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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라 불린 내 친구-146화 (146/161)

146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달빛마저 기암절벽에 가려진 협곡 안.

칙칙한 어둠만이 대지를 휘감았다. 바람에 떨어진 넝쿨 부스러기들이 처량하게 흩날릴 즈음, 광기에 가득 찬 울분이 마인의 입가를 헤쳐 나왔다.

“크윽! 줄을 잘라 버리다니! 곱게 죽을 생각은 버려라.”

“사지를 씹어 먹어 주마!”

“저 피는 네 것이야!”

구명줄로 여겼던 마지막 희망을 끊어 버린 자. 그를 향해 꿈틀거리는 수백의 눈동자가 분노를 흘려 냈다. 눈가에 불타오르는 귀화는 이미 이성이 떠나가고 있음을 알렸다.

무심했던 무윤의 눈빛은 새로운 호기심을 담아 반짝거렸다.

“역시 약을 먹었어도 마인들인가?”

“이 새끼가! 뭐라는 거야?”

선단으로 마기를 잠재웠다 한들, 형언할 수 없는 분노는 결국 그 본성을 드러내기 마련. 짐작 못 할 상황도 아니다.

그때 형산 쪽으로 향하던 혈천대주 탁조경이 고개를 돌렸다.

“빨리 끝내! 형산 쪽으로 집중한다.”

“예!”

아무리 절벽을 타고 넘을 만큼 신법이 뛰어나다 해도, 대원 수십이 한 장 앞까지 에워싼 이상 더 볼 것도 없다. 시간이 없어 직접 찢어 죽이지 못하는 게 아쉬울 뿐.

그렇게 형산 쪽으로 신형을 날리려던 찰나.

퍽! 우둑! 빠각!

“크악!”

“커억!”

“우욱!”

순간 당황한 외침이 사방에 비산했다.

“조장이 당했다!”

“고수다! 조심해!”

“간격을 좁혀라! 혼자 뛰어들면 안 돼!”

“놈은 하나야. 겁먹지 마라!”

“이 개새끼가 정말! 야! 다 들러붙어!”

전혀 의외의 상황, 황급히 고개를 돌린 탁조경의 부릅뜬 눈에서 안광이 이글거렸다. 시야에 들어온 상황이 전했다.

‘보통 놈이 아니다.’

대원들에 가려 자세히 보이지는 않지만, 한 줄기 바람이 무리를 휩쓸고 지나가듯, 부드럽고 빠른 손이 수십 개의 잔영과 함께 휘날린다.

그때마다 여기저기 비명과 타격음이 연이었다.

퍼억! 빠각! 우두둑!

“크윽!”

“켁!”

“우욱!”

바람결에 흔들린 신형이 무리 사이를 헤집을 때마다 하나씩 바닥에 널브러졌다.

그 흐름을 살피던 순간 짜릿한 감각이 탁조경의 등줄기를 훑고 내려갔다. 대원들이 보여 준 모습이 알린다.

‘아무도 놈을 못 쫓아!’

지척에 놈이 있음에도, 눈앞을 지나 빠져나가는데도, 대원들의 눈동자는 뭔가에 홀린 듯 제 갈 길을 못 찾았다.

자신의 혈천대가 어떤 부대인가. 대부분 절정급 이상에 초절정도 열에 하나는 섞인 최강의 무력 부대인데.

거기다 중원 공략의 최선봉 부대라 이전까지 가장 많이 해 온 건 암살과 협공. 물론 그 대상은 정, 사 극강의 고수들.

초고수를 상대하기 위한 일대다의 훈련은 물론 실전까지 수없이 거친 부하들.

한데 그 백오십이 모인 저 한복판에서 마치 쉬운 먹잇감을 노리는 뱀처럼 유유히 꿈틀거리며 지나가는 자. 거기에 눈으로 좇지 못할 속도까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초절정 끝자락인 자신도 대원 이십 명 이상과 저럴 수는 없는데.

무인의 본능이 전한 위기감이 뒤통수를 짜르르하게 했다.

