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라 불린 내 친구-155화 (155/161)

155화

다음 날, 하오문 지부 대회의장.

형산과 뇌도문을 포함한 형주의 주요 무가 및 무림맹, 사도련 지부장이 자리했다. 귀주의 침략에 대응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모인 자리.

그 논의 전에 형산의 대표로 참석한 선청이 무윤과 도백의 일을 알리자 한바탕 광풍이 실내에 몰아닥쳤다. 세세한 설명과 질문이 오고 간 후, 다들 터질 것 같은 숨을 몰아쉬고는 탄성을 자아냈다.

“허! 천 방주가 그 도인의 제자였다니!”

“천 공자! 정말 큰 결정을 하셨구려. 그 많은 도백의 무공을 형산에 전하시다니.”

“월운비영(月雲飛影)께 그런 인연이 있었구려.”

월운비영은 이번에 생긴 무윤의 별호다. 어둠 속에서 혈교 마인들을 척살할 때 날아다니는 그림자만 달빛에 보여서 지어진 이름.

소란이 진정되자 형산의 선청이 다시 나섰다.

“당초엔 도가 문파들을 초청해서 검증까지 한 후 강호에 알릴 생각이었으나, 귀주의 침략에 대응하자면 도움이 될 거 같아 말씀드렸습니다.”

“허허! 현명한 결정이오. 저들도 이 소식을 들으면 부담이 더 커지겠지.”

정, 사 모두 덕담을 건넸지만, 사파는 물론 형산이 봉문한 틈에 세를 넓히고자 했던 정파 무가 또한 쓰린 속은 어쩔 수 없다.

그만한 사안이니까.

이어서 예정됐던 공동 대응 선언이 있고 난 후.

무윤과 따로 자리한 뇌도문 소문주 장도윤은 문득 허탈한 실소가 입 가득 올라왔다.

이미 진정으로 상대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솔직한 심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자네 덕분에 웃다가 울다가, 하여간 내가 정신이 없네.”

“도백 무공이 부담되십니까?”

“왜 아니겠나. 이번이 형산 위에 올라설 기회라 여겼거늘.”

“좋은 점도 있잖습니까?”

바로 생각나는 게 있다.

“……사업 말인가?”

“예. 진정한 도가 문파로 거듭나자면 손 뗄 일도 적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무가의 근간은 무공일세. 비교할 게 아니지.”

“귀문의 무공이 부족하다 여기십니까?”

장도윤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오백 년을 이어 온 가문의 저력은 모두 자전뇌풍검(紫電雷風劍), 그 절대검공에서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넨 우리 검을 모르는가?”

“본 적은 없지만, 익히 들었습니다. 강호 최고의 뇌검(雷劍)을 논할 때 빠지지 않는다고.”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중에서도 최고라 자부한다네. 선조 중엔 이 검으로 현경까지 가신 분도 있지. 내 증조부님만 하더라도 화경이셨고.”

“그럼 뭐가 걱정입니까? 당장 배야 좀 아프겠지만 그 길로 정진하면 원하는 걸 이룰 수 있는데.”

장도윤은 씁쓸한 미소를 감추지 않았다.

“그렇기는 하네만 이후론 절대자를 배출하지 못했네. 자네도 알겠지만, 뇌검으로 극에 이르자면 자질은 물론 몸이 받쳐 줘야 하는데, 휴! 그런 인재가 자주 안 나오니 문제지.”

무윤은 잠시 갈등이 일었다.

‘도와주고 더 엮을 필요가 있을까?’

세상에서 가장 강한 기운으로 알려진 뇌기(雷氣)

당연히 과거 무륜도 연구했었고, 특히 여휘는 초인의 무공을 거의 완성할 즈음 뇌기에 한참 몰두한 적이 있었다.

뇌기 무공의 갈래는 크게 몇 가지로 나뉜다.

우선 몸 안에서 뇌기를 만드는 것과 자연 뇌기를 받아들이는 방법.

또 뇌기 자체의 힘을 우선하는 것과 다른 힘에 섞어 응용하는 것.

그중 뇌기를 익히는 모든 무인의 꿈은 역시 번개의 힘을 몸에 담아내는 것.

‘여휘도 초인의 몸에 번개의 힘을 담아 보려고 했었지.’

하지만 여휘 또한 포기, 아니 그만두고 말았다.

그때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이제 뇌기 연구는 그만하련다.

-왜?

-몸이 만드는 뇌기는 성에 안 차고, 벼락 칠 때 번개의 힘도 몇 번 끌어 써 봤는데 인간의 몸에 담을 기운이 아니야.

-그 몸으로도 버티기 어렵더냐?

-뇌기에 특화되게 바꾸면 되는데, 초인의 몸이야 만물과 조화를 우선시하잖아. 내 길이 아니다.

그때 연구했던 지식과 동굴에 남아 있는 절대의 뇌기 무공도 두 권 있다. 돕고자 하면 방법은 여러 가지.

