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이제 진경을 직접 살펴볼 때. 양현각주 건우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그럼 보여 주겠나?”
무윤은 준비된 탁자에 함을 올려놓고는 담담히 말했다.
“아시겠지만 기록한 비단은 천 년 전 겸백이라 조심히 봐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를 말인가. 시간이 걸리더라도 단 한 곳도 훼손하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겠네.”
조심스레 겸백을 펼쳐 놓자 학도 열은 물론 장로들과 주요 일대제자들까지 살피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시진가량 뜨거운 열기가 대전을 휘저은 후.
양현각주 건우의 낭랑한 웃음이 사방에 흘렀다.
“허허! 본 각주는 물론이고 학도 모든 분의 의견이 일치하였소. 도백파 진경이 맞소이다.”
순간 격한 고성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무량수불! 정말이었어!”
“이런 기쁜 일이 다 있다니! 하하!”
“이러면 봉문도 빨리 풀 수 있지. 원시천존이 도우셨어!”
한동안 대전을 가득 메웠던 흥분이 가라앉고 난 후, 장문인 건수는 무윤을 가리키고는 말문을 열었다.
“여기 계신 도우께서 이 귀한 걸 건네주셨네.”
“어떤 분이신지?”
“사정상 지금은 얼굴을 역용했는데 나중에 알려 주겠네. 우선 할 말이 있다고 하니 경청해 주시게.”
“……?”
무윤은 단상에 올라 정중히 예를 갖췄다.
“장문인 말씀대로 사정이 있어 잠시 역용했는데, 제 말이 끝난 후엔 본모습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잠시 양해 부탁드립니다.”
“허허! 그러시게. 바로 알린다면야 뭐가 문제겠는가.”
무윤은 탁자 구석에 있는 다른 함을 가리켰다.
“그럼 바로 본론을 말씀드리죠. 저기 다른 함이 보이시겠죠?”
“그렇지 않아도 궁금했는데 저것도 진경인가?”
“아닙니다.”
“그럼?”
“저 안엔 총 서른일곱 권의 무공서가 있습니다.”
좌중 모두의 눈에 의아함이 가득 서렸다. 누구보다 놀란 장문인 건수가 나섰다. 무공에 대해 아는 건 아직 건허뿐.
“자네, 그게 무슨 말인가? 무공이라니.”
“저 안엔 도백파의 무공, 서른일곱 개가 들어 있습니다.”
“……?”
왁자지껄했던 대전이 한순간에 정적에 빠져들었다.
장문인 건수는 눈을 껌벅였다. 분명 찾아왔을 땐 진경만 얘기했었는데 난데없이 무공이라니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이보게, 난 당최 무슨 말인지…….”
“현청운형권을 들어보셨습니까?”
“……그건 도백의 대표적인 권 아닌가? 한데 그걸 왜…….”
“저 안에 현청운형권도 있습니다.”
장문인 건수의 놀람 어린 눈이 한순간 멍해졌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말. 한데 거짓 같지가 않다. 이미 보여 준 진경 또한 그렇고, 말을 꺼낸 자가 무윤이다. 지난 마단 사건 때 초절정 중반의 실력을 알고서 얼마나 놀랐던가. 그런 자가 형산의 전부라 할 자들이 모인 곳에서 망발을 늘어놓을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럼.
‘현청운형권이 저기에? ……나머지 서른여섯 개도 전부 도백의 무공?’
순간 마른침이 꿀꺽 삼켜지고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사실일지 몰라.’
문득 그걸 확인해 줄 사람이 떠올랐다. 잘게 떨리는 입술은 마음의 격동을 알렸다.
“사, 사형! 혹시 보셨소이까?”
장로 건허가 연단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본도는 이미 확인하였소. 저 안에 있는 건 도백파의 무공이 맞소이다. 현천운형권도 물론 있고.”
좌중은 경악에 빠져들었다. 다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흥분 그대로 말을 쏟아 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도백의 무공 서른일곱 개?”
“진짜야 뭐야?”
“건허 사숙이 허언할 분이 아니잖아!”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근데 진경도 다 진짜잖아. 그러면?”
“헉! 그럼 저 말이 다 사실이라고?”
경악에 찬 모두의 시선이 단상 위로 쏠렸다.
그 사이 장문인 건수는 건허에게 전음을 보냈다.
-사형, 정말 맞습니까?
-미리 말 못 해서 미안하네.
-……다 살펴보신 겁니까?
-어제 밤새 살폈는데 확실하네. 일부는 보여 준다 했으니 그때 보면 자네도 알 게야.
이러면 우선 믿고 봐야 한다.
-그, 그럼 왜 저에겐 비밀로 하셨는지?
-난 자네만은 알리고 의논하고 싶었네. 한데 저 친구가 이 자리에서 공론화해서 해결하고 싶다는데 방법이 없었네. 정말 미안하이.
장문인 건수는 속 깊은 한숨을 절로 흘렸다. 무윤이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 능히 짐작이 간다.
‘마단 사건을 직접 겪었으니 누굴 믿을 수 있을까.’
