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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작
파르르르르.
힘을 잃은 게이트가 자그마한 빛과 함께 없어졌다.
눈가에 다크서클이 가득 내려온 이창이 손목시계를 바라보았다.
“새벽 1시 반, 5개, 아니 6개인가? 게이트를 깨는 시간이 점점 빨라진다. 대체 어떻게...”
레벨이 오르면서, 특히나 수혁의 레벨 업과 함께 큰 폭으로 뛴 능력치에 대해 알지 못하는 이창은 머리만 긁적일 뿐이었다.
피곤한 기색마저 없어 보이는 수혁이 홍영기에게 입을 열었다.
“하나 더?”
“네? 으으... 진짜루요?”
난색을 표하는 홍영기와 이창의 다크서클을 본 수혁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농담이야. 나도 이제는 좀 지긋지긋하다. 이만 가서 쉬자.”
“살았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이창이 백미러로 힐끔 수혁을 바라보았다.
“점점 게이트를 깨는 속도가 빨라지는군요. 이런 성과라면 이제 보름도 지나기 전에 부산의 모든 게이트가 없어질 겁니다. 대체 무슨 비결이 있습니까?”
아직도 포기 못했나. 이 양반.
틈만 나면 수혁이 어떻게 게이트를 깨는지 물어봤다.
물론 그가 대답을 친절히 해주는 법은 없었다.
“반복 숙달입니다. 머슬 메모리 아시죠? 몸이 기억한다고. 전투도 같습니다. 반복될수록 쉽거든요.”
“그렇겠죠. 하.하.하.”
이창과 무의미한 대화를 이어나가는 수혁은 하루의 마지막 일과인 각성자 비율을 확인했다.
전체 대한민국 인구의 18%가 각성을 했다는 기사가 뉴스의 맨 상단에 존재했다.
최근 들어서 그 비율을 나타내는 그래프가 급상승곡선을 그리는 중이었다.
낯선 존재에서 오는 공포감은 점점 해프닝으로 바뀌어갔다.
질리도록 보이는 고블린의 등장은 초반과 달리 안정적인 방어로 인해 하나의 기상예보처럼 느껴졌다.
예측 가능한 소나기, 발은 젖지만 우산만 있으면 대부분은 막아낼 수 있는 그런 형태로.
시간이 흐르는 만큼 세상은 빠르게 적응했다.
각 지역에서 이름난 각성자들이 스스로를 뽐내기 시작했고, 인터넷을 달궜다.
그 중 가장 큰 활약은 부산에서 활동하는 수혁이지만, 계약서 요청사항에 따라 인적사항 공개는 전혀 없었다.
모두들 정부의 지시에 따른 특민방의 공이라고만 알 뿐.
간간이 수혁이란 존재에 관해 인터넷 공간에 글이 보였지만 금방 없어져 버렸다.
수혁의 요청에 국정원이 열일을 하는 것 같았다.
정부에서도 게이트를 없애는 일을 자신들의 공치사로 적극 활용하느라 애썼다.
전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나라라던가?
다른 도시에서 정부를 통해 게이트를 없애달라고 그렇게 연락이 쏟아진다던데 정부는 그저 기다리라는 말로 시간을 끌 뿐이었다.
이창을 통해 다른 도시의 얘기를 들을 때마다 계약서를 추가로 쓰고 싶었지만 이내 접었다.
조만간 없어질 게이트에 무리한 욕심을 부리다 불편한 관계들이 늘어날 수도 있었다.
그렇게 수혁의 고블린 게이트 공략도 점점 끝이 다가왔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게이트 공략 스피드런에 집중하던 때에 예상치 못한 일이 생겨났다.
그것은 수혁 말고 군에서 게이트 공략에 성공했다는 대대적인 뉴스보도였다.
전생에서는 아무도 공략한 적 없던 고블린 게이트가 벌써 수혁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도 공략이 되어버렸다.
이것이 수혁으로부터 시작된 자그마한 날갯짓에 의한 영향인지, 훗날 어떤 태풍을 불러올지는 그로서도 예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자신 말고도 다른 각성자들이 강해진다는 점에 수혁은 만족했다.
그럴수록 훗날 나타날 탑을 무사히 오를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얘기니까.
군에서 대대적인 성과로 홍보하는 영상이 모든 매체에서 쉬지 않고 방송되었다.
[우리 대한민국에서 괴물들을 없애기 위해 집중적으로 육성한 특수대원들이 자랑스러운 성과를 이뤄냈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군은 더욱 많은 성과를 내기 위해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해당 부대의 지휘관이라고 하는 사람이 마이크를 앞에 두고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의 뒤로 사열해있는 군인들 가운데 낯이 익은 사람이 보였다.
한쪽 팔에 깁스를 한 김상중이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경직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그 다음부터였다.
