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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라 불린 내 친구-137화 (137/161)

137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사도련 척마단주 독고운양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나설 핑계를 줘서 고맙긴 한데. 어떤 놈일까?’

남악(南岳) 형산에 오른 이유는 물론 유람이 아니다. 그가 찾는 마인들의 흔적이 있을까 해서 살피러 온 걸음.

한데 갑자기 들린 소리에 숨어서 듣다 보니 의아함이 커졌다.

‘유진이 뭘까? 정파 놈들이 사제지간에 저러는 걸 보면 보통 일은 아닌데.’

그러다 들키는 순간, 자리를 뜰까 하다가 발길이 떨어지지 않은 이유. 유진이 뭔지는 나중에 알아봐도 되지만.

‘기운을 감추고 있었는데 사파란 걸 어떻게 알았지? 거기다 기습이라 하지만 저 넷을 너무 쉽게 제압했어.’

그 궁금함이 더해져 나선 자리다. 형산의 장로라면 자신을 대략 알아볼 건 빤한 상황. 우선 해명부터 할 차례.

“다시 말하지만 난 남악을 보러 왔을 뿐. 여기서 소란 피운 건 그대들이니 날 탓할 생각은 말라고.”

장로 건천의 눈이 가늘어졌다. 일부러 드러낸 기세로 보아 쉽게 볼 상대가 아님은 직감했다. 그래도 이곳은 자신들의 터전.

“이 형산이 사파가 쉬이 오를 곳이던가?”

“잘 알지. 근데 지금 봉문 중이잖나. 지금 아니면 언제 와 보겠나? 안 그런가?”

“누군가?”

어차피 여기 온 건, 하루 이틀 사이에 정파에 알려질 일.

“나? 밝히면 더 오해받을 거 같긴 한데. 그래도 명색이 척마단주 체면이 있는데 감추기도 그렇군.”

건천의 눈이 커다래졌다.

“독고운양?”

“그대는?”

“……형산의 장로일세.”

“건천? 건허? 아니면?”

“우리 신분이야 증명됐을 터. 이쯤 하지.”

“뭐! 보아하니 더 물을 상황 같진 않군. 아! 난 귀가 안 좋아서 들은 건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말이 길어져 봤자 좋을 게 없다.

“피차 할 말도 없는 거 같은데, 이만 가 보지 그러나?”

독고운양의 야릇한 시선은 바로 무윤을 향했다.

“형산엔 볼일이 없는데 자넨 아니지. 초면에 사파 종자라니 좀 심했어. 안 그런가?”

“숨어 있었던 건 그쪽입니다.”

“뭐! 그건 그렇지. 그럼 이제 말해 보겠나? 내가 사파인 건 어떻게 알았지?”

“제가 기운을 잘 읽는 편입니다.”

“호! 이보게. 척마단주면 나름 강호에서 이름값 좀 하는 편이지. 한데 감췄는데도 자네 같은 젊은 친구한테 들킨 걸 알면 내 체면이 뭐가 되겠나? 핑곗거리라도 던져 줘야 갈 수 있다네.”

쉽게 물러날 자도 아니고, 척마단주 정도면 자신을 알아내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

‘감추는 게 능사가 아니다. 의구심이 생기면 더 파 볼 텐데.’

문득 이자라면 대략 알고 있을 일이 떠올랐다. 이제 알려도 걱정할 게 없는 상황이고.

“월검문 풍세백이라고 아십니까?”

“……아! 관아에서 피살된 그 친구 말인가?”

“당시 그자를 마인으로 판정했다는 얘기는 들어 보셨는지?”

독고운양의 눈이 살짝 커졌다. 당시 풍세백과 관련된 일은 중요한 사안이라 보고받은 게 있다.

“들은 게 있네. 누군가 법음으로 마인으로 판정했다고.”

“그게 접니다. 제가 익힌 게 좀 특이한 기공이라. 이 정도면 답이 됐습니까?”

“그걸 어떻게 믿지?”

