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라 불린 내 친구-160화 (160/161)

160화

다음 날 하오문 지부.

연사구는 날 선 목소리를 감추지 않았다.

“확인이라 하셨습니까?”

갑자기 들이닥친 무림맹 오십여 명. 그 대표들이 자리하자마자 꺼낸 이야기엔 그럴 수밖에 없다.

유운각주 제갈정현은 담담히 말을 풀어 냈다.

“그러네. 사실관계 확인이지.”

연사구는 티 나게 입을 비틀었다.

“확인이라! 저 이래 봬도 하오문 당주입니다. 유운각이 군사부 산하 정보 감찰 기관인 걸 모를 거 같습니까? 그냥 확인이면 군사부에서 왔어야지요.”

“워낙 중대한 사안이라 우리가 왔을 뿐이네. 협조만 잘해 준다면 오늘이라도 돌아가지.”

연사구의 눈이 점점 깊은 색을 더해 갔다.

‘무슨 꿍꿍이지?’

공식 요청은 은야문 도천의 기록을 살피겠다는 것. 하지만 자료야 이미 정, 사 모두에게 보여 주기로 한 상황.

그럼에도 맹의 무력대인 호천대 서른과 유운각 요원 스무 명이 같이 왔다는 건.

‘뭔가 꼬투리를 잡겠다는 건데, 의도를 모르겠단 말이지.’

이러면 하나씩 풀어 가야 한다. 또 그 전에 반드시 천명할 게 있다. 가슴을 쭉 내밀고는 불꽃같은 정광을 보였다.

“협조라면 얼마든 합니다만, 도를 넘어가시면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전 귀 맹 사람이 아니라 하오문도니까요.”

“목에 너무 힘주지 않아도 되네. 자네가 남궁을 꺾은 소문은 하남에도 쫙 퍼졌지.”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 때.

“뭘 협조하면 됩니까?”

“기록부터 보여 주게나. 나머진 그다음에 요청하지.”

“보여 드리기로 했으니 그래야죠. 근데 다른 놈한테 잠시 맡겼습니다. 전 지킬 힘이 없어서요.”

은월청요검과 달리 도천의 기록을 찾은 건 자신이라 알렸기에 둘러댄 말.

“월운비영(月雲飛影)?”

“예.”

“그 친구는 어디 있나?”

“후원에 있으니까 바로 가지고 오겠습니다.”

“그 친구도 같이 봤으면 하네.”

“……왜요?”

“도백 건도 그렇고 묻고 싶은 게 많네.”

“직접 말씀하시죠. 제 말 듣는 놈이 아니라서.”

“……!”

잠시 후, 하오문 지부 후원.

연사구는 무윤에게 건네받은 기록을 내밀었다.

“이겁니다.”

“좀 살펴보겠네.”

“아시겠지만 오래된 겸백이라 조심히 다뤄 주시길.”

“응당 그래야지. 알겠네.”

유운각 요원들이 달려들어 살피길 한참, 전음으로 의견을 수렴한 제갈정현의 눈이 깊어졌다.

‘후! 정말 천 년 전 자료야.’

자신이 봐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세월의 흔적이 겸백에 묻어난다.

하지만 이미 예상했던 일. 이제 계획한 대로 일을 풀어 낼 때.

“자료는 진짜가 확실해 보이네. 하나 내용을 믿는 건 또 다른 얘기지.”

“그건 각자 판단할 문제죠. 저 또한 기록 그대로 알릴 뿐이고.”

제갈정현은 본론을 꺼내 들었다.

“그러지. 천 년 전 일을 어찌 알겠나. 한데 이 내용은 다른 자료들과 상이한 게 많네. 이런 게 공식적으로 알려지면 혼란이 작지 않을 걸세.”

“……무슨 뜻으로 하신 말씀이신지?”

“맹에선 관련 내용을 심층적으로 조사하고 있네. 그 결과가 나올 때까지 발표하지 말아 주게.”

연사구는 티 나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료가 상이한 건 이것만이 아닌데 왜 유독?”

“솔직히 말하지. 알겠지만 지금 혈교와 전쟁 중이고 천마교도 언제 뛰어들지 모르네. 한데 이 자료는 그 둘에 도움이 될 공산이 커. 해서 부탁하는 것이네.”

가만히 듣고 있던 무윤의 눈이 깊어졌다.

‘명분은 그럴싸한데, 속내가 뭐지?’

여휘의 존재는 거의 기정사실화됐고, 남은 건 여휘의 무공이 천마신공인지 아닌지, 또 아니라면 전해졌는지에 대한 여부.

변수가 많아 예측이 어렵지만, 단순화해 보면.

‘안 밝히면 천마교는 물론 중원도 혼란이 더 커지지. 밝히면 둘 다 적어지고.’

그렇다면 결론은.

‘혼란 상황이 더 이어지길 바란다는 건데. 분명 그 안에서 더 얻는 게 있으니 저러는 거고.’

다만 지금으로선 추측일 뿐 짐작 가는 게 없다.

