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저녁 해가 천천히 숨을 고를 무렵.
쾅! 카캉! 카앙! 콰쾅!
얽히고설킨 무형의 불꽃이 어둠에 잠겨 가는 대지에 환하게 제 몸을 불살랐다.
사방에서 고성이 난무했다.
“죽여라!”
“좌측이 뚫렸다! 막아!”
“이 거지 같은 마인 새끼들! 다 죽여 버리겠어!”
“크크! 그럴 실력이나 될까?”
“대주! 이쪽도 몰려옵니다!”
“방어선을 지켜라. 물러나선 안 돼!”
“헉헉! 놈들 숫자가 너무 많습니다!”
“그럼 죽여!
“시팔! 그러자고요!”
하늘로 향해 치솟는 핏물이 격전의 현장임을 알렸다. 주인 잃은 팔다리가 사방에 널브러지고, 잘린 볏단처럼 머리통이 굴러다녔다. 주인 잃은 칼이 대지에 박히고 잘려 나간 손발이 대지를 나뒹굴었다.
스윽!
검에 서린 피를 흩뿌리자 짙은 피 안개가 독고운양의 눈가를 스쳐 갔다. 잠시 틈이 생긴 사이 평생의 숙적에게로 눈을 돌렸다.
“예까지 와서 얼굴도 안 보고 가려 했는가?”
혈천대주 탁조경은 낭랑한 웃음을 흘려 냈다.
“크크! 강남 도왕께서 오셨는데 어쩌겠나? 살아야 다음에 또 볼 텐데.”
독고가 두 명의 절대자 중 하나로 강남의 도왕이라 불리는 독고승. 천하십대 고수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했지만, 강북 팽가의 팽강현과 함께 중원의 이대 도왕으로 불린다.
또 숨겨진 신분 하나가 있다. 사야홀주라고.
독고운양은 입을 살짝 비틀었다.
“숙부를 건드린 건 그쪽이니 날 탓하지 말게.”
순간 탁조경의 눈빛이 형형하게 빛났다. 이 말을 하려고 일부러 기다렸다. 도왕을 딴 데로 보내 버리기 위해서. 그럼 자신은 물론 다수가 빠져나갈 수 있다.
“무슨 소리! 우린 사야홀(私夜笏)을 건드리지 않았네.”
“허허! 정말 놀랐네. 자네가 그런 허접한 변명을 다 하다니.”
“단주!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이나?”
“아니면 시간을 끌 수작이겠지. 뭐 어느 쪽이건 상관없네. 오늘이 자네 제삿날인 건 변하지 않을 테니까.”
“크크! 이거 실망인데. 날 그렇게밖에 안 봤다니 말이야.”
“그럼 핑계라도 늘어놔 보게. 마지막인데 들어 주지.”
“내 듣기로 사야홀을 공격한 자들은 자료는 다 챙기지 못했어도 살아 있는 선우가 사람들은 다 빼 왔다고 하더군. 확인했겠지?”
그때 옆에서 귀 기울이고 있던 사야홀주 독고승이 나섰다.
“더 말해 보게.”
“역시 도왕께서는 알아들으시는군요.”
“잡설은 필요 없네.”
“본교라면 그렇게 했겠습니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저들 대신 자료나 왕창 챙겼겠지.”
“혈교가 아니다?”
“예. 우리가 일을 벌이는 틈을 노렸더군요. 아! 전 물론 나중에 알았습니다. 오해는 마시길.”
“저들이 누군가?”
“우리가 그런 것까지 다 터놓을 사이는 아니잖습니까? 뭐 그래도 이건 말씀드리죠. 저들은 북쪽으로 갔습니다. 율재령 골짜기 쪽으로 갔으니까 빨리 가시면 또 모르죠.”
“친한 사이 같은데 그 말을 어떻게 믿지?”
“여기까지 같이 오는 걸로 공조는 끝났습니다. 이젠 우리가 살고 봐야죠. 아! 그래서 하나 더 알려 드릴까 하는데. 저들은 선우가영을 찾느라 시간이 지체돼서 피해가 커졌다고 하더군요. 혹 그녀가 있다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독고승의 눈이 가늘어졌다.
“무슨 소린가? 그 아이는 자네들이 죽였으면서?”
탁조경의 눈도 번득였다. 그때 보낸 이들은 자신의 직속 수하들. 한데 자신이 본 절대자들은 거만으로 둘러싸인 인간들. 이런 상황에 절대 저런 사소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그때 보낸 수하들은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전 그쪽에서 죽인 줄 알았는데.”
순간 독고승의 눈이 반짝였다. 궁금한 게 많지만 지금 중요한 건 오직 하나. 자료를 아직 가지고 있다면 되찾는 것. 그들과 협상할 거리가 생겼다.
