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류선화의 질문은 계속됐다.
“아! 그럼 해적들이?”
“예, 그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저 혼자만…….”
“에고! 미안해요. 내가 괜한 말을 꺼내 가지고…….”
“아녜요, 이젠 다 내려놓은 일인걸요. 괜찮아요.”
“……저기 그럼 가까운 친척들은?”
순간 서연의 눈가에 씁쓸함이 화살처럼 스쳐 갔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친척이라 할 분들은 없어요.”
“……!”
이번엔 어머니 류선화 대신 누나 천소은이 나섰다. 딱딱한 분위기도 깰 겸 아까부터 정말 궁금한 게 있었으니.
“정말 나이가 서른하나?”
“예, 언니신데 말 편하게 하세요.”
“흠! 그럴까. 근데 피부가 어쩜 이렇게 뽀얗고 하얗지? 정말 부럽다.”
막내 천아현의 새초롬한 입가도 반짝였다.
“그러게요. 전 처음 볼 땐 제 또래로 봤지 뭐예요. 언니! 무슨 비결이라도 있어요?”
당서하의 장난기 더한 입이 살짝 비틀어졌다.
“애가 꿍쳐 놓고 얘기를 안 해. 열심히 수련해서 그렇다나 뭐라나. 하여간 나한테도 말 안 한다니까.”
류선화의 눈도 반짝였다. 그녀도 궁금했으니까.
“정말 그거예요? 호호! 그런 수련이면 나도 하고 싶어지네.”
당서하는 이참에 작심하고 나섰다.
“야! 이젠 솔직히 털어놔 봐. 도대체 뭘 먹어서 그런 거야? 아니면 뭘 발랐어?”
“언니는 나랑 같이 있었으면서 왜 그래요?”
“야! 밤에 혼자 뭘 하는지 내가 어떻게 알아?”
“진짜 아니라니까요. 저도 이유를 알면 가르쳐 드리지 왜 감추겠어요?”
“혼자 예뻐지려고.”
진서연은 황급히 손사래 쳤다. 허공에 높게, 높게.
“……아니라고요!”
한참 가벼운, 아니 여인들 입장에선 가볍지 않은 실랑이가 오고 갈 즈음, 류선화의 눈이 순간 아련해졌다. 아니라고 항변할 때 내젓는 진서연의 손이 눈 가득 들어와서다.
‘어쩜 저 고운 얼굴에 손이 저러다니.’
멸마단 대원에 초절정 무인이란 얘기는 들었지만, 막상 얼굴을 대할 땐 전혀 떠올리지 못했다. 한데 가녀릴 것 같은 그녀의 손은 투박하다 못해 거친 상처와 주름투성이.
손등은 가뭄에 쩍쩍 갈라진 듯 패였고, 그 틈 사이 주름은 검붉게 물들었다. 마디마디 굵어진 손가락 여기저기엔 칼날에 베인 붉은 상처가 도드라진다.
자신처럼 삶은 흔적이 만든 주름과 상처가 아닌, 그 수많은 수련과 싸움이 만든 흔적일 터.
갑자기 목이 메어 왔다. 류선화 또한 무공을 익히지는 않았지만, 무가의 여인. 저 거친 손이 뭘 말하는지 어찌 모를까. 저 검붉은 손엔 서연의 삶이 담겼다. 혼자인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마인을 상대하는 전장의 처절함을 어떻게 감내해 왔는지, 그 손에 묻어났다.
문득 허공에 손사래 칠 때를 제외하곤, 소맷자락 사이로 손을 집어넣고는 탁자 아래 허벅지 위에 두 손 꼭 모아 쥔 그녀의 모습이 확연히 보인다. 아까 차를 마실 때 약간 어색했던 손놀림도 이제야 이해된다.
‘다도(茶道)를 몰라서 그런 줄 알았는데.’
문득 비슷한 행동을 취했던 당서하에게도 눈길이 갔다. 그녀의 손 또한 다를 바 없다. 투박함은 물론 취하는 태도도.
마인을 상대하는 철혈의 여무인들, 저 나이에 초절정이란 경지에 올라 강호를 오시하는 여인들. 어떤 무인 앞에서도 당당함을 잃지 않을 여인들. 그런 이들이 손을 가린다.
창피해서? 부끄러워서?
아니! 그럴 리 없다. 그런 데 신경 쓸 정신이 있다면 저 경지까지 가지도 못했을 터. 이유는 단 하나.
‘우릴 배려하는 거야. 저 손을 보면 어색해할까 봐.’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깰까 하는 걱정이다. 아들의 동료라 친근히 다가온 이들이 거리낌을 가질까, 다른 세상 사람이라 거리를 둘까 하는 조바심이다.
류선화의 눈길에 아련함이 물결처럼 출렁거렸다. 연민이 아닌 고마움과 애정이 담뿍 담긴 울렁임이다.
그 마음 담긴 잔주름 가득한 손길이 양옆에 있는 그녀들의 손을 잡아 갔다.