어쨌든!

그 모든 상황과 변수, 위험을 다 고려하더라도 절대 물러설 수 없는 일.

‘여휘와 내게 씌워진 악마의 굴레를 벗기는 것보다 중요한 건 없다.’

한데 도천의 기록은 분위기를 반전시키고 결정타를 터트리기 위한 사전 포석일 뿐.

‘회고록을 밝혀야 천 년 전 논란이 종식된다.’

회고록의 핵심은 두 가지.

우선 현재 무가들이 진실이라 믿게 만들 내용들을 여기저기 넣어 두었다. 자신들이 가진 자료와 비교해 보면 자연히 알게 되게끔.

이건 진실을 알려 악마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

또 정, 사 대표 무공들을 과하게 칭찬하는 내용도 은연중에 포함시켰다.

무공의 차이는 극히 미미해서, 익힌 자의 자질에 따라 언제든 승부가 바뀔 수 있다고. 단지 여휘라는 인간이 너무나 뛰어나 고금제일인이 됐을 뿐이라고. 또 그게 사실이기도 하고.

‘그럼 굳이 여휘 무공을 탐낼 이유가 없지.’

조작 세력이 원하는 건 여휘의 무공을 이용해 강호의 혼란을 야기하는 것인데, 이러면 뭔 짓을 해도 파장이 적을 수밖에 없다.

도천의 기록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파장을 가져올 회고록.

‘반드시 세상에 뿌린다.’

한데 전쟁이 격화된 지금 시간 끌 상황이 아니다. 그러다 조작한 놈들이 여휘의 무공이랍시고 세상에 꺼내 혼란을 부추기는 날엔.

‘사고가 터지고 나면, 차후 진실을 알리는 건 몇 배 더 어려워진다.’

더 고민할 것도 없다.

‘무림맹과 척을 지더라도 어쩔 수 없어.’

결심한 이상 몰아칠 때. 어차피 회고록 또한 며칠 후 도백 유진과 함께 공식적으로 알릴 예정인데 조금 먼저 전할 뿐이다.

“도천 말고 다른 곳에도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응? 난 금시초문이네만.”

“더 자세한 기록인데 곧 세상에 알려질 겁니다.”

“……그걸 자네가 어찌 아는가?”

“제가 가지고 있고 곧 공개할 거니까요.”

제갈정현은 물론 호천대주 염수찬과 일행 모두의 눈이 커다래졌다. 다급한 이의 말문이 바로 열렸다.

“뭘 가지고 있다는 겐가?”

“과거 척고련의 군사였던 무륜을 아시겠죠?”

“당연히 아네만?”

“그자의 회고록입니다.”

순간 경악의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헉!”

“무륜! 그자의?”

“설마!”

“어찌!”

생각도, 상상도 못 했던 말. 여휘와 친구에다 같이 척고련을 이끈 쌍두마차 중 하나. 그런 자의 회고록이라니.

경악을 넘어선 놀람은 생각이란 자체를 막아 버렸다. 그저 멍한 눈만 한동안 허공을 좇을 뿐.

제갈정현은 가슴이 턱 하니 막혀 왔다. 생각하기도 싫은 가정이 뇌리에 휘몰아친다.

‘저 말이 사실이면?’

문득 가주이자 무림맹 군사인 숙부 제갈성진의 말이 떠올랐다.

-네 임무는 그 내용이 세상에 나오는 걸 늦추는 것이다. 거짓으로 몰아가건 명분으로 저들을 압박하건, 최소 서너 달은 어떻게든 막아라.

-이유를 여쭤도 될지?

-가문을 위한 중대사니라. 그리만 알거라.

-……!

맹의 유운각주인 자신에게 공적인 임무를 주면서 가문을 언급했다. 그것도 중대사라는 첨언까지. 그럼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반드시 해내라는 뜻이거늘.’

한데 무륜의 회고록이라니! 도천의 기록도 강호를 떠들썩하게 했지만.

‘사실이면 비교 자체가 안 돼.’

내용에 따라 지금까지 논란을 단번에 종식할 수도 있는 사안. 이러면 바로 할 게 있다.

‘우선 내용부터…….’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이 잘게 떨렸다.

“후! 워낙 황망한 얘기라 정신이 없구먼. 혹 내용을 볼 수 있겠나?”

“그러지요.”

어차피 공개할 자료, 먼저 보이고 반응을 보면 속내를 짐작할 수도 있다.

한 시진 후, 무윤이 건넨 수백 장의 회고록을 꼼꼼히 살피던 제갈정현은 속 깊은 한숨이 절로 터져 나왔다. 자신은 물론 유운각 요원들의 의견도 일치한 상태.

‘천 년 전 게 맞다. 게다가 그 어떤 자료보다 방대하고 자세해. 일기처럼 시간의 흐름 따라 기술한 내용 또한 어색한 곳이 없어.’

거기에 객관적 사실을 적시한 부분은 다른 자료에서 의문시됐던 것들을 해결하고도 남는다.

