데...”
아까 전의 도플갱어도 그렇고 이렇게 찾아온 빌런헌터도 그렇고 다들 신체능력치가 얼마나 높은 건지 허기욱이 내심 이를 갈았다.
아직도 세상에는 강자가 너무나 많았다.
무엇보다 세상에 레벨이 40대로 알려진 블러드 길드장인 수혁마저 손쉽게 뛰어내리자 자존심이 상했다.
허기욱이 홧김에 창가에 다가가 밑을 바라보며 발을 허공에 살짝 디뎠다.
멈칫.
“어우... 많이 높은데.”
그의 몸이 창문 끝에 걸쳤을 때 뒤에서 다급히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오빠!!! 죽지 마!!!”
무언가 오해를 한 김지민이 창문에 걸쳐진 허기욱의 몸을 끌어안았다.
“나 때문에 뛰어 내리지마-! 내가 미안해. 엉엉엉.”
“......널 놔두고 먼저 안가. 그 새끼는 내가 꼭 잡을게.”
울고 있는 김지민을 끌어안은 허기욱이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마력으로 발을 감싼 수혁이 아파트 난간과 벽을 살포시 박차며 속도를 떨어트린 후 바닥에 착지했다.
그와는 달리 도플갱어가 바닥에 거칠게 착지했는지 도로에 운석이 떨어진 후 생긴 크레이터 같은 흔적이 존재했다.
아까 아파트에 올라오기 전 응시했던 곳이 맞았었다.
이정도 충격이면 몸에 상당한 무리가 왔을 것이 분명했다.
CCTV는? 주변에 없다.
주민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신경도 안 쓰는지 목격자도 따로 없다.
고렙헌터들이 사는 동네라고 CCTV설치가 촘촘하지 못했다.
다들 평소에 구린 행동을 얼마나 많이 하는지 설치를 격하게 반대했다는 소문을 들었지만 이런 식으로 돌아올 줄을 몰랐을 거다.
도플갱어의 몸에서 흘렀던 핏방울이 바닥에 군데군데 남았다.
흔적을 쫓아가자 중간에 모습을 바꿨는지 핏방울은 없어졌지만 허공을 맴도는 잔향은 그대로 이어졌다.
허기욱에게 듣기로 홀딱 벗고 있었다고 하던데 변신하면서 옷도 흉내내는 건가.
그럼 평소에 벌거 벗고 다닌다는 얘기?
...시원하게 사는 녀석이네.
잔향을 따라가던 수혁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많은 인파가 존재하는 쇼핑몰을 앞에 둔 직후였다.
담배냄새, 땀냄새, 향수냄새 등 온갖 향들이 수혁의 코를 스쳐가며 잔향을 옅게 만들었다.
흔적들을 쫓던 와중에 수혁을 가장 곤혹스럽게 만든 것은 헌터상점이었다.
“회복포션을 누가 사갔냐구요? 시험 준비하는 학생부터 회춘하고 싶은 할아버지까지 한 시간에도 몇십명씩 와서 사가죠.”
헌터상점의 여직원의 말이 도중에 끊겼다.
상점의 모든 손님들이 회복포션을 집어 들고 끊임없이 계산대로 왔기 때문이었다.
게이트에 들어갈 헌터부터 남녀노소 가릴 것이 없었다.
상점 밖에는 빈 포션통 수십 개가 쓰레기통 밖으로도 삐져나와 있었다.
체력이 부족할 때는 비타민이나 피로회복제가 아닌 회복포션으로 보충하는 시대였다.
효과가 의심되는 저렴한 상품부터 헌터협회에서 보증한 성능 좋은 녀석까지 물건이 다양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도플갱어의 부상이 보통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허기욱의 공격에 내장까지 상한 것이 분명했으며, 고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린 탓에 강인한 헌터의 육체라도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었다.
그렇다면 보통의 포션으로는 회복할 수 없다.
회복력 최상인 포션이 필요했을 거다.
“한 병에 이천만원짜리인 최상급 포션을 사간 사람이요? 보자... 오늘 총 3명이 사갔네요. 그 중 빌런이 있었나보죠? 중요한 거면 제가 더 알아볼게요. 혹시 번호 좀...”
머리가 샛노란 여직원이 수혁이 내민 빌런헌터면허를 보고는 순순히 협조에 응했다.
“여기 피부가 창백한데 명품으로 도배한 젊은 여자하고, 정장입고 머리가 벗겨진 중년남성분, 그리고 주름 가득한 백발의 할머니. 이렇게 세 분이 사갔네요. 그런데 번호는 진짜로 안 알려줄 거에요?”
“번호 대신 다음에 시간 날 때 한 번 찾아올게요.”
“진짜죠? 꼭이요!”
여직원이 애절한 눈으로 수혁을 쳐다보았다.
