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독고승의 시선이 윤자엽을 향했다. 사전 작업을 해야 할 때. 나직이 전음을 보냈다. 우선 확인할 것부터.
-없어진 게 보이는구먼.
-지금쯤이면 세상에 퍼졌을 거외다.
-선우가 사람인가?
-가까운 편이오. 이리 나설 만큼.
-아쉽지만 이 빚은 다음에 받아 내지. 그만 가시게.
순간 윤자엽의 눈가에 더할 수 없는 열기가 서렸다.
‘기회다.’
독고승의 의도야 빤히 짐작되는 일.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천운처럼 칼자루를 잡을 패가 주어졌다. 하지만 순간의 실수 하나로 언제든 칼끝으로 바뀔 수도 있는 상황.
‘독고승은 지금의 적. 불가의 무인 또한 가영의 인연이 있다 하나 아군이 될 수 없는 자.’
신중에 시중을 기해야 할 때. 먼저 무윤에게 전음을 보내 의향을 묻기로 했다.
-독고승이 제안한 게 있네만.
-말하지 마시게. 내겐 어떤 얘기도 필요 없네.
-……협상하지 않겠다면 난 독고승 편에 설 수도 있네.
-그대 결정이지. 물론 책임도 그대 몫이고. 알아서 하시게.
-……!
순간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심사가 윤자엽의 눈가를 스쳐 갔다. 초조함과 흥분이 등줄기를 훑고 내려갔다.
‘판단이 어려워.’
셋 모두 언제든 다른 둘의 적이 될 수 있는 상황. 한쪽은 제안을 줬고 한쪽은 듣기를 거부한다. 결정은 촌각의 순간에 내려야 하고.
날카로운 눈초리가 사방으로 뿌려지던 어느 순간, 후끈 달아오른 숨이 입가에 담겼다.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그 마음 담긴 시선이 독고승을 향했다.
-역시 사야홀주다운 판단이시오. 한데 고민이구려. 여기선 보내 준다지만 그대가 쫓아오면 영 불안해서. 저 불가의 무인과 같이 나서는 것도 한 방법 같은데.
-선택은 그대가 하시게. 단 후자는 둘이서 날 잡을 자신이 있을 때 해야겠지. 나야 우리 아이들이 올 때까지 버티기만 하면 되는데, 자신 있는가?
-허허! 상처 정도야 몰라도 그대를 어찌 잡겠소이까? 하나 저 불가의 무인이 도망치면 또 우릴 쫓을 텐데 그게 고민이구려.
-……하고 싶은 말이 뭔가?
-다른 이들을 먼저 보내고, 난 남아서 그대들이 진정으로 싸우는지 지켜보다가 물러나겠소.
-크크! 한참 머리 굴리더니 고작 생각하게 박쥐 짓이라? 어째 영 맘에 안 들어.
-나도 위험부담은 마찬가지요. 둘이 날 공격할 수도 있거늘.
-그냥 가면 고민도 없지.
-저자를 보내고 우릴 쫓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소? 난 일행의 안전이 우선이오.
잠시 생각하던 독고승은 결정을 내렸다.
-좋네. 대신 삼십 장 밖에 물러서 있게.
-알겠소.
전음이 끝남과 동시에 날아오른 신형과 함께 창천을 닮은 짙푸른 도강이 대기를 뚫었다. 무윤과 다섯 장 거리를 좁힌 건 눈 깜짝할 사이.
파파팟!
허공을 관통해 내리꽂은 신형이 지척에 다다를 즈음, 유성처럼 호선의 궤적을 그린 무윤의 주먹이 휘둘러졌다. 주먹에 가득 맺힌 권강은 너울거리듯 도강의 폭풍 속을 향했다.
부우웅! 슈욱!
거세게 물결치는 격랑처럼 독고승의 도강은 거칠게 압도하는 강한 힘 그 자체. 벽력의 도에선 푸른 강기가 묵직한 파공성과 함께 세상을 갈라놓듯 휘몰아쳤다.
쇄애액!
마주치길 주저하지 않은 두 개의 기운이 부딪히자, 뇌성벽력과도 같은 폭발음에 이어 대기를 찢어 버리는 굉음이 터져 나왔다.
콰쾅! 쾅! 콰쾅!
그렇게 몇 초가 흐를 무렵, 북쪽으로 내달리다 놀라 뒤돌아본 이들에게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엄청난 경파가 이 먼 곳까지 전해져 살을 떨리게 한다.
“저럴 수가!”
“헉! 저런 강기라니!”
“역시 절대자!”
“저, 저게 사람들인가!”
물러서길 거부하는 두 절대자의 부딪침. 그 충격에 사방으로 비산하는 강기의 불꽃은 시퍼런 번개가 대지를 찢어발기듯 광풍과 함께 사방에 휘몰아쳤다.
쾅! 콰앙! 쾅쾅!
