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과거청산
복싱장 밖으로 나온 수혁은 자신의 의문을 해결하고자 다시 김밥천당을 방문했다.
눈앞에 놓인 라면을 다시 들이키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흐음... 몸에 문제는 없는 것 같은데...”
과거 흡혈귀로 살 때에는 피가 아닌 다른 음식은 역겨워서 먹을 수 없었다.
사람이나 몬스터의 피는 각자 다양한 맛을 가졌었다.
그것은 결코 인공적으로 따라할 수 없는 독특한 풍미였다.
하지만 지금은 과거로 돌아와 사람의 몸을 하고 있는데 어째서 상만의 피를 핥았을 때 예전과 같이 피 맛을 느낄 수 있었을까.
혼자만의 생각에 빠진 수혁이 계산하려 현금을 내밀자 종업원이 흐뭇하게 쳐다보았다.
“우리 집 라면 맛있지? 자주와~ 총각.”
“네. 잘 먹었습니다. 맛있네요.”
“그래. 좀 팍팍 먹고 살 좀 찌워요.”
방긋 웃는 종업원을 뒤로한 수혁은 곧장 자신의 원룸으로 되돌아갔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텅 빈 공간에 앉아 내면을 관조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느껴진다. 찐득한 피가 감싸진 그의 심장박동 소리가.
그리고 그 특유의 리듬은 전생의 것과 같았다.
게다가 심장에서 미약하면서 촛불과 같은 마력도 느껴졌다.
하지만 어째서 권능은 남아있고 부작용은 전부 사라졌는가는 여전히 알기 힘들었다.
아니, 꼭 알아야하나? 나쁠 게 전혀 없잖아.
생각을 마친 그는 생각해두었던 행동을 하러 가기로 했다.
그가 앞으로 짜 둔 계획에는 약간의 돈이 좀 필요하니까.
지하철을 타고 강남역에 도착했다.
역사 밖으로 나오니 어두운 밤하늘에 밝게 뜬 달이 보였다.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오자 미약했던 마력이 더 늘어나며 육체에서 강인한 힘이 느껴졌다.
흡혈귀도 아닌데 흡혈귀의 능력이라니.
이제 그는 음식도 먹고 피도 마실 수 있는 잡종인간이 되었다.
“아주 마음에 드는 걸?”
흐뭇해진 수혁의 미소도 잠시 미래에 관해 생각해보자 표정이 진중해졌다.
웃다가 찡그렸다를 반복했다.
다른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았다면 수없이 바뀌는 표정에 미친사람이라 했을 것이었다.
미래를 아는 수혁은 지구의 멸망을 막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 했다.
특히나 막판에 진화인자가 부족하다는 얘기를 들은 걸로 보아 그와 더불어 탑을 깰 동료들이 마지막까지 살아있어야 할 듯 보였다.
죽은 최지헌의 손을 올렸을 때 멈춰있던 %가 올렸으니까.
그에게 선택지는 몇 없었다.
하나는 그와 같이 탑을 정복할 동료들을 찾고 키워내서 탑을 정복한다.
다른 하나는 자신이 탑을 혼자 깰 수 있을 만큼 강해져서 겉절이(?) 동료들을 버스에 태운다.
그러나 그는 지금껏 믿음직한 동료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같이 탑에 올랐던 동료들이 지구에서 최강자라 손꼽혔으나 사실 그가 보기에는 아쉬운 점이 많았다.
“걔들을 내가 일일이 데리고 다니면서 강해지게 만들 수는 없지. 알아서 살아라. 난 내 길을 가련다.”
수혁은 후자의 방법을 선택하기로 마음먹었다.
미래에 만날 연약한(?) 탑의 동료들을 살리기 위해 본인이 더욱 강해지기로.
그 첫 단추는 이곳 강남역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마침 광수패거리는 볼일도 있으니.”
밤이 찾아와도 불이 꺼질 줄 모르는 빌딩숲 사이의 한 건물 앞에 수혁이 도착했다.
