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화
천가장 뒤편 낮은 산등성이.
석양빛 노을이 산마루 너머 영롱했던 금빛을 감춰 갈 즈음.
휘이익!
여린 가지 흔드는 소슬한 산바람이 능선 따라 살랑였다. 그 옆 골짜기 따라 잔잔히 흐르는 시냇물 소리가 서연의 귓가를 맴돌았다.
문득 쳐다본 눈엔 둥둥 떠내려가는 붉은 꽃잎이 달빛에 아롱진다. 머리카락 흩날리던 바람이 더한 상념을 팔랑이던 꽃잎이 일깨웠다. 속 깊은 한숨이 입가를 헤쳐 나왔다.
‘후! 어떡하나?’
이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무윤이 먼저 가 있겠다는 곳에 다다른다.
천가장을 나와 여기까지 가장 느린 걸음으로, 또 잠깐잠깐 멈춰 하늘도 바라보고, 흐드러지게 핀 들녘의 꽃에 얼굴을 들이밀어 향기도 맡아 보며 속을 헤아렸지만.
‘모르겠어. 어떡해야 할지.’
답을 찾지 못한 걸음은 그새 또 멈춰 어둠 따라 오는 달에 시선을 가게 한다.
문득 낮에 대련할 때 당서하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고개를 수차례나 갸웃거리면서, 의아한 시선 그대로 뚫어지게 전신을 훑어 대면서.
-도대체 며칠 전에 뭘 얻은 거니?
-왜요?
-정말 몰라서 물어?
-전 잘…….
-내력이 늘거나 기세가 달라진 거면 내가 이해하겠어. 근데 이건 뭐랄까, 아! 그래! 어릴 적 교관 숙부가 내 수준에 맞춰서 대련해 주는 느낌. 딱 그거야. 최소 두 단계 위인 고수가 가르칠 때. 너 혹시 초절정 상에라도 올랐니?
-무슨 소리예요? 저 초절정에 오른 지 일 년 된 거 아시잖아요.
-아니까 하는 소리지. 방금 네 모습은 내 검이 어디로 올지 이미 알지만, 맞춰 주는 느낌이었어.
-기감이 좋아진 건 맞아요. 매번 대련하다 좀 달라져서 그렇게 느꼈을 거예요.
-그런가? 난 아닌 거 같은데.
거기서 넘어가긴 했지만 당서하는 게슴츠레한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었다. 물론 그건 정확하고 합리적인 의심이고.
‘초감각과 초극의 움직임이 이 정도일 줄이야.’
혼자 수련하던 삼 일 전엔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검 끝의 미묘한 떨림의 차이까지 손 따라 올라와 온몸에 알려지던 그 순간의 짜릿함. 절정과 초절정의 벽을 넘을 때만큼 광휘의 격정으로 다가왔었다.
거기에 몸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됐다 싶어 당서하와 벌인 대련이었는데.
‘찰나의 차이, 그게 이 정도라니.’
초감각 덕에 향상된 동체시력(動體視力)과 기감, 거기에 더해진 초극의 움직임. 그로 인해 이제껏 약간의 우세였던 당서하를 상대하는 내내 속으론 여유가 넘쳐흘렀다.
그걸 제대로 못 감춘 걸 당서하가 알아챈 것이고.
‘당분간 언니한테도 감출 수밖에.’
무윤이 절정 중반으로 보일 때 초절정 실력을 보인 게 그제야 실감이 됐다. 이 정도면 한두 단계 위 고수보다 내력과 경험이 부족할 뿐이지 기감에선 못할 게 없으니.
그 탓에 올라가는 발걸음은 더욱 느려져만 갔다.
터억! 투욱!
물론 최종적으론 무윤이 권한 춤을 춰 보고 결정하겠지만, 벌써 두려움이 앞선다.
‘후! 올바른 결정을 할 수 있을까?’