하지만 이미 목표한 상호 연대는 끌어낸 상황. 지금은 더 얻어 내고 싶은 게 없다.

‘관두자. 다음에 필요하면 그때 생각해 보고.’

세상일을 미리 예단할 필요는 없다.

형주 하오문 지부.

논의가 끝나고 나오자마자 두 여인이 황급히 다가왔다. 당서하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감돌았다.

“맹에서 연락이 왔는데 멸마단 전부 섬서로 간다고 하네.”

“그래요? 그럼 두 분은 어떻게?”

“알아서 판단하라고 했는데 가야지. 전쟁터로 가는 건데 우리가 빠지면 대원들이 힘들어져.”

가는 건 확정인 상황.

“언제 출발합니까?”

“얼굴 봤으니 바로 가야지. 거긴 한시가 급해.”

혈교 마인과의 싸움이 본격화된 이상, 멸마단이 참여하는 건 당연지사. 시기가 된 건 예상했지만 이렇게 급하게 떠날 줄은 몰랐다.

연사구가 바로 나섰다. 이젠 웃음으로 배웅할 때.

“가서 마인들 너무 때려잡지 말아요. 나보다 잘나가면 배 아파지니까. 적당히 알죠?”

“당연하지. 전쟁터에선 사는 게 이기는 거니까.”

앞으로 나선 진서연은 셋을 향해 정중히 고개 숙였다. 은은한 미소와 함께 진정 어린 말이 흘렀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배운 것도 많고, 같이했던 시간 정말 즐거웠어요. 잊지 않을게요.”

연사구의 미간이 티 나게 좁혀졌다.

“다 좋은데 진 조장은 싸우기 전에 역용은 필수! 알죠?”

“그럴게요.”

당서하도 걱정되는 게 있다.

“귀주하고 싸움도 만만치 않을 거야. 다들 조심하고.”

“우리야 저놈 옆에 딱 붙어 있으면 되니까 걱정 붙들어 매세요.”

“알지. 근데 매번 같이 있진 못하잖아. 그럴 땐 너무 나대지 말고. 특히 넌 그것만 조심하면 돼.”

“거참! 가는 마당에도 잔소리네. 나 없으면 심심해서 어쩔까!”

“그러게. 그건 좀 아쉬워.”

무윤은 불안과 안도감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둘 다 가르칠 건 끝나서 다행이야.’

당서하의 검 교정도 끝났고 서연에게 필요한 중단전 무학도 다 알려 줬다. 해 줄 수 있는 건 다 한 셈.

이제 남은 건 연사구처럼 웃으며 보내는 것뿐. 그래도 뭔가 아쉬움이 들던 그때 문득 품 안에 있는 게 떠올랐다.

무윤은 천설청옥 구슬을 꺼내 내밀었다.

“이거 가지고 가세요.”

“어? 이거 천마교 놈들한테 줬던 그 구슬이네.”

“갑자기 가시는 거라 드릴 게 이것밖에 없네요.”

“이야! 작은 게 빛깔이 참 곱네. 고마워. 잘 간직할게.”

그래도 넌지시 알리긴 해야 한다. 언제 요긴하게 쓰게 될지도 모르니까.

“혹시 돈이 급할 땐 파셔도 됩니다. 근데 작아 보여도 꽤 값나가는 거니까 꼭 큰 보석상에 가서 거래하셔야 합니다.”

“에이! 선물로 준 건데 팔면 쓰나. 그럴 일 없어.”

“혹시나 해서 드린 말씀이에요.”

“알았어. 정 급할 땐 그렇게 할게.”

마지막으로 전할 말이 있다.

“참! 당장은 아니지만 거기 갈 일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그땐 찾아뵐게요.”

“그래? 그러면 좋고.”

그때 서연이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소려를 보고 갔으면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됐네요. 안부 전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대신 내년엔 꼭 들른다고 하겠습니다.”

확답하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일. 그저 진정을 담아 전할 뿐이다.

“노력할게요. 정말로.”

“……!”

잠시 후, 두 여인의 모습이 멀어질 즈음.

무윤이 자리를 뜨자 연사구의 팔이 하후진의 어깨에 올라왔다.

스윽!

“네 생각은 어때?”

“뭐가요?”

“저놈하고 진 조장 말이야. 조금만 더 같이 있었으면 뭐가 될 거 같기도 했는데.”

“그렇게 안 돼서 잘됐죠.”

순간 화들짝 놀란 연사구의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너 혹시?”

“아! 이 형님 진짜! 뭔 헛소리를 하려고 그래요!”

“그게 아니면 왜?”

“왜긴요. 진 조장이 불쌍하잖아요.”

격하게 공감되는 말. 피식 웃음이 올라온다.

“풋! 그건 그러네.”

“형님도 괜히 나서서 엮지 말아요. 평생 욕먹을 각오 아니면.”

“그래도 이번엔 둘 다 눈치가 좀 그랬는데.”