서큐버스의 성 페로몬 특성을 흡수한 이후로 헌터가 아닌 마력 저항력이 없는 일반인들은 수혁에게 집적댔다.
처음엔 적응을 못했지만 이제는 그러려니하고 적당히 넘기는 법을 익혔다.
웃으며 상점을 나온 수혁은 아까 화면에서 발견한 특이점을 되새겼다.
중년 남성과 백발의 할머니와 달리 명품으로 치장한 젊은 여성에게서 발견한 것.
그녀의 귀에 걸린 자그마한 푸른 보석이 눈에 익었다.
엘리네의 눈물, 일명 마력회복귀걸이.
장착하고 있으면 지속해서 마력회복속도를 높여주는 아이템이었다.
도플갱어가 끊임없이 변신스킬로 몸을 유지한다면 마력을 지속적으로 사용할 테고, 마력포션을 계속 들이붓는 것이 아닌 이상 마력회복능력이 필요할 게 분명했다.
어쩌면 마력회복아이템을 계속해서 찾을 확률도 높았다.
“생각보다 좋은 걸 가지고 있군.”
그자의 피에 담긴 특유의 맛과 향, 보유 아이템까지 확인한 수혁의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남은 것은 그를 잡을 함정을 파는 것뿐.
“에이 씨. 재미 좀 보나했더니 돈만 쓰고 개고생했네.”
자신의 집으로 복귀한 도플갱어, 헌터 류익준이 곧장 뜨거운 물이 가득 담긴 욕조에 몸을 담갔다.
최상급 포션을 마셨지만 회복하면서 생긴 어지럼증과 피로감은 쉽사리 가시지 않았다.
변신을 풀고 수면에 비친 얼굴은 예상 외로 준수한 얼굴의 미청년이었다.
과거 연극바닥에서 구르던 그의 인생이 바뀐 것은 고블린을 때려잡고 각성한 뒤부터였다.
“그 시절이 좋았었는데... 쩝.”
각성한 극단의 동료들과 팀을 꾸려 잠시 돈만 벌기 위해 뛰어든 헌터세계에서 어느새 자신만 남게 되었다.
마음 터놓고 얘기했던 동료를 모두 잃은 후 자신의 비밀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졌다.
자신이 변신하는 모습을 보고 즐거워하던 단원들이 이따금씩 생각났다.
“그럼 뭐하나~ 결국 다 죽었는걸~ 진작에 나처럼 편하게 살았어야 했는데... 쯧.”
자신과 접촉한 상대로 변신할 수 있는 스킬은 레벨이 높아질수록 활용도가 무궁무진했다.
게이트에 프리헌터로 참가했다 모두 몰살당한 상황에서 몬스터로 변신해 보스몹을 홀로 잡은 일부터, 어느 유명한 연예인으로 변신해서 클럽을 휘젓고 다닌 일까지 낄낄거리며 추억에 잠겼다.
아파트에서 뛰어내릴 때 발이 부러졌지만 회복포션만으로도 치유가 되는 좋은 세상이었다.
아직도 시큰거리는 발목을 주무르던 그는 조금 더 좋은 아이템과 레벨 업에 욕심이 생겼다.
“내가 레벨만 더 높았어도 거기서 허기욱을 가짜라고 밀어붙이고 김지민을 계속 따먹는 건데, 싯팔.”
불륜 걸리듯이 홀딱 벗고 도망친 게 억울한 그가 욕조에서 발길질을 마구 해댔다.
거기다가 비록 훔친 카드지만 포션 비용으로 거금까지 써버렸다.
애꿎은 물에 분풀이를 마친 뒤 스마트폰으로 헌터협회 게시판에 접속했다.
그곳에는 길드에 속하지 않은 프리 헌터들을 고용하는 중개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레벨만 더 높았으면 추한 꼴을 안 봤을 거란 생각에 당분간은 게이트 공략에 적극적이기로 마음먹은 그였다.
“헤라 길드, 50레벨대 헌터 구합니다. 돈을 좀 적게 준다고 하던데... 남대문 길드, 여긴 여자헌터도 없는 곳 아닌가? 으... 부랄 땀내. 가로수 길드, 헤븐 길드... 아, 뭔가 영 땡기는 곳이 없네.”
요구조건에 비해 보수가 짜거나 신뢰성 없는 중소길드들이 난립했다.
그 와중에 한 길드의 문구가 그를 사로잡았다.
“블러드 길드? 요구 레벨 50대에 보수가... 오! 타천사의 팔찌? 자동마력방어형성에 마력회복속도증가? 이런 걸 보수로 내건다고? 와... 돈 많다고 소문났다더니 장난 아니네? 나한테 딱이긴 한데... 경쟁자가 많겠는데? 흐음... 일단 고우!”
