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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군인
“너는 언제부터 있었던 거지? 계속 지켜본 건가?”
“그렇다면?”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아무도 알아서 안 된다.
증인을 모두 없애기로 마음 굳인 김일호는 쓰러져있는 홍영기 대신 수혁을 먼저 처리하기로 마음먹었다.
“고블린을 쫓아갔다더니... 보스몹 경험치가 탐이 났나 보군? 이거 어쩌나 이미 내가 잡았는데.”
“아니지. 정확히는 네가 아니고 저기 누워있는 영기가 잡은 거지.”
“...내가 보스를 붙들고 있는 덕에 잡았으니 내가 잡은 거나 마찬가지지. 그러니 이 방패정도는 내가 가져도 되지 않을까? 네 생각은 어때?”
뻔뻔한 김일호가 방패를 앞에 들고는 천천히 접근했다.
방패를 들고 능력치가 오르자 온 몸에 불끈 힘이 솟았다.
마력 방어막을 사용하는 법도 저절로 알게 되며 자신감도 치솟았다.
그러나 접근은 신중했다.
홍영기에게 수혁이 가진 강력한 몽둥이 얘기를 들은 것도 있고, 무엇보다 저 여유만만한 태도에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다.
“공헌도가 가장 크다는 점을 알리고 팀원들을 설득해야지, 죽이면 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온갖 범죄를 저지르는 사이코패스, 너 같은 놈들을 뭐라고 하는 줄 알아?”
귀를 쫑긋 세운 김일호에게 수혁이 말을 이었다.
“빌런. 사회의 쓰레기들.”
“푸하하핫. 이봐. 게임이나 소설에서나 겪던 일들이 현실이 된 지금 그런 게 무슨 소용이야. 지금은 누가 이 시대의 주인공이 될지 경쟁하는 중이라고. 그리고 나는 주인공이야!”
거리가 좁혀지자 김일호가 위로 치켜든 검을 수혁을 향해 휘둘렀다.
캉.
어느새 한 손에 몽둥이를 든 수혁이 어려움 없이 검을 막았다.
몽둥이를 보자 김일호의 눈에 짙은 탐욕이 철철 흘렀다.
“네 몽둥이도 내가 가져가마!”
캉. 캉. 캉.
연달아 검을 휘둘렀으나 수혁의 무성의한 팔놀림에 모두 막혀버렸다.
생각보다 수혁이 강한 것을 바로 느낀 김일호는 방식을 바꾸기로 했다.
‘무기라고는 몽둥이뿐이지. 방패로 시야를 가리고 밀어버려야겠다. 균형을 잃으면 바로 죽여주마.’
몸통만한 카이트실드로 수혁을 밀어붙여 몸을 휘청일 때 검을 찔러 넣어 마무리할 생각이었다.
검을 회수한 김일호가 방패를 앞에 올리고 있는 힘껏 밀었다.
퍼억.
하지만 수혁의 몸에 부딪친 방패는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마치 커다란 바위와 같은 느낌에 김일호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 놈 힘이?!’
“끝났냐? 내 차례다.”
몸둥이를 위로 치켜든 수혁이 밑으로 내리꽂았다.
심상치 않은 모양새에 김일호가 다급히 외쳤다.
“마력 방어막!”
곧바로 그의 몸 주위로 반투명한 막이 생겨났다.
그제야 마음이 놓인 그는 곧바로 반격하기 위해 검을 꽉 쥐어잡았다.
콰앙!
“크아악-!”
수혁의 몽둥이가 마력 방어막을 부수고는 방패를 내리치자, 방패를 잡고 있던 김일호의 손과 팔, 어깨가 통째로 부서졌다.
방패는 멀쩡했지만 몽둥이에 담긴 거력은 그대로 온 몸을 강타했다.
무릎이 접히며 주저앉은 김일호가 고통을 애써 참으며 말을 더듬었다.
“하... 하급 마력 방어막이 어... 어떻게... 무... 무슨 스...스킬이길래...”
“스킬은 무슨. 내가 그냥 강한 거다.”
“마...말도 안 돼! 아직 나보다 레벨이 높은 사...사람은 본 적이 어...없어. 레벨이 며...몇이냐!”
“1이다.”
“뭐?! 이... 이 새끼가 나를 노...놀리나...”
이어지는 말을 무시한 수혁이 곧장 김일호의 목을 옆으로 젖혔다.
김일호의 땀에 젖은 목덜미가 고스란히 드러났다.
“뭐... 뭐하는 거야? 아악!”
수혁이 송곳니를 박아 넣자 고통에 울부짖던 김일호의 비명소리가 점차 잦아들었다.
잠시 후 미라처럼 변해버린 김일호를 내팽개친 수혁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쩝. 쩝. 빌런은 언제나 달군. 보스몹보다 경험치가 좋네.”
[미약한 마력 운용 능력을 얻었습니다.]
“마력 운용? 이런 좋은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마력 운용은 스킬을 사용할 시 효율적인 마력 움직임으로 마력의 사용량을 아낄 수 있는 고급 특성이었다.
그러고 보니 김일호란 이름이 제법 익숙했다.
