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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라 불린 내 친구-159화 (159/161)

159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어둠이 밤의 날개를 내린 듯, 차갑고 칙칙한 지저의 공간.

그 안에 몸을 눕힌 이의 입가엔 득의한 미소가 가득했다.

‘크크! 네놈들이 버텨 봐야 고작 며칠이지.’

까마득한 십여 장 아래 땅속.

하지만 땅을 파고 오면서 공기가 담길 공간을 확보한 이상, 기식대법으로 버틸 수 있는 건 근 한 달에 가깝다. 또 여차하면 다시 움직여도 되고.

어쨌든 이젠 안심해도 된다. 이 깊은 곳까지 쫓아올 수 있는 놈은 없으니.

다만 아쉬운 건.

‘몇 달만 더 했으면 마성도 완전히 제어할 수 있었거늘.’

갑자기 동굴을 폐쇄하고 남은 아이들도 다 불태워 죽인 이유는 오직 하나.

‘교에서 낌새챈 게 확실해.’

인근에서 악명 높은 문파만을 골라 공격했다는 절대 마인. 그는 분명 아이들이 사라진다는 소문에 자신을 찾아온 교의 무인이리라. 그 탓에 급하게 서두른 게 오히려 화근이 됐다.

하지만 이내 아쉬움을 접어 버렸다.

‘이 정도면 오래 숨어 있었지. 뭐 시간은 걸리겠지만 거점이야 또 마련하면 되고.’

이제 느긋하게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마음을 다잡고는 기식대법으로 어둠에 녹아들길 한참.

캉! 카앙! 채앵!

이 깊은 땅속까지 울리는 요란함이 의식을 일깨웠다.

‘이 소리는?’

내력을 집중할 필요도 없이 바로 감이 왔다. 지축을 울리는 수천의 진각과 쇠붙이의 충돌, 거기에 성난 고성까지.

“죽여라!”

“감히 회하를 노리다니, 살아 돌아가지 못하리라!”

“미친! 그 주둥아리부터 찢어 주마!”

캉! 카앙! 콰쾅!

비릿하게 올라온 녹문기의 웃음이 갈수록 짙어져 갔다.

‘크크! 바로 움직여도 되겠어.’

광란의 전쟁을 벌이는 놈들이 자신을 신경 쓸 리 없다. 또 신속히 옆으로 땅을 판다 한들 소리도 새어 나가지 않을 것이고.

‘들판을 벗어나 숲까지만 가면 된다.’

그리고 우거진 숲에서 나와 유유히 빠져나가면 그만.

다시 암혈지둔공을 끌어올려 땅을 헤집기 시작했다.

쿠쿠쿵! 파팍! 팍! 팍!

반 시진 후, 솔가지 흔드는 여린 산바람 소리만 가득한 숲속.

아름드리나무 사이 대지에 쌓인 낙엽이 흔들거렸다.

사삭! 사락!

지하를 횡으로 파고 숲에 접어든 녹문기는 지둔공을 멈췄다. 이제 종으로 뚫고 올라가기 전 마지막 점검을 할 때.

‘매사 조심이 최고지.’

지둔술을 펼칠 때 가장 위험한 두 순간. 땅을 파고들면서 뒤가 노출될 때, 또 지금처럼 뚫고 올라가면서 상체만 밖으로 나왔을 때. 노리는 놈들이 있다면 이때를 절대 놓치지 않는다.

물론 호신강기를 꺼내 오르면 웬만한 놈은 문제도 안 되지만.

‘그 어린 새끼가 있을지 모르니까.’

가만히 내기를 올려 땅속으로 전해지는 울림을 하나둘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러길 한참.

입가에 미소가 그득해졌다.

‘아무도 없어.’

휑한 바람에 쓸리는 나뭇가지 떨림, 골짜기 물여울 소리, 간혹 지저귀는 새소리뿐. 땅으로 전해지는 다른 울림은 전혀 없다.

이러면 신속히 뚫고 올라가도 된다. 다시 지둔공을 끌어올렸다.

