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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플갱어
박이현이 화살 하나를 꺼내 손 위에 올려놓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말과 함께 화살에 옅은 빛이 스며들었다.
관통력 증가와 회복력 저하의 디버프 스킬까지 때려 넣은 화살을 활시위에 걸었다.
그녀가 준비를 마치자 수혁 역시 강한 일격을 준비했다.
수혁의 발밑에 생긴 그림자가 발을 감싸자 움직여도 소리가 나지 않았다.
그림자와 붉은 혈기가 뱀처럼 또아리를 틀며 검을 감쌌다.
80레벨대의 사이클롭스는 잠을 자고 있지만 그로서도 방심할 수 없는 몬스터였다.
수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박이현의 화살이 허공을 갈랐다.
관통력이 강화된 탓에 공기를 찢어발기며 무서운 기세로 날아가는 화살 밑으로 수혁이 빠르게 접근했다.
“?”
수상한 낌새를 느낀 사이클롭스가 코를 고는 걸 멈췄지만 화살은 막지 못했다.
푹.
“크어어어어-!”
자다가 날벼락을 맞은 사이클롭스가 눈을 못 뜨는 사이 수혁이 어느새 사이클롭스의 목까지 접근했다.
“죽어라!”
서걱.
검붉은 기운이 담긴 검이 사이클롭스의 목을 갈랐다.
그러나 예상보다 사이클롭스가 몸부림치는 것이 격렬했던 탓에 절반만 가를 수 밖에 없었다.
“칫.”
재빠르게 몸을 뺀 수혁이 있던 곳으로 사이클롭스의 발이 날아왔다.
다급히 몸을 숙인 그의 위로 거대한 발 하나가 풍압을 일으키며 스쳐갔다.
그를 돕고자 박이현이 연달아 화살을 날렸지만 사이클롭스의 손을 뚫지 못하고 연달아 막혔다.
박이현의 회복력 저하 스킬과 붉은 장미덩쿨의 검의 출혈 효과로 사이클롭스 목에서 폭포처럼 피분수가 줄줄 떨어졌다.
“크르륵. 인간...”
피거품을 물며 증오심을 나타내는 사이클롭스가 눈에서 화살을 뽑아냈다.
곧바로 눈에 거품이 부글부글 생기더니 어느새 멀쩡해져 버렸다.
“눈이?!”
“회복력을 눈에 집중했군. 목의 상처는 쉽사리 없애지 못할 거다. 시간을 끌면 우리의 승리다.”
깜짝 놀란 박이현을 수혁이 냉정한 목소리로 진정시켰다.
“인간... 잠을 방해... 죽인다-! 씹는다-!”
포효하는 사이클롭스의 눈이 어두운 동굴을 환하게 밝힐 정도로 거세게 빛났다.
“파괴광선이다! 절대 맞서지 마!”
수혁의 경고와 함께 사이클롭스의 눈에서 빛이 레이저처럼 쏘아졌다.
둘이 좌우로 몸을 날리자 파괴광선은 바닥을 갈랐으나 이내 박이현을 타겟으로 계속 쫓아왔다.
“그 속도로 날 맞추겠냐?!”
박이현이 빠른 발놀림으로 동굴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사이클롭스를 도발했다.
파괴광선은 뛰어다니는 박이현의 뒤를 아슬아슬하게 따라왔다.
수혁이 구경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림자에서 덩치가 소보다 더 큰 박쥐를 여러 마리 일으키더니 곧장 사이클롭스를 공격했다.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거대한 박쥐를 향해 파괴광선의 목표를 바꾸었다.
이리저리 공중에서 회피하던 박쥐 한 마리가 파괴광선에 맞아 재로 변했다.
살아남은 박쥐들이 사이클롭스의 얼굴과 목에 붙으며 날카로운 이빨과 손톱으로 공격했다.
“바악쥐이... 짐승... 맛 없어-!”
사이클롭스가 몸에 붙은 박쥐를 떼어내는 틈에 수혁이 발밑으로 소리 없이 다가왔다.
