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재 빌런의 무한 흡수 권능-2화 (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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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싱하던 시절

기나긴 잠 속에서 누군가 수혁을 끌어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꿈쩍하지 않던 그의 두 눈이 번뜩 떠지자마자 12온스짜리 복싱글러브가 얼굴을 때렸다.

퍽. 퍼버버벅.

한 대 얻어맞은 뒤 쏟아지는 주먹 세례는 영문을 모르던 수혁이 본능적으로 양손을 올려 막아냈다.

“움직여! 빠져나와!”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상대방의 스트레이트를 고개를 숙여 더킹으로 피한 수혁이 링의 구석에서 빠져나왔다.

‘이제 무슨 상황이지?’

아직 영문을 몰랐지만 상대방이 자신을 공격하도록 놔둘 수는 없었다.

쏟아지는 훅과 어퍼컷을 피하고 반격을 할 무렵 종이 울렸다.

“야 임마! 수혁아! 정신 안 차릴래? 너 왜 갑자기 어리버리 타고 그래?”

링의 구석에서 자신의 얼굴에 바세린을 바르며 이해가 안가는 표정으로 보는 남자의 낯이 익었다.

“상만이 형?”

“너 이 새끼. 아까 훅 맞았을 때 혹시 기억 잃었냐? 아씨... 너 이거 꼭 이겨야 돼. 이것만 이기면 동아시아 챔피언전이라고! 까먹지 마. 알았어?”

자신의 등짝을 찰지게 때려준 김상만은 링 밖으로 다시 나갔다.

‘챔피언전... 그 직전 경기라면 10년도 더 훌쩍 지난 일인데. 내가 과거로 왔다고?’

자신의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지만 강대했던 마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꿈인지 생시인지 알기 위해 수혁은 종이 울리자 가드를 내렸다.

“얌마! 수혁아!!! 가드 안 올리냐!!!”

가드를 내린 모습에 상대방의 표정이 경직되었다.

콧김을 거세게 내뿜은 후 수혁을 향해 있는 힘껏 훅을 날렸다.

그것은 자신을 무시한 상대를 용납할 수 없다는 의지였다.

퍽. 퍽. 퍽.

사정없이 두들겨 맞는 수혁의 모습에 상만은 양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쥐어 잡았다.

“저 새끼 대체 왜 저래?!”

몇 번 두들겨 맞은 수혁은 더는 못 참겠는지 상대방 복서를 클린치로 껴안았다.

그것도 모자라 어깨를 들썩거리며 웃음을 참기 위해 끅끅거렸다.

이 통증은 꿈이라면 느낄 수 없는 분명한 현실이었다.

이름조차 기억나지 않던 상대방 복서가 양 팔을 들어 올리며 심판을 어이없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그 모습에 심판이 둘을 떨어트리더니 수혁을 향해 경고를 날렸다.

“경고! 이봐. 지금 뭐 하는 거야? 관중들이 보잖아. 매너를 좀 지켜.”

“...”

“파이트!”

심판의 신호와 함께 경기가 다시 재개되었다.

상대방 복서 역시 챔피언의 자리를 위해 저런 덜떨어진 수혁에게 질 수 없었다.

아직 정신 못 차리는 그를 넉다운시키고 챔피언 벨트에 한 발 가까워질 거라 믿었다.

그러나 수혁의 움직임이 180도 바뀌어버렸다.

‘뭐야?! 이 움직임은.’

자신의 주먹 움직임을 미리 예상이라도 한 듯 끊임없이 카운터 펀치가 날아왔다.

스트레이트를 날리면 고개 숙이며 어퍼컷이, 훅을 날리면 더 빠른 스트레이트가.

마치 맨 처음 복싱을 배울 때 자신의 스승에게 실컷 얻어맞던 시절이 떠올랐다.

그만큼 수혁의 움직임을 도저히 쫓을 수 없었다.

수혁의 인생은 온통 피로 얼룩진 삶이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언제나 종이 한 장 차이로 그를 옭아매었다.

그런 그가 약해진 몸에 적응하고 현실을 받아들인 이후 진지한 자세로 임하자 그간 쌓여있던 전투감각이 깨어났다.