아침마다 이창이 챙겨오던 김밥과 샌드위치, 과일 등에서 김밥만 남게 된 것은.
얼굴이 붉어진 이창은 계속 먹다보니 김밥이 제일 맛있더라라는 변명을 늘어놓았지만 지원이 줄어든 것을 느꼈다.
틈만 나면 상부와 통화하며 싸우는 모습까지 빈번했다.
숨긴다고 멀리서 통화하는 노력과 달리 귀가 밝은 수혁은 전부 듣고 있었다.
“으음... 뭔가 분위기가 달라진 것 같아요. 게이트 깨는 속도가 더 늘었는데 대우가 좀 다르네요. 우릴 쳐다보는 눈빛들이 좀 변한 것 같아요.”
감이 좋은 홍영기는 바뀐 변화를 바로 감지했다.
“군에서도 게이트를 공략했으니 우리의 가치가 크게 떨어진다고 생각되겠지.”
“칫...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신경 쓰지 마라. 우리는 맡은 일에 충실하기만 하면 돼.”
부산의 구포에서 김해로 넘어가는 일대의 게이트를 공략하는 와중에 모르는 번호로 연락이 왔다.
평소라면 전화를 받지 않겠지만 그날따라 알 수 없는 느낌에 휩싸인 수혁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이수혁씨 맞습니까?
“누구시죠?”
- 혹시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김상중입니다. 저번에 같이 검을 맞대고 싸웠던.
“아~ 네. 기억합니다. 무슨 일이시죠?
- 한 번 만나서 얘기하고 싶습니다.
그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수혁이 흔쾌히 승낙했다.
이창에게 하루만 휴가를 갖자고 전하자 무척이나 기뻐했다.
홍영기는 게이트가 없어져서 활기가 돋는 번화가로 혼자 놀러갔고, 하루 만에 부산까지 내려온 김상중을 수혁이 맞이했다.
“오랜만입니다.”
“그래봐야 일주일 정도밖에 안 지났는데요.”
“최근에 큰일을 겪어서 시간이 무척이나 많이 흐른 느낌입니다.”
“게이트 공략 말입니까?”
“그걸 어찌...”
수혁의 말에 화들짝 놀란 김상중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수혁이 머무르는 호텔 내부에 위치한 카페에 다른 손님은 보이지 않았다.
짐작했다는 얼굴을 보여준 수혁의 눈이 다른 곳을 향했다.
“팔을 많이 다치셨습니까? 깁스까지 한 걸 보니.”
“이거 말입니까? 사실 다 나았습니다. 하하하. 각성자가 되고 보니 회복력이 엄청 빠르더군요. 이참에 핑계대고 휴가를 얻었습니다.”
진지했던 모습만 봐와서 그런가 이런 익살스러운 면이 새롭게 느껴졌다.
“머릿속으로 몇 백번이나 시뮬레이션을 돌렸습니다. 수혁씨가 작성한 보고서를 보고 대원들과 예상 가능한 위험들을 모두 추려봤죠. 그럼에도 부상을 피하기는 쉽지 않았지만 아무도 죽지 않았습니다. 그것만으로도 만족합니다.”
“대단합니다.”
“대단하긴요. 이미 수혁씨가 하루에도 몇 개씩이나 게이트를 깨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말하기 그렇지만 존경합니다.”
전생에서 자신을 죽이려고 현상금을 걸었던 사람에게 존경한다는 얘기를 듣자 기분이 묘했다.
그의 마음을 짐작하지 못하는 김상중이 말을 이어갔다.
“사실 중간에 제법 힘든 시기가 있었지만... 저희 대원 중 한 명이 스킬을 각성했습니다. 탐지 스킬이라고 해야하나요? 그 덕에 길을 헤매지 않고 공략할 수 있었죠. 아마 수혁씨도 그런 스킬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짐작합니다.”
“...”
스킬이 아니라 엄밀히 말하면 아이템이지만 굳이 자신의 패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것과는 별개로 계속해서 수혁씨가 얘기한 것이 제 뇌리에 남았습니다.”
“?”
“민간 각성자들이 활성화가 되면 나라에 더 큰 도움이 된다는 의견 말입니다.”
수혁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경청하는 자세를 취했다.
그가 했던 말에 김상중의 심경이 바뀐 모양이다.
“점점 각성자들이 늘어나는 추세는 피할 수 없는 흐름인 것 같더군요. 게다가 저와는 다른 스킬을 얻은 대원을 보니 전투와는 연관이 없는 스킬이지만, 다양한 각성자들이 모여야 시너지효과를 얻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덕분에 게이트를 깰 수 있었구요. 아마 수혁씨도 팀원분과 같이 다니는 이유가 그런 거겠지요?”
“뭐... 그렇죠.”
홍영기가 전투 말고 도움 되는 스킬이 있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버스에 탑승하는 것 같은데.
