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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라 불린 내 친구-156화 (156/161)

156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다음 날 오후, 호남 회하(怀化) 외곽.

바람 탄 햇살 구름만 허공을 노니는 들판에 두 무리가 대치했다.

휘리릭!

양쪽의 대표들이 가운데로 자리할 즈음, 귀주 용중문의 장로 육도명의 야릇한 미소가 색을 더했다.

“오랜만이외다.”

형주 뇌도문 장로 장천상, 회하의 화검문주 홍재율의 굳은 표정이 작금의 상황을 알렸다.

귀주 무인은 이천 명, 뇌도문이 가세한 회하 무인은 구백여 명.

고수의 수는 물론 개개인의 무력 또한 엇비슷한 상태라 불리함이 여실히 드러난 상황.

하지만 모르고 있던 것도 아니고 나름 준비한 패도 있다.

뇌도문 장로 장천상은 차가운 미소를 흘려 냈다.

“먼 길 오셨소이다.”

“허허! 나야 천 리 길이니 그렇소만, 저들은 지척에서 왔지요. 천천히 왔는데 하루도 안 걸렸다 하더이다.”

“그리 가까이 있는 사이거늘, 꼭 이리 부추겨야 했소이까?”

“가까이 있는 저들을 박대한 건 그쪽 아니오? 우린 저들의 뜻을 따랐을 뿐이외다.”

장천상은 예리한 칼날이 담긴 시선을 던졌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갈 때.

“진정 전쟁을 하려는 게요?”

“그게 어찌 최선이겠소? 피할 방안을 준다면 내 경청하리다.”

화검문주 홍재율이 앞으로 나섰다.

“회화 전체 무가와 상단의 공식 입장을 전하겠소.”

“의견 일치를 본 게요?”

“그렇소.”

“어디 들어 봅시다.”

“중원으로 나가는 물품에 한해 우리 이문을 지금의 반으로 줄이겠소. 알겠지만 우린 큰 손실을 감수하는 게요.”

“귀주로 오는 물품은?”

홍재율은 매섭게 뜬 눈을 꿈틀거렸다. 선을 넘는 얘기다.

“그것까지 내놓으면 망할 곳이 부지기수이거늘! 애초부터 협상할 생각이 없었군?”

“큰 결심으로 나선지라 저들은 부족하다 여길게요.”

“내 권한 밖이요! 더 이상 협상은 없소이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구려. 준비합시다.”

뇌도문 장천상이 급히 나섰다. 다른 패를 언급할 때다.

“형주 소식은 들으셨을 텐데?”

“아! 그 공동선언 말이오?”

“강호에 천명한 이상 싸움이 시작되면 선언에 그치지 않을 것이외다.”

실소 가득한 웃음이 육도명의 입가를 비틀었다. 이제 속을 뒤집어 놓을 차례.

“명색이 정파라 자처하는 이들이 그리했으니 맞겠지요. 한데 언제 나선다고 하더이까? 여기 싸움이 다 끝난 다음에? 아니면 회화와 귀 문에 여력이 없어지면? 난 그때가 언제일지 정말 궁금하다오. 또 그때 목표가 우리일지도. 크크!”

“뭘 잘못 알고 계시는구려. 선언 내용은 외부 침략이 시작되면 곧 움직인다는 거요. 못 믿겠다면 여기 형산과 하후가 대표가 와 있으니 직접 물어보시오.”

“그러니까 그 곧이 언제냔 말이지. 우리도 이리 준비하는 데 몇 달이 걸렸다오. 한데 저들이 빨리 움직이겠소? 설사 그렇다 해도 족히 수십 일은 걸릴 텐데, 그때까지 버틸 수 있으시겠소?”

“숫자를 믿으시나 본데 우린 전면전을 할 이유가 없소. 물러서서 방어만 하면 된단 말이외다.”

“허허! 코앞이 회화거늘 어디까지 물러서시겠소? 어디 한번 해 봅시다.”