“기억났다! 비셔스 한국지부장!”
비셔스는 세계적인 빌런 조직으로 국가를 각성자들이 지배해야한다는 과격한 사상을 가진 조직이었다.
그에게 접근한 비셔스 놈들은 죄다 빌런이라 계속 잡아먹자 나중에는 찾아오는 자들이 없었다.
이름난 헌터들도 정부의 통제와 압박에 빌런으로 돌아선 자들이 제법 있었는데 김일호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수혁이 해외로 도피한 뒤에 빌런으로 전향해 직접 마주한 적은 없었다.
좋은 특성과 실력으로 빠른 성장을 이룬 그는 대한민국의 손꼽히는 헌터이자 빌런이 될 운명이었지만...
“차라리 잘됐군.”
몽둥이를 아공간에 집어넣고 죽은 일행들과 고블린들의 피까지 그림자로 흡수했다.
[Lv.1 등급(슈퍼 노비스)
- 신체 : 66 + ??
- 마력 : 64 + ?? + (1)
- 종합전투력 : 130 + ?? + (1)
- 경험치 : 7829/10000 ]
게이트만 다녀서는 얻을 수 없는 큰 경험치가 들어왔다.
“이 맛에 빌런을 잡아먹지.”
상태창을 끈 수혁이 바닥에 아직 뻗어있는 홍영기를 발로 툭툭 찼다.
“일어나.”
“으...으음... 헉! 그... 그 자식! 어? 사장님?!”
눈이 커진 홍영기를 향해 수혁이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내기는 내가 이겼다. 너 감봉이야.”
“네?! 아...”
그는 주변에 쓰러진 사람들을 씁쓸하게 바라보았다.
“제가 방심하지만 않았어도... 그 놈이 갑자기 배신을 할 줄은 몰랐어요. 대체 무엇 때문에...”
“게이트에서 나온 아이템이지. 눈이 먼 인간의 욕심을 과소평가하지마. 누구도 믿지 말라고. 최소한 이 게이트 안에서는.”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착했다구요. 다들 도시의 시민들을 위해 힘껏 돕는 자들이 대부분이었어요. 그 자 빼고는요. 이러다 사장님도 믿지 말라고 하겠네요.”
“믿지 마. 그런데 안 믿으면 어쩔 건데? 나 이수혁이야.”
“악덕사장.”
거만한 수혁의 태도에 홍영기가 자그맣게 궁시렁거리며 일어났다.
이번 일로 배운 점이 많은 듯 눈가에 복잡한 감정이 일렁였다.
“방패는 네가 써라.”
“앗! 그래도 되요?”
“그래. 월급도 깎였는데 그거라도 챙겨야지.”
“...”
죽은 일행들의 무기와 군번줄을 챙긴 수혁과 홍영기가 탈출 포탈을 빠져나갔다.
게이트가 소멸되며 수혁과 홍영기가 나타나자 대기하던 특수민간방위대 대원들이 화들짝 놀랐다.
“어?! 없어졌어! 저 사람들은?”
우르르 몰려온 대원들이 곧장 그들을 둘러쌌다.
“어떻게 된 겁니까? 같이 들어갔던 우리 부대원들 혹시 못 봤습니까?”
“그들은 이 게이트 내부에서 몬스터들과 장렬히 싸우다 전사했습니다. 그나마 이 친구와 제가 보스몬스터를 처리하고 빠져나왔지만...”
씁쓸한 표정을 지은 수혁이 무기와 군번줄을 그들에게 전해주었다.
홍영기는 그 가식적인 모습에 못 볼 꼴을 억지로 본 듯 콧구멍을 크게 벌렁거리고 눈도 가늘게 떴다.
점점 표정을 숨기는 게 어려워지자 고개를 크게 떨구었다.
하지만 특수민간방위대 사람들에게 홍영기의 모습이 마치 전투에서 동료를 잃은 분노로 비춰지는 듯 보였다.
“죽은 부대장과 동료들 모두 도시를 위해 최선을 다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위험하니 좀 더 지켜보자고 했었는데...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그래도 이 끔찍한 게이트를 없앨 수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엄청난 정보인데, 괜찮으시다면 저희 기지로 같이 가서 지휘관분께 자세한 얘기를 좀 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나라를 위한 일인데 당연히 그래야죠. 가시죠.”
특수민간방위대 대원들을 따라 수혁과 홍영기가 이동했다.
그들을 맞이한 건 짙은 다크서클로 인상적인 중년의 군인이었다.
“반갑습니다. 특수민간방위대를 이끄는 김철진 대령입니다. 게이트라는 걸 없앨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게 사실입니까?”
수혁은 그에게 게이트 내부의 지형과 보스몹을 잡으면 더는 몬스터가 나오지 않는다는 정보, 그리고 김일호를 비롯한 자들의 죽음을 알려주었다.
그의 얘기를 들은 김철진 대령의 얼굴엔 그늘이 더욱 드리워졌다.