‘어떤 놈이기에?’

분명 독고승은 아니다. 그라면 도강의 폭풍으로 대원들을 깨부수지, 저런 식으로 각개격파할 리가 없다. 아무리 화경이라도 저 수많은 절정급 무인 사이를 저러고 다니다간 상처는 물론 중상까지 각오해야 하는데.

한데 간혹 번쩍이는 손끝엔 권기의 불꽃만 일렁일 뿐 강기는 찾아볼 수가 없다. 그럼에도 마치 꽃의 너울 속으로 나비가 넘나들 듯 유려한 움직임은 거칠 것이 없다.

또다시 빛 머금은 손끝이 수십 개의 잔영과 함께 휘날렸다.

휘리릭! 사삭!

그렇게 한 줄기 바람처럼 스쳐 지나간 무리는 벌써 오십여 명.

반 각도 되기 전에 근 사십에 가까운 몸뚱이가 바닥에 널브러졌다.

툭! 퍼억! 타닥! 우둑! 빠각! 콰지직!

“크윽!”

“켁!”

“우욱!”

탁조경은 덜덜 떨리는 몸을 주체할 수 없었다.

‘이, 이러면…….’

물러서라는 명령은 내릴까 했지만 그럴 필요 없었다. 대원들의 뒷걸음질은 벌써 시작되고 있었으니까.

어느새 두려움을 모른다던 마인들이 자지러지기 시작했다. 환영처럼 흐른 잔상이 공간을 접을 때마다, 기겁한 마인들은 혼비백산했다.

“이쪽으로 온다!”

“피, 피해라!”

“뭐, 뭐지? 이 기운! 무, 무서워!”

“모, 몸이 말을 안 들어!”

“도, 도망쳐야 해! 어서!”

“튀어!”

발끝이 대지에 붙어 버린 초절정 마인 하륭의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헉!”

빠름을 초월한 흐름이 바람을 헤치는 순간 지척에 다다른 신형, 그 손끝이 머리를 향하는 게 느껴진다. 무형의 기운이 몸을 옥죄는 걸 직감한 순간, 본능이 부른 몸의 비틀림이 허공을 허우적거렸다.

휘릭!

하지만 알싸한 바람이 가슴 언저리를 휑하니 스쳤다 싶은 찰나, 격통이 찾아왔다.

푸욱! 부르르!

“켁!”

배를 지나 온몸을 파고드는 뼈저린 울림. 충격을 넘어 경악에 불신까지 더해진 눈만 부릅떠졌다. 그저 머릿속엔 한 가지 의문만이 가득 찼다.

‘왜? ……움직이지 못했지? 왜 떨렸지?’

온갖 사선을 넘나들며 죽음 직전의 상황도 수차례 경험한 자신인데. 초절정이 된 이후 교의 화경급 고수들 앞에서도 위압감은 느꼈지만 떨어 본 적은 없었는데.

놈이 다가온 그 순간, 뭔지 모를 두려움이 몰고 온 떨림이 온몸을 휘감았다. 절로 떠는 사시나무가 돼 버렸다.

이해할 수가 없다. 도저히.

하지만 답을 찾기 전 이미 바닥을 쓸어 댄 몸뚱이는 정신까지 앗아 가 버렸다.

한편 초극기를 살짝 꺼내 해일처럼 무리를 휩쓸던 무윤의 눈이 깊어졌다.

‘역시! 신기심의공보다 몇 배의 효과가 있어.’

처음 공격 시에는 초극기를 꺼내지 않았다. 그러다 서른 넘게 쓰러트린 이후 궁금함에 반 장 이내에 미칠 정도로만 살짝 꺼내 본 것인데.

심장 주변을 주로 옥죄는 신기심의공 기운과 달리, 초극기는 짧은 순간이지만 마인의 온몸과 정신을 한순간 얼어붙게 했다. 그 덕에 생각보다 배는 빠르게 마인들을 제압할 수 있었던 거고.

물론 더 꺼내면 효과도 커지겠지만, 조절이 완전하지 않은 지금은 장악한 공간 밖으로 기운이 빠져나간다.