그때 건천이 나섰다. 어떻게든 빨리 보내야 할 시점.

“그 자리엔 나도 있었소. 저 친구가 판별한 게 확실하오.”

순간 독고운양의 눈이 번득였다. 이러면 우선 믿을 수 있다. 한데 자신이 형주에 온 건 마기를 감춘 마인들을 찾기 위한 것. 조금이라도 빨리 찾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다.

‘풍세백 그놈의 광기가 거의 사라졌을 때 잡아낸 놈이라? 분명 쓸모가 있다.’

손해 볼 게 없는 장사다. 아니면 그만이니까. 또 어떤 놈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이제 끌어들일 명분을 만들 때. 짐짓 헛기침부터 흘렸다.

“크흠! 믿고 싶긴 한데. 나야 독고가 사람이니 당연히 가문의 무공을 익혔지. 한데 이 사실을 알면 가문 사람들이 뭐라 할지 모르겠구먼.”

“기운을 잘 파악하는 기공이야 강호에 널렸잖습니까?”

“이봐. 나 척마단주야. 내 기운까지 단번에 알아보는 기공이 세상에 널렸다고?”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는데, 남의 비기를 까라는 말입니까? 트집 잡을 거면 좀 그럴듯한 걸 꺼내시죠.”

독고운양도 말을 돌리는 성격이 아니다.

“그 친구 참 시원해서 좋군. 그래, 속셈이 있긴 하네. 들어 보겠나?”

“뭡니까?”

지금은 끌어들이기 위해 필요한 부분만 알릴 때. 그래도 형산에 대놓고 알릴 상황은 아니라 전음을 보냈다.

-최근 호남에 마인 놈들이 어슬렁거리는 거, 모르겠지?

무윤의 눈이 커다래졌다. 처음 듣는 얘기다.

-확실한 겁니까?

-우린 그리 본다네. 아니면 내가 여기 왜 있겠나? 한데 이번 놈들은 좀 특이해. 마기가 잘 드러나지 않아서 찾는 데 애를 먹고 있지. 어떤가? 자네가 좀 도와주겠나? 어차피 정파도 마인은 잡아야 할 거 아닌가.

무윤의 눈이 깊어졌다.

‘마기가 드러나지 않는다? 혹시?’

방연극이 봤다는 그자들일 수 있다. 이러면 우선 물어야 한다.

-왜 왔는지 아십니까?

-지금 말하긴 곤란하네. 아직 확실하지도 않고 말이 잘못 나가면 정, 사 간에 문제가 생길 수도 있거든.

-그럼 어떻게?

-형주 사도련 지부로 오면 그때 알려 주지. 아! 근데 저자들은 괜찮겠는가? 뭔가 단단히 엮인 거 같은데.

-죽일 사이는 아니니까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뭐 그렇다면. 근데 하나 물어도 될까?

-어떤?

-유진이 뭔가? 말하기 싫으면 관두고. 따로 알아보면 되니까.

-제가 떠들 일은 아니라서. 곧 알게 되실 겁니다.

-그래? 그럼 조금만 참지. 참! 자네 이름이?

-천무윤이라 합니다.

-알았네. 한데 화급을 다투는 일이라 빨리 왔으면 하네. 이건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닐세.

-알겠습니다.

잠시 후, 독고운양이 떠난 게 확실해지자 의아한 건천의 말문이 열렸다.

“전음을 나누던데?”

감출 일도 아니다.

“호남에 마인이 와 있는데 찾는 걸 도와달랍니다.”

“마인?”

“그것밖에 모릅니다. 자세한 건 와야 얘기하겠답니다.”

“……다른 말은?”

“이게 할 얘깁니까?”

“……!”

잠시 갈등하던 건천은 곧바로 섬뜩한 광망을 뿜어냈다.

‘더 고민할 게 없다. 죽이면 끝.’

이젠 눈 가득 터져 나오는 살기를 감추지도 않았다.

“악연은 끊어 내야 하는 법. 나도 어쩔 수 없느니라.”

“말이 더 필요합니까?”