무기가 없으면 맨손으로, 맨손이 묶이면 이빨로도 적을 죽일 수 있어야했던 그에게 규칙이 있는 현재 시합은 몸풀이에 가까웠다.

당황한 상대방이 실컷 얻어맞다 결국 가드가 열리며 빈틈이 크게 보였다.

그 틈을 수혁의 무투(武鬪)감각이 놓치지 않았다.

굽은 빨대가 펴지듯 뻗은 발끝이 그대로 가드사이를 파고들어 상대방의 눈 바로 앞에서 멈춰버렸다.

화들짝 놀란 복서가 뒤로 물러나며 심판을 향해 반칙을 어필했다.

수혁과 복서사이로 파고든 심판이 곧장 몸을 돌려 손가락질하며 수혁을 바라보았다.

“청팀! 반칙패!”

“...이런 미친... 수혁아...”

“푸하하핫.”

반칙패를 받았음에도 수혁은 화통한 웃음만 지었다.

웅성거리는 관객들과 벙어리가 된 김상만이 허무한 얼굴로 잡고 있던 하얀 수건을 축 늘어트렸다.

복싱은 고독한 스포츠다.

새벽부터 일어나 달리며 몸을 달구고, 체급을 맞추기 위해 땀복을 입고 감량을 하는 그 모든 것은 오롯이 본인이 감당해야했다.

하루 종일 글러브를 끼고 샌드백을 때린다.

그렇기에 가족도, 친구도 없던 수혁에게 복싱은 친구이자, 가족이며 인생이었다.

수혁이라고 처음부터 모든 사람들을 배척하던 것은 아니었다.

복싱장의 사람들과 미트를 치며 농담도 치고, 웃음도 가졌었다.

그의 복싱인생 파트너이자 모든 것을 믿은 김상만의 배신만 아니었다면.

챔피언의 꿈을 향한 수혁을 위해 김상만과 불철주야 노력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수혁과 달리 김상만은 누구보다 어여쁜 와이프와 몸이 약한 딸이 있었다.

결국 챔피언행 열차를 움직이던 수혁의 선로를 끊어버린 것은 가난에 굴복한 김상만이었다.

김상만의 친구였던 박광수가 그런 그를 찾아왔다.

거액의 돈을 건내며 승부조작에 가담시켰고 김상만은 받아들였다.

결국 챔피언전 중반부에 알 수 없는 약을 탄 물을 먹은 수혁은 패배했고, 불법도박으로 큰돈을 번 박광수는 적당한 수수료를 김상만에게 쥐어주었다.

그 뒤는 뻔한 이야기였다.

재기에 실패한 복서는 나락으로 가며 마약에 빠졌고 크게 허우적대다 세상에 게이트가 열리며 큰 혼란 속 어찌저찌 살았다는 그런 이야기.

마약도 빨고 사람과 몬스터 피도 빨던 그런 시절.

그러고 보니 게이트가 열리며 쏟아져 나온 몬스터에 김상만이 죽었다는 옛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다.

나중에 술에 취한 박광수에게 진실을 듣고 김상만을 원망하려했지만 대상이 이미 없었다.

대신 박광수는 그에게 팔다리가 뽑히며 고통스럽게 죽었지만.

글러브를 던지곤 링에서 내려온 수혁에게 김상만이 침을 튀기며 다가왔다.

“너... 이... 이... 이게 무슨 시합인데. 이것만 이기면 챔피언전인......”

“반가워. 상만이형.”

퍽.

그리고 수혁에게 한 대 맞았다.

사람 하나 겨우 누울 공간, 누런 벽지 곳곳에 곰팡이가 피어있었다.

예전 기억을 떠올리며 반지하 원룸에 도착했다.

과거로 돌아온 수혁에게는 너무 오랜만이라 모든 공간이 낯설었다.

설거지가 가득 쌓인 싱크대는 날파리떼가 윙윙거렸다.

운동밖에 모르던 수혁이었다.

“챔피언벨트만 따면 다 해결될 줄 알았지. 세상이 망할 거라는 사실도 모르고. 씁.”

어쩌다 내가 과거로 돌아오게 된 걸까.

마지막 죽기 전에 느꼈던 강력한 에너지 때문에? 아니면 용왕의 마력을 흡수해서?