마인으로 오해받을 수도 있는 상황. 절대 해서는 안 될 일.

한편 마인을 향해 돌진했던 형산의 무인들은 그 자리에 발이 얼어붙어 버렸다. 눈앞에 펼쳐진 믿기지 않은 현실이 그리 만들었다.

“저, 저게?”

“저럴 수가!”

“어, 어떻게?”

자신들 쪽으로 몰려와 긴장했던 것도 잠시, 몇 번 검을 휘두르기도 전에 물러나는 마인들이 의아했었다.

그렇게 살펴보길 한참, 마인들이 몰린 중앙엔 마치 사람 없는 옷자락 하나만 날아다니듯 보였다. 간혹 사방을 헤집고 파고들던 소매 끝이 빛을 발할 때 흐릿한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장문인 건수의 얼어붙은 입은 그저 부르르 떨리기만 했다.

‘허! 무량수불!’

경악을 넘어선 놀람은 생각이란 자체를 막아 버렸다. 그저 멍한 눈만 무윤이라 짐작되는 허공의 잔상을 좇을 뿐.

그때 절벽 위를 도우러 올라갔던 선청이 내려왔다.

파파팟!

“장문인! 위는 정리됐습니다.”

“그래? 다들 무사한가?”

같이 내려온 연사구의 고개가 깊숙이 숙여졌다.

“늦지 않게 와 주셨어요. 감사드립니다.”

“아닐세. 그대들 아니었으면 놓칠 뻔했거늘. 큰일을 했네.”

“근데 척마단 쪽은 싸우는 거 같은데, 가만히 계실 건가요?”

“척마단이 아닐세. 천 공자 혼자 싸우고 있네.”

“예? 혼자요?”

놀란 넷의 시선이 어두운 협곡 안을 향했다. 장문인 건수는 지레짐작에 급히 나섰다.

“잠깐! 가는 게 능사가 아닐세! 오히려 방해가 될 게야!”

상황을 파악한 넷은 갈 생각이 없었다. 그래도 건수의 설명은 계속됐다.

“천 공자야 큰 은인이거늘 우리가 왜 이러고 있겠나? 나설 거면 진즉에 움직였지. 잘 보시게. 저들은 벌써 백 가까이 쓰러졌네. 한데 천 공자 움직임은 변함이 없어. 아니 오히려 더 빨라졌지. 이 상황에 끼어들면 도움이 되겠나?”

당서하의 담담한 답변이 흘렀다.

“그러네요.”

유심히 앞을 살피던 연사구는 계속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윤의 실력이야 누구보다 잘 알고, 천하 십대고수 방연극과 싸웠을 때 그 동작이 확연한 이상 걱정은 없다. 의아한 건.

‘왜 얼굴을 깠지?’

혈교 최강의 무력대, 그 백오십 명을 혼자 상대하는 걸 그대로 드러내다니. 저렇게 나설 요량이면 분명 도인 신분이어야 하는데.

‘뭔 일이 있나?’

넷의 담담함에 놀란 건 장문인 건수다. 그 모습이 알려 주는 확신.

‘실력을 알고 있었어.’

이젠 정말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자네들, 알고 있었군? 천 공자 실력 말일세.”

“죄송합니다. 본인이 알리길 원치 않아서요.”

이제 물어야 할 때. 이미 눈으로 확인한 이상 확신이나 마찬가지인 그 경지. 하지만 직접 듣지 않고서는 이 당혹감이 사라지지 않을 듯했다. 꿀꺽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 벽. ……넘은 거겠지?”

“직접 물어보시죠. 우리가 떠들 일은 아니라서.”

“……!”

돌려서 시인하는 말, 또 담담한 표정이 답을 더했다.

순간 주변에서 귀를 쫑긋하고 있던 형산 무인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미 눈으로 보고 짐작은 했지만.

“허! 화경이라니!”

“역시! 그랬군.”

