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윤자엽은 밝힐 수 있는 것들을 추려 냈다.
우선 반박할 것부터 꺼내는 게 협상의 기본. 이제부터는 둘만 알아야 할 내용들. 담담히 전음을 보냈다.
-천마 소문은 우리가 퍼트린 게 아닐세. 사실을 알고 몇 곳에 알리기만 했을 뿐, 이후 저들이 알아서 한 짓이네.
-유도만 했다 이건가?
-그건 인정하지. 우리의 꿈을 위해서였네. 또 살기 위해서였고.
-꿈?
-당당히 살기 위해 강해지는 것이네. 그 목표 중 하나가 고금제일인 여휘의 길을 좇는 것이라 알리기로 한 게지. 물론 강호의 이목을 돌리고 혼란의 틈에 더 커 나갈 생각도 있었지. 부인하지 않겠네.
순간 무윤의 눈이 번득였다. 여휘를 좇는다는 말.
‘그래서 중단전 무공을 익혔어.’
짐작은 가지만 확신을 위해 더 묻기로 했다.
-전해지지도 않은 무공을 어찌 좇는단 말인가?
-과거 기록에 길은 대략 나와 있네. 그걸 우리 방식대로 풀어 가고 있지.
-선단을 연구한다고 들었는데 그 이유였나?
윤자엽은 가영이 말했을 부분이라 감추지 않기로 했다.
-과정 중에 필요한 부분이 있네.
이러면 더 묻지 않아도 된다. 중단전 무공이란 것만 같지, 선단을 통한 길이면 그 끝이 확연히 달라진다. 그저 신기심의공의 아류일 뿐.
다음 궁금한 것.
-소문을 주도한 곳은?
-어찌 한두 곳이겠나? 알려 줬더니 다들 알아서 움직였네. 정, 사, 마 가릴 것 없이.
-무림맹에서 처음 나왔지. 어딘가?
-모르네. 난 모든 걸 주관하는 위치는 아니라서.
이제 다음 질문.
-원수인 혈교에 선단은 왜 넘겼는가?
-청해에 있다 보니 저들과 적절한 관계가 필요했네. 또 원수란 표현은 나 같은 혈교 출신 몇 사람에게만 해당될 뿐, 다른 구성원에겐 아니지.
-다른 구성원?
윤자엽의 단호한 고갯짓에 힘이 담겼다.
-여기까지. 더는 어렵네.
선우가영 때문이라도 물어야 할 게 남았다.
-혈교에선 선우단엽이 있는 걸 모르는가? 안전한지 묻는 걸세. 가영 시주 때문이라 답해 줬으면 하네.
-혈교 윗선만 알고 있네. 서로 필요에 의해서 모른 척하고 있는데 당분간 큰일은 없을 걸세.
마지막 말이 뜻하는 게 있다.
-언제든 등 돌릴 수 있다는 걸 서로가 안다?
-어디 우리만 그런가. 강호 모든 세력이 다 비슷한 것을.
-하긴 그렇군.
윤자엽의 눈이 깊어졌다. 이제 상대가 판단을 내릴 시점. 그 전에 꼭 알릴 게 있다. 정파인 저자를 뒤흔들 수 있는 얘기. 물론 그로 인해 적의가 옅어질 수도, 더해질 수도 있다. 위험부담이 크지만 가릴 처지가 아니다.
‘이걸로 승부를 건다.’
진중함을 담아 시선을 마주했다.
-다른 얘길 하나 해 주지.
-뭔가?
-사야홀에서 빼낸 자료는 오는 도중에 이미 넘겼네.
-……세상에 알리려고?
-아주 상세한 자료지. 아무리 독고가라도 고생 좀 할 거야.
-난 아닐 거 같네만.
-어째서?
-마인이 강서를 습격한 상황에서 그런 자료가 나온들 그 신빙성을 누가 믿겠나? 독고가에서 명분을 만들어 반박하면 금방 수그러들 게야.
윤자엽의 눈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감돌았다.
-거기에 더해질 게 있네.
-어떤?
-오대세가에서 마단을 연구한 자료도 곧 같이 폭로될 걸세.
무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거야 이미 나왔다가 흐지부지됐는데 무슨 소린가?
-전혀 다른 자료가 터질 걸세. 처음 공야의숙에 연구진을 만들 때부터 소상한 얘기들이 전부 담겨 있네.
-누가 그런단 말인가?
-우리일세.
놀란 표정을 감출 수가 없다.
-그런 자료가 그대들에게 있다?
-들어 볼 텐가?
-……?
한동안 윤자엽의 상세한 설명이 이어진 후.