검으로 사정없이 발가락을 잘라낸 후 곧바로 뒤로 이동해 아킬레스건을 난자했다.
파바바박.
할짝.
달군.
사이클롭스의 뒤꿈치에서 튀는 피를 혀로 맛본 수혁이 곧장 다리를 타고 이동하며 계속해서 검을 찔러댔다.
부글부글 거품이 일어나는 목이 회복하려는 낌새를 보이자 박이현의 스킬을 집중한 화살이 또다시 목을 관통했다.
박쥐와 수혁의 검, 박이현의 화살이 사이클롭스를 계속해서 몰아붙이자 다리에 힘이 풀린 사이클롭스가 엉덩방아를 찌었다.
“크우-! 다리-! 피이-!”
사이클롭스의 회복력과 수혁의 출혈, 박이현의 회복력 저하가 끝없이 힘을 겨뤘다.
온 몸을 이리저리 돌며 수혁의 검이 스쳐간 곳마다 피와 거품이 뒤섞였다.
주저앉은 사이클롭스가 눈으로 파괴광선을 못 쏘게끔 박이현이 집중적으로 분열화살을 날리며 얼굴을 사격했다.
사이클롭스의 몸에 박히는 화살의 개수가 늘어날수록 박이현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흘렀다.
“내 아까운 화살 그만 좀 쳐 먹고 빨리 뒤져-!”
마력을 담아 스킬의 효율을 높여주는 특수 화살은 재활용이 되지 않기 때문에 유지비용이 제법 들었다.
‘41, 42, 43...’
속으로 계속해서 화살 사용 개수를 세던 그녀의 눈이 보름달처럼 커졌다.
계속해서 흘린 피를 곁에 바짝 붙은 수혁이 그림자로 족족 빨아먹자 회복력을 잃은 사이클롭스가 마침내 쓰러졌다.
힘을 잃은 상체가 그대로 동굴 벽과 부딪치며 풀풀 먼지를 날렸다.
수혁이 본격적으로 쓰러진 사이클롭스의 목에 얼굴을 집어넣는 사이 박이현은 자신의 아공간에서 남은 화살의 개수를 확인했다.
“에이 씨. 120발도 안 남았네.”
그나마도 특수 화살의 개수는 30개도 채 되지 않았다.
울상을 짓던 그녀의 곁으로 어느새 흡혈을 모두 마친 수혁이 입을 팔로 닦으며 다가왔다.
[강인한 회복력을 얻었습니다.]
“왜 그렇게 표정이 안 좋아?”
“으... 저 빌어먹을 거인한테 화살을 너무 낭비했어요. 개당 얼마짜린데.”
솔직히 수혁이 아니었다면 있는 화살을 전부 다 써도 부족할 판이지만 굳이 얘기하지는 않았다.
“일단 아이템이 나왔으니 확인부터 해보자.”
“...내 화살...”
계속 궁시렁거리는 박이현과 수혁이 사이클롭스가 죽은 다음에 바닥에 떨어진 아이템으로 향했다.
반짝이는 것은 하나가 아닌 두 개였다.
[켄타우로스 궁수의 활 : 바람의 힘으로 화살을 만들어 날린다. 신체 +14]
“어머! 뭐야아~ 좋은 거인이었잖아?”
순식간에 태세를 바꾼 박이현이 눈을 꿈뻑이며 수혁을 쳐다보았다.
고개를 끄덕이자 냉큼 활을 집은 그녀가 빈 곳을 향해 활을 사용했다.
화살이 없이 활시위만 당겨도 공기가 뭉쳐진 화살이 앞으로 쏘아졌다.
“마력은 좀 드네.”
신난 박이현이 활에 정신이 팔린 사이 수혁은 다른 아이템을 집어 들었다.
[디메티리움 구슬 : 광범위한 마력 무효화 상태를 만든다.(1회)]
수혁을 게이트에 찾아 들어오게 만든 이유.