스르륵!
부드럽게, 살포시 쓰다듬고 어루만졌다. 흠칫거리는 두 여인의 표정이 보였지만 그윽한 미소로만 답했다.
“……!”
어루만짐은 계속됐다.
사르르! 스르륵!
그녀들의 열정에 보내는 찬사이자 고마움의 표시엔 어느새 따스함이 묻어 들었다. 놀람에 머뭇거리던 두 여인도 어느새 잔잔한 미소로 화답했다. 류선화의 촉촉이 젖은 두 눈과 살포시 짓는 미소가 뭘 말하는지 알았으니까.
그제야 움츠려 꼭 모아 쥐려던 손을 풀어 냈다. 쓰다듬는 손에 모든 걸 내맡겼다.
류선화는 떨리는 숨으로 가만히 말끝을 흐렸다. 그저 하고 싶은 말은 이것뿐.
“우리 집에서 쉬었다 가요. 잠시라도…….”
“……!”
두 여인의 눈시울이 여리게 붉어졌다. 형언할 수 없는 가슴 속에서 치미는 뜨거운 뭔가가 그리 만들었다.
대놓고 마음을 울리는 말도 아닌데. 그저 쉬다 가라는 말뿐인데. 그런데 달리 느껴진다.
그저 잔잔한 매만짐으로, 촉촉한 살갗의 여운으로 단지 알고 있다고 속삭인다. 그 힘들었던 무게를.
귀에 똬리를 틀고 메아리치는 영혼의 숨결이 두 여인의 가슴에 조용히 흩뿌려졌다.
여인들의 소담한 두런거림은 이후로도 계속됐다.
* * *
천가장 정원.
가주실에서 나와 상념에 잠겨 걷던 무윤의 눈이 살짝 커졌다. 멍하니 혼자 정자에 있는 이.
“왜 혼자 있어?”
하후진은 멋쩍은 듯 미소를 흘렸다.
“여자들끼리 뭉쳤잖아. 눈치 보다가 슬쩍 빠졌다.”
“잘했다. 거기 있어 봤자 불편하기만 하지.”
“넌 가 봐야 되지 않아?”
여자 여섯이 까르르 웃는 소리가 정원까지 들려왔다.
“저 분위기에 가면 좋아하겠냐. 분위기만 망치지. 가족들이야 따로 보면 되고.”
“하긴! 끝나려면 한참 남았을 거야.”
그때 무윤의 눈이 살짝 깊어졌다. 정원에 들어올 때 혼자 멍하니 있던 하후진의 표정이 그리 밝지가 않았다. 대략 짐작은 되는 상황.
‘마음이 복잡하겠지.’
이번에 가면 가문을 나오겠다고 알리려고 했는데, 소가주 하후천기의 일에다 강호의 복잡한 상황까지 더해져 심란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떻게 화두를 꺼내야 될지 망설여질 즈음, 정원의 나뭇가지 흔든 실바람이 눈가를 스쳐 갔다. 풀잎 흔들어 봄 향기 가득 담은 채 살랑살랑 불어와 코끝을 간지럽힌다.
사라락!
그 향기 받아먹던 입가에 싱그러운 미소가 점점 더 짙어질 즈음, 무윤은 팔베개를 하고는 정자에 털썩 드러누웠다.
투욱!
“후! 간만에 이렇게 하늘을 보니까 좋네.”
고민이 있다면 들어 주고 원한다면 의견도 내는 게 친구 된 도리. 하지만 익숙한 놈의 표정이 알린다. 우측 어금니만 깨무는 건 스스로 답을 내렸을 때의 습관. 또 어느 쪽 결정인지도.
‘결심했으면 응원하면 그만이다. 먼저 말하면 들어 주고.’
지금은 어떤 말보다 오랜만에 느끼는 이 편안함을 같이하는 게 가장 최고의 응원.
잠시 머뭇거리던 하후진도 피식 웃고는 따라 누웠다.
탁!
“그래! 나도 좀 쉬자. 아이고! 그동안 너무 힘들었어.”
하후진이 머뭇거리다 웃은 이유가 있다.
‘또 티가 났구나.’
뭔가 물을 거 같던 놈이 입을 닫아 버린 이유를 알아챘다.
악양에서 가문을 나온다고 했을 때 무윤이 해 준 말이 있다.
“나오기 전에 네 표정부터 뜯어고치자.”
“응? 그게 뭔 소리야?”
“뭔 소리는! 네 얼굴에 생각이 다 쓰여 있다 이 소리지.”
“내가 그런다고?”
그때 연사구가 껴들었다.
“야! 너 고집 피울 때는 오른쪽 어금니 꽉 물고, 초조하면 손 까닥거리고, 진짜 좋으면 눈꼬리부터 올라가. 정말 몰라?”
“……몰랐어. 근데 그걸 왜 지금 얘기해?”
“참내! 그것도 질문이냐?”
하후진의 성난 시선이 두 사람을 번갈았다.
“……그동안 나 가지고 놀았다 이거네.”
