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연사구는 어깨를 으쓱거리고는 심드렁한 목소리를 냈다.
“그새 귀주 쪽 상황은 정리 좀 해 뒀지. 그거 파악한다고 잠도 제대로 못 잤어.”
“얼굴은 멀쩡한데?”
“야! 이 새끼야!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데! 그렇다고 하면 그런 줄 알아!”
“까기나 해.”
연사구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술을 뗐다.
“우선 회하(怀化)로 오는 인원은 약 이천, 그중 용중문이 이백 명 정도고 나머지는 동쪽 문파들이야.”
무인만 이천 명이면 거대 문파 세 곳을 합친 정도. 무거운 숨이 절로 내쉬어진다.
“그 인원이면……. 정말 죽기 살기로 해보자는 건가?”
“결론은 그거지. 회하에서 중재안이 나오지 않는 한 전쟁은 어쩔 수 없을 거야.”
“중재안?”
“귀주가 가장 원하는 건 중원과 직교역인데 그건 회하를 점령해야 가능한 거고, 협상이라면 이문을 대폭 조정해 달라고 하겠지.”
이러면 바로 물을 게 생긴다.
“회하 무가하고 상단들 입장은?”
“화검문주가 나름 중재안을 마련하긴 했는데, 그 정도로 귀주가 물러서지 않을 걸 그들도 알아. 결국 싸우겠다는 거지. 이익을 뺏기는 것도 그렇지만, 귀주 동쪽 문파하고 원수지간이더라고.”
“원수?”
“귀주 놈 중엔 말이 무가(武家)지, 도적 떼 같은 놈들도 있어. 회하 주변 산속 마을을 습격해서 남자들 다 죽이고 여인하고 아이들을 팔아먹은 개새끼들도 있더라고.”
“그 정도야?”
“그래. 그 꼴을 여러 번 당했으니 회하 민심이야 빤하지. 알아보니까 뇌도문이 계속 중재했는데 씨알도 안 먹힌 모양이야.”
당서하의 긴 한숨이 모두의 심정을 대변했다.
“전쟁은 어쩔 수 없네. 이러면 어떻게든 빨리 끝내는 데 초점을 맞춰야겠다.”
“제 생각도 그래요. 뇌도문이 공동선언을 반기는 것도 그 이유고.”
모두의 안색이 굳어져 갈 즈음, 역시 답을 못 찾고 고심하던 무윤은 문득 팔에 찬 팔찌가 눈에 들어왔다. 순간 눈가에 더할 수 없는 열기가 서렸다.
‘방법이 있겠어!’
한번 물꼬가 트인 상념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러길 한참, 결심이 굳어진 무윤은 깊고 장중한 숨을 내쉬었다.
‘해 보자.’
그러자면 먼저 할 게 있다. 시선이 두 사람을 번갈았다.
“사구하고 진이, 나 좀 보자.”
“왜?”
“따라와 봐.”
“……?”
* * *
얼마 후 하오문 지부, 뒷산.
의아한 연사구의 시선이 무윤을 향했다.
“야! 바쁜데 왜 여기로 불렀어? 얘기야 안에서 해도 되는데.”
“따로 보여 줄 게 있어서.”
“뭔데?”
“귀주 무가들이 스스로 물러나게 할 방안이 있다.”
“스스로? 어떻게?”
“자기 안방이 공격당하면 돌아갈 수밖에 없겠지?”
연사구의 눈이 커다래졌다. 무윤이 할 짓이야 빤히 짐작되니까.
“너……?”
“네가 준 정보 중에 거지 같은 다섯 문파를 골라 놨다. 닷새면 건드리고 돌아오긴 충분해.”
연사구는 바로 핏대를 올리고는 쏘아붙였다.
“이 새끼가 지금 뭐라는 거야! 인마! 그 잘난 머리는 어디다 두고 그런 멍청한 소릴 지껄여! 기습이야 한다고 치고 그다음은 생각 안 해?”
“아무리 감춰도 난 줄 안다 이거지?”
“입 아파, 이 새끼야. 혼자서 그렇게 박살 내면 누가 봐도 널 의심할 거고, 또 넌 줄 티 안 나게 깨부술 정도면 물러서겠어? 뭐, 아예 싸움에 불 지를 거면 확 그렇게 해 버리든가.”
“난 줄 모르게 하면?”
연사구는 눈을 껌벅였다. 무윤의 진중한 표정이 장난이 아님을 알린다. 또 뭔가 방안이 있음도.
“방법이 있어?”
“있다.”
“뭔데?”
“절대급 마인으로 위장해서 공격하는 거.”
“……마인?”
“그럼 난 줄 모를 거고, 귀주에 아직 마인들이 남아 있는 게 되는데 이 전쟁에 집중 못 하지. 돌아갈 수밖에 없을 거야.”
“……?”
전쟁을 원천적으로 차단할 방안을 고민하다 팔찌를 보고 떠오른 생각.
‘마인이 귀주를 공격하는 상황을 만들면?’