“아니! 난 화경보다 내 눈으로 본 게 더 믿기질 않네. 저들이 누군가? 혈교 혈천대일세. 그런 저들을 혼자 상대하다니 저게 더 놀랍지 않은가?”

“하긴 그렇군. 아무리 화경이라도 저리는 쉽지 않지.”

“그럼 어디까지 갔을까?”

“정말 궁금하구먼.”

같은 의문이 반대편에 있는 독고운양의 뇌리에도 가득 찼다.

‘저 나이에 어떻게?’

척마단 또한 마인들과 몇 번 부딪치고는 바로 물러났다. 그러고는 똑같이 멍한 눈으로 쳐다보는 중이고.

그제야 어제 상황도 이해가 됐다. 형산의 장로 둘 앞에서 당당했던 그 모습에 자신을 알아본 것까지.

문득 떠오르는 생각.

‘숙부님은 저럴 수 있을까?’

답을 내릴 순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저런 식으로는 못 하실 게야.’

마인 하나하나를 박투로 깨부수는 저 방식. 다른 절대자가 본다면 정말 무식한 짓이라고 폄하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보고 하라고 한다면.

‘절대 저리 못 하지. 다치기 십상인데.’

분명 박투에 특화된 절대무공을 익혔으리라.

무윤을 쳐다보는 눈가의 잔떨림이 점점 더 커져만 갔다. 오만 가지 상상이 뇌리를 휩쓸었다.

‘앞으로가 더 무서운 놈! 우리와는 어찌 될까?’

정과 사에 한 발씩 걸친 놈이라 어떤 관계가 될지 판단이 안 선다. 거기에 더해진 의문. 굳이 안 나서도 피해는 있겠지만 마인들은 처리할 수 있는 상황.

‘왜 나섰을까? 저 경지에 올랐는데 세상이 몰랐다는 건 그동안 감췄다는 건데.’

그저 계속 흐르는 묵직한 숨이 복잡한 심사를 알렸다.

파팍! 퍽! 우둑! 두두둑!

폭풍 같은 기의 파동과 흙먼지가 해일처럼 협곡을 휩쓸었다. 어둠을 가르는 뇌전처럼 손끝의 빛은 명멸했다.

그 넓은 대지에 백 명이 넘게 쓰러졌어도 팔다리 하나 잘린 게 없다. 목이 달아난 자도 물론. 모두가 비명을 토하고 주저앉았다가 대지에 쓰러질 뿐.

하지만 꿈틀거리는 자도, 고통을 호소하는 비명 또한 없다.

혈천대주 탁조경의 허망한 눈이 주변을 쓸었다.

‘다 죽었어. 그것도 한 방에.’

이제 격정에 휩싸였던 심장도, 눈가도 몸도 떨림을 멈췄다. 현실을 자각할 시간은 충분했으니까.

광기에 젖어 달려들던 대원들도 엉거주춤 물러나는 지금, 놈을 죽일 가능성은 없어졌다. 이제 남은 건 하나뿐. 더 일찍 판단하지 못한 아쉬움이 억장을 무너뜨렸지만, 이제라도 외쳐야 했다.

가슴 속 저 밑에서 복받친 울분을 하늘을 향해 토해 냈다.

“대주로서 마지막 명이다! 달아나라! 살아라! 어떻게든 살아서 교로 돌아가라!”

그때 양쪽 진영에서도 고성이 들려왔다. 이젠 그들이 나서야 할 차례.

“마인들을 죽여라!”

“감히 형주를 노리다니! 죽여라!”

또다시 협곡엔 광풍이 몰아닥쳤다. 그사이 온몸이 피에 절은 무윤은 천천히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터덕터덕!

아무도 그 주변에 다가오지 않았지만, 모두의 눈은 그 걸음을 힐끔거렸다. 전장을 벗어나는 그때까지.

일각 후, 독고운양은 마지막까지 살아남았던 평생의 숙적, 탁조경의 숨통을 끊어 버리고는 외쳤다.

“나 독고운양! 이제야 원수를 갚았도다!”

밤에 밀려오는 거대한 파도처럼 격정의 함성이 협곡에 물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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