김상만이 알려준 주소로 찾아온 건물 엘리베이터에 적힌 층수별 입주회사를 보았다.
“3층, 4층, 5층, 6층. 한마음파이낸싱투자에셋(주). 이름이 쓸데없이 기네.”
주식회사 한마음.
전생에서도 알고 있던 회사였다.
게이트가 열리고 각성자들이 나오기 시작할 때 회사의 사장인 박광수 역시 고등급 헌터로 각성해 명성을 높였다.
문제는 각성자들의 중요성이 높아지자 함부로 정부에서 손을 대지 못했고, 온갖 패악질을 벌이는 몇몇 각성자들이 빌런으로 변했다.
박광수 역시 손꼽히는 빌런 중 한명이었다.
빌런들 대부분은 훗날 검성이라 불리는 최지헌에게 대부분 죽긴 하지만.
박광수는 자신의 세력을 높이고자 악명 높은 빌런이었던 수혁에게 찾아와 손을 내밀었다.
‘그리고 나에게 상만이형 얘기를 꺼내고 죽었지만... 같은 사람을 두 번 죽이겠군.’
수혁은 곧장 엘리베이터에 탑승해 6층을 눌렀다.
문이 닫힌 엘리베이터는 곧이어 천천히 위로 올라갔다.
빠-악.
“아아-악!!!”
“쓰읍. 최사장님. 엉덩이가 땅이랑 키스하겠네. 빨리 올리소.”
사무실 안에서 셔츠를 입고 야구방망이를 든 사내 앞에 팬티바람으로 엎드려뻗친 남성이 있었다.
김상만과 같은 체육관에서 운동했던 박광수는 헤비급 선수로 운동을 그만둔 뒤 실컷 먹고 찌운 덩치가 상당했다.
팬티바람으로 엎드린 남성이 무릎을 잽싸게 꿇고는 손을 싹싹 빌었다.
“박사장님... 제발... 제발 한번만 봐줘... 내가 최대한 빨리 돈을 마련해볼게... 우리가 본 세월이 얼만데... 응? 같이 밥도 먹고 술도 한 잔하던 사이잖아... 제발...”
“어허... 가까운 사이일수록 돈 관계는 철저히 해야지. 그동안 내한테 받아먹은 게 얼만데 지금 이카면 내보고 우짜라고.”
“박사장... 내가 이번에 곧 내는 애들이 데뷔만 하면...”
“허어... 데뷔, 데뷔, 그놈의 데뷔, 대체 데뷔는 언제 하는긴데? 엉? 엔터테인먼트유지하기 힘들믄 그냥 나한테 넘기소. 내가 빚하고 퉁쳐줄테니.”
“그 애들이 어떤 애들인데!”
“...얘들아. 울 최사장님이 아직 대화할 준비가 안됐다. 단디 좀 잡아봐라.”
“예!”
박광수의 뒤에 있던 덩치들이 최사장을 강제로 땅에 눕혔다.
“자... 잠깐!”
“이빨 꽉 무소. 깨집니더.”
퍼억.
“아-악.”
한참 최사장을 때리고 있던 박광수의 뒤로 팔에 문신이 가득한 남성이 다가왔다.
“사장님. 그... 손님이 오셨는데요.”
“손님?”
“김상만 동생 이수혁이라고하면 안다길래...”
“상만이 동생 수혁이? 어어. 알지알지. 데꼬온나.”
“네.”
잠시 후 사무실에 들어온 수혁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들어왔다.
그의 눈에 피투성이로 쓰러져있는 최사장이 보이자 표정이 굳었다.
박광수는 아랑곳하지 않고 수혁을 반갑게 맞이했다.
박광수가 손짓하는 소파에 수혁이 앉았다.