더 끌고 싶지도 않고, 그럴 시간도 없다.

‘척마단주가 직접 올 정도면 심각한 상황이라고 봐야지.’

게다가 하오문이 일절 모르고 있다는 건, 그만큼 상대가 은밀하게 움직인다는 뜻. 일의 우선순위가 달라져야 한다.

건천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초절정 상으로 판단되는 놈.

‘절대 얕볼 놈이 아니야. 전력을 다한다.’

하지만 사제 건도와 합공하는 건 자존심이 용납지 않는다.

-자네는 가만히 있게.

-사형! 정말 죽이실 겁니까?

-허! 본산을 위해선 이게 최선이라 하지 않았나. 혹 도망칠지 모르니 잘 살피게.

-…….

모든 힘을 개방한 단전에서 일어난 진기가 건천의 전신을 내달렸다. 혼신의 힘을 다한 검극의 울림이 한 치의 흘림도 없는 의지를 알렸다.

우우웅!

경력의 여파가 무복 자락을 휘날리던 순간, 가볍게 내디딘 도약에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바람 탄 몸놀림에 더해진 칼날에 무수한 검파가 감돌았다.

슈우욱! 쇄액!

동시에 땅에 뿌리가 박힌 듯 굳건했던 일보의 진각도 허공을 향했다. 섬전 같은 쾌속함이 대기를 갈랐다.

파팟! 휘익!

곧게 뻗은 무윤의 주먹이 마주쳐 오는 검을 향했다. 한데 강기는커녕 여린 권기 하나 보이지 않는다. 오직 무형의 진기파동이 감싼 날주먹 그대로만 허공을 가른다. 초인의 무공, 박투다.

‘빨리 끝낸다.’

무인으로 봤다면 권강은 물론 호신강기까지 꺼내 상대를 예우하겠지만, 상대는 탐욕에 물들어 버린 미친 도사. 그냥 빨리 밟으면 그만이다.

위이잉!

시퍼렇게 흘러나온 검강이 몰아치는 폭풍처럼 무윤을 휩쓸 찰나, 건천의 눈가에 이채가 서렸다. 이해할 수 없는 상대의 표정이 부른 의문.

‘어째서?’

애써 무심함을 가장한 표정이라면 이럴 이유가 없다. 한데 저 떨떠름함 속에 담긴 건 나른함이다. 귀찮음이다. 불쾌함과 짜증이다. 어떻게 이 절체절명의 상황에 저럴 수 있단 말인가. 분노와 울분은 물론 초조와 불안, 긴장, 흥분이 가득해야 할 판에.

등골에 차디찬 시릿함이 치밀어 올랐다.

‘혹시 암수?’

하지만 이내 생각을 떨쳐 냈다. 이미 검격 안으로 몸이 들어온 상황. 이제 곧 쇄도한 힘과 강력한 기의 군집이 놈의 주먹과 몸을 찍어 내린다.

‘그러면 끝이다.’

지금은 올곧이 검에만 모든 걸 집중하면 된다. 광풍으로 몰아치면 그만이다. 육체를 짓씹어 대는 검이 전해 준 짜릿한 손 감각만 느끼면 끝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그 순간 거센 바람에 온몸 뒤흔드는 몸짓이 건천의 눈 가득 들어왔다. 허공에 너울거리던 손은 물론 몸까지 휘청거리듯 폭풍을 헤치고 회전한다.

순간 두 눈이 부릅떠졌다.

‘헉!’

검의 폭풍을 거슬러 올라오는 몸짓이 보인다. 출렁이는 파도처럼 너울거리며 흐느적거리는 손이 다가온다. 강기의 빛을 타고 올라 그 좁다란 곳에 길을 만들고는 비집고 들어오는 파동이 느껴진다. 기묘한 권파가 타오르는 들불처럼 살갗을 지져 대듯 아려 온다.

‘어떻게?’

겹겹이 쌓인 강기의 틈 사이로 경파를 헤집은 손끝이 눈가에 잔영처럼 흐르던 순간.

