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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약은 밀고 당겨야지
검과 몽둥이가 공기를 가르며 맞부딪쳤다.
몽둥이에 실린 거력에 밀린 김상중이 뒷걸음질치며 힘을 해소했다.
그런 그를 수혁이 공격 대신 우두커니 서서 지켜보며 여유를 부렸다.
“지금은 국가비상사태입니다. 이런 특수한 상황에서 국민들을 지키기 위해 우리 군이 존재하는 겁니다.”
“초반엔 그랬지만 솔직히 이제 필드의 고블린들은 초반처럼 위협적이진 않을 텐데요? 고블린들은 약하고 각성자들은 늘어나고 있죠. 무엇보다 국가에서 집중적으로 키운 각성자들이 저나 제 동료처럼 스스로 일어선 각성자들보다 기량이 떨어지니까요. 이 참에 다른 민간각성자들에게 길을 열어주어서 더 나은 실력자들을 발굴하면 나라에 더 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기량이 떨어진다는 각성자가 김상중 본인과 직전에 홍영기와 싸웠던 국정원 직원을 가리키는 것을 깨달았다.
수혁의 말에 자존심이 상한 듯 김상중의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졌다.
“아직 제 실력을 다 보여준 게 아닙니다.”
스킬을 쓰지 말라는 상부의 지시를 무시한 김상중이 결국 일을 저질렀다.
그의 몸 주변에 번쩍이는 전류가 흐르더니 곧 무기로 집중되었다.
마치 트롤 메이지가 썼던 번개 마법이 떠올랐다.
그때와 다른 점은 번개 방출형이 아닌 무기에 잔류시켜 검의 파괴력을 극대화했다는 점이었다.
파지지직.
김상중의 검날에서 누런 스파크가 쉼 없이 튀어 올랐다.
“어어. 이봐. 김 상사. 잠깐만-!”
심판을 맡은 군인이 차마 겁이나 중간에서 말리지 못하는 사이 김상중이 검을 들고 쇄도했다.
그의 검 주변으로 파지직거리는 스파크가 모두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막사내의 관전자들이 예상치 못한 상황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검에 담긴 파괴력은 수혁도 좌시할 수 없었다.
흑빛 몽둥이에 피처럼 붉은 기운이 넘실거리더니 곧 검과 맞부딪쳤다.
콰앙!
운동장에서 피어난 흙먼지가 충격파와 함께 막사를 덮쳤다.
“우웩. 퉷. 퉷.”
“어떻게 된 거야?”
“김상중이 스킬 쓰지 말라고 얘기 안했어?”
“...능력이 너무 위험한데?”
“레벨 5인데 저런 위력을 가졌어?”
흙먼지에 잔뜩 더럽혀진 장군들은 불만어린 음성과 함께 예상외의 각성자 위력에 각자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그와 동시에 이 싸움의 결과가 너무나 궁금했다.
공중에 비산한 흙먼지가 고요한 분위기 속 땅으로 가라앉았다.
그 다음 보인 광경에 막사 내의 군인들과 국정원 직원들 모두 눈이 크게 벌어졌다.
한쪽 무릎을 꿇고 마력 고갈로 숨을 헐떡이는 김상중과 멀쩡히 서있는 수혁의 모습이 너무나 대비되었다.
전격스킬은 강한 파괴력만큼 마력소모가 매우 컸다.
낮은 레벨의 김상중은 힘 조절도 할 줄 모르니 냅다 전력을 다했을 게 분명했다.
그 결과가 지금의 모습이었다.
“허억. 허억. 어떻게?! 레벨을 속였구나!”
“내가 굳이 레벨을 속일 이유가 있을까요?”
“날 방심하게 만들기 위해서겠지.”
“흠... 못 믿기는 건 잘 알겠지만, 레벨이 전부는 아니랍니다.”
여유로운 태도를 지닌 수혁의 눈웃음이 초승달처럼 휘어졌다.
그의 눈과 마주친 뒤 이해할 수 없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저 앳되어 보이는 외모 속 산전수전을 다 겪은 베테랑 군인의 모습이 떠오르며 수혁과 겹쳐졌다.
그것은 입만 산 자가 아닌 진짜만 보일 수 있는 강자의 여유로움이었다.
그걸 자신은 뒤늦게 알아차렸다.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 김상중의 앞으로 심판을 보던 군인이 방패를 들고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곤혹스러운 얼굴이 방패 위로 슬그머니 올라왔다.
“김 상사! 스킬은 사용금지 아니었나? 테스트는 여기서 종료야.”
곧이어 수혁에게 다가간 그는 능구렁이 같은 웃음을 지었다.
“멀쩡해 보이는데 병원에 안 가도 되겠습니까? 우리 대원하고 대등하다니 참으로 대단하군요. 허허허.”
대등하긴 개뿔.
누가 봐도 우위가 명확한데 애써 모른척하다니.