또 자신 스스로가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이유. 가문의 독문 신법인 천기미리보(天機迷離步)에 대한 내용이 그 안에 있다.

‘과거 초식 이름이 있어.’

가문에 있는 천 년 전 자료를 뒤지다 지금과 달라진 초식 몇 개가 있다는 건 자신도 이번에 처음 알았다. 한데 그 이름이 버젓이 써 있다는 건.

‘무륜이 쓴 게 맞아.’

이젠 확신으로 다가온다. 만약 이 자료가 세상에 나가면.

‘천 년 전 논란은 흐지부지된다.’

순간 머리가 지끈거리고 커진 눈은 불안하게 떨려 왔다.

‘이걸 어떻게 막지?’

거짓 자료로 몰아가는 건 이미 글렀다. 다른 전문가에게 보이면 누구나 천 년 전 것임을 증언할 텐데.

그때 연신 탄성을 자아내던 호천대주 염수찬은 궁금한 것을 물었다.

“허! 한데 이게 어찌 자네에게 있는 겐가?”

가까운 이에겐 신빙성을 더하기 위해 조사와 무륜이 친구라고 했지만, 여기선 말을 달리해야 한다. 트집거리를 줄 이유가 없으니.

“조사께선 당시 여휘와 겨룬 적이 있었는데, 그 후 척고련에 대해 궁금해하자 무륜이 사본을 넘겨줬다고 하셨습니다.”

“무륜에게 직접 받았다는 말인가?”

“그리 쓰셨습니다.”

“그것도 볼 수 있는가?”

“사문의 비기와 같이 적혀 있어서 불가합니다. 다만 궁금하신 게 있다면 알려 드리지요.”

몇 가지 질문과 답변이 오고 가자, 제갈정현의 씁쓸함은 더욱 깊어져 갔다.

‘더 캐 볼 필요도 없어.’

고민에 잠긴 눈이 깊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방법은 하나뿐.

‘명분을 만들어서 맹의 이름으로 압박해야겠지.’

제갈정현은 그동안 참았던 숨을 티 나게 몰아쉬었다.

“휴! 걱정이 더 커지는구먼. 이걸 알면 천마교와 혈교 내분은 가라앉을 게 확실하니.”

“보기에 따라 다르겠죠.”

제갈정현은 바로 눈살을 찌푸렸다.

“이미 서북쪽은 전쟁 중일세. 이럴 때 가장 좋은 전략은 저들 내부를 흔드는 것. 그 때문에 감추자는 건데 이해가 안 되나?”

“그러면 중원 또한 혼란이 커지는데, 전 찬성하기 어렵습니다.”

“이보게. 이미 맹에서 수많은 논의를 거쳐 내린 결정이네. 자네가 맹의 정보력보다 낫다 여기는가?”

“그럴 리가요.”

“그럼 왜 그러는 겐가?”

무윤은 의구심 담은 눈빛 그대로 상대를 마주했다.

“누구를 위한 결정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의중을 찔린 상황. 이러면 전략을 달리해야 한다.

“맹의 결정을 못 믿겠다는 건가?”

“생각이 다른데 제가 맹의 결정에 따라야 합니까?”

“이보게. 자네도 정파일세.”

“전 흑도방주기도 하지요.”

“……자넨 사파로 강호에 나설 생각인가?”

“그 잣대를 제게 대지 마시지요. 전 정, 사 어디에도 속할 생각이 없습니다.”

제갈정현은 매섭게 뜬 눈을 꿈틀거렸다.

“그 말! 맹에 그대로 전해도 되겠나?”

“고맙습니다. 수고를 덜어 주신다니.”

지금은 더 말해 봤자 길만 더 어긋날 뿐. 제갈정현은 굳은 표정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경고는 확실히 해야 한다.

“자네 그거 아는가?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다고 꼭 모두의 친구가 되는 건 아니네.”

“모두의 적이 될 수도 있다. 이 말씀이겠죠?”

“난 지금 자네의 태도면 그리 보인다네.”

무윤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래도 그중 한둘과는 친해지지 않겠습니까? 전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만.”

“……!”

물론 친해질 한둘, 그중에 제갈세가는 절대 들어갈 수 없다.

추측에서 의심으로, 이젠 확신으로 다가온 직감.

‘무림맹 내 조작의 주체, 제갈이 가장 유력해.’

순간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속에서 치밀어 오른다.

과거를 잊고 살기로 했던 자신인데.

여휘와 월소려의 염원은 차치하고라도 자신 또한 새로운 삶을 갈망했었는데. 분노와 싸움보다는 즐거움으로 세상을 돌아보고 싶었는데.

무인보다는 상인으로, 춤꾼으로 살아 보고 싶었는데.

그 소망을 짓밟아 버린 자들.

씨를 뿌린 청해의 세력, 그 싹의 틔워 조작의 실체를 만든 자들.

그걸 주도한 놈들만큼은 절대!

‘가만두지 않아!’

다만 지금은 은밀히 파헤쳐야 할 때. 확인이 우선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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