“당한 놈이 바보지. 어쨌든 이참에 다 고쳐. 그래도 딴 놈한테 당하는 꼴은 못 보지.”
“……!”
하후진은 누운 채로 시원한 바람 따라 미소 지었다.
“또 티 났냐?”
“그래.”
하후진은 결정을 알렸다. 바로 나오기로 한 것을.
“빨리 고쳐야겠네.”
“어쩐지! 꽉 깨문다 했다.”
순간 등골이 시린 하후진이 벌떡 일어났다. 어느 쪽으로 결정했는지도 알았다는 뜻.
“야! 그건 또 뭔 소리야?”
“반대가 심한 쪽으로 결정할 때 꼭 그러더라.”
“야! 이 새끼야! 저번에 이건 왜 말 안 했어? 아주 둘이서 정말!”
“나오기 전엔 다 알려 줄게.”
“……!”
얼마 후 구긴 얼굴을 편 하후진은 다시 드러누웠다. 이번엔 아예 대 자로 뻗듯이. 털어놓고 나니 한결 속이 시원해졌다.
말끔하게 초록이 빛나는 정원, 그 위 하늘에 서서히 흘러가는 뭉게구름 사이 삐져나온 햇살이 눈에 아롱진다. 소복이 내리쬐는 따스함이 포근함을 더하자 아늑함에 취한 두 남자의 눈은 사르르 감겼다.
그러길 한참 번져 가는 석양이 어슴푸레 어둠을 몰고 올 즈음, 온갖 상념으로 복잡했던 시름이 지는 해를 따라 서서히 자취를 감춰 갔다.
이대로 잠들었으면 하는 생각이 절로 들 그때, 당서하의 앙칼진 고성이 쩌렁쩌렁 울렸다.
“이것들이 어디 갔나 했더니 아주 팔자가 늘어졌네. 야! 저녁때 되면 알아서 와야지. 찾느라고 한참 고생했잖아!”
“……!”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때다.
* * *
천가장 정원.
어둠의 문을 연 별들만 간혹 불빛을 뿌릴 즈음.
저녁 식사가 끝나고 무윤은 따로 서연을 불러냈다.
“…….”
“…….”
서로 말이 없길 한참, 고즈넉한 정원의 실바람 하나가 서연의 뺨을 스쳐 갔다. 그 살랑임 좇아 눈앞에 팔랑이던 꽃잎이 막혔던 화두를 끌어냈다.
“정원이 참 아담하고 예쁘네요.”
“그런가요? 가꾼 분께 알려 드리면 좋아하시겠네요.”
“세심한 손길이 여기저기 묻어 있어요. 근데 어느 분이?”
“어머님 두 분이 같이하세요.”
“그럴 거 같았어요. 아까 듣다 보니 두 분 다 꽃을 참 좋아하시더라고요.”
문득 옛 생각이 떠오른 무윤은 잔잔한 미소를 흘려 냈다.
“저희 할아버지가 사업 때문에 강제로 혼인시켜 들어온 분이 둘째어머니세요. 그러니 처음엔 다들 힘드셨던 모양인데 이 정원이 두 분을 이어 준, 가교 역할을 했답니다.”
“그래요?”
“서로 통하는 게 있다 보니 하나둘 터놓게 되다가 지금 사이가 됐다고 하셨죠.”
“참 보기 좋았어요. 안 그런 곳들이 많은데.”
“제가 철부지 때 말썽만 안 부렸으면 더 좋아지셨을 겁니다.”
서연은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대충 들었어요.”
“어! 그런 얘기도 했습니까?”
“좀 심하셨던데. 듣다가 몇 번 욱했어요.”
“그땐 참 철이 없었죠.”
“그러게요. 다들 이렇게 철들 줄 몰랐다고 하시던데.”
무윤은 눈을 게슴츠레 떴다.
“다들 모여서 제 욕만 했나 보네요.”
“칭찬도 가끔!”
“……!”
그렇게 소소한 얘기들을 하나둘씩 풀어헤치자, 어색함은 날리는 바람에 조금씩 쓸려져 갔다.
그러길 한참, 싱그러운 웃음이 색을 더해 가던 서연의 눈이 깊어졌다. 이런 소소하고 사적인 대화를 해 보긴 처음이다. 또 무윤이 이런 자리를 어색해하는 것도 잘 알고.
그럼에도 이러는 이유. 물론 짐작은 간다. 악양에서 설명은 충분히 들었으니까.
‘전인을 찾기 위해 그 안에 둔 걸 내가 익혀 버렸으니.’
자신은 이미 보타문의 무인, 그 마음에 결심한 걸 먼저 알리기로 했다. 아쉽지만 최선이라 생각되는 안.
“바라타나티암 심법은 더 수련하지 않을게요. 너무 걱정 마세요.”
무윤은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스스로 안 하게 되실 겁니다. 이젠 의미가 없으니까요.”
“……?”
놀람에 더해진 의문이 눈을 동그랗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