“저들도 그리 알고 있겠군.”
“당연히.”
독고승의 전음이 조카 독고운양을 향했다.
-거짓 같지 않다. 난 그쪽으로 가야겠는데, 괜찮겠느냐?
-늦지 않으시면 됩니다. 보아하니 도주할 생각이라 구석에 몰기 전까지 전면전은 없을 겁니다.
-알았다. 빨리 오마.
-근데 자료는 이미 빼돌리지 않았을까요?
-그럴 거 같다만 그래도 가 봐야지 어쩌겠느냐.
-알겠습니다.
어쨌든 탁조경의 전략은 먹혀들었다. 이미 선발대 서른을 형산으로 보낸 상황. 이 어둠에 둘만 잘 교란시키면 된다.
독고승이 떠나자마자 탁조경의 고성이 산야에 올렸다.
“퇴각하라!”
“예!”
탁조경의 비릿한 시선이 북쪽을 잠시 향했다.
‘날 원망하지 말게. 살기 위한 선택이니.’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또다시 시작됐다.
그 방향은 자개봉. 형산파가 있는 곳.
* * *
전장의 북쪽.
회색 먹구름 풀린 어둠이 더 칙칙해졌다.
파파팟! 사사삭!
“헉헉!”
“하아!”
다급한 걸음이 숲을 헤쳐 나갈 즈음, 열 살 남짓 아이를 업고 가던 윤자엽의 눈에 당혹감이 서렸다. 전방 십여 장 앞에서 팔짱을 끼고 자신들을 바라보는 자.
한데 산천초목을 흔들던 바람이 제집을 찾아간 듯, 그 주변은 휘도는 바람 한 줄기 없다. 다른 곳은 쓸리는 나뭇잎 소리가 확연한데도.
그 공간의 실체를 깨달은 윤자엽의 가슴이 턱 하니 막혀 왔다. 자신만의 공간이 있음을 일부러 드러낸 자. 침음이 절로 삼켜졌다.
‘강자!’
화경인 자신의 기준에도 통하는 말. 한데 살피던 눈에 의아함이 더해져만 갔다. 직접 보진 않았지만 그림으로 알고 있던 얼굴. 그자일 줄 알았는데.
‘독고승이 아니야. 그럼?’
어쨌든 간격이 좁혀진 이상, 이들을 데리고 피하는 건 불가능.
“잠깐! 멈추게.”
“……?”
타다닥! 타악!
윤자엽은 마른 대지를 터벅거리고 다가오는 중년인에게 물었다.
“우릴 기다렸나?”
“궁금한 게 너무 많아서.”
“강서에서 왔나?”
“애들은 잠시 재우지. 피곤할 텐데.”
“……그러지.”
아이들이 잠에 빠져들자, 무윤의 질문이 시작됐다.
“마기도 없는 자들이 왜 혈교와 같이 있었나? 한둘이면 그러려니 하겠는데 다 아닌데?”
이미 스무 명 모두의 기운은 다 훑었다. 그중 무인들의 기운은.
‘악양 동굴, 수장이던 자와 동일해. 전부.’
소문 조작 세력에 속한 자들이 확실했다. 하지만 궁금한 게 많은 지금은 먼저 꺼내서 적의를 심어 줄 이유가 없다.
윤자엽은 답 대신 질문을 건넸다. 답하려면 알아야 하니까.
“그대는 누군가?”
“마인을 죽이러 왔다가 그대들이 궁금해서 여기로 왔네.”
“알겠지만 우린 마인이 아니네.”
“같이 있었지. 사이가 나빠 보이진 않았네.”
“독고가? 아니면 척마단? 그것부터 알려 주게.”
“전혀 상관없네. 그대라면 내 기운을 대략 알 텐데.”
혹시 몰라 나선 이후 신기심의공은 감추고 불가의 기운을 한껏 풀어 낸 상태. 익힌 무공은 없지만, 불기(佛氣)를 뿌리는 건 어렵지 않다.
역용을 했어도 도가 기운을 썼다간, 형산파 일을 진행하다 보면 향후 들킬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어 내린 선택.
산자락에 빛나던 초록 향에 더해 장엄한 불가의 기운이 느껴지자 윤자엽은 작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정파야.’
애들부터 먼저 재운 것도 그렇고. 이러면 협상의 여지가 있다. 잠시 생각하다 적당한 말을 골라냈다.
“독고가와 오랜 원한이 있어 그걸 풀고 가는 길일세. 이분들은 오래전 잡혀간 이들이었고.”
“부족해. 그 정도 해명이면 마인과 한패로밖에 안 보인다네.”
그때 중년의 여인이 앞으로 나섰다. 가슴 저 밑에서 복받치는 한 서린 분노가 차디찬 목소리에 가득 담겼다.