“그래. 상만이 친한 동생이라꼬? 억~수로 반갑네. 저기 쓰러져있는 저 놈은 신경 쓸 거 없다. 내한테 계속 거짓말을 해가 벌 좀 받는기다. 울 동생은 우짠 일이고? 혹시 돈 필요하나? 행님이 조매 챙겨주까. 마! 내 지갑 좀 들고 온나.”
“네. 사장님.”
지갑을 가지러 간 부하가 서랍을 뒤적거리는 사이 수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곧바로 사무실 입구로 다가간 그가 문고리를 걸어 잠갔다.
“자! 주-목! 내가 여기서 오늘 죽으면 안 되는 이유 있는 사람 손!”
수혁의 말에 모두들 어이없는지 헛웃음을 지었다.
박광수는 담배를 꼬나물려다 밑으로 흘렸다.
“어이쿠... 점마 뭐꼬? 수혁아... 씁. 형들 있는데서 그러는 거 아이다. 복싱 좀 했다고 까불지 말고! 일로 온나. 머하노! 쟤 좀 여기 앉히 봐라.”
“네. 사장님.”
부하들이 수혁에게 어슬렁 다가갔다.
그들은 수혁의 곧게 뻗은 손의 손톱이 날카롭게 자라나는 걸 눈치 채지 못했다.
“좋은 말로 할 때 일로... 윽.”
수혁에게 손을 뻗은 부하의 가슴팍에 피와 함께 손 하나가 뚫고 나왔다.
수혁이 손을 다시 뽑자 아직 펄떡이는 피범벅인 심장이 들려있었다.
패거리들 모두가 그 모습을 목격하고 얼어붙자 박광수가 고함을 질렀다.
“싯팔. 뭐해! 전부 연장 들어!”
목소리를 들은 부하들이 품속에서 급히 나이프를 꺼냈다.
나이프가 없던 자는 벽에 기대어져 있던 방망이를 주워들었다.
“저 새끼 죽여!”
“와아아아아!!!”
휙. 뿌직.
땅을 박찬 수혁이 날아올라 다가오는 부하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가슴뼈가 움푹 들어가는 동시에 발을 회수한 후 날아오는 방망이를 팔로 막았다.
빠-악.
수혁의 팔과 부딪친 방망이가 오히려 부러지며 날아갔다.
부러진 방망이를 보고 놀란 부하의 목을 수혁의 손끝이 관통했다.
“죽어-!”몸을 기울이며 뒤에서 찌르는 나이프를 흘린 수혁이 연달아 손을 찔렀다.
푹. 푹. 푹.
검처럼 날카로운 손끝은 손쉽게 사람들의 몸을 꿰뚫었다.
수혁에게 덤벼든 패거리들 대부분이 피를 쏟으며 쓰러졌다.
“괴...괴물이잖아?!”
“이런 미친...”
박광수 옆에 남은 세 명은 더는 덤벼들지 못하고 주저하며 박광수의 눈치를 보았다.
자신의 부하들이 당하는 사이 책상 앞으로 간 박광수가 서랍에서 권총을 꺼냈다.
총을 겨누자 남은 부하들이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박광수의 말에 표정이 썩어 들어갔다.
“구경만 할끼가! 어서 저 놈을 죽여!”
“으아아아아!”
억지로 덤벼든 마지막 부하들 모두 수혁의 손에 꿰뚫렸다.
그 틈을 타 박광수가 방아쇠를 당겼다.
탕! 탕! 탕! 탕!
그러나 총알은 인간방패를 뚫지 못했다.
들고 있던 시체로 총을 막아낸 수혁이 박광수에게 그대로 시체를 집어던졌다.
“으헉.”
날아오는 시체를 피해 옆으로 뒹군 박광수가 급히 총을 다시 겨눴지만 수혁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두리번거리며 좌우를 살피던 그의 뒤에서 소름끼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전히 비겁한 짓은 잘하는구나.”
“너... 너 뭐야-!!!”
“저번에는 고통스럽게 죽였지만 이번에는 깔끔하게 끝내줄게. 아직은 죄를 짓기 전이니.”
“그게 무슨... 커헉.”