도저히 생각해보았지만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집안을 뒤적거리다 낡은 통장하나를 집어 들었다.

[xx은행 잔액 : 84,250원]

실실 헛웃음이 새어나오며 슬며시 통장을 내려놓았다.

“맞다. 나 돈 없었지.”

꼬르르르륵.

“...먹고 생각해보지 뭐.”

[김밥천당]

남녀노소 모두가 아는 국민식당에 들어가 김밥과 라면을 시켰다.

매콤한 냄새를 풍기는 뻘건 라면 옆에 고소한 참기름냄새가 진동하는 김밥이 놓여졌다.

그러나 종업원이 음식을 갖다 준지 한참이 흘러도 수혁의 숟가락은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참다못한 푸근한 인상의 종업원이 입을 열었다.

“총각. 왜 음식 놔두고 제사만 지내? 우리 라면 맛있어~ 먹어봐.”

“...음식이 너무 오랜만이라 그렇네요.”

“어디 아팠었나봐? 몸이 삐쩍 말랐구만. 먹고 부족하면 내가 김밥 한 줄 서비스로 더 썰어 줄 테니 부족하면 얘기해~”

혀를 차며 불쌍하게 쳐다보는 종업원을 향해 수혁이 가벼운 미소로 답했다.

뜨끈한 라면국물을 입에 넣자 절로 탄성이 나왔다.

매콤하고 기름진 국물이 입안을 감싸며 몽글몽글한 계란의 부드러운 풍미가 놀란 혀를 달래주었다.

거기에 기름에 볶아진 각종 야채가 밥과 어우러져 고소한 풍미를 내며 오독오독 씹히는 김밥까지.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맛이었다.

피를 빨며 살던 저주받은 삶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빌런이 아닌 양지의 헌터로 살 수 있는 삶.

거기에 미래까지 알고 있다면?

머릿속에 여러 가지 계획들이 마구 들어서면서도 수혁은 라면을 먹는 걸 멈추지 않았다.

‘우선은 돈부터.’

그가 엄청난 손놀림으로 세상에서 제일 맛있게 라면과 김밥을 먹자 종업원이 흐뭇하게 쳐다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끓였지만 정말 기깔나게 끓였다고 생각했다.

한참을 식사에 열중하던 수혁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거미줄처럼 온통 금이 가있는 액정에 떠오른 것은 그도 잘 아는 이름이었다.

상만이형.

- 여보세요.

- ......하아... 수혁아... 형이 뭐 잘못한 거 있어? 네가 갑자기 왜 그러는지 형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일단 체육관으로 나와. 만나서 얘기하자.

뚝. 뚜.뚜.뚜.

자신의 말만 하고 끊은 김상만이었다.

느닷없이 경기도 망친 수혁이 자신까지 때렸으니 화가 잔뜩 날 만했다.

한때는 수혁의 분노 역시 크고도 넘쳤던 때가 있었다.

다만 지금은 시간이 지나며 많이 희석되었지만.

김상만이 현재 어떤 생각을 할지, 수혁이 그를 어떻게 대할지 역시 결국엔 둘이 해결해야할 문제였다.

말이 안 되면 몸으로라도.

낡고 금이 간 건물 2층에 수혁이 다니던 복싱장이 위치해있었다.

왕년에는 챔피언까지 먹었다는 관장이 과음으로 죽은 뒤 실질적으로 김상만이 운영하는 곳이었다.

헐만큼 헐은 샌드백과 낡은 링, 곳곳에 먼지가 쌓인 추억의 장소를 수혁이 살펴보고 있자 그 뒤에 김상만이 나타났다.

복싱미트를 양 손에 든 김상만이 미트를 마주치며 팡소리를 냈다.

“너. 왜 갑자기 안하던 짓을 하고 그래? 엉?! 그 경기만 잡으면 챔피언전이였어! 네가 그토록 원했던!”

샌드백을 만지작거리던 수혁이 무심한 눈으로 김상만을 바라보았다.

“...형 광수하고 연락해?”

“그... 그게 무슨 소리야? 지금 그 얘기가 왜 나와?! 그리고 광수라니? 너보다 형인거 몰라?”

“이미 이때부터 얘기하고 있던 거였구나. 광수한테 얼마 받았어?”