“하아... 1부대장을 비롯한 사람들이 실력도 제일 좋고 열정적이신 분들이었는데... 정말 아쉽습니다. 그분들 모두 국가유공자로 지정될 겁니다. 그거 아십니까? 부산에만 생겨난 게이트가 100여개가 넘습니다. 그 곳에서 쏟아져 나오는 몬스터들을 부지런히 잡고 있죠. 게이트까지 없어진다면 빠른 시일 내에 안정이 찾아올 겁니다. 저희와 같이 하시겠습니까? 저희 정부는 실력 있는 각성자분들을 적극 대우해드리고 있습니다. 위기에 빠진 시민들을 도와야지요.”
“거절한다면요?”
“허어... 거절이라뇨? 정부 밑에서 일하면 월급에 각종 세금혜택까지 최대한 많은 혜택을 드릴 겁니다. 게다가 점점 시민들 사이에서 각성자들이 늘어나는 추세라 이런 좋은 기회가 점차 줄어들 겁니다. 추후에 경찰이나 군인으로 특별채용 될 기회도 제공될 텐데... 이런 기회는 미리 선점하는 것이 좋은 거라 제가 특별히 얘기 드리는 겁니다. 나중에는 하고 싶어도 못 합니다.”
김철진 대령이 침을 튀기며 각종 감언이설로 수혁을 구슬리기 시작했다.
그가 왜 이러는 건지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각성자들의 강한 육체는 훗날 국력으로 이어지니까, 거기에 더해 이런 위험한 존재들을 사전에 미리 정부의 통제 안에 집어넣으려는 수작이었다.
초반에야 각성자들 레벨이 낮으니 먹히겠지만 나중엔 같은 고렙 각성자가 아니라면 통제할 수도 없다.
[None]
그러나 심미안을 통해 김철진 대령을 보니 그는 비각성자였다.
대화를 할수록 전쟁터에서 앞서지 않는, 대의보다 실적만 노리는 정치군인의 색깔이 강했다.
지금이야 직책을 내세울 수는 있겠지만 나중에는 씨알도 안 먹힐 것이다.
이제부터는 앞서지 않는 사람은 리더가 될 수 없으니.
수혁의 생각과는 달리 홍영기는 적극적으로 하고 싶다는 열기를 그에게 쏘아댔다.
게이트를 없애 사람들을 돕는 대의가 홍영기의 심성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하긴, 그러니 훗날 홍영기가 대한민국을 구한 7인의 영웅에 들어가지.
잠자코 얘기를 듣던 수혁이 대답했다.
“하겠습니다. 부산에서 한정으로 단, 부산에 생긴 게이트를 저 혼자 없애는 조건으로. 어차피 다른 사람들은 게이트를 공략하기 힘드니 전부 제가 깨겠습니다.”
“혼자서요?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흐음... 일단 도시를 빨리 안정화하는 게 중요하니까요. 그 조건을 가지고 상부와 한 번 얘기해 보겠습니다.”
김철진 대령은 반신반의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그의 실력이 의심되지만 저렇게나 자신만만한 태도에 한 번 속아주기로 마음먹었다.
김철진 대령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홍영기가 감격에 찬 얼굴로 수혁을 바라보았다.
“역시! 사장님의 실력이면 도시를 구하기 충분하죠. 저 더러운 몬스터들을 모조리 때려잡고! 제가 앞장서서 싸울게요!”
“무슨 소리야? 나는 부산에 내 건물이 있어서 몬스터들을 처리하는 것뿐이야. 겸사겸사 게이트 독점권도 얻고.”
“네?!으... 역시 악덕사장...”
홍영기와 수혁이 투닥거리는 사이 김철진 대령이 난감한 표정으로 들어왔다.
“상부와 얘기해보았지만 회의적인 말들이 많더군요. 믿기 힘들다고... 실례지만 레벨이나 능력치를 자세히 얘기해주시면 제가 좀 더 설득해 보겠습니다.”
“능력치를 알려주긴 그렇고 레벨은 1입니다.”
“...네? 아니... 뭐라구요? 지금 저랑 장난합니까?! 지금 그 레벨로 저 위험한 게이트를 깼다는 말입니까?”
마치 자신이 놀림 받았다는 생각에 김철진 대령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 다른 부대장들만 해도 레벨이 3, 4인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고작 레벨 1가지고... 미안하지만 제의는 취소합니다. 정 원하면 부대원들로 받아줄 수는 있으니 일단 나가세요.”
“좋습니다. 혹시 생각 바뀌면 전화 주시길.”
수혁이 자신의 번호를 남긴 채 순순히 자리를 떴다.
아직도 몸을 부들부들 떠는 김철진 대령이 곧바로 모든 부대장들을 불러 모았다.
부대장들 모두 영문을 모른 채 사무실로 들어왔다.
“고작 레벨 1도 저 게이트를 깬다는데 우리가 못 깰 이유가 없지. 다들 저 게이트 내부로 진입할 준비하세요.”
“사장님이 그렇게 순순히 물러날 줄 몰랐어요. 레벨만 듣고 판단하다니 실력도 모르면서... 참 나. 사람 급하다고 할 땐 언제고...”
홍영기가 김철진 대령의 태도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게이트에 대해 우습게 보고 있으니 며칠 기다려 보자. 우선은 가볼 곳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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