자신의 가슴을 뚫고 들어온 수혁의 손에 억울하다는 듯 입을 뻐끔거리다 박광수가 그대로 눈을 감았다.
박광수의 각성자 부하들 때문에 치고 빠지기를 반복했던 전생과 달리 너무나 허무한 복수였다.
난장판이 된 사무실을 뒤로한 채 책상 서랍을 뒤적거리던 수혁이 입을 열었다.
“구경 잘 했어? 이제 눈 떠도 돼.”
“...”
“말 안하면 죽인다.”
“죄... 죄송합니다. 살려주세요.”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최사장이 무릎을 빠르게 꿇더니 벌벌 떨며 손을 마구 빌었다.
수혁은 서랍 속에서 쓸 만한 물건을 찾지 못하자 뒤편에 있던 금고문을 뜯었다.
금고 속에는 서류 몇 가지와 현금다발, 골드바 등이 들어있었다.
서류를 꺼내 한참을 읽던 수혁이 고개를 돌려 최사장을 바라보았다.
“네가 살아야 할 이유를 얘기해봐.”
“홀어머니를 모시고 있고, 토끼 같은 마누라와 자식들이 집에서 저를...”
“참고로 거짓말하면 넌 살아도 산 게 아니다.”
독사처럼 날카로운 눈빛이 쏟아지자 최사장이 급히 입을 닫았다.
눈치를 보던 최사장이 침을 꿀꺽 삼켰다.
“제 모든 재산을 드리겠습니다. 경찰에 신고도 안하겠습니다. 무조건 입을 꾹 다물고 제가 무덤까지 가져가겠습니다.”
“너 돈 없어서 여기서 맞고 있던 거 아니야?”
“......그거하고 다른 게 제가 엔터테인먼트사업을 하는데, 이번에 이를 갈아서 준비하고 있는 걸그룹이 있는데 진짜로 데뷔만 하면 빵 터질 겁니다. 이 사업의 지분을 드릴 테니...”
“걸그룹?”
얼마 뒤에 세상이 확 뒤바뀔 텐데 걸그룹이라니.
시큰둥해진 수혁의 태도에 조급한 최사장이 말을 계속 이었다.
“비쥬스타즈라고 프랑스어로 보석을 뜻하는 비쥬와 추후 우리나라를 이끌 스타들이라는 합성어를 통해서 만든 걸그룹인데 얘들이 정말 미모면 미모, 댄스에 가창력까지 정말로 못하는 게 없는 대박 날 그룹이라 제가 정말 사활을 걸고...”
“잠깐. 비쥬스타즈? 혹시 5인조에 박이현이라는 애도 있나?”
“네? 그걸 어떻게... 혹시 저희 연습생 팬클럽 가입하셨는지... 원하시면 제가 직접 만남도 주선하겠습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최사장이 수혁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수혁은 예전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비쥬스타즈는 역사에 길이 남던 유명한 걸그룹이었다.
세상에 관심 없던 수혁마저 알정도로.
그 이유는 비쥬스타즈가 데뷔하는 첫 무대에서 바로 대한민국 첫 게이트가 열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훗날 탑에 같이 올랐던 박이현이 각성하며 몬스터를 때려잡았고, 폭력적인 걸그룹 이미지로 대차게 망했다.
‘그 뒤로 걸그룹 때려치우고 실력과 미모를 겸비한 헌터로 유명해졌지. 재밌는 인연이군.’
금고 속의 돈과 골드바를 수혁이 발밑에 생긴 그림자로 집어넣자 쭉쭉 들어갔다.
혹시 어린 시절의 박이현의 피를 흡수한다면 그녀의 특성들을 내가 가질 수 있을까?
아니지. 이제는 그런 빌런짓은 해서는 안 되지.
자신의 뺨을 세게 때리자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최사장에게 수혁이 입을 뗐다.
“걸그룹 애들을 한 번 보고 싶은데. 다른애들 말고 딱 한 명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