수혁은 말없이 자리로 돌아갔다.
홍영기가 헐레벌떡 다가오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사장님! 괜찮으세요?”
“물론이지.”
“아... 에이... 혹시나 했는데 김새네.”
따콩.
“아얏.”
꼭 매를 번다.
머리의 혹을 문지르면서도 끊임없이 조잘거린다.
“우리 사장님이 당황하는 모습 한 번 보고 싶다아~ 맨날 얼음장처럼 냉철하다아~ 위기에 빠진 사장님 한 번 구해주고 싶다~”
“시끄럽다. 돌아갈 준비나 하자.”
반대편 막사가 굉장히 소란스러워졌다.
수혁과 싸운 김상중이 군인들 사이에 둘러싸여 심한 욕을 듣는 게 보였다.
심판이 얘기하던 정황상 그가 스킬을 쓰지 말라는 지시를 어긴 것 같았다.
오히려 국정원 쪽 막사가 이제는 군인들의 눈치를 보는 중이었다.
이럴 땐 빠르게 자리를 빠져주어야 한다.
괜히 다른 일에 엮이기 전에.
또다시 눈을 가리고 봉고차에 탑승했다.
자리에 드러누운 수혁의 옆에 홍영기도 같이 드러누웠다.
두 사람이 드르렁 코를 골자 맞은편의 국정원 직원들이 마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봉고차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돌리고자 이곳저곳을 돌다 마지막으로 특민방 건물 앞에 도착했다.
개운한 얼굴로 기지개피는 수혁과 홍영기를 강영철과 이창이 다시 맞이했다.
사무실에 앉아 커피를 들이키는 수혁에게 강영철이 서류 한 장을 내밀었다.
“듣자하니 상부가 한 바탕 뒤집어졌다는군요. 자신감만큼 실력이 확실했나봅니다. 허허허. 이수혁씨가 요청했던 부산 시내 게이트 독점권에 관한 내용이 들어있는 계약서입니다. 특수민간방위대에 임시직으로 들어오니 월급도 제공될 테고, 게이트를 없앨 때마다 추가 수당금도 들어가 있습니다. 내용 한 번 확인해 보시고 사인하시죠.”
서류 속 글자 하나하나 차분히 들여다보던 수혁의 미간이 조금씩 좁혀졌다.
계약서에는 특민방의 대원으로서 해야 할 정부의 지시에 따른 의무적인 일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개를 슬쩍 들자 시간이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조금 늦네.”
“네?”
수혁의 혼잣말에 강영철이 반응했다.
사인을 하지 않고 서류만 들고는 시간을 질질 끄는 모습에 강영철의 손이 땀에 조금씩 젖어들었다.
계약서 내용이 무언가 맘에 안 드는 건지 짐작도 못하던 그는 이 계약을 성공시키지 못할시 자신에게 닥칠 후폭풍이 걱정되었다.
“내용에 무슨 문제라도?”
“잠시만요.”
“?”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건물 주변이 소란스러워졌다.
강영철과 이창의 귀에 달린 무선이어폰으로 방문을 빨리 막으라는 급박한 지시가 떨어졌다.
즉시 두 사람이 방문쪽으로 향했지만 벌컥 힘 있게 열리는 문을 막지 못했다.
그리고 나타난 한 무리를 보고는 당황한 듯 얼어붙었다.
“누구십니까?”
강영철의 질문에 정장을 입은 통통한 중년의 금발 남성이 답했다.
그의 뒤로 복도에서 한국 군인들을 막아서며 실랑이를 벌이는 미국 측 요원들이 보였다.
“토마스 주한 미국 대사입니다. 이곳에 계신 이수혁씨와 할 얘기가 있는데 시간이 되도록 나타나지 않아서 왔습니다.”
“이게 무슨 경우입니까! 함부로 허락도 없이 군사 시설을 들어오다니요!”
옆에 있던 이창에게 뭐라도 해보라는 눈짓을 보냈다.
이창이 즉시 앞으로 나서서 막아보려 했지만 토마스 대사 옆에 붙어있던 근육질의 남성이 그를 제지했다.
수혁에게 익숙한 얼굴인 먼데이였다.
“여기는 대한민국 영토입니다! 당신들이 함부로 나서고 다닐 수 있는 그런 곳이 아니에요-!”
“Back off-! 뒤로 가! 이 이상 접근하면 대사님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겠다. 물러나. 똥마려운 강아지처럼 짖지 말고.”
“뭐라고?”
어느새 허리춤의 총으로 손이 간 이창이 먼데이와 서로 노려보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험악해진 가운데 강영철이 수혁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수혁씨.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미리 약속이라뇨?”
당혹스러운 강영철에게 수혁이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아... 우리나라에서 저를 그다지 원하지 않는 것 같아서, 잠시 얘기를 해보니 매우 잘 통하더군요. 우리나라보다 더 나은 조건을 제시한다길래 잠시 생각 좀 해본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찾아올 줄은 몰랐네요.”