디메티리움 구슬을 깨트리면 일정 범위 내의 모든 존재가 마력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얼핏 봤을 때는 좋은 효과 같지만 딱히 쓸 필요가 없었다.
게이트에서 나오는 몬스터들의 강인한 육체를 이기려면 헌터들에게 마력을 통한 스킬이 필수였다.
그렇기에 헤라 길드에서 수많은 희생 끝에 얻은 아이템이 고작 디메티리움 구슬이라 길드 복구를 하지 못하고 무너진 이유였다.
딱 한 번, 이 구슬을 쓸 만한 곳은 바로 탑을 오를 때 만나는 거울여왕과의 전투였다.
그녀의 환상마법에 걸린 수많은 헌터들이 동료를 공격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등 아비규환을 만들어냈었다.
강인한 정신력으로 이겨낸 몇몇 헌터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무너졌기에 수혁이 고심 끝에 기억해낸 수단이었다.
전생에서는 어떤 돈 많은 헌터가 동생 훈련 시켜준다고 허무하게 사라졌던 아이템을 수혁이 이번엔 놓치지 않았다.
수혁은 탑의 완벽한 공략을 위해 한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는 중이었다.
“어?! 탈출 포탈이다.”
사이클롭스가 죽으며 탈출 포탈이 생겨났다.
내심 나가기를 바랬던 박이현의 시선을 수혁이 외면했다.
“나가자. 아직 게이트를 깨려면 멀었어.”
“이 거인이 보스 아니에요?”
“나침판을 봐. 보스는 다른 녀석이야. 이 거인은 보너스라고 해두지.”
“으... 씻고 싶었는데...”
혹시 다른 아이템이 있나 사이클롭스가 머무르던 공간까지 샅샅이 뒤져본 그들은 빈 손만 털며 홍영기에게 돌아갔다.
슈우우우-
게이트 밖으로 나온 그들을 게이트 관리국 직원들이 맞이했다.
“블러드 길드원 여러분. 고생하셨습니다.”
“으아아- 씻고 싶어~”
“난 배고프다. 고기를 좀 뜯어야겠어.”
현실 시간으로는 하루도 채 안 지났지만 게이트 내부에서 일주일이란 시간을 보낸 그들이었다.
배를 움켜쥔 홍영기와 몸을 박박 긁는 박이현을 수혁이 웃으며 지켜보았다.
그런 수혁을 향해 관리국 직원이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블러드 길드장님. 게이트에서 나오면 헌터협회장께서 최대한 빨리 연락을 달라는 요청을 부탁 받았습니다.”
“협회장님이요? 일단 게이트에서 얻은 마석에 관해서는 정리해서 신고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게이트에서 나온 주먹보다 작은 돌이 강한 마력을 품고 있어서 마석이라 불리며 실생활에 새로운 에너지원으로 각광받고 있었다.
게이트를 공략하는 주요 업무 중 하나가 몬스터 사냥과 마석 줍기였다.
인원이 적은 블러드 길드가 마석을 쉽게 모을 수 있는 건 박이현이 가지고 있는 스킬 덕분이었다.
맵핑에 탐지까지 다방면의 스킬들을 가진 그녀 덕에 시간 낭비를 최소화할 수 있었다.
여러모로 쓸모가 많은 그녀였다.
“다들 고생했어. 다음 집합은 아직 멀었으니 충분히 휴식해.”
“넵. 길드장님은요?”
“난 헌터협회장님이 찾는다니까 가봐야겠어.”
“상중이 형님이요?”
수혁의 의도대로 김상중이 헌터협회를 설립한 후 협회장까지 맡고 있었다.
여러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수혁이 힘을 보태 위기를 잘 넘겼다.
지금 수혁을 찾는 이유도 그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 분명했다.
***
본격적인 헌터의 전성시대가 열리며 헌터협회가 급속도로 성장한 것은 당연했다.
예상대로 헌터들이 활성화될수록 범죄가 빈번해졌고 곧 사회적인 문제로 떠올랐다.