제집에 적이 쳐들어왔는데 누가 밖의 싸움에 신경 쓸까. 그래서 여휘의 초극기를 이용해 절대마인으로 분장한 다음, 쓰레기나 다름없는 귀주 무가들을 급습하기로 마음먹었다.
또 그 결정엔 다른 이유도 있다.
‘천마교에 가기 전에 초극기를 제대로 다루자면 이만한 기회도 없어.’
혈교 혈천대와의 싸움에서 느낀 초극기는 그 자체로도 절대의 힘, 거기에 신기심의공이 더해진 강함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알려진 천마교의 최강자는 장로원 태상.
‘현경급이라고 했지.’
거기에 교주는 화경 중반을 훨씬 넘어섰고. 그 외에도 감춰진 강자가 얼마나 더 있을지 모른다.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선 초극기의 완벽한 운용은 필수.
아무리 생각해도 의아한 하후진이 껴들었다.
“다 좋은데, 그럼 절대 마인으로 보일 마공이 있어야지. 그건 어떻게 하려고?”
“속일 만한 게 있어.”
“그게 가능해? 엄청난 마기처럼 보여야 하는데.”
“네 힘 중에 분노의 기운 알지?”
“……아는데 그건 마기와는 느낌이 다른데?”
적당히 거짓말을 섞어야 할 때.
“거기다 천마교 야율혁한테 들은 걸 조금 가미해 봤어.”
“그래도…….”
“보고 얘기하자.”
“……?”
우우웅! 샤아아아!
말이 끝나기 무섭게 뭔가 끈적끈적하게 몰려오는 기운, 하후진은 갑자기 엄습한 오한에 몸이 부르르 떨렸다. 바로 눈이 커다래졌다.
‘달라. 그땐 두려움만 들었는데.’
뭔가 음습하고 사이하면서도 탁하지 않은 기운. 그동안 접했던 것과는 확연한 차이가 느껴진다.
스르르! 사아아!
시간이 갈수록 연사구의 표정도 괴이하게 바뀌어 갔다.
‘이게 도대체?’
이번에 형산에서 접했던 마인들, 그 수백이 뿜어낸 사악한 기운은 아직도 뇌리에 또렷이 남아 있는데.
‘비슷하면서도 달라. 더 정제된 기운 같기도 하고.’
뭔가에 홀린 듯 해답을 찾아 눈길은 이리저리 갈팡질팡했다.
그러길 한참, 서서히 몰려온 기운이 스멀스멀 불안함을 주던 어느 순간.
솨아아아! 샤아아아!
허공을 가득 메운 무자비한 경파가 물밀듯이 밀어닥쳤다.
연사구의 표정이 한순간 허옇게 변해 버렸다.
‘헉!’
두려움과 공포가 몰고 온 떨림이 전신을 휘감는 찰나, 갑자기 온몸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이, 이게.’
부르르!
그냥 떨림이 아니다. 의지와 상관없이 찾아온 경련에 온몸이 부들부들 요동친다. 단번에 바람에 절로 떠는 사시나무가 돼 버렸다. 어느새 이마에 송골송골하게 맺힌 굵은 땀방울이 줄기줄기 떨어진다.
격통이 찾아온 것처럼 머릿속도 하얗게 탈색된 듯 멍해졌다. 눈앞이 아득해지고 얼굴은 파랗게 질려 갔다.
평생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기분. 수많은 칼날이 스쳐 지나갔던 이번 마인과의 싸움에서도 긴장과 두려움은 있을지언정, 이렇게 무기력하게 넋을 놓아 보진 않았는데.
멍해진 중에도 문득 떠오른 생각.
‘이게 전장이었으면, ……죽었다.’
생각하기도 싫은 상상에 몸서리쳐졌다.
무윤의 공간 장악, 시험 삼아 그 기운에 한 번 들어간 적이 있다. 그때도 지금처럼 몸을 옥죄는 기운에 사로잡혔지만, 그래도 벗어날 의지는 충만했었는데.
지금은 꺼낼 의지조차 공포감에 손을 들어 버렸다. 그저 이 기운이 사라지길 바라는 염원만이 뇌리에 가득할 뿐.
그때 아랫도리에서 이상한 느낌까지 올라온다. 꽉 닫혀 있던 무언가가 서서히 풀려 간다.
순간 가슴속 저 밑에서 복받친 고함이 폭발했다.
‘이런! 시팔! 안 돼!’
온 마음 다한 염원이 의지를 일깨웠지만, 요지부동. 서서히 몸이 무너져 내렸다. 끝까지 버티던 무릎마저 무너질 찰나.
사라락! 스르르르!
무자비한 전율로 몸을 짓뭉개던 기운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털썩!
그대로 바닥에 몸을 떨구자마자, 벅찬 광희처럼 안도감이 물밀듯 밀려왔다. 두 사람의 거친 숨이 연달아 뿜어졌다.
“헉헉! 하아!”
“후우! 하아! 후!”