사방으로 빛의 파편을 쏟아 내는 독고승의 도강은 웅혼했다. 또 한 자 가까이 되는 권강의 이지러짐도 몰아친 도를 향해 강대한 기운으로 넘실댄다.
무윤에게 질문을 던졌던 선우소령의 떨리는 눈이 윤자엽을 향했다.
“우리, 가도 되는 건가요?”
적이라고 했지만, 적처럼 느껴지지 않는 자. 죽은 줄만 알았던 선우가영을 보살피고 있는 자. 발길이 떨어지질 않는다.
시선을 전장에 고정한 윤자엽의 음성이 단호해졌다.
“빨리 가시게. 내가 경고했음에도 자기 의지로 벌인 싸움일세. 또 언제든 몸을 뺄 수 있는 자고.”
“부련주께서는?”
“나 또한 피할 순 있네. 어서 가래도!”
“……예, 부디 다시 뵙기를.”
“걱정 마시게.”
일행을 보내고 광풍의 전장을 바라보는 눈엔 서서히 핏발이 맺혀 갔다. 꽉 깨문 어금니에 핏물이 고일 만큼 격정이 가슴에 물결쳤다.
저기에 서지 못한 아쉬움, 거기에 분노가 더해진 열기다. 무인의 자존심 더해 끓어오르는 투기다.
또 거기에 더해진 한이 있다.
독고승이 제안을 줬을 때 최선은 일행과 같이 피하는 것. 한데 남아 있고자 했던 이유. 상황에 따라 처신할 생각도 있었지만, 꼭 보고 싶은 게 있었다.
자신에게 단죄와 책임을 추궁했던 자. 피할 수 있음에도 도왕과의 결전을 피하지 않은 자. 그 오만의 끝을 눈으로 보고 싶었다.
강호에 발을 들인 자. 그들은 강자만이 모든 걸 결정할 권리를 가지는 걸 용인하고 강호에 들어왔다. 자신이 그런 강자가 되려고 들어왔으니까. 싸움을 선택한 이상 힘의 승부에 어떤 불평도 할 수 없음은 물론, 죽음까지 남에 손에 맡기는 걸 허락했다.
자신에게 그런 강자임을 스스로 드러냈던 자. 강자라는 사실 그 하나만으로 자신을 준엄하게 꾸짖었기에 변명조차 제대로 할 수 없게 만든 자. 한데 더한 강자가 그 앞에 나타났다. 그럼에도 굽히지 않고 홀로 강자인 듯 오연히 나선 그 모습이 무너지는 걸 보고 싶었다.
도와줄지 아니면 죽이는 쪽에 설지 결정을 못 했지만, 그 갈림길에서 묻고 싶었다. 도움을 받겠냐고.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내 손을 빌리길 청한다면, 그때 웃어 주려 했다.
그래야 아까의 물음에 스스로 당당해질 수 있다고 여겼기에. 그리고 다음을 기약하며 떠나려고 했는데.
‘강자였어. 독고승 앞에서도.’
승부를 예단할 순 없지만 수십 초가 흐른 지금까지도, 해일처럼 휩쓰는 도강의 폭풍 속에서도 짙푸른 색으로 올올이 뭉쳐진 권강은 제 색을 잃지 않았다. 날카로워진 눈빛 또한 타오름을 멈추지 않는다. 어느 한쪽도 우위를 점하지 못한 공방, 그 속에서도 장중한 기세는 변함이 없다.
쾅! 콰콰쾅! 쾅쾅!
독고승의 얼굴이 터질 듯 붉게 물들었다. 예상을 뛰어넘는 놈의 경지가 그리 만들었다. 질 거란 생각은 안 들지만.
‘나와 큰 차이가 없어.’
자신을 완전히 제어하는 절대자는 한 단계 위의 현격한 강자가 아닌 이상, 언제든 발을 뺄 능력이 있다. 즉 놈을 잡는다는 보장이 없다.
이제 방법은 오직 하나. 생사를 걸게 만들어야 한다.
‘그러자면 공간에 가두고 틈을 노릴 수밖에.’
물론 그 또한 먼저 눈치채고 빠지면 그만. 하지만 놈도 물러서지 않는 걸 보면 가능성이 있다.
‘화를 돋울 필요가 있어.’
그러자면 혀의 싸움으로 잠시 전장을 바꿔야 할 때. 폭풍이 떠밀어 준 바람에 몸을 실어 뒤로 물러났다.
휘리릭!
독고승은 속없어 보이는 웃음을 환히 내비쳤다.
“이런! 내가 실수했구먼. 이런 상대였으면 저자를 먼저 옭아맸어야 하는 건데.”
“더 늦기 전에 그리하시죠. 전 물러나 있겠습니다.”
“허허! 너무 늦었지. 자넬 화나게 했는데 그냥 보내면 세상에 무슨 말을 쏟아 낼지 어찌 알겠나.”
