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직접 나서는 것과 배후에서 움직이는 것. 장단점을 비롯해 큰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당초 계획은 세상에 나설 땐 형산에 유진을 전한 도인의 제자로, 실력을 드러내야 할 때는 도인 신분을 쓸 생각이었다. 형산의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 또한 그 도인 신분으로 하려고 했고.
배후에서 움직이려고 했던 큰 이유는 세 가지.
보이는 적, 미지의 적을 상대하기 위한 최적의 전술인 점.
또 무윤이 어리고 강하다는 것. 실력을 드러낼 경우 그로 인해 생길 상대의 두려움, 시기심과 질투, 자괴감만큼 적을 만드는 것도 없으니까.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했던 건, 역시 삶의 방향이었다.
‘강호인으로 살 생각이 없었거늘.’
이제껏 강호에 나선 것도 소문 조작을 바로잡기 위해서였을 뿐, 언제든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해선 꼭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생각을 바꿨다.
‘내 삶의 목표를 위해선! 받아들인다. 강호인의 삶을.’
천 년 전 무륜일 때는 물론 지금도 변하지 않은 인생의 목표.
그건, 내가 옳다고 생각한 삶의 방식으로 당당히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음을 보이는 것.
과거 척고련 시절부터 그 꿈을 위해 반드시 지켜 왔던 철칙이 있다.
바로 무인들의 싸움에서 일반 백성들을 지키는 것.
이 철칙을 지켰기에 과거 신강과 청해 사람들은 그 어떤 지역보다 더 평화를 누렸고, 당연히 척고련을 경외의 대상으로 삼았었다. 과거 무륜의 인생은 그 자부심과 당당함으로 살아온 세월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번 생에선 무인의 삶을 선택하지 않았기에, 침주에서의 사업으로 내 삶의 방식을 증명하려 했었다.
그래서 무인으로 나설 생각이 없었던 건데.
곧 전장의 피바람이 불어닥칠 게 확실한 지금, 침주와 그 주변에 만들어 가는 내 꿈을 지키고, 아끼는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선.
‘신강과 청해에 그랬던 것처럼! 여기도 지켜야지.’
물론 자생적으로 생긴 지역 내 분쟁은 논외다. 막아야 할 건 외부의 간섭과 압력 또는 직접적인 침략으로 벌어져 민초들에게까지 피해가 가는 전쟁.
그걸 위해선 직접 나서야 한다.
‘모두를 끌고 갈 힘이 있음을, 그걸 보이고 증명해야 한다.’
과거 철칙을 지킬 수 있었던 건, 여휘가 강함을 보이고 무륜이었던 자신이 지도자의 역량을 보였기에 가능했던 일. 이젠 혼자 그 둘의 능력을 보여야 한다.
우선 여휘가 했던 것처럼, 그 피 끓는 전장을 주도하려면 상대의 칼끝에 몸을 드리워야 한다. 맨 앞에서 거칠 것 없는 폭풍으로 휘몰아치는 철혈의 무인임을 보여야 한다. 그래야 상대를 압도하는 건 물론 내 편이 믿고 따르고 추종한다.
‘먼저 형산부터.’
결정을 내린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다.
의지 더한 발끝이 빠름을 더해 대기를 갈랐다.
파파팟!
* * *
회하곡 협곡.
혈천대주 탁조경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좌우에 병풍처럼 둘러 쳐진 절벽을 보던 시선이 점점 더 가늘어졌다.
‘이런 곳일 줄이야.’
낯선 곳에서 척후조를 보내 전방 지형을 살피는 건 필수이자 기본. 당연히 그리했음에도 협곡에 갇혀 버린 건, 길게 굽어진 절벽의 특이함 때문이다.
진입 초기 몇백 장은 낮은 산등성이라 절벽이라 할 것도 없었다. 한데 거의 직각으로 꺾어 돌아 협곡이 끝나는 곳에 다다랐을 땐 수십 장 높이의 깎아진 직벽이 사방을 에워쌌다. 앞에 있는 좁은 출구에 형산 놈들이 이미 포진해 있었고. 서서히 뒤를 조여 오던 척마단이 이젠 뒤까지 막아 버린 상황.
물론 혈교 최강 부대 중 하나인 혈천대원들이 벽을 못 오를 리 없다. 하지만 문제는 시간.
‘정상까지 오르는 사이에 놈들이 위에 와 있겠지.’
뒤편 산길로 먼저 도착해서 올라오는 대원들을 하나씩 공격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형산이 막은 전면을 뚫자니 호리병처럼 좁은 출구라 동시에 공격할 수도 없다. 뒤는 수적 열세고. 진퇴양난의 상황.
그때 주변을 살피고 온 부대주 갈마륵이 급히 다가왔다.
“대주, 방법이 있을 거 같습니다.”
“어떻게?”
“넝쿨로 줄을 만들어 날쌘 몇 놈이 먼저 올라가면, 그다음이야 시간 걸릴 게 없습니다. 외진 곳이 있어 만드는 것도 올라가는 것도 걸릴 염려 없고. 그리하는 것이 어떨지?”
“그래? 얼마나 걸리겠느냐?”