빠각!

“으윽!”

머리를 뒤흔든 충격에 이어 어느새 팔뚝 사이로 파고든 주먹이 가슴을 향한다 싶은 찰나.

푸욱!

“커억!”

내장 속까지 찌릿하게 울리는 충격, 정확히 명치에 주먹이 틀어박혔음을 알렸다.

둔중한 두 번의 타격이 준 울림은 건천의 뇌리를 뒤흔들었다. 멍해진 정신이지만 확신으로 다가온 느낌.

‘다, 당했어. 내가……. 어떻게?’

순간 본능 스스로 내린 결정이 내력을 끌어올리던 찰나, 경악과 함께 다가온 사실에 부여잡고 있던 정신이 흩날렸다.

‘다, 단전이!’

깨져 버렸다. 오십 년 피땀 흘려 쌓아 온 모든 것이 모인 그곳이건만. 단 한 번의 주먹질에 산산이 부서져 허공에 흩뿌려졌다. 아득한 어둠이 온 세상을 덮친 듯 눈가에 밀어닥쳤다.

어느새 무너진 무릎이 땅에 떨어짐과 동시에 멍하니 풀린 눈만 앞에 선 자를 향했다. 단 두 번의 주먹질 이후론 대지에 발을 박고는 예의 나른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자.

문득 제자 선운이 편지에 썼던 글이 떠올랐다.

-그는 감췄을 뿐 아주 강한 무인입니다. 죽이고자 하는 사부님이 도리어 그리될 수 있을 만큼.

통렬한 후회 하나가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 말을 헤아렸어야 했거늘! 살폈어야 했거늘!’

밀물처럼 쏟아져 드는 자괴감을 다 가슴에 담기도 전, 의식은 스스로 허물어진 자신을 버리듯 서서히 떠나갔다. 그때 귓전을 스치는 말 한마디.

“이제 알겠어. 왜 제자가 죽는 그 순간에도 당신을 걱정했는지.”

건천의 멍해지던 눈이 잠시 빛을 잡아챘다. 제자의 말이란 그 소리에.

‘……선운이 왜?’

무윤은 씁쓰레한 미소가 절로 떠올랐다. 건천의 몸이 알려 주는 사실. 아직도 반성보다는 후회와 허탈함, 분노의 기운만이 몸에 가득했다.

마음 같아서는 진언의 울림이라도 전해서 깨닫게 해 주고 싶은데 이미 의식이 다 떠나간 상태. 이제 마지막 말을 전할 시간밖에 없다.

“그거 아나? 다들 비슷하게 마단을 먹었던데, 아직도 머릿속에 광기가 가득한 건 당신뿐인 거. 왜 유독 당신만 그럴까? 도력도 제자보다 높은데. 그래서 난 헷갈려. 광기 탓에 이렇게 된 건지, 아니면 이게 원래 당신 모습인지.”

멀어지는 의식 속에도 놀람은 어쩔 수 없었다.

‘광기가 그득하다고? 나만?’

무윤의 마지막 말이 흘렀다.

“그건 당신만이 알겠지. 자신을 돌아본다면.”

“……!”

스르륵 무너져 내린 몸이 대지를 쓸었다.

투욱!

무윤의 무심한 시선이 건도를 향했다.

“어쩌시겠습니까?”

장로 건도는 속 깊은 안도의 한숨을 안으로 삭였다.

‘안 나서기를 천만다행이지.’

쓰러진 제자들을 보면서 아린 마음에 나설 생각도 없었다. 한데 순식간에 승부가 갈린 상황. 뭘 어찌할 사이도 없어 그저 멍하니 바라만 봤을 뿐.

하지만 자신 또한 초절정 상의 경지. 무윤이 우연으로 이긴 게 아님을 절감했다. 또 도사로서 더 초라해지고 싶지도 않고.

“크흠! 장문 사형께 사실대로 고하겠네. 제자들을 깨워 주게.”

“알겠습니다.”

잠시 후, 일행은 형산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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