“이미 세상에 전한 모양인데 제가 더 할 말이 있겠습니까?”
“내 살아 보니 세상에 중놈들 입방정만큼 무서운 게 없더군. 마공이라면 무작정 게거품을 무는 게 그대 족속들 아닌가.”
무윤은 지금 눈빛 그대로 상대를 마주했다.
“전 사야홀주로 계신 그대도, 마인들과 협잡하는 저치들도 꼴 보기 싫어 나섰을 뿐입니다.”
“허허! 마(魔)도 싫고 사(邪)도 싫다. 역시 정파란 건가?”
“잘못 아셨습니다. 무공의 길이 다른 게 뭐가 문제겠습니까? 그저 사욕을 위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는 게 역겨워 드린 말씀입니다.”
독고승은 흘릴 수 있는 가장 섬뜩한 미소를 입가에 담았다.
“역시 정파답게 세 치 혀를 잘 놀리는구먼. 한데 어쩌지? 그러다 내 손에 명을 달리한 자들이 많은데.”
무윤은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틀린 말도 아닌데 이 정도에 발끈하시다니, 마음이 급하신 모양입니다. 하긴 이미 사야홀 서류가 다른 이에게 넘어갔으니 그럴 만하겠네요.”
“허허! 예상 못 하고 왔겠나. 대신 분풀이할 상대가 있으니 그나마 다행일세.”
“어디 잘 고르셨는지 다시 해볼까요.”
“그러지.”
노도와 같은 광풍이 두 사람 사이에 거센 회오리를 불렀다.
휘리릭!
잠시 윤자엽을 바라보던 독고승의 눈이 가늘어졌다.
‘언제 합류할지 모르지.’
전장에선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 하는 법.
‘내 영역 안으로 끌어들여야 어떤 상황에도 전장을 주도한다.’
그 마음 담은 도 끝이 하늘 향해 힘차게 뿌려졌다. 휘도는 소맷자락에 담긴 기운이 허공을 가르자, 노도와 같은 광풍이 거센 회오리를 불렀다.
휘이익!
그 돌풍 따라 돌과 흙먼지가 하늘로 솟구쳤다.
화라락! 파팍!
거센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던 아름드리나무들이 두려운 듯 제 몸을 흔들어 댔다. 들불처럼 일어난 경력이 주변 곳곳에 무자비한 전율을 내려보냈다.
샤아악! 슈우욱!
의지와 기감의 일체를 통한 제공권의 장악, 그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사전 포석.
무윤의 두 손도 하늘로 치솟았다.
일보의 진각이 산야를 울리고 광풍을 불렀다. 걷던 걸음 그대로인 채 들려진 손에는 폭발적인 기운이 뿜어 나오기 시작했다.
우우웅!
한순간에 강기가 양손 가득 올라와 일렁이기 시작했다. 시퍼렇게 맺혀 있던 권강이 어느새 소용돌이처럼 둘둘 말리더니 무형의 진기파동이 만발했다. 엄청난 경파가 주변 숲에 회오리를 불렀다.
위이잉!
무윤 또한 공간을 뺏기지 않기 위한 선택.
순간 진득하게 미소 짓던 독고승의 표정이 우뚝 굳어 버렸다. 대기를 진득하게 울리는 파동에 겹겹이 쌓인 농밀한 기파가 알렸다.
‘이것도 나와 엇비슷하다니!’
공간장악은 강기와는 또 다른 경지라 우위를 자신했었는데.
마음이 다급해졌다. 이러면 먼저 공간을 장악하는 자가 주도권을 가진다. 그래야 그 안의 변화를 먼저 감지하고 상대의 기를 흩트릴 수 있다. 더 나아가서는 무형의 진기를 응축해 상대의 몸과 기운을 옥죌 수 있고.
‘여기서 승부를 본다.’
생각과 동시에 하단전 깊숙한 곳에서 대해와 같은 내력이 용솟음쳤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광대한 기세. 그 미증유의 힘이 아지랑이가 되어 주변 대기를 이지러트렸다.
위이잉! 우우웅!
두 절대자 사이의 공간에서 무형의 진기파동이 만발했다. 강기의 충돌과는 전혀 다른 기파가 둘 주변에 회오리를 불렀다.
두둑! 쿠웅! 우지직! 파팍!
그 어느 한쪽도 우세를 점하지 못한 상황, 두 절대자의 전력이 쏟아진 그곳엔 주변을 발기발기 찢어 버리는 바람 소리와 세찬 기의 파동만이 치열함을 알렸다. 그 긴박한 대치가 길어지던 어느 순간.
슈우욱! 쇄애액!
또 다른 강기의 폭풍이 세상을 갈라놓듯이 두 사람 사이로 쏘아졌다.
윤자엽이 쇄도했다.
파파팟!
천마라 불린 내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