무인으로서 욕심은 뭐가 됐든 받아들이라고 아우성친다. 또 무인의 열정은 명분에서도 당당하다고 주장한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의 이치를 궁구하고 도(道)를 좇는 구도(求道)에 가려야 할 배움은 없다. 또 무공을 배우는 것도 아니고, 춤을 통해 스스로를 깨닫는 경험과 가르침인데 못 받아들일 건 없어.’
혹 그중의 일부를 무공에 쓴다 해도 정해진 구결이나 주해로 전해 받은 게 아닌 이상, 원칙적으로 사문의 법도에도 어긋나지 않는다.
한데 그럼에도 주저하게 되는 이유. 우선 무윤의 속마음이 환히 보인다.
‘춤의 길이라 해도 천 공자는 분명 가능한 한 많은 걸 알려 주려고 할 거야. 그래야 내가 안 다친다고 생각하니까.’
물론 그 또한 엄밀히 따져 봐도 큰 틀의 가르침이면 문제 될 게 없다.
또 이젠 무윤이 어떤 사람인지도 안다.
‘마음을 터놓은 사람들에겐 한없이 베풀어 주려고 하지. 이미 나도 그 안에 들어가 있고.’
그런데 왜? 어째서? 냉철한 이성으로 이 모든 상황을 분석해도 문제없는 게 확실한데 왜 주저하게 될까?
서연은 그 답을 이렇게 찾았다.
‘이렇게 받기만 해도 되는 걸까? 마음으로만 보답해도 되는 걸까? 또 난 이런 걸 받을 자격이 있을까? 내가 천 공자에게 뭘 해 줬다고.’
스스로 생각해도 자격지심 같기도 하고, 미안함에 고마움에 든 사양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또 언제나 기대기만 해선 안 될 거 같기도 하고.
그 마음 탓에 결정을 못 내리길 한참, 서연은 결국 당초의 생각을 떠올렸다.
‘가 보자. 가서 해 보고 결정하자.’
지금으로선 이게 최선의 답이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사사삭!
* * *
구름 사이사이를 뚫은 달빛이 흐릿하게 지면을 저어 갔다. 언덕 군데군데 달빛 오물거림에 어둠과 빛이 휘돌아 공존했다.
그때 약속 장소에 도착한 서연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응? 벌써?’
휘이익!
하늘 향한 소맷자락 흩날림으로 바람을 손짓하는 이.
한 걸음 짚어 뗀 다른 발에 온몸이 놀려지자, 하늘거리는 무복 자락이 허공에 뿌려진다.
사라락!
서연은 바로 인기척을 내려다 의아함에 발길을 멈춰 섰다.
‘이상하네.’
평소에 보던 춤과 확연히 달라 보이는 이유.
‘느껴지는 기운이 없어. 중단전 내력을 전혀 안 쓰는 거 같은데.’
천라칠상무(天羅七想舞)라 이름 지은 무윤의 춤. 인간의 칠정(七情) 모두를 섞어 풀어 낸 춤이라 했다.
그래서 옆에서 보고 있자면 춤사위와 상관없이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여러 감정이 기운에 담겨 전해지는데, 지금은 그 어떤 것도 감지할 수 없다.
‘기다리다 지루해서 그냥…….’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땀이 송골송골하게 맺힌 무윤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떠오르는 의문.
‘땀?’
화경의 무인이 땀이라니. 그것도 그냥 춤사위일 뿐인데. 의아함에 살펴보길 한참, 가빠진 무윤의 숨소리가 확연히 들릴 즈음에야 짐작이 됐다.
‘내력을 안 쓰는 게 아니라 아예 봉인했어.’
그건 곧 몸 안의 어떤 기운도 배제한 채 순수한 체력만으로 춤추고 있다는 뜻.
‘뭐 하는 걸까?’
초절정 무인도 때론 저런 수련을 하니까 그 자체는 이상할 것도 없다. 다만 자신이 온 걸 알면서도 멈추질 않는다는 건.