툭! 투두둑! 쿠쿵!

거칠 것 없이 솟은 몸이 땅을 반쯤 빠져나온 순간.

슈우욱! 쇄애액!

타오르는 들불처럼 다가오는 진기 파동. 녹문기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모를 수 없는 기운.

‘강기!’

또 농밀한 기의 군집, 그 서리서리 뻗쳐오른 강대함이 알려 준다. 절대자의 것임을.

‘놈이다!’

생각 이전에 본능이 움직였다. 극한으로 호신강기를 끌어올리고, 발바닥 용천혈에 내력을 때려 박아 치솟게 하는 것도. 강기를 흘려 내기 위해 몸을 비트는 것 또한.

우우웅! 휘익!

어금니를 악다물었다. 여긴 들판이 아닌 숲속, 이번 공격만 피해 내면 도망치는 건 어렵지 않다.

‘이번만 어떻게든!’

한데 그 순간.

슈우욱! 쇄애액! 샤악!

“이 천하의 악적!”

“놓칠 줄 알았더냐!”

“갈가리 찢어 죽여 주마!”

또 다른 강기와 검기, 거기에 철 그물까지 사방에서 밀려왔다. 그 찰나의 순간 폭우처럼.

경악 어린 눈이 한순간 멍해졌다. 지금은 솟구친 힘으로 허공에 뜬 상황.

‘이런!’

한데 이해할 수가 없다.

‘어떻게?’

여기로 나올 줄 어찌 알고. 또 그리 조심히 살폈건만, 절대자인 그놈이면 몰라도 이 많은 무인이 숨어 있었는데 기운을 못 읽어 내다니.

하지만 생각은 이어지지 않았다.

슈우욱! 카앙! 퍼억! 우둑!

“커억!”

등을 강타한 무윤의 강기에 척추뼈가 와르르 내려앉는 순간, 입에서 왈칵 피가 솟구쳤다.

“쿨럭!”

강기의 충격에 호신강기가 흐트러진 찰나, 시린 칼 빛이 사방에 난무했다.

쇄애액! 쉬이익!

서걱! 파팟! 우둑! 파핫!

“크아악!”

삭둑 잘린 왼팔이 바닥을 뒹굴고, 넝마처럼 반이 잘린 오른손은 너덜거린다. 허벅지를 뚫은 검 끝은 살을 뚫고 뼈를 부숴 버렸다.

푸욱! 퍼억!

“우욱!”

핏물이 하늘로 치솟았다. 잘린 볏단처럼 몸이 툭 무너졌다.

터억!

솨아악!

협공이라 해도 상대는 극마지경의 고수, 그런 마인을 단숨에 격퇴한 환희에 모두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허공을 뒤덮은 철 그물 여러 개가 몸을 휘감자마자, 용중문 육도명의 희열 가득한 고성이 들판을 향했다.

“악적을 잡았노라!”

수천이 내지르는 함성이 바로 돌아왔다.

“와! 성공이구나!”

“잘했소이다!”

“하하하! 역시! 우리 소문주 전략이 먹혔어!”

“우리도 잘했지. 암!”

“그럼! 삼천 명이 나섰는데 안 속고 배기겠나!”

순간 의식을 잃어 가던 마인의 눈에 허망함이 더해졌다.

‘날 잡으려고 일부러!’

단 한순간의 방심, 아니 나름 철저히 대비하고 움직였건만. 극마지경인 자신이 변변한 대응 한번 못 해 보고 이렇게 허무하게 끝날 줄이야.

대지에 머리를 처박는 그 순간까지 벌어진 입은 다물어지지 않았다.

녹문기를 포획하고 다시 들판으로 향할 즈음, 연사구의 전음이 무윤을 향했다.

-뇌도문 장 소문주, 어때? 보통이 아닌 거 같은데.

-그러게. 머리를 잘 굴렸어.

녹문기가 땅으로 사라지고 각 대표가 다급히 모였을 때, 장도윤이 바로 나섰다.

“놈이 땅속에 있는 한 잡는 건 어렵습니다.”