장천상은 마지막 패를 꺼내 들었다.

“이제 곧 천 대협이 올게요. 그 또한 전쟁을 강력히 반대, 아니 도발에는 강력히 대응하겠다고 천명했소. 이래도 해 보시겠소?”

육도명은 귀찮은 듯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그 얘긴 됐소이다. 그 나이에 화경이라니! 난 솔직히 믿지도 못하겠거니와, 설사 맞다 해도 그 하나 늘었다고 달라질 건 없소이다.”

“절대자를 너무 우습게 보는구려.”

“화경이라면 어찌 과소평가할까. 하나 그런 자일수록 더 몸을 사리는 법. 남의 일에 목숨이라도 걸 거 같소? 더 할 얘기 없으면 돌아가겠소이다.”

그때 표홀한 바람이 언덕 저편에서 불어왔다.

휘리릭!

동시에 휑한 들판 저 끝까지 농밀하게 퍼지는 울림은 웅혼한 목소리를 귓전에 울려 댔다.

“얘길 좀 더 하지요!”

의아한 시선 몇 개가 돌아가자마자, 경악의 단발성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헉!”

“저, 저!”

“나, 날아온다!”

“허, 허공에 어떻게!”

하얀 나비가 허공을 노닐 듯 바람 따라 유유히 휘날리는 신형, 하늘의 이치를 몸에 품었는지 육중한 몸이 대지에 내리지도 않고 바람에 흩날린다.

허공과 일체화된 듯 서서히 공간을 접어 다가오는 자의 모습이 모두의 눈 한가득 들어올 즈음.

누군지 알아본 뇌도문 무인들의 환희가 입을 헤쳐 나왔다.

“천 대협이다!”

“월운비영(月雲飛影)께서 오셨다!”

“하! 저 먼 거리를 날아오다니!”

“역시! 절대자!”

과장된 얘기까지 흘러나왔다.

“허! 저게 능공허도(凌空虛道)인가? 아니면 허공답보(虛空踏步)?”

“이 사람아! 뭐면 어떤가! 하늘에 저리 떠 있는데.”

그때 의아한 하후진의 전음이 연사구를 향했다.

-형님! 저놈 경공은 화경치고는 별로였잖아요?

-그러게. 뭔 꼼수를 쓴 거 같은데. 아니면 티 안 나게 내력을 많이 쓰고 있거나.

-아! 분위기를 확 휘어잡으려고 일부러 그런 거 같네요.

-크크! 저놈 속은 타들어 가겠다.

아니나 다를까, 있는 하단전 내력 모두를 쥐어짜 내 버티던 무윤은 한계에 다다랐음을 직감했다.

‘여기까지다.’

전장의 분위기를 압도하고 주도권을 가져오기 위한 선택. 절대자로서 위엄을 보이는 건 이쯤이면 된다.

이젠 실질적인 강함을 보일 때.

드높게 뿌려진 팔의 날갯짓이 하늘에 검을 세웠다.

쉬이익!

시퍼렇게 흘러나온 빛이 너울거리자 무형의 진기 파동이 주변에 넘실거렸다.

우우웅! 위이잉!

검을 둘러싸고 조금씩 하늘로 향하던 강기는 어느새 한 자에 가까운 선명한 색을 우려냈다.

내기의 파동이 땅에 있는 자들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빛이 하늘로 용오름 치듯 일렁이던 강대한 기운은 서서히 그 위세를 드러냈다.

절로 터진 목소리가 사방을 울렸다. 엄청난 위압감에 모두의 몸이 후들거렸다.

“저, 저건!”

“하! 한 자가 넘는 강기라니!”

“갓 화경이 맞는 거야?”

“어떻게!”

귀주 쪽 무인들은 서늘한 냉기와 함께 사지가 떨려 왔다.

“그, 근데 저거 혹시?”

“우리……?”

“아니면 왜?”

“서, 설마!”

