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격한 숨이 잦아들 즈음 그윽한 서연의 시선이 무윤을 향했다.
“고마워요.”
“뭐가 말입니까?”
솔직한 마음이 내린 답이 흘렀다.
“그냥 이거저거 다요.”
“……!”
서연은 무윤이 왜 이 자리를 만들었는지 이젠 안다. 또 중단전을 열고 사흘이 지난 오늘 그런 이유도.
그래도 먼저 듣고 싶었다. 다른 궁금한 것도 있으니까.
“묻고 싶은 게 많네요.”
“뭐부터 할까요?”
“같이 추자고 한 이유는 알겠어요. 중단전은 몸의 근원, 한번 들어선 이상 무공이든 춤이든 상관없이 멈출 수 없다는 거, 그거 알려 주려고 그런 거죠?”
내력을 봉인했음에도 중단적의 흐름은 미약했지만, 그 생명력을 알렸다.
“예, 중단전은 인간의 생명력 그 자체라 스스로 더 나은 삶을 찾아가는 건 본능입니다. 생이 지속되는 한 의지로 막을 수 있는 게 아니죠.”
서연은 이 부분에선 결심을 굳혔다. 무윤의 말마따나 중단전의 의지를 춤으로 확실히 느꼈으니까.
“바른길로 가기 위한 가르침은 해 주세요. 고맙게 받아들일게요.”
서연이 결정을 내린 이상 무윤은 한 가지만 덧붙이면 된다.
“아시겠지만 무공과 춤의 이치를 완전히 구분할 순 없습니다. 다만 걱정하시는 문제는 안 생기게 최대한 조율하겠습니다.”
“부탁드려요.”
“달리 궁금한 건?”
이 질문도 대략 감은 오지만 확실치 않은 게 있다.
“전 같이 추자고 했을 때 바라타나티암을 생각했는데 그냥 몸이 이끄는 춤을 하셨어요. 아마도 제가 불무나 바라타나티암 모두 의무감이 앞서서 시작한 거라, 춤 자체의 즐거움을 느껴 보라고 그런 거겠죠?”
“맞습니다. 몸과 마음이 일체되는 게 중단전을 알아 가는 최선이니까요.”
“내력을 봉인한 것도 그래서?”
“예, 아무래도 내력 없이 느껴야 더 순수하게 다가올 거 같아서요.”
“그랬던 거 같아요.”
그 후로도 몇 가지 질문과 중단전 수련에 대한 설명이 한참을 오고 갔다.
그리고 산을 내려가던 즈음.
뒤따라가던 무윤은 서연 몰래 그동안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었다. 아주 기다란 안도의 한숨을.
‘휴! 일이 잘됐기에 망정이지.’
서연에게는 모든 걸 계획한 대로 시연한 것처럼 말했지만.
다 거짓말이다.
처음 짰던 계획은 서연이 올라오는 그 순간 다 틀어져 버렸다.
원했던 결과가 나와 다행일 뿐이지.
‘생각대로 된 게 하나도 없어.’
또 전혀 생각도 상상도 못 했던 고민이 생겨 버렸다. 혼란의 한숨이 그냥 쉼 없이 흐를 정도로.
‘이게 도대체!’
오늘 목적은 서연에게 중단전의 가르침, 그 허락을 받아 내는 것.
최초 생각한 방안은 내력을 교류해 감각을 극대화해서 중단전의 본질부터 알리려고 했다. 그럼 배워야 한다는 걸 그녀가 자각하니까.
그 후에 차근차근 설명해 주려고 했는데.
서연이 올라오다 하도 오랫동안 멈칫멈칫하기에 무슨 일이 있나 싶었다.
그 의아함에 몰래 서연의 내면 울림을 살피던 어느 순간.
충격 그 자체의 광풍이 밀어닥쳤다. 경악을 넘어선 놀람이 생각이란 자체를 막아 버릴 정도의 혼란과 어질함.
한참이 지난 지금까지, 아직도 흥분으로 날뛰는 머릿속은 진정되지 않았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 잘게 떨리는 눈, 얼어붙은 입매, 시린 등골, 절로 삼켜지는 마른침.
그 모든 것이 혼란에 날뛰는 머릿속을 멍하게 만든다.
그건 서연이 여리게 뿜어낸 기운의 색 때문이다.
짐작은커녕 전혀 생각도 예측도 못 했던 기운. 따스함과 애틋함, 애절함, 설렘이 동시에 섞인 그 이상야릇한 울림.
그 내면의 아련한 색이 옅은 향기로 다가왔었다. 그 누군가 마음의 빗장을 한 발짝 넘어서 슬며시 다가올 때, 그 선을 넘어와 아림을 전할 때, 발이 없어도 길이 없어도 소리 소문 없이 다가와 그 안에 살짝 똬리를 틀 때 느껴지는 기운.
볼이 빨개지고 가슴은 두근거리고 생각할 때마다 마음을 살랑살랑 홀리는 그것. 꽁꽁 얼었던 마음에도 한순간 새싹을 돋게 하는 그것.