‘보라는 뜻 같은데.’
그 확신이 들자 걸음을 멈추고는 가만히 시선을 고정했다.
휘리릭! 사라락!
그러길 한참 춤은 조금씩 신명을 더해 갔다. 하지만 힘에 부치는지 어깨춤 너울거리는 동작도, 바닥을 쓸어 대는 발 디딤새도 다소 거칠어 보인다. 힘차게 허공에 뿌려진 손도 부드럽지 않다.
서연의 입가에 엷은 미소가 사르르 흘렀다.
‘처음이야. 저런 모습은.’
춤뿐만 아니라 무공 수련 때도 전혀 보지 못했던 광경. 첫 만남을 제외하고는 언제나 완벽하게만 보였던 무윤인데.
오늘따라 저 흐트러짐이 싱그럽게 다가온다. 항상 저만치 앞에 있던 사람이 바로 내 옆에 있는 느낌이랄까.
그러다 문득 떠오른 의구심.
‘저게 무슨 춤이지?’
특별한 형(形)이 보이질 않는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느낌대로 그냥 풀어 내는 춤 같다.
그 의아함에 눈이 깊어지던 어느 순간.
“하아!”
거친 호흡을 연신 뱉어 내는 무윤의 얼굴이 눈 한가득 들어왔다. 그때 그의 입가에 흐르는 미소에 시선이 고정돼 버렸다.
‘저런 미소는 처음 보네.’
무윤의 미소는 언제나 은은하고 그윽했지만, 밝다고 할 순 없었다. 항상 그 내면에 뭔가 있음을 알리는 표정이었는데.
‘오늘은 정말 티 한 점 없이 맑고 환해.’
절로 지어지는 아이의 웃음꽃 번진 미소처럼, 그 상큼함이 낯설게 다가온다. 의문도 따라온다.
‘원래 저렇게 웃을 줄 알았나?’
그 호기심 더한 서연의 눈빛이 초롱초롱 빛을 더해 갔다.
그렇게 산자락을 쓸어 대던 몸짓이 연이은 장단을 불러올 즈음, 발갛게 상기된 서연의 뺨이 가볍지 않은 흥분을 알렸다.
‘흥이 나.’
눈앞에서 출렁인 춤사위가 한동안 파도처럼 넘실거리자, 어느새 눈에 익숙해진 장단이 어깨에 흥을 담고 몸에 스며든 신명은 심장을 간지럽혔다.
사라라! 스르륵!
절로 흥얼거려지는 콧노래가 몸을 울리고 어깨를 들썩인다. 그렇게 흥 담긴 흐느적거림이 온몸에 퍼질 때쯤, 알싸한 두근거림이 마음을 부추겼다.
‘춤추고 싶어.’
나도 저곳에 있으면.
세상 다 가진 듯 싱그러운 무윤의 미소도, 손끝 하나 여린 놀림으로 허공을 헤치는 상쾌함도 내 것이 된다.
아니 같이 나눌 수 있다.
그때 하늘 향한 날갯짓에 가득 담긴 무윤의 마음이 다가왔다. 너울처럼 허공에 넘실거리는 소맷자락이 손짓했다.
나오라고. 같이 추자고.
바람 가득 안은 돛처럼 마음이 부풀었다. 꽃잎 따라 불어온 실바람도 몸에 속살거렸다. 빨리 나가라고.
문득 불무(佛舞)를 배운 지 얼마 안 됐을 때 일이 떠올랐다. 가르치던 사숙 경혜에게 누군가 물었다.
-사숙! 저희는 불무 말고 아무 춤이나 추면 안 되는 거죠?
-아무 춤이라! 우리 사질이 생각하는 아무 춤이 뭘까?
-음! 그냥 형식도 없고 자기 맘대로 막 추는 거요.
-그런 춤이라면 상관없단다.
-예? 그런 거는 보기도 흉해서 불자가 하는 건 좀…….