“하면 방안이 있는가?”

“스스로 나오게 해야죠.”

“어떻게?”

“아시겠지만 기식대법을 오래 하면 몸도 내력도 많이 상합니다. 놈도 안전에 문제만 없다면 빨리 나오려고 할 겁니다.”

“놈이 우리가 주시하고 있는 걸 아는데 쉽게 나오겠나?”

“바로 나올 상황은 딱 하나. 우리가 싸우면 됩니다.”

“뭐라? 그게 무슨……?”

“시늉만 하자 이겁니다. 지역을 선정해 그 안에서 각 무가 사람들끼리 칼부림 소리를 내면 지하에서 어찌 알겠습니까?”

육도명이 의아함에 나섰다.

“일단 그렇게 속인다 치세. 한데 사방이 숲인데 어디로 나올지 어찌 알 것이며, 또 녹문기 정도면 우리가 숨은 걸 땅속에서도 알아챌 것이네.”

장도윤의 시선이 무윤을 향했다. 방금 땅을 살피던 표정에 어느 정도 자신이 보였기에 꺼낸 안이다.

“땅속 기운을 살피던데, 찾을 수 있겠나?”

“기식대법을 펼치면 몰라도 움직인다면 가능합니다.”

“알았네. 그리고 자네야 기운을 감출 수 있겠지?”

“예.”

“그럼 우린 자네 주변 멀찍이서 둘러싸고 있겠네. 놈이 거의 올라왔다 싶을 때 신호를 보내 주게.”

“아뇨. 오히려 저와 붙어 있는 게 낫습니다. 제 공간 안이면 감출 수 있습니다.”

“오! 그럼 더 수월하지.”

“그리하시죠.”

결국 장도윤의 계획이 성공한 셈. 연사구의 전음이 이어졌다.

-사실 합심해서 마인을 잡는 게 그리 어려운 발상은 아닌데, 전쟁 일보 직전인 상대에게, 그것도 그 짧은 순간에 판단하고 제안하는 건 쉬운 게 아니지.

-거기다 같이 노력해서 마인을 잡고 나면 다시 싸울 가능성도 확 줄어들고.

-물론 그 생각까지 하고 나섰겠지?

-그러겠지. 하여간 앞으로 눈여겨볼 자야.

-그러게. 근데 결론은 어떻게 날까? 아직 합의점은 못 찾았잖아.

-이런 분위기면 제안할 게 있다. 그거면 풀릴 거 같기도 한데.

-……?

얼마 후, 상황이 정리되자 대표들이 다시 모였다. 원래 네 명에 뇌도문 소문주 장도윤까지.

용중문 육도명의 시선이 무윤을 향했다.

“녹문기를 데려갔으면 하네. 결자해지라 어쨌든 귀주에서 그 짓을 했는데 마무리도 우리가 해야 하지 않겠나.”

이미 녹문기는 사지가 다 잘려 나간 상황.

“어떻게 하실 겁니까?”

“성월문 조사가 끝나면 명명백백히 밝히겠네. 우리 문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회하 쪽도 동의하자 무윤은 화두를 돌렸다. 이제 양쪽을 중재할 차례.

“이번에 살펴보니 귀주도 회하도 서로 쌓인 게 많더군요. 잘잘못도 있지만, 상황이 그리 만든 게 크다고 봅니다. 싸울 때 싸우더라도 대화로 덜어 낼 게 있을 거 같은데.”

육도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귀주 무가들과 합의한 내용이 있다.

“자네 말이 맞네. 해서 이참에 귀주로 잡혀 왔던 회하 사람들을 돌려보내기로 했네. 아이들도 신원이 밝혀지면 성월문 재산을 털어서 보상하도록 조치하고.”

화검문주 홍재율이 환한 미소로 나섰다. 저 배려는 협상의 여지가 있음을 간접적으로 보인 것. 이러면 화답할 차례.

“그리해 주신다니 정말 고맙소이다. 크흠! 그리고 귀주 쪽에 할 제안을 더 손봐서 한 달 안에 보내겠소이다. 나 혼자 결정할 사안이 아니라 장담은 못 하지만 최선을 다해 보겠소.”