터무니없는 보수에 고개를 갸웃거리긴 했지만 이런 좋은 기회를 날릴 수는 없었다.
해당 연락처에 신청서를 적은 그가 답장을 받은 건 하루 뒤였다.
와글와글.
“무슨 프리헌터 고용하는데 면접을 이렇게 봐?”
“그러게 말이다. 우리가 입사하러 온 것도 아닌데.”
사방에서 투덜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많은 사람들이 블러드 길드에 지원했다고?”
블러드 길드의 본사가 위치한 강남의 한 빌딩 로비에 수많은 헌터들이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 중에는 50레벨을 뛰어넘어 60레벨 베테랑 등급의 헌터들마저도 기웃거렸다.
경쟁자들의 숫자에 류익준이 불안함을 느끼며 두리번거리는 가운데 누군가 그의 어깨를 툭 쳤다.
“어? 익준씨도 왔네?”
“남명 형님? 여기 지원했어요? 형님은 베테랑 등급의 헌턴데... 아이템이 탐나서 온 거에요?”
그처럼 프리로 활동하며 게이트 공략을 같이 했던, 눈가의 주름이 자글자글한 김남명이 인사를 해왔다.
“아이템도 그렇지만 블러드 길드잖아. 소수정예. 아무도 안 받아주는 거 알지? 이 기회에 좀 잘 보이려고.”
“에이... 더 좋은 10대 길드 놔두고 이런 곳을요? 레벨 제일 높은 홍영기빨 아니에요?”
류익준의 말에 김남명이 손사레를 쳤다.
“익준씨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네. 그 인원으로 게이트 공략이 가능하다는 얘기가 뭐겠어? 게이트에서 마석으로 나오는 수익을 죄다 지들끼리만 나눠먹는다는 거지! 다른 길드는 열 몇 명씩 나누는데. 그러니까 홍영기도 다른 길드를 안 가잖아?”
“아~! 듣고 보니 그렇네요.”
“그리고 저~~~어기 저 분도 있잖아.”
얼굴의 홍조를 감추지 못하는 김남명이 눈짓하자 허기욱이 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사람들의 신원을 확인하며 현장을 통제하는 헌터 박이현이 있었다.
긴 머리를 말총머리처럼 묶고는 화이트블라우스에 정장 바지를 입은 그녀의 모습에 남성헌터 대부분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박이현 헌터?”
“아... 사인 받아야 되는데, 같이 일하다보면 정도 쌓이지 않을까?”
그제야 류익준은 노총각헌터로 여자헌터들에게 집적대가 길드에서 제명당했던 그의 과거가 기억났다.
“쩝. 형님. 죄송하지만 레벨 업 좀 해야 되서 빈자리 양보 못해드립니다.”
“그야 당연하지! 우리 선의의 경쟁 한 번 해보자고!”
“허기욱 헌터님은 길드장님 면담이 예정되어있습니다. 3층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친절한 박이현의 안내에 초조하게 지켜보던 김남명이 되물었다.
“저는요?”
“죄송하지만 김남명 헌터님은 다음에 더 좋은 기회로 모시겠습니다.”
정중하게 고개 숙이며 거절하는 박이현의 말에 김남명의 얼굴이 붉어졌다.
박이현과 함께 미안한 기색으로 엘리베이터에 탄 류익준이 사라지자 김남명의 입에서 짧은 욕설이 나왔다.
“류익준 저 개새끼.”
류익준이 3층으로 올라가자 면접이 예정된 헌터들 몇몇이 몰려있었다.
검과 방패를 조화롭게 잘 쓰는 유망주로 불리는 김예현 헌터부터 베테랑 등급의 거구의 사내 최욱, 화염마법의 대가라고 불리는 이명한까지.
프리헌터시장에서 몇 번 본 안면 있는 헌터들과 마주치자 가벼운 눈인사를 날렸다.
전에는 같은 팀이었지만 현재는 블러드 길드의 자리를 놓고 경쟁을 펼치는 사이로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다들 귀걸이와 목걸이, 팔찌와 반지 등, 마력회복과 관련 있는 아이템으로 장착된 모습에 류익준이 탐나는 눈길로 힐긋 쳐다보았다.
‘저 것들을 내가 다 가지고 있으면...하루의 단기계획이 아닌 며칠, 몇 주의 중장기 계획까지 가능할 텐데.’
물론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것보다 류익준이 착용한 귀걸이, 엘리네의 눈물이 제일 효율이 좋았지만 아이템은 다다익선 아니겠는가.
다른 헌터들의 아이템을 어찌 뺏을까 궁리하던 와중에 생각을 끊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모여 주셔서 반갑습니다. 블러드 헌터의 이수혁입니다.”
블러드 길드장인 이수혁이 사람들 앞에 나타났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류익준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착각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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