“저들에게 잡혀서 죽지 못해 살아온 게 이십오 년이에요. 이분들은 그런 저흴 구해 주신 거예요.”
“그 긴 시간을 잡아 뒀다? 이유가 있을 터인데.”
“……우리가 아는 게 필요해서 그런 거예요.”
여인의 말에 추측이 확신이 됐다. 이십오 년이란 시간에, 무인이 아닌 자들의 몸에 가득 밴 건 진한 약 향, 그리고 선단은 물론 독 내음까지.
순간 무윤의 눈이 더할 수 없이 빛났다. 이제야 잘게 쪼개졌던 파편들이 하나로 모이기 시작했다.
선우가영의 오빠, 선우단엽이 조작 세력에 있고, 상당한 위치에 있다는 가정하에선 거의 모든 게 맞아떨어진다. 혈교와 어떤 역학 관계인지 그 부분은 의문이지만.
이러면 핵심을 찔러야 한다.
“사야홀에서 탈출하셨소?”
“…….”
세차게 떨리는 여인의 눈빛과 막혀 버린 입. 답을 준 셈이다.
“선우가 사람이오?”
순간 윤자엽의 눈썹이 매섭게 휘날렸다. 단번에 저걸 알아낸다는 건.
“독고가와 무슨 관계인가?”
“아무 관계도 없다 했네. 그저 들은 게 있을 뿐.”
“못 믿겠네. 신분을 밝히시게!”
이제 한 번에 쏟아 낼 때. 그리고 표정을 살펴야 한다.
“그러는 자넨? 자네가 있는 곳은? 정말 궁금했네. 마기를 감추는 약을 혈교에 전하질 않나, 천마 헛소문을 퍼트리질 않나. 거기다 이번엔 정, 사 대전까지 조작하는 자네들! 도대체 청해에서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게지?”
윤자엽의 머릿속이 멍해지고 얼어붙은 입은 그저 부르르 떨려 왔다. 줄줄이 쏟아진 말들은 생각도,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들.
싸늘한 냉기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세차게 떨리는 눈은 마음의 격동을 알렸다. 모두 맞는 말은 아니지만, 핵심을 꿰뚫고 있다. 그저 떠오른 의문 하나.
‘어떻게?’
무윤은 내력을 올려 웅혼한 기운을 한껏 뿜어냈다. 이럴 때 더 밀어붙여야 한다.
우우웅!
“이 모든 일! 선우단엽이 저지른 겐가? 허! 혈교를 도망쳐 나온 자가, 그것도 부모님을 죽인 혈교와 이런 일을 벌이다니! 하늘이 두렵지 않은가! 이렇게 악마가 돼서야 어찌 동생 얼굴을 볼 수 있단 말인가!”
“……!”
경악을 넘어선 충격, 부여잡고 있던 정신이 흩날리는 윤자엽은 생각이란 자체를 할 수가 없었다. 또다시 떠오르는 단어는 아까의 그 하나뿐.
‘어떻게?’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멍해진 눈빛만 무윤 주변을 가득 헤맸다.
그러길 한참, 아직도 머릿속은 혼동 그 자체이지만 번뜩 떠오르는 게 있었다.
‘동생이라고 했어! 설마!’
묻는 입술이 파르르 떨려 왔다. 과거 그의 첫사랑이기도 했던 여인. 그녀를 찾기 위해 이번 여정에도 직접 나선 것인데. 죽었다고 생각하고 이젠 마음에서 떠나보내려던 그녀였는데.
이러면 물어야 한다. 알아야 한다.
“가영, 그 아이를 아는가? 아니 살아 있는가? 그것만이라도 알려 주게. 부탁하네. ……살아 있는가?”
“그녀를 어찌 아는가?”
“……어릴 적 가까웠던 사이네.”
격정에 떠는 표정과 심장의 울림이 진실임을 알린다. 신분을 감춘 이상 가영이 드러날 일은 없다. 알리고 더 많은 걸 털어놓게끔 할 때.
“이젠 다른 삶을 살고 있네만, 오빠 때문에 걱정이 많지.”
“……!”
무윤은 선우가영에게 들었던 과거 이야기 몇 개를 건넸다. 살아 있다는 증거가 확실한 것으로.
한동안 격정의 회오리가 몰아친 후, 윤자엽은 멍한 정신을 간신히 진정시켰다.
‘살아 있어. 확실해.’
그녀가 직접 얘기하지 않았다면 모를 얘기들. 그걸 전한 이가 이제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본다.
자신이 답할 차례란 뜻.
어차피 싸워서 이긴다는 보장도 없고 이자가 시간을 끌면 대안이 없다. 그럴 바엔 적당히 알리고 부탁하는 게 최선.
‘한데 어디까지 말해야 할까?’
윤자엽의 눈이 깊고 무겁게 가라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