“그러니까 잘됐다는 거예요. 저놈이 자기 마음도 제대로 모르는데 그런 일이 생기면 끝이 좋겠어요? 진 조장만 다치지. 기다려 보자고요. 저놈이 느낄 때 돕는 게 최곱니다.”

“그건 그런데, 그러다 늦으면?”

“그럼 인연이 아닌 거지 어쩌겠어요. 전 억지로 맺어 주는 건 아니라고 봐요.”

“……!”

앞날은 모르는 법이니까.

나흘 후, 귀주 완산.

호남 회하(怀化)에서 좌측으로 백여 리 떨어진 도시.

그 외곽 산야의 어둠 속에 무윤이 홀로 섰다.

이미 목표한 다섯 중 네 곳의 공략은 끝낸 상황. 연사구가 조사한 것에다 직접 살펴본 결과, 쓰레기 그 자체인 곳들이라 거침없이 손을 쓰는 데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마지막 여기 완산, 성월문이 마지막 목표다.

문득 지난 나흘간의 여정을 떠올리자, 속 깊은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귀주와 회하, 둘이 너무 꼬였어.’

네 곳을 처리하면서 살펴본 귀주 동쪽의 민심 또한 호남 회하를 분노의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

자신들이 피땀 흘려 가꾼 것들을 헐값으로 가져가 자기 배를 불리는 탐욕스러운 자들로.

또 이런 분위기를 이용해 회하 외곽 산속 마을을 습격해 사람들을 잡아 오는 곳도 적지 않았다. 그 대표적인 곳이 습격한 네 곳이었고.

그러니 회하 또한 이들을 적으로 여기는 거고. 결국 전쟁이 일어날 요인은 이미 안에 내재해 있었던 셈이다.

무윤은 머리를 휘저어 복잡한 심사를 털어 냈다.

‘남이 해결해 줄 게 아니지. 스스로 푸는 수밖에.’

그리고 시내를 바라보는 눈에 갈등이 일었다.

‘어떡할까?’

눈앞에 있는 성월문은 조사 내용으론 적당히 나쁜 딱 그 정도. 시간이 있다면 세세히 살피고 결정하겠는데 지금이면 귀주 무인들이 회하에 거의 다다랐을 시간.

이미 목표한 소문은 충분히 난 상태인 데다, 돌발 변수를 감안하면 바로 가는 게 적절할 판단.

무윤은 결정을 내렸다.

‘안을 살펴보고 별다른 게 없으면 그냥 간다.’

화살처럼 쏘아진 신형이 어둠 속에 스며들었다.

사라락!

잠시 후, 성월문 외원.

경비를 서던 이들끼리 속닥거렸다.

“이보게 자네, 소문 들었나?”

“소문? 아! 그 절대마인?”

“그래.”

“주현의 영초문이 풍비박산이 났다고 듣긴 했는데 뜬소문 아니야? 아무리 절대마인이라 해도 한 놈이 어떻게 거길 박살 내겠어?”

“거기만이 아닐세. 삼량문하고 협도가, 산응문까지 다 당했네.”

“에이! 설마! 그 네 곳 무인을 합치면 천 명이 넘네.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자네만 알고 있게. 이건 다 총관부 혁수 놈에게 들은 걸세. 확실하단 얘기지.”

“헉! 그럼 그게 다 사실이라고?”

“그러니까 내가 이러는 게지.”

잠시 멍했던 자의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가만! 그러고 보니까 네 곳 다 악명이 자자한 곳이잖아? 거참 이상하네. 마인이 그런 곳만 노렸을 리도 없고.”

“그거야 모르지. 근데 우리라고 다를 게 뭐가 있나. 해서 조심하자는 게지.”

“에이! 그래도 우린 그만큼은 아니지.”

그때 주변을 살피던 경비 마웅은 슬며시 귀엣말을 했다.

“그 소문이 마인 귀에 들어가면 또 모르지.”

“……그거?”

“그러니 몸을 사려야지. 듣자 하니 마인은 보이는 놈들만 조졌다고 했으니까, 당분간 어디 틀어박혀 있는 게 상책일세.”

“사실이면 당연히 그래야지. 참! 혹시 자넨 아이들을 본 적이 있는가?”

“나도 없지. 하여간 잘못 입 놀리다가는 큰일 나. 조심하게”

“…….”

한편 전각 위에 있던 무윤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막 떠나려던 참에 들린 얘기.

‘아이들?’

순간 뇌리를 타고 싸한 기운이 올라왔다. 연사구가 이곳 정황을 설명하면서 덧붙인 말.

-참! 최근에 호남 서쪽 애들이 많이 실종됐는데 귀주 짓이란 소문이 있어. 가면 살펴봐라.

-몇 명이나?

-백 명이 넘어. 뭔가 좀 찜찜하지?

-그러네. 알았다.

은밀한 움직임이 장원 이곳저곳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스르륵!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