“반 각이면 충분합니다.”
“알았다. 내가 시간을 끌지.”
굳이 수많은 전장의 경험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정, 사가 공조한 이 상황이면 빤한 게 있다. 따지고 보면 둘도 적인 셈인데.
‘죽기로 싸우는 척하면 먼저 나설 놈이 없지.’
절벽 근처 높은 바위로 올라간 탁조경의 고성이 협곡을 쩌렁쩌렁 울렸다.
“이거 놀랐소이다. 양쪽이 합심해서 이런 수를 쓰다니. 내 살다 살다 이런 광경을 다 보는구려.”
“형산을 불러낸 건 자네일세. 누굴 탓할 게 아니지.”
“오! 그럼 형산이 먼저 이 계획을 제안했다 이거군.”
독고운양의 입이 비틀어졌다. 형산파에 화살을 겨누게 할 기회다.
“당연한 거 아닌가. 여긴 형산이거늘.”
탁조경의 비릿한 시선이 형산파를 향했다.
“하하하! 장문인. 본 대주는 정말 생각도 못 했소이다. 저들은 마단을 이용해 그대들을 봉문하게 만든 곳인데 공조하다니. 이거 화살을 잘못 겨누신 거 아니오?”
장문인 건수의 눈이 불을 품었다. 말꼬리를 이었다간 망신만 돌아올 뿐, 화두를 돌려야 한다.
“네 이놈! 이 형산이 감히 마인들이 장난칠 곳이더냐! 내 오늘 중원에 저지른 짓까지 그 죄를 엄중히 묻겠노라!”
“크크! 이거 섭섭하구려. 우리야 사도련에 비하면 가볍게 장난친 건데 이리 나오시다니.”
“마인과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어서 오너라! 형산의 무서움을 보여 주마!”
“뒤가 걱정돼서 가긴 그렇고. 먼저 오시오. 그럼 상대해 드리리다. 아! 아니면 길을 비켜 드릴까? 아무리 생각해도 저쪽이 더 원수 같은데.”
장문인 건수는 뜨겁게 요동치는 피를 애써 달랬다.
지금은 참아야 할 때. 마인의 수는 백오십, 공격해 오면 모를까 먼저 나섰다간 피해는 걷잡을 수 없다. 본산의 지원 병력이 올 때까진 대치 상태를 유지하는 게 최선.
나름 국면을 전환할 말을 꺼내 들었다.
“그대 부하들이 저쪽에 많이 당했던데 우릴 먼저 상대하겠나?”
“솔직히 고민 중이오. 쪽수만 아니면 벌써 달려들었을 텐데.”
“빈도는 장문인이라 제자들 걱정이 먼저일세.”
“호! 저들하고 싸우면 관여 안 하시겠다? 뭐 그 말 믿음이 가긴 하오. 어디 그래 볼까?”
독고운양은 냉랭히 코웃음 쳤다.
“큭큭! 급하긴 했군. 자네가 같잖은 격장지계(激將之計)까지 다 쓰다니.”
“그래? 근데 난 그 같잖은 게 어째 먹힐 거 같단 말이지. 뭐 아니라면 먼저 와 보든가.”
“시간은 우리 편일세. 기다릴수록 초조한 건 그쪽이지. 난 성급할 이유가 없다네.”
그렇게 말싸움이 길어지던 어느 순간, 절벽 위에서 커다란 고성이 터져 나왔다.
“이놈들 줄 만들어서 올라옵니다! 어떻게 좀 해 봐요!”
정황을 살피기 위해 진즉 일행과 함께 절벽 위로 올라왔던 연사구다. 다급한 당서하의 목소리도 쩌렁쩌렁 울렸다.
“저쪽 구석으로 올라옵니다. 줄이 여러 개예요!”
동시에 은밀히 올라가던 마인들이 속도를 끌어올렸다.
쉭쉭! 차착! 파팟!
당서하를 비롯한 넷의 신형이 마인들이 올라오는 곳으로 내달렸다.
파파팟!
연사구의 다급한 고성이 울렸다.
“이런 시팔! 다 올라왔어!”
“조심해! 만만한 자들이 아니야.”
“알아요! 그러니까 열 받지! 도대체 밑에서 뭐 한 거야!”
부대주 갈마륵과 함께 올라온 마인들도 바위에 줄을 묶자마자 넷을 향해 짓쳐 들었다.
“넷뿐이다! 신속히 처리한다.”
“옙!”
삽시간에 바람 탄 열 개의 신형이 부딪쳤다.
캉! 카앙! 채앵!
격렬하게 뒤엉킨 공방 속에 일진광풍이 절벽 위에 휘몰아쳤다.
휘리릭!
시린 섬광을 뿌려 낸 연사구는 전신에 살기를 풀어 냈다. 의도된 대갈일성이 마인들을 향했다.
“쪽팔리게 뒷구멍으로 도망치는 새끼들이라니! 야! 너희 마인 맞기나 한 거야?”
마인을 상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격장지계라 들었다. 마공의 특성상 쉽게 분노하고 흥분하니까. 번진 광기에 힘은 더 세져도 판단은 흐려진다고. 이만큼 힘 안 드는 무기도 없으니 무조건 쓰고 볼 일이다.