“그리해 주신다니 다행이오만, 당초 안에서 크게 바뀌지 않는다면 언제고 이런 일은 반복될 것이오. 부디 신중하고 현명한 판단을 내리길 바라오.”

“알겠소이다. 명심하지요.”

분위기가 무르익자 무윤이 나섰다.

“이렇게 하시는 건 어떨지?”

“좋은 생각이라도 있는가?”

“어쨌든 양쪽 다 칼을 빼 들었는데 그냥 집어넣긴 좀 그렇지 않습니까?”

놀란 좌중의 반문이 절로 터져 나왔다.

“아니! 자네 그게 무슨 소린가?”

“이, 이보게. 말리던 자네가 갑자기 왜?”

그때 뇌도문 소문주 장도윤의 미소가 의미심장해졌다.

“그거 괜찮네요. 저는 찬성입니다.”

“……?”

무윤과 장도윤이 주고받듯 계획을 풀어 내길 한참, 만면에 웃음을 띤 대표들이 각자 진영으로 돌아갔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다만 상대가 바뀌었을 뿐.

열흘 후, 형주 저잣거리 객잔.

행상들이 모인 자리에 한 사람이 달려들었다.

타다닥!

“하아! 이보게들, 회하(怀化)에서 소식이 왔네.”

그 자리는 물론 객잔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지금 형주의 가장 큰 관심거리는 그것이니까.

“그래! 어찌 됐는가?”

“하하! 산채 다섯 곳을 다 쓸어버렸다는군. 덤비는 놈들은 다 작살 냈고 포로가 오백에, 도망간 놈들은 백이 안 된다고 했네.”

“허! 정말 잘됐군. 그 정도면 당분간 산채가 다시 들어서진 못하겠어.”

“이 사람아! 당분간이 아닐세. 앞으로 귀주하고 회하 무인들이 공동으로 감시단을 만들어서 교역로를 감시하기로 했네.”

“뭐? 그게 사실인가?”

“그렇다니까.”

“허허! 그것참 생각할수록 희한하다니까. 매번 원수처럼 싸우던 자들이 하루아침에 그리 바뀔 줄 누가 알았나.”

“그거야 다 월운비영(月雲飛影) 대협께서 중재한 덕분 아닌가. 이번 싸움에도 나서서 양쪽을 골고루 돕기도 했고.”

“잘 알지. 어디 이 일뿐인가. 세상 어느 천지에 정, 사가 전쟁을 막겠다고 공동선언하는 곳이 있겠나. 절대자이신 천 대협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지.”

“아무렴! 그러니까 다들 천 대협을 칭송하는 게지.”

“그래. 하여간 덕분에 우린 발 뻗고 자게 생겼으니 얼마나 좋은가!”

“하하! 그렇고말고. 자, 이 즐거운 날 술이 빠질 수 없지. 한잔하세나.”

“허허! 그러세.”

그때 이 층에 있던 오십여 명 전부의 표정이 복잡 미묘해졌다. 하남 무림맹에서 방금 도착한 이들. 이유는 달랐지만, 각자의 상념은 깊어져만 갔다.

무림맹 호천대주 염수찬의 전음이 유운각주 제갈정현을 향했다.

-각주. 아무래도 절대자란 것도 사실이고 그 도인의 제자도 맞는 거 같구려.

-……그런 거 같습니다.

-하! 그 나이에 절대자라니. 그나저나 이러면 연사구만이 아니라 그자까지 조사해야 하는데. 쉽게 응할까 걱정이오만.

-아무리 절대자라 하나 정파 소속인 이상 거부할 명분은 없습니다. 잘 다독여 봐야지요.

연사구가 터트린 은야문 호법 도천의 기록을 조사하기 위해 온 걸음.

한데 드러난 목적은 그렇지만, 각자 속한 곳에 따라 속내는 전부 달랐다.

아주 극명하게 차이 날 정도로.

천마라 불린 내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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