“이 새끼가 진짜?!”

복싱미트를 던진 김상만이 자세를 잡고 달려들었다.

슬쩍 고개를 흔들며 미트를 피한 수혁이 김상만이 다가오길 기다렸다.

김상만이 비록 코치생활을 하지만 그 역시 한때는 프로선수였다.

성급하게 주먹을 날렸어도 기본 몸에 익은 자세는 잊지 않았다.

쉼 없이 훅과 스트레이트를 적절히 섞어가며 수혁을 맞추려했지만 종이 한 장 차이로 아슬아슬하게 스쳐지나갔다.

‘실력 차이가 이 정도였나?’

슬그머니 후회를 한 김상만은 뒤로 물러난 뒤 주먹을 내렸다.

“됐다... 내가 잠시 흥분했다. 말로 해보자. 지금 이렇게...”

피식.

코웃음을 친 수혁이 그의 말을 끊었다.

“그게 뭔 개소리야. 일단 좀 맞고 시작하자.”

“자... 잠깐....”

아까와는 반대로 김상만은 수혁의 주먹을 한 대도 피하지 못했다.

고개를 숙이면 어퍼컷이, 그가 피하면 어떻게든 쫓아와 주먹을 맞췄다.

견디다 못한 김상만이 태클을 걸어 넘어트리려 했지만 다리를 뻗으며 무게중심을 바꾼 수혁이 오히려 그를 넘어트렸다.

우당탕탕.

“허억. 허억. 이건 복싱이 아니잖아. 네가 이런 기술들을 어떻게...”

“조용.”

퍽. 퍽. 퍽.

피투성이가 된 김상만이 곧바로 쓰러졌다.

쓰러진 김상만을 바라보던 수혁의 시선이 피가 묻은 자신의 손으로 향했다.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린 뒤 슬쩍 혀로 핥았다.

달달한 과일 농축액 같은 맛 사이로 새콤함이 부족했다.

어째서 예전처럼 피가 맛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나는 분명 흡혈귀가 아닐 텐데?

복싱장 중간에 주저앉은 그는 김상만이 정신을 되찾기를 기다렸다.

“끄으으...”

겨우 정신을 차린 김상만의 눈에 자신의 손을 빨고 있는 수혁이 보였다.

“광수한테 얼마 받았어?”

“끄응... 얼마 받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수혁이 다시 일어나 손을 들자 화들짝 놀란 김상만이 손을 빠르게 저었다.

특히 피가 묻은 자신의 손을 핥고 있는 수혁의 모습이 너무나 소름끼쳤다.

“40!!! 40만원!!! 얼마 전에 받았어. 아니. 틈틈이 조금씩... 요새 딸도 병원가고 생활이 힘들다고 하니까 그냥 나한테 건네줬다고! 진짜야. 그것 말고는 아무런 얘기도 없었어.”

“그래?”

아직까지는 광수가 적은 돈으로 그의 환심을 사는 중인 걸로 보였다.

그렇게 조금씩 호의가 쌓이며 끝내 그를 옭아맬 줄도 모르고.

과거의 자신이었다면 당장 김상만을 죽여도 부족했을 것이다.

그러나 돌아온 지금 과거와 같은 삶을 살 수는 없었다.

혼자서는 탑을 깰 수 없었듯이 그에게도 변화가 필요했다.

눈물을 흘리는 김상만의 품속에서 빠져나온 핸드폰 배경화면, 그의 가족사진이 켜졌다.

“하아... 내 말이 믿기지 않겠지만 얼마 뒤 세상이 바뀔 거야. 형수도 그렇고 민지도 어리니 몸 간수 잘해. 그 동안의 인연이라 마지막으로 얘기해주는 거니까. 광수 패거리 어디 있는지 주소도 부르고 더 이상은 광수랑 연락할 생각하지 마.”

광수패거리가 있는 건물 주소를 받은 수혁이 복싱장 문을 나서기 직전 발을 멈춰 섰다.

“아참! 형 피맛을 보니 비타민이 부족하더라. 과일 좀 챙겨먹어. 난 진짜 간다.”

수혁이 사라진 뒤로도 벙찐 얼굴의 상만은 일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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