온몸의 털이 바짝 서 버린 그 순간.

물을 벗어나려는 소용돌이처럼 기의 용틀임이 검 끝으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뿜어진 채 스스로 울음을 짓던 강대한 기운이 몸부림치자, 강기의 폭풍이 주변에 휘몰아쳤다.

휘이잉! 화라락!

너울 치는 파도처럼 강기의 이지러짐이 극한에 다다를 때, 하늘 향한 손이 대지를 향해 내리꽂혔다.

휘이익!

빛의 파편이 눈을 시리던 순간 푸른 섬전이 세상을 갈라놓듯이 쏘아졌다.

슈우욱! 쇄애액!

몰아치는 거대한 바람, 귀청을 찢는 굉음과 함께 불꽃처럼 갈라진 강기들이 지켜보던 이들의 시야를 가득 메웠다.

“타, 탄강!”

“하! 벌써 저 경지라니!”

내재된 강기를 밖으로 꺼내 흩뿌리는 탄강.

강기의 강함과 농밀함을 그대로 담아 쏘아 내는 강환보다는 한참 처지지만, 화경 중반이라야 가능하다고 알려진 게 탄강인데.

수십 갈래 나뉜 번쩍임은 양쪽 무리 사이 빈 곳에 뇌성벽력을 내리꽂았다.

쇄애액! 가아앙!

귀청을 찢는 폭음과 함께 천근의 무게를 담은 듯 대지를 발기발기 찢어 버렸다.

쿠우웅! 콰아앙! 콰쾅! 쿠쿵!

하늘에서 불덩이가 떨어졌다. 천둥 번개가 땅을 찢어 댔다.

거센 흙먼지가 하늘로 솟아오르며 울음을 토했다.

파파팍! 화라락! 화락!

들썩인 대지와 달리 좌중은 일순 정적에 빠져들었다. 모두의 놀람 어린 눈이 한순간 멍해졌다.

“이럴 수가!”

“하!”

“어찌!”

상대를 가늠하려는 생각 따윈 이미 뇌리를 떠나 버렸다. 그저 떠오르는 생각은 하나뿐.

‘절대자!’

모두가 꿈꾸는 그 모습. 무인의 혼을 일깨우고 가슴을 전율케 하는 염원의 경지. 몰아치는 폭풍이 두려워 사지를 떨면서도 형형하게 타오르는 눈빛은 그 길을 앞서 걸어가는 자를 향했다.

뇌도문 장천상을 향한 절대자의 미소가 햇살에 반짝였다.

“늦지 않아서 다행입니다.”

“……!”

무윤의 시선이 천천히 용중문 육도명을 향했다.

“얘기 더 하시겠습니까? 아니면?”

“……!”

한편 모두의 시선이 한곳에 쏠린 그때.

무윤과 전음을 나눈 연사구가 은밀히 귀주 부대 후미로 향했다. 이미 안면을 터놓은 귀주 하오문도에게로.

사르르!

잠시 후, 정신을 추스른 육도명의 눈이 깊어졌다.

다 믿진 않았지만, 워낙 상세히 전해진 소문이라 나름 짐작한 바는 있었다. 화경은 아니고 초절정 끝쯤 될 거라고. 한데.

‘화경, 그것도 중반이라니!’

하지만 그래 봤자 거느린 세력도 없는 절대자. 게다가.

‘엄한 싸움에 목숨 걸 리가 없지.’

거기에 이런 수천 명의 집단 전투라면 승패를 가를 요인이 될 수 없다.

이젠 다수의 힘으로 몰아붙일 때. 짐짓 헛기침을 흘리고는 말에 뼈를 담았다.

“크흠! 이리 소란스럽게 나설 줄은 몰랐네.”

“안 그랬으면 저와 대화나 하셨겠습니까?”

“얘기는 이미 다 했네. 다른 제안이 없다면 서로 입만 아플 게야.”