부대주 갈마륵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짙어졌다.
“크크! 젖 비린내 나는 애송이로구나. 진마지경(초절정)인 우리한테 그런 얕은수를 쓰다니.”
“이거 왜 이래! 너희보다 센 새끼한테도 잘 먹힌다고 그랬어!”
“누가?”
“멸마단 조장님께서!”
갈마륵의 미간이 좁혀졌다. 갑자기 멸마단이 거론되다니.
“……누구냐 넌?”
“하오문 당주님이시다, 왜!”
“하오문?”
연사구는 비웃음 가득한 입을 실룩거렸다.
“거봐! 먹히잖아. 너 지금 당황했지? 좀만 더하면 열 좀 받겠는데.”
“…….”
한편 절벽 위를 보던 세 진영 모두 다급해진 건 마찬가지.
일대제자 선청의 시선이 장문인을 향했다.
“절벽 위엔 넷이라 불리합니다. 인원을 보낼까요? 그리고 공격은 어떻게?”
장문인 건수의 초조한 시선이 절벽 위아래를 번갈았다.
‘인원을 분산했다가 놈들이 몰려오면?’
게다가 척마단도 아직 움직이지 않았다. 판단이 쉽지 않은 상황.
척마단주 독고운양도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판단은 이미 내렸다.
‘형산이 움직이는 걸 보고 나선다. 우리 먼저 움직이면 안 나설 수도 있어.’
그럼 피해는 물론 그 이후 형산이 어찌 나올지 모른다. 마단 일로 쌓인 앙금은 절대 작은 게 아니니까.
한편 양쪽을 살피던 탁조경은 비릿한 웃음이 절로 올라왔다.
‘서로 눈치 본다 이거지! 그래 조금만 더 부탁하마!’
각자 다른 속내의 세 눈빛이 서로를 날카롭게 살피던 순간.
화라락! 휘익! 파파팟!
세 진영 모두에게서 날 선 고함이 터져 나왔다.
“누구?”
“헉! 저렇게 빨리!”
“절벽을 타고 누가 옵니다!”
모두의 시선이 쏠린 건 가파른 절벽 상단. 어스름 달빛에 저 뒤에서부터 횡으로 쾌속하게 절벽을 타고 오는 희끄무레한 잔상이 시야를 스쳐 갔다.
순간 혈천대주 탁조경의 다급한 고성이 울렸다. 누군지는 몰라도 향하는 방향이 문제다.
“줄 쪽으로 간다! 막아라!”
마치 벽에 달라붙어 움직이는 거미처럼 직벽 위를 사선으로 날아오는 자가 향한 건, 움푹 파인 공간을 이용해 몰래 절벽 위까지 연결한 넝쿨 쪽.
파파팟! 팟! 팟!
이십 여장 절벽 위를 거슬러 올라가는 자라 방법은 하나뿐.
“비도를 써라!”
“예!”
순간 마인들이 뿌린 수십 개의 비도가 절벽 위를 향했다.
슈우욱! 슈욱! 쇄애액!
달빛에 시린 광망을 뿌려 댄 칼날이 대기를 가르고 먹잇감을 덮쳐 갈 찰나, 순간 허공을 박차듯 신형이 솟아올랐다.
휘익! 팍! 팍팍! 팍!
목표를 잃은 칼날이 벽에 박힘과 동시에, 넝쿨을 잡아챈 자의 손이 달빛에 번쩍거렸다.
쉬익! 서걱! 툭!
순식간에 잘린 여섯 개의 넝쿨 줄이 바닥에 떨어질 즈음, 따라 내려온 신형이 표홀히 대지에 발을 디뎠다.
터억!
동시에 묵직한 음성이 형산 쪽을 향했다.
“장문인께서 오셨군요.”
장문인 건수의 눈이 튀어나올 듯이 커졌다.
“아니! 자네!”
“절벽 위를 부탁드립니다.”
건수의 놀람은 무윤을 확인해서만이 아니다. 그가 내려온 곳은 마인들이 몰려 있는 한가운데. 그것도 뒤는 절벽, 앞엔 백오십이 넘는 마인들이 에워싼 형국.
한데 움직일 생각은커녕 무심한 듯 흐르는 눈빛으로 주변을 쓸어내린다. 넘실넘실 솟구치는 마인들의 살의가 그 한곳으로 몰려드는데도. 포위망을 조여 오는 마인들의 발소리가 여기까지 분노의 귀화를 뿌려 대는데도.
대지에 깊이 박힌 듯 그 발은 일체의 미동도 없다.
다급한 건수의 웅혼한 고성이 협곡에 가득 찼다.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
“형산의 제자들이여! 저 패악 무도한 마인들을 참할 지어다!”
“예!”
동시에 독고운양의 칼날도 허공에 솟아올랐다.
“나서라! 척마 대원이여! 저들의 피로 동료들의 한을 풀 것이다!”
“존명!”
어둠을 뒤엎은 광풍이 하늘 높이 흩어진 별빛을 갈랐다.
휘이익! 화라락! 파파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