그 와중에 김상중의 말이 끊이지 않았다.
“... 전역 신청서를 냈습니다. 상부와 마찰도 심하고 게이트를 깨는 방식은 충분히 설명했으니까요. 위에서 받아들일지는 의문이지만.”
“좋은 결단입니다.”
“전역하고 민간 각성자들을 위한 단체를 하나 만들 생각입니다. 좀 더 체계적이고 각성자들을 육성할 수 있는 그런 단체. 사실 그것에 관한 걱정이 많습니다.”
“뭐죠?”
“각성자들이 늘어날수록 그 힘을 올바른 곳에 사용하지 못하는 자들도 늘어날 겁니다. 정의롭지 못한 자들을 어찌 통제할지... 제가 나서서 한다고 해도 늘어나는 숫자를 혼자서 감당하기는 힘들 것 같군요. 사실 법으로 통제한다고 해도 잘 될지 의문입니다.”
김상중은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각성자들이 빌런화가 되는 것을 벌써부터 우려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었다.
힘이 있는 자에게 도덕과 윤리의 잣대를 들이대며 참으라고 한다고 말을 듣겠느냐만, 그것을 적절히 통제하는 것이 중요했다.
안 그러면 진짜로 무질서한 사회는 개판으로 변할 것이니까.
실제로 그렇게 무정부상태에 놓인 국가들이 훗날 제법 있었다.
중요한 요지는 빌런에 관한 통제를 어찌했으면 좋겠냐는 거다.
그것은 수혁이 제일 자신있어하는 분야였다.
“그런 자들이 생겨난다면 저에게 연락주세요. 제가 해결해 드리죠.”
“정말입니까? 수혁씨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됩니다. 게다가 그 힘을 정의롭게 쓰고 있는 현재의 모습만 봐도 말이죠. 수혁씨 덕분에 이곳 부산시민들이 마음 놓고 지낼 수 있게 되었죠. 전 개인적으로 감격했습니다.”
“저야말로 상중씨의 대의를 응원합니다. 그러니 제 힘이 필요하면 꼭 불러주세요.”
사회에 해를 끼치는 빌런을 잡아먹을 거니까.
기왕이면 특성 좋은 녀석들로.
간절한 수혁의 마음이 전해진 건지 안심된다는 얼굴을 한 김상중이 웃으며 떠나갔다.
이렇게 미래의 헌터협회 협회장과 친한 사이가 되었으니 수혁으로써는 마음이 놓였다.
협회장이 보증한 헌터를 누가 빌런으로 보겠는가.
합법적인 양지의 헌터에 이렇게 한 발자국 더 다가섰다.
빌런들에 관해서는 확실히 처리할테다.
대의를 위해서.
진짜로.
김상중이 떠난 뒤 수혁은 또다시 게이트를 깨는데 집중했다.
한 달이 걸릴 거라는 예상과 달리 2주가 좀 지난 시점에 부산의 모든 게이트가 없어졌다.
게이트가 사라진 길거리에는 사람들의 웃음꽃이 피어났으며, 생기가 돋았다.
호신용품 장사가 그렇게 잘된다더니 심심치 않게 무기를 든 사람에게 경찰들이 접근해 신원파악을 하는 것도 일상이 되었다.
일상생활로 돌아온 부산과 달리 아직도 다른 도시 내부에서는 끊임없는 전투가 이어지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헬기 지원을 요청했는데 예산 문제로 KTX로 대체되었습니다. 면목이 없습니다.”
“괜찮아요. 월급쟁이가 뭐 그렇죠. 그 동안 고생했습니다.”
부산역에서 미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이창과 수혁이 작별인사를 나눴다.
“서울에도 아직 무수한 게이트가 남아있지만 수혁씨라면 금방 평화를 되찾아 주실 거라 믿고 있습니다.”
“열심히 해봐야죠.”
수혁과 홍영기가 탄 기차가 부산역을 출발했다.
서울에서도 부지런히 고블린을 잡을 거라는 홍영기의 의욕이 발산되기도 전에 사람들의 핸드폰에 긴급문자가 끊임없이 울렸다.
전 세계의 게이트가 전부 없어졌다는 내용이었다.
“사장님! 인류가 이겼대요!”
기차 내부에서 사람들이 환호성을 질렀고, 홍영기 역시 분위기에 휩쓸려 흥분하며 소리질렀다.
오직 수혁만이 조용히 각성자의 수치를 찾아보았다.
전 세계 인구의 30프로가 넘은 시점이었다.
서울에 도착하자 온 도시의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축제를 열었다.
수혁이 전망 좋은 호텔에서 차분히 앉아 꺼지지 않는 도시의 야경을 지켜보는 동안, 늦은 밤이 될 때까지 거리의 사람들과 어울리는 홍영기는 숙소로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자정이 지나자 균열과 함께 새로운 게이트가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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