-흉하면 어떠하냐. 네 삶의 몸짓이 담긴 것이거늘. 이 사숙이 처음에 뭐라 했지? 춤은 몸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실현하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했었지?
-예.
-또 삼라만상(森羅萬象)의 본질을 깨닫기 위해선 뭐부터 알아야 한다고 했었니?
-자신 스스로요. 그래서 수양하는 거고.
-그래. 한데 삶의 몸짓이 그대로 담긴 춤은 자신의 내면을 표현해 스스로를 알려 준단다. 곧 받아들이기에 따라 자기 수양이 되지. 해서 그 마음을 잃지 않는 한, 내 본질을 드러내는 그런 현상의 춤은 언제든 춰도 된단다. 아니 난 해 보라고 권하고 싶구나.
-……!
이미 결심하고 온 자리에 옛 기억이 더해지자 망설임은 없었다. 마음을 이어받은 발이 사뿐히 앞을 나섰다.
바람 따라 살랑살랑 불어온 향기가 발길을 이끈다.
사삭! 사삭!
흥이 가득했던 무윤의 입가게 그윽한 미소가 더해지는 게 보였다. 자신을 반기는 기꺼운 웃음. 말이 필요 없다.
서연도 내력을 봉인했다. 장단을 맞추자면 그게 좋다.
잠시 후, 드높게 뿌려진 네 개의 손끝이 허공을 허우적거렸다.
휘리릭! 사라락!
머릿속에 있는 바라타나티암의 형(形)은 꺼낼 필요도 없다. 지금은 그 어떤 형식도 필요 없으니까.
오직 온몸을 움직여 표현할 뿐이다. 꺼낼 뿐이다, 나 스스로를.
심장의 고동에 맞춰 몸의 장단을 타고, 그 틀 안에서 나오는 흥 그대로 꺼내면 그만이다. 몸이 원하는 장단을 타면 그뿐이다.
몸에 내맡기는 춤은 삶의 몸짓이자, 사람의 본능이자 생명력 그 자체, 거기에 몸을 던지면 그만이다.
거기에 하나만 더하면 된다. 내 옆에 있는 자와의 호흡.
내력을 봉인한 지금 그 어떤 기운의 공유도 없지만, 흐름에 내맡겨진 몸은 자각한다.
그저 저 하늘 향한 상대의 몸짓에 나도 장단을 맞추면, 각자의 흥이 팔락이는 옷자락 따라 서로에게 흐른다는 걸.
지금은 절로 돋는 흥에 몸을 내맡기면 그만이라는 걸.
그렇게 디딤과 돋움의 발걸음이 함께하고 서로의 손짓 따라 장단을 맞추길 한참.
어느덧 상대의 춤사위는 눈앞에서 물결치는 잔잔한 파도로 넘실거렸다. 하늘 향해 팔 벌린 날갯짓은 서로를 연결하려는 몸짓이 됐다.
사라락! 화라락!
바람 탄 손 너울 사이 넘나들던 바람이 얼굴에 맺힌 땀을 조금씩 허공에 흩뿌려 갔다.
얼마 후, 몸 안의 모든 걸 꺼낸 몸짓이 힘겨워질 때쯤, 청산 깊은 숲에 연이어 펄럭이던 소맷자락이 서서히 날갯짓을 거둬들였다.
사라라!
허공을 가득 메웠던 몸짓은 격한 가슴의 울렁임만 남기고, 해묵은 찌꺼기는 날리는 바람이 어디론가 쓸고 가 버렸다.
동시에 두 사람이 털썩 주저앉았다.
한동안 그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
“…….”
지금은 말이 필요 없다.
적어도 온 마음 다한 이 흥이 가라앉을 때까지는.
가슴 떨림에 남은 즐거움의 여운이 가시기 전까지는.
춤추던 대지엔 흐드러지게 핀 들녘의 꽃향기가 바람에 넘실거렸다.
사라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