거친 바람이 귓가를 쓸어 댔지만, 격정에 떠는 무윤의 상념은 더욱 깊어져 갔다. 내용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 사실이야.’
삼십 년 전 공야의숙을 설립할 당시와 그 이후 일들은 참여한 자가 아니고서는 절대 알 수 없는 내용들. 공야성에게 들었던 내용보다 더 방대하고 세밀하기까지, 또 틀린 것도 거의 없다.
당문과 제갈은 직접 참여하지 않았지만, 정보는 받았고 서문가는 이제껏 해 온 사실까지 들어 있다. 또 그 이면에 담긴 오대세가의 치부까지.
이 정도면 사고 이후 바로 그만둔 남궁과 팽가까지 파장이 미친다. 거짓이라고 반박해도 너무 자세해서 쉽게 수그러들 내용이 아니니까.
바로 떠오른 의문. 이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자.
‘누굴까? 내부자, 그것도 최고위층이 아니면 알 수 없는 내용인데.’
이 건이 터진다면 사도련 사야홀 또한 파장이 커질 수밖에 없다. 강호의 두 축인 정, 사 모두에 어떤 폭풍이 휘몰아 닥칠지 예측조차 할 수 없을 사안.
깊은 탄식이 입가를 쓸어 갔다.
‘누가 이 폭풍을 피할 수 있을까!’
공야성 등 세 사람의 복권과 패악의 마공 연구 중단을 위해 밝혀지길 바랐던 일. 하지만 스스로의 반성도 없고, 대책 없는 이런 식으로 터지면 어떤 양상이 벌어질지 모른다.
가장 최악의 가정.
‘다들 하는데 나라고 못 할 게 없다. 거대 무가들이 하는 덴 다 이유가 있겠지. 이런 식이 되면.’
오히려 마공 확산이란 불씨에 기름을 끼얹는 꼴. 생각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진다.
그때 윤자엽의 묵직한 전음이 귓전을 때렸다.
-내 말, 믿는가?
순간 그 말에 형언할 수 없는 분노가 밀어닥쳤다. 세상의 혼란을 부추기는 저들에 대한 성난 원성이 하늘을 찔렀다.
‘왜? 도대체 뭘 위해서?’
하지만 지금은 더 들어야 할 때. 가슴 속 저 밑에서 복받친 고함을 억누르고는 물었다. 정말 묻고 싶었다.
-이게 최선이었나? 꼭 이런 식이어야 했나?
윤자엽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섬뜩하리만치 차디찬 한기가 흐르는 목소리.
하지만 이내 입술을 짓씹었다. 이미 각오한 일. 또 반박할 자신도 있다. 한 서린 열기가 그대로 토해졌다.
-우린 혈교, 사야홀, 그리고 오대세가가 벌인 그 짓 때문에,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모인 사람들일세.
-원한이란 말인가?
-맞네. 난 적어도 이 일에 있어선 한 점 부끄럼 없네. 거짓이라곤 추호도 없으니까. 아니! 오히려 따지고 싶네. 우리가 잘못했나? 아니 저들이 했네. 자네 걱정은 짐작하네만 그럼 우린 어떻게 해결하지? 어떻게 이 원한을 풀지? 그냥 입 닥치고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나?
-난 이게 최선이냐고 물었네.
-……아니! 물론 아닐세. 마음이 시키는 그대로, 쌓인 원한이 바라는 그대로 했네.
-차선(次善)도 아니고 차악(次惡)도 아닌 최악을 선택했군.
-부인하지 않겠네. 하면 자넨 그 최악의 결정에 죄를 묻고 싶나? 아니면 마공? 사파는 물론 자네가 속한 정파도 마공을 연구했네. 우리만 잘못했다 할 수 있는가? 그 이유만으로 우릴 단죄할 자신 있는가?
무윤은 불꽃같은 정광과 함께 타오르는 숨결을 내던졌다. 상대를 마주한 눈 그 어디에도 여린 떨림 하나 없었다.
-단죄라! 적어도 이 일로 그럴 순 없겠지. 자네 말대로 사실을 알린 것이니. 하지만!
-……?
-모든 결정엔 책임이 따르지. 그걸 피해 갈 순 없을 걸세.
-……책임을 물을 셈인가?
-그럴까 하네. 단 다른 일에 대해서 난 단죄할 자격이 있다네. 한데 그건 나중에 해야겠군.
-……?
-오고 있는 자의 기운이 안 느껴지나?
급히 산 아래를 향한 윤자엽의 시선이 파르르 떨렸다. 일보의 진각마다 대지를 울리며 거센 바람을 헤치고 올라오는 자.
‘독고승.’
피할 수 있는 상황은 이미 지나 버렸다. 다급한 시선이 무윤을 향했다. 진정한 의도를 알아야 대책이 나온다.