빌런화 된 헌터들을 잡기 위해 헌터협회나 정부에서도 자체적으로 팀을 꾸리며 나름대로 노력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헌터들의 레벨이 높아질수록 게이트에 집중할 뿐, 빌런 범죄에는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고레벨 빌런을 잡기 위한 실력 있는 헌터가 절실한 상황에 적극적으로 도움을 준 것은 수혁이었다.
정부에서는 레벨을 올리지 못하는 수혁을 잊어버렸지만 김상중은 그의 실력을 잘 알았다.
세상을 어지럽히던 연쇄살인마 강현중이나 부녀자 강간범인 이세린도 모두 수혁에게 비밀리에 잡혔다.
수혁이 경험치를 위해 그들을 법정에 넘기는 대신 후루룩 짭짭했지만 김상중은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빌런을 더 없애달라고 요청할 정도였으니.
지금도 그를 찾는다는 건 분명 빌런이 어딘가에서 활개를 친다는 얘기였다.
필요 경험치가 많아 레벨업이 고픈 수혁에게는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게이트 공략해서 피곤할 텐데 미안하네.”
“아직 쌩쌩해요. 제가 무조건 돕는다고 했잖아요.”
“이번에 도플갱어 녀석이 처음으로 흔적을 남겼어.”
수혁을 마주한 김상중이 미안한 기색을 감추곤 눈을 빛냈다.
빌런 도플갱어.
추정 레벨은 50대로 다른 사람으로 계속 변신해가며 각종 범죄를 저지르는 녀석이다.
모습이 계속 변하는 탓에 잡는데 애를 먹는 중이었다.
전생에 이 빌런은 어느 순간 모습을 감춰버려서 수혁이 한국을 떠날 때까지도 잡지 못했었다.
개과천선했다는 소문도 돌았지만 진실은 아무도 몰랐다.
“미녀 헌터 김지민 알지? 그녀의 남편으로 변신해서 거사를 치르다 게이트에서 복귀한 남편에게 걸렸다는군. 남편도 유명한 헌터인 거 알잖아? 한 방 얻어맞고 잽싸게 도망쳤다는데 처음으로 걸린 현장이야.”
“제가 바로 가보죠. 그게 언제 일어난 일이죠?”
“너한테 전화하기 1시간 전이야. 그 녀석이 도플갱어라고 추정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어.”
수혁이 김지민의 아파트로 찾아가자 건물 주위에 움푹 파인 땅 옆으로 유리조각 등 여러 잔해가 어지럽혀져 있었다.
잠시 응시하던 그는 사건이 일어난 아파트로 올라가 그의 빌런헌터면허를 보여주었다.
별도의 수사권을 허용 받은 빌런헌터면허는 수혁을 비롯한 몇 명의 헌터만 소지했다.
신원과 실력이 보증된 헌터들로 구성된 빌런헌터면허는 칼과 방패가 서로 교차된 무늬가 박혀있고, 정의의 면허로도 불렸다.
전생에선 이들에게 쫓겨 다녔던 수혁이 이제는 빌런헌터로도 활동하는 중이었다.
“내가 무기를 안 들어서 그 새끼를 못 죽인 게 한입니다. 젠장.”
“허기욱 헌터님의 강철주먹을 맞고 피를 흘리며 창문 밖으로 떨어졌다 이거죠?”
“네! 그런데 이 새끼가 떨어지자마자 모습을 바꿨는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어서 내가 진짜!”
울고 있는 김지민과 씩씩대는 남편 허기욱의 진술을 들은 그가 부서진 창문으로 향했다.
몸의 일부를 강철로 변화시키는 허기욱이 방심한 도플갱어에게 일격을 먹였다.
도플갱어가 흘린 핏방울이 창문 곳곳에 흔적을 남겼다.
수혁이 부서진 창문에 묻어있는 혈흔을 찍어 맛을 보았다.
참으로 달콤하다.
콧속으로 들어온 망고와 바나나를 섞은 혈향이 공중에서 아른거리며 수혁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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