얼마 후 격한 숨소리가 긴 호흡으로 바뀔 즈음, 무윤의 입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괜찮아?”
순간 연사구의 머리 위로 퍼런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이 새끼! 가만두나 봐라!’
여차하면 오줌까지 지릴 뻔했다. 붉으락푸르락하던 얼굴에서 욕설 가득한 입이 열리려던 순간.
하후진이 먼저 짓쳐 들었다.
파파팟!
불끈 쥔 두 주먹과 함께 짓씹은 입술 사이로 울화가 터져 나왔다.
“야! 이 개새끼야!”
슈우욱!
마기가 옮아간 듯, 하후진의 부릅뜬 눈에선 귀화가 활활 타올랐다. 넘실넘실 솟구치는 기운엔 살의까지 더해졌다.
잠시 멈칫하던 무윤은 도망가는 걸 포기했다.
‘피했다간 큰일 난다.’
이럴 땐 맞는 수밖에 없다. 고의는 아니었지만, 자신도 잘못했으니까. 반대할까 봐 좀 강하게 힘을 꺼낸 게 실수다.
“너 이 새끼 오늘 가만 안 둬!”
“진아, 그게 그러니까…….”
“닥쳐!”
“…….”
하후진은 달려온 그대로 냅다 주먹을 휘둘렀다.
슈우욱!
살짝 구부린 무윤의 몸 위로 주먹이 작렬했다.
퍽! 팍! 팍팍!
연이어 달려온 연사구도 합세했다. 우선 놈에게 경고할 게 있다.
“너 호신강기 두르면 뒈진다!”
“…….”
들끓는 분노를 가득 담은 주먹이 등을 찍어 갔다.
슈우욱! 퍽! 퍽퍽!
어느새 초식도 사라진 막 주먹에 용암처럼 들끓는 원성이 더해졌다.
“이 개새끼야! 너 때문에 내가! 아우!”
“…….”
“이 우라질 새끼! 대충하고 끝냈어야지. 이게 무슨 꼴……. 아니 하여간 맞자. 넌 좀 맞아야 돼!”
“…….”
퍽! 푸욱! 팍팍! 푸욱!
얼마 후, 소란이 진정되고 셋 다 바닥에 퍼질러 누웠다. 바람 탄 햇살 구름이 빠르게 허공을 지나가자 무윤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바람이 좋다.
‘금방 마르겠어.’
물론 기운을 둘에 집중한 탓도 있지만 어쨌든 초절정급 무인이 오줌을 지릴 정도다. 그것도 하후진은 좀 심할 정도로.
‘검증도 확실히 됐고.’
물론 그 때문에 열받아 달려온 놈들이라 맞아 줘야 했고.
‘나라도 그랬을 테니까.’
분이 좀 가라앉자, 연사구의 말문이 진중하게 열렸다. 생각하면 할수록 불안해진다. 너무나 강렬한 기운이니까.
“그거 마기 같은 게 아니고, 마기 아냐?”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너 그거 알지? 정, 사 고수 중에도 마공 시험한답시고 몸에 직접 심었다가 골로 간 놈 많은 거.”
“걱정하지 마라. 이건 몸에 있는 게 아니니까.”
“뭐? 그럼?”
팔찌 덕분이라고 할 수는 없으니.
“외부 기운을 잠시 빌린 거야. 바로 빼내면 몸에 하나도 안 남는다. 확인해 보든가.”
“……팔 줘 봐.”
“자.”
한참 내력을 살피고 나서야 연사구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야! 그거참 신기하네. 아주 말끔해.”
“이제 됐지?”
이러면 구체적인 계획을 물어야 한다.
“당연히 혼자 움직여야 할 거고.”
“그래야지.”
“그 정도 마기면 널 의심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딴 데 있었다는 증빙이 있는 게 좋은데.”
“우선 공동선언부터 하고 돌아가는 상황보고 생각하자고.”
“그게 좋겠네.”
몇 가지 논의가 더 이어질 즈음, 하후진은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그 마기 막 넣다 뺐다 할 수 있다고 했지?”
“응.”
“남한테 넣을 수도 있어?”
“안 해 봤는데 가능할 거야. 왜?”
“약하게도 가능해?”
“그럴걸.”
“나 해 보면 안 될까?”
“……왜?”
“너 나중에 천마교 가 본다며? 나도 가 보고 싶었거든. 그걸로 마인 흉내 내면 문제없잖아. 얼굴은 역용하면 되고.”
연사구의 입꼬리도 확 올라갔다.
“크크! 그거 괜찮네. 나도 정말 궁금했는데. 우리 해 보자.”
무윤은 단호히 고개 저었다.
“안 돼. 너흰 이거 못 견뎌. 겪어 봤으면서 그래?”
“약하게도 된다며? 우리야 조금 보일 정도면 되잖아.”
“……!”
마기를 조율하는 게 문제가 아니다.
‘이놈들을 데리고 천마교로 간다고?’
절대 안 될 일이다.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그런데, 눈초리가 심상치 않다.
천마라 불린 내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