-사야홀주 독고승이네. 자넨 어찌할 겐가?
무윤도 예측하지 못한 상황. 복잡하게 꼬인 지금 자리를 뜨기도 그렇고 섣불리 뭘 결정하기도 어렵다.
‘만나 보고 결정한다.’
* * *
잠시 후.
휘이익! 사라락!
표홀한 신법과 함께 대지에 내린 강남의 도왕이자 사야홀주 독고승. 그 시선에 놀람과 긴장감이 가득 담겼다.
불어오는 바람결에 섞인 두 무인의 기세가 알렸다. 감추지 않고 개방한 탓에 바로 직감할 수 있는 그것.
‘화경! 그것도 둘!’
짙은 어둠을 뚫은 심유한 눈빛과 화경 중반의 거칠 것 없는 경파로 상대의 전신을 훑어 갔다.
우우웅!
그러길 잠시, 독고승은 도에 손을 올린 채 불어오는 바람에 가볍게 머리를 휘저었다. 이젠 그 스스로 천하십대 고수의 반열에 올랐다고 자부한다. 형님인 사도련주도 인정한 사실이니까.
한데 앞에 선 두 절대자의 경지는 화경을 것 넘어선 정도. 생사를 건다면 승패는 장담할 순 없으나, 의지로 물러서기 전까지 전장을 주도할 자신은 있다.
그 오연함 담긴 무인의 투기가 거칠 것 없는 기세를 부채질했다.
위이잉!
그때 둘을 살피던 눈에 의아함이 가득 서렸다. 무인 열과 함께 결연한 자세로 자신을 마주한 자야 당연한데.
‘저자는 왜?’
십여 장 떨어진 곳에서 팔짱만 끼고 있는 자. 그 뒤엔 불안에 떠는 선우가가 열 명 있다. 뭔지 이해할 수 없는 상황.
매서운 시선에 흉중에 품은 의문을 그대로 담아 흘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이지? 날 혼자 상대하겠다고? 큭큭! 이 도왕이 그렇게 우습게 보이나?”
윤자엽은 깊고 장중한 숨을 내쉬었다.
“같은 편이 아니오이다.”
“……어쭙잖은 계략은 집어치우게. 저 뒤에 있는 아이들을 내가 모를 거 같나?”
“못 믿겠으면 직접 확인하시지요.”
무윤을 살피던 독고승의 시선에 의아함이 가득해졌다.
‘불가의 기운! 소림? 저런 자는 들어 보지 못했거늘.’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이가 없다. 어쨌든 정파라면 같은 편이 아니란 뜻. 이러면 물어야 한다.
“말해 보게. 이게 무슨 상황인지?”
“마인을 잡으러 왔다가 이들이 수상해 뒤를 쫓았소이다. 몇 가지 묻는 중에 오신 게고.”
“이들은 누군가?”
“아직 듣지 못했소이다.”
“어쨌든 저들은 마인과 한패일세.”
“그리 보여 온 게지요.”
“그럼 같이 나서면 되겠군.”
“아직 판단을 못 내렸소이다. 다만 관여할 생각은 없으니 뜻대로 하시지요.”
“그 판단 내가 도와주지. 저들은 강서를 공격한 마인과 같이했네. 내 이름을 걸고 보증하지.”
“이들은 아니라고 하더이다.”
“허허! 그대는 나보다 이자들 말을 신뢰하는가?”
“도왕의 말씀을 어찌 못 믿겠소이까. 하나 사야홀주의 말이라면 신중할 수밖에요.”
독고승의 입가에 섬뜩한 광망이 스쳐 갔다. 도착하자마자 이미 예상했던 일.
저 경지의 정파 무인이 우연히 왔을 리가 없다. 또 얘기를 나눴다는 것도 그렇고, 선우가 아이들을 보호하는 모양새도 확실하고. 고민도 길지 않았다. 우선 탈취한 방대한 자료가 놈들에게 없다는 건.
‘이미 빼돌렸어.’
사야홀 소문이 퍼지는 건 막을 수 없는 상황. 한데 독고가의 능력이면 어떻게든 축소시키고 변질시킬 수 있다. 또 그런 상황에서 훔친 놈부터 때려잡는 건 분풀이밖에 안 되고.
더 중요한 건, 저 불가의 무인. 분명 저 경지면 상당한 지위에 있는 자.
‘저 입으로 떠들어 대는 게 더 문제. ……제거한다.’
단 움직이기에 앞서 선결해야 할 일.
‘다른 놈이 못 나서게 해야지.’
둘이 합공할 가능성, 그것만 배제하면 된다.
천마라 불린 내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