“그럼 끝내시죠. 저도 따로 할 제안 같은 건 없습니다.”

육도명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이렇게 나타나서 아무 말도 안 한다?’

그건 달리 보면 싸우겠다는 의지의 표현. 바로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올라왔다. 수많은 전투가 알려 준 경험의 지혜.

‘전장은 피의 광기가 지배하는 살육장이자 집단의 싸움. 아무리 절대자라도 혼자 할 수 있는 건 한계가 있지. 기껏해야 백 명 정도.’

그것도 절정급 무인을 추려서 차륜전을 쓰면 수십으로도 상대할 수 있다. 죽이진 못해도 막는 건 가능하니까.

그 확신이 상대를 바라보는 눈에 불꽃을 담아냈다.

“자신 있는가?”

무윤은 티 나게 눈을 껌벅였다.

“어떤 걸 말씀하시는지?”

“허허! 다른 게 있겠나. 이길 자신 말일세.”

답은 바로 나왔다.

“없습니다.”

육도명의 눈도 절로 껌벅여졌다.

“없다? ……근데 싸우겠단 말인가?”

상대를 바라보는 눈에 무윤의 진심이 그대로 묻어났다. 불꽃같은 정광에 타오르는 숨결까지 더해졌다.

“그대가 생각하는 이기는 게 뭡니까?”

“뭐라?”

무륜은 온 내력 담아 웅혼한 음성을 흘려 냈다. 연사구가 움직인 지금 조금이라도 더 귀주 무인들을 흔들 때다.

“이 들판에 너 나 할 것 없이 수천이 피를 뿌리고도 내 편만 더 많이 남아 있으면! 그게 이기는 겁니까? 아니면? 나 하나만 살아남더라도 이쪽을 다 죽이면 이기는 겁니까?”

화들짝 놀란 육도명도 뜨겁게 달궈진 숨을 뿜어냈다. 명분에서 꺾이면 전장에서 불타는 가슴은 사라져 버린다.

“이건 전쟁일세. 수십 년 말로 해결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피를 흘려야 하는. 우리라고 이 결정이 쉬웠을 거 같나?”

“아니겠지요. 고민하고 또 고심하셨겠지요. 내 새끼들도 죽어 나갈 판인데 어찌 쉬웠겠습니까! 또 작은 전쟁이 때론 큰 전쟁을 막아 주는 것이 불행하지만 현실이기도 하고.”

“우리도 그런 고뇌의 결단이었네.”

“하지만! 언제고 전쟁은 마지막 수단이어야 합니다. 한데 이번이 그럴 일이라 보십니까?”

육도명은 가슴을 쭉 내밀고는 불꽃같은 정광을 보였다. 적어도 그 질문엔 나름 당당하니까.

“우린 그리 본다네. 이제껏 회하는 우리 걸 빼앗아 자기들 배를 채웠네. 그걸 토해 내라 하는데 거부하니 이리됐을 뿐이야.”

“알아보니 그 주장도 억지는 아니더군요. 회하 쪽에서 과한 부분도 있어 보입니다.”

“크흠! 일부분이 아니라 아주 크다네.”

“한데 그 분노 때문에 회하에 한 짓은 뭐라 하실 겁니까?”

“……뭘 말하는 겐가?”

“회화 인근 산속 사람들을 수시로 잡아가더군요. 그 때문에 회하에서도 강경한 분위기가 많은 거고.”

“크흠! 일부 몰지각한 곳들이 하는 짓일세. 우리도 단속하고 있는데 그걸로 전체를 싸잡아 비난해선 안 되지.”

순간 무윤의 눈에 불꽃이 일었다.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광풍처럼 휘몰아쳤다.

성월문에서 본 그것 때문이다.

“그럼 이런 건 어떻습니까?”

“……어떤?”

“아이들 수백을 잡아다 불태워 죽인 곳이 있다면?”

“……?”

전쟁은 말리되 악은 징벌해야 한다.

천마라 불린 내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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