아침 시린 살 속으로 파고드는 햇살처럼 따사로운 그것은.
설익은 연정이다. 풋풋함 그대로 살짝 향기만 배어 있는.
그 기운을 모를 수 없다. 아니 착각할 수가 없다. 무윤 스스로 느껴 본 적은 없지만, 주변에 많은 이들, 서로를 조심스럽게 알아 가는 많은 남녀에게서 수없이 맡았으니까.
그때마다 상큼하고 싱그러운 웃음이 절로 올라왔으니까. 결코 모를 수가 없다.
그녀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아주 미약했지만, 풀잎 나부끼는 바람결처럼 스치고 지나갔지만, 발길을 못 잡은 서연에게선 분명 그것이 느껴졌었다.
그 충격이 몰고 온 혼란에 머릿속까지 멍해질 즈음, 서연이 마음을 다잡았는지 힘차게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그 순간 중단전 내력을 교류할 생각은 버려야 했다.
‘절대 안 돼!’
아니면 내 가슴이 쿵쾅거리는 걸 그녀도 알게 되니까. 무슨 이유인지 그녀는 모르겠지만, 얼버무릴 수도 있겠지만, 마음은 단호히 거부했다.
내 기운도 아니지만, 그녀의 기운에 놀란 가슴이지만, 발가벗은 내 몸을 보이는 기분이었으니까.
또 그 혼란스러운 기운으론 그녀를 설득할 수도 없었다.
갈피를 못 잡고 헤매던 그때 문득 떠오른 건 유선이었다.
‘그래! 유선이 처음 보여 줬던 춤!’
춤이 궁금해 찾아갔을 때, 옷을 갈아입고 온 유선이 춤의 즐거움을 알려 줬던 그 기억. 춤 자체의 본질이 뭔지 처음 알게 된 그때가 떠올랐다.
그래서 급히 내력을 봉인하고 몸이 원하는 대로 춤추기로 한 것인데. 유선의 그 환했던 웃음이 생각나 절로 미소 짓게 되면서부터 다행히 잘 먹혀들었다.
계획은 완전히 틀어졌지만, 결과는 원하던 대로.
문득 앞서 내려가는 서연의 뒷모습이 눈 한가득 들어왔다. 부담을 다 털어 버렸는지 풀잎 저미는 발끝이 가볍다. 하늘거리는 옷자락이 바람에 가벼이 나부낀다.
마음의 색 또한 평온함 그 자체다. 아까의 그 색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에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심사가 가득 담겼다. 내려가는 내내 초조함과 조바심이 올라온다.
물론 아직 채 발아하지 않은 싹이라 바로 사라질 수도 있다. 하지만.
‘저게 만약 커지면, 그녀가 알면?’
생각하기도 싫은 상상에 몸서리쳐졌다. 절로 마른침이 꿀꺽 삼켜지고 온몸의 털이 바짝 서 버렸다. 이전 생을 통틀어 한 번도 느껴 보지도 고민해 보지도 못한 것인데.
생각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막연한 위기감이 온 뇌리를 휘저었다.
그러길 한참 무윤은 심중의 불안과 걱정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최근에 많이 도와줬어. 그 때문에 잠깐 그런 거겠지.’
그래도 불안했다. 그 위기감은 해결책을 떠올리게 했다.
‘가르치는 것도 며칠에 몰아서 빨리 해 버리고 좀 떨어져 있자. 그럼 사라질 거야. 당연히!’
그렇게 마음먹자 놀란 가슴도 바들바들 떨리던 몸도 그새 안정을 되찾았다.
‘그래! 그러면 돼.’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커다랗게 쉬어졌다. 입 밖으로.
“휴!”
그때 앞서가던 서연이 뒤돌아섰다.
“무슨 걱정 있으세요?”
또다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아! 아닙니다. 그냥 이거저거 생각하다가.”
“……?”
쓸리는 낙엽 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말없이 천천히 길을 내려갔다.
여인은 편안함 가득한 마음으로, 또 한 사람은 불안함 가득한 채로.
그런데 무윤은 몰랐다. 자각하지 못했다.
서연의 마음속 싹을 살피느라, 그 놀람에 경황이 없어서.
비슷한 싹이 자신 속에도 슬며시 자리 잡고 있음을.
정말 몰랐다.
자신은 제 머리 못 깎는 중이 아니라, 머리카락이 있는 줄도 모르는 중이란 걸.
과거 수십 년 노인이었던 과거의 관념이, 채 오 년밖에 안 된 지금을 넘어서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다른 건 몰라도 적어도 여인에 대해선.
아직 조금 더.
* * *
다음 날, 형주 하오문 지부.
“그놈들 말대로 오대세가하고 사야홀 일이 터졌어.”
“반응은 어때?”
“지금 막 나온 거라 두고 봐야지. 하여간 내용이 정말 자세하고 정확해서 파장이 만만치 않을 거야.”