“그러면 부산 시내 게이트 독점권이 필요 없다는 말입니까?”
“음... 일단 미국 측의 얘기를 좀 들어보고 와도 될까요? 계약이라는 게 원래 밀고 당기는 맛이 있잖아요. 다음에 만날 땐 더 나은 조건으로 보길 기대하죠.”
“그게 무슨...?”
망연자실한 강영철의 말을 토마스 대사가 잽싸게 끊었다.
“하하하하. 미스터 리. 듣던 대로 화끈하시군요. 미국은 미스터 리에게 최고의 조건을 제공할 예정입니다. 전세계에서 게이트를 없앨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데 당연하죠. 각 주에서 서로 보내달라고 안달이 났습니다. 자- 이쪽으로.”
토마스 대사의 손짓에 주변에 있던 미국요원들이 수혁과 홍영기의 주변을 둘러쌌다.
그들 사이에 있던 썬데이가 수혁과 마주치자 슬쩍 고개를 숙였다.
그들에게 에스코트 받으며 나가는 와중에 대한민국 군인들과 국정원 직원 모두가 분하다는 듯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영기. 너는 숙소에서 기다리고 있을래?”
“아뇨. 길거리에 있는 고블린들을 잡으러 갈게요.”
“좋아. 저녁에 보자.”
정의로움이 가득한 홍영기는 수혁이 누구와 계약하고, 밀고 당기는 것에 큰 관심이 없었다.
당장 자신의 눈앞에 있는 몬스터를 죽이고 사람들을 돕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홍영기가 자리에서 떠나고 토마스 대사가 준비해 온 차가 보였다.
자동차의 제일 앞에 박힌 미국 국기가 바람에 펄럭거렸다.
수혁이 뒷자리에 타자 이어서 토마스 대사, 썬데이, 먼데이가 그의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자동차 내부가 특수방음처리가 되어있는지 두툼한 소재들에 둘러싸여있었다.
앞좌석에서 운전 중인 자들은 무슨 얘기를 해도 들을 수 없게끔 튼튼하고 견고한 이음새들이 보였다.
창문마저도 짙게 썬팅된 터라 밖에서는 전혀 들여다 볼 수도 없었다.
편하게 기대앉은 수혁에게 토마스 대사가 환한 미소를 보였다.
“미스터 리. 젊은 나이에 능력도 출중하고 인물도 훤칠하군요. 전 세계가 미스터 리에 관심이 많습니다. 듣기로는 대한민국에서 집중적으로 키우던 군인하고도 맞먹는다고 하더군요. 쯧쯧. 이런 인재를 홀대하는 나라라니.”
“감사합니다.”
“당신의 그 위대한 능력을 미국에 써준다고 생각해줘서 정말로 다행이오. 우리는 최대한 많은 지원을 보장할 겁니다. 온 도시가 갑자기 생겨난 게이트로 고통 받는 중입니다. 경제, 의료, 모든 것이 예전처럼 돌아가려면 당신의 능력이 필요해요. 정말 고맙습니다.”
칭찬을 거절하는 성격은 아니다.
하지만 잘못된 것은 바로잡아야했다.
“내가 미국에 간다구요? 그건 아닙니다. 내가 내 나라를 놔두고 뭐하러 거기까지 갑니까.”
조만간 게이트의 길을 찾는 스킬들을 가진 각성자들이 나오면 토사구팽당할 게 뻔한데.
“왓? 내가 들은 것과 다른데?”
토마스 대사가 자신의 양옆에 앉은 썬데이와 먼데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아까와 달리 딱딱한 로봇처럼 경직된 두 남녀는 무표정하게 앞만 바라볼 뿐이었다.
저것이 바로 제일 큰 문제다.
자신의 지배를 받는 자들은 사고의 유연성이 떨어지고 명령만 따르는 수직적인 모습을 보이는 것.
수혁은 자율적으로 움직이며 불리한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부하를 원했다.
그런 면에서 스스로 움직이고 행동하는 홍영기처럼.
“씁.”
수혁이 손짓하자 썬데이와 먼데이가 토마스 대사의 양팔을 붙잡았다.
“어?! fuck! 뭐하는 거야? 이거 안 놔?”
미국은 전생에서도 헌터의 질이 제일 좋은 나라였다.
먼 미래에도 여전히 세계를 선도하는 나라일 것이 분명했다.
아직은 그들과 척을 질 필요도 없고, 가까워지는 것도 부담이니 적당한 거리만 유지하고 싶었다.
자신에 관해 완급조절하며 보고를 적절히 할 수 있는 자를 마침 적당한 시기에 만나다니.
참 운이 좋다.
수혁이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며 토마스 대사에게 다가갔다.
“왓! 노우-!!!”
썬데이가 비명을 지르는 토마스 대사의 입을 틀어막았다.
콰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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