당서하가 급한 마음에 나섰다.
“우리 가문에선 뭐래?”
“지금 터졌는데 이천 리나 떨어진 사천 소식이 벌써 들어왔겠어요?”
“하긴! 멍청한 질문이네.”
연사구의 표정이 진중해졌다. 이번 사안은 아무리 당문이라 해도 작게 볼 게 아니다.
‘상황을 정확히 알려 줘야 마음의 준비를 하겠지.’
당서하를 보는 눈에 빛을 더하고는 말문을 열었다.
“우선 알아본 것부터 말씀드릴게요.”
“그래? 뭔데?”
“가장 심각한 건 서문가죠. 지금까지 몰래 해 온 게 거의 드러났으니까.”
“어떨 거 같은데?”
“모르긴 해도 최소한 오대세가에선 물러나야 될걸요. 그걸로 끝날지도 모르겠고.”
“그리고?”
“남궁도 골치 아플 거예요.”
“왜?”
“이번에 가주가 한 짓이 다 까발려졌잖아요. 남궁이 어딥니까? 천하제일가문에다 맨날 의기천추(意氣千秋)를 떠벌리는 곳인데.”
이번 폭로에는 가주 경쟁자였던 남궁천우를 제거하기 위한 계략이 상세히 들어 있다.
당서하의 눈이 깊어졌다. 남궁에 대해선 이중 누구보다 잘 아는 그녀다.
“지금 남궁 가주에 도전할 내부 세력은 거의 없어. 사실로 판명돼도 경쟁자였던 남궁천우도 죽어 버렸잖아. 좀 떠들다가 유야무야 끝날 거야.”
순간 연사구의 눈에 섬광이 스쳐 갔다.
“그 아들은 있잖아요. 남궁사현.”
당서하에게는 남궁사현의 일을 알리지 않았다.
“인마! 너한테 깨진 소문이 강호에 다 퍼졌는데 어떻게 나서겠어? 또 그게 아니더라도 가문에서 세력도 별로 없어.”
“그래도 혹시 모르죠.”
“남궁은 됐고. 그보다 다른 세 곳은?”
“당문, 팽가, 제갈도 삼십 년 전 일엔 모두 책임이 있잖아요. 다만 그 후로 직접 한 건 없고 자료만 받았으니까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눈치 보는 모양이에요. 아! 팽가는 아예 그것도 안 받아서 좀 나은 편이고.”
“그 정도면 시간이 문제지, 해결되지 않을까?”
“그건 그런데 정작 심각한 건 다른 거죠.”
“어떤?”
“누가 이 사태를 가장 즐길까요? 사파? 천마교? 혈교?”
당서하의 표정이 우뚝 굳어졌다. 가장 무서운 적은 언제나 가까이 있는 법.
“구대문파겠지.”
“맞아요. 어떻게든 일을 키우려고 자기들끼리 머릴 맞대는 모양인데 조만간 뭔 얘기가 나올 겁니다.”
“어떨 거 같은데?”
“저도 모르겠어요. 그 능구렁이 속을 들어가 봤어야 말이지.”
당서하의 깊은 한숨이 더해질 즈음, 무윤이 화제를 돌렸다.
“사도련 사야홀은?”
“벌써 대응에 나섰는데 빤하지. 마인을 상대하려고 그랬다, 계속 그 주장이야. 물론 다들 안 믿는 분위기고.”
둘 모두 이미 예상했던 일. 가장 걱정되는 걸 꺼내 들었다.
“다른 무가들 반응은?”
연사구의 눈이 깊어졌다.
“당장이야 별거 없는데 다들 숙덕거리지. 마공에 뭔가 있으니까 서문가나 독고가가 그런 거라고. 이러다 연구할 만한 마공서 하나 나오면 난리 날 거야.”
“누군가 그런 걸 꺼내 놓을 수도 있고.”
“휴! 그러겠지.”
이제 가장 큰 걱정거리를 물을 때다.
“강호 상황은 어때? 특히 서북쪽.”
“거긴 이미 한바탕 정사 대전이 벌어지고 소강상태였는데, 혈교 부대가 몇 번 쳐들어왔어. 아직 전면전은 아닌데 어찌 될지 모르니까 무림맹하고 사도련도 신경을 곧추세우고 있더라고.”
“다른 데는?”
“정, 사 간 분쟁은 어디나 다 생겼는데, 그래도 동남쪽하고 사천은 조용한 편이고 중북부는 갈수록 더 커지고 있어.”
중북부는 중원 무가가 가장 많이 몰린 곳. 그곳 싸움이 커지면 언제든 중원 전체로 퍼지게 돼 있다.
“심각하네.”
“호북도 마찬가지라 언제 여기 호남까지 영향이 올지 몰라. 우선 이번 귀주하고 전쟁부터 막아야겠지만.”
남은 건 다급한 현안. 귀주 상황을 챙길 때다.
천마라 불린 내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