그래도 진경에다 무공까지 가지고 와서 이런 자리를 만든다는 건, 분명 전할 의사가 있다는 뜻.
-이 자리에서 뭘 하려는 겁니까?
-그건 나도 모르네. 지켜봐야지.
그래도 하나는 꼭 묻고 싶었다.
-전할 마음은 있는 거겠지요?
-안 그러면 왜 왔겠나? 알겠지만 우리에겐 다시없는 기회일세. 부디 잘되도록 부탁하네.
-이를 말씀입니까. 당연히 그리해야죠. 저 정도면 어떤 요구 사항도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고맙네.
무윤이 무공서를 탁자에 깔아 놓자, 장문인을 비롯한 장로들은 조심스레 내용을 살피기 시작했다. 약속된 시각은 반 시진.
흥분이 더해진 불꽃같은 정광이 서책을 훑던 사이사이 경탄성이 터져 나왔다.
“허! 도백 것이 맞아!”
“이것도, 저것도!”
“하아! 내 평생 이런 순간이 있다니!”
“무량수불! 다 진본이 맞는 거 같소이다.”
“허허! 도백이라니!”
예정된 시간이 다 되자 무윤은 서책을 거둬들이고는 열기 가득한 모두의 시선을 담담히 마주했다.
“다들 궁금하실 텐데 이제 본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장문인 건수가 앞으로 나섰다.
“경청하겠네. 말하시게.”
“이 자리를 만든 이유는 제 스승님의 뜻입니다.”
“어떤?”
“천 년 전 조사께서 남긴 것들을 세상에 전하라 하셨습니다. 그중 도백의 것을 전할 상대를 찾다가 여기에 온 겁니다.”
그때 건수의 눈이 커다래졌다. 최근 도인에 대한 소문이 바로 떠올랐다.
“그중이라면……. 혹시 자네가 은월청요검도?”
“그건 제 스승께서 전하셨습니다.”
“그럼 우릴 찾은 것도 스승의 뜻인가?”
“아닙니다. 은거에 드시면서 제게 결정하라 하셨습니다.”
건수의 입이 파르르 떨려왔다.
“하면, ……우리에게 전할 의향이 있으신가?”
“그걸 알아보려 이 자리를 청한 겁니다.”
“말해 보시게.”
이제 본격적인 논쟁을 시작할 때. 진중함을 가득 담아 좌중의 시선을 마주했다.
“묻겠습니다. 여러분의 형산이 도백의 유진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까?”
“…….”
그 누구도 감히 당당하게 답할 수 없는 사안. 짧은 정적 후에 장문인 건수는 나직한 숨을 흘려 냈다. 답이 어려울 땐 묻는 게 방법이다.
“그대는 어찌 생각하는가?”
“귀 파의 여러 정황을 살폈지만, 확신이 안 들더군요. 그래서 여러분 의견을 직접 듣고 결정하려고 이 자리를 청했습니다.”
“의견이라면 어떤?”
“만약 도백의 유진이 형산 것이 된다면 앞으로 어떻게 하실지, 그걸 알려 주시면 됩니다.”
그때 회의장 문을 박차고 들어온 이가 소리쳤다.
“저, 정말 도백의 무공이 맞는가?”
모두의 시선이 장로 건천을 향할 즈음, 장문인 건수는 굳었던 신색을 떨쳐 내고는 헛기침을 흘렸다.
“크흠! 사형. 그건 이미 확인했소이다.”
“허! 그럼!”
“중차대한 논의 중이니 사담은 잠시 후에 하시죠.”
“……?”
단상을 향한 건천의 눈에 의아함이 서렸다.
‘누굴까?’
장로직에서 물러난 후 당분간 은인자중하기로 했다. 움직일 일은 물밑에서 조용히 처리해도 되니까. 한데 아침에 진경 얘기를 듣고는 이모저모 활용할 방안들이 떠올라 고민 중이었는데, 갑자기 무공까지 있다는 소식에 놀라 황급히 달려온 길.
그때 일대제자 대사형 선청이 앞으로 나섰다. 정중히 예를 갖춘 후 담담히 말문을 열었다.
“본 파에 귀한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리오. 해서 묻고 싶은 게 있소이다.”
“그러시죠. 너무나도 중요한 사안이니 저도 성심껏 답변하겠습니다.”
“만약 우리가 부족하다 여기면 저 유진은 어쩌실 건지?”
“무당에 전할 겁니다. 이유는 아시겠지요?”
“그곳이라면 당연하오. 하면 애초부터 그곳으로 가지 여긴 왜 온 게요?”
“무당에 가면 넘칠 뿐이고, 이곳엔 오면 부족한 걸 채우리라 여겼습니다. 어느 게 더 값지겠습니까?”
“분명 그럴 것이오. 그럼 그대의 기준이 있을 터인데 말씀해 주시겠소?”
무윤의 미소가 의미심장해졌다. 건천이 왔으니 이제 밝혀야 할 때.
“도장께는 설명이 필요 없을 거 같은데. 전에 충분히 말씀드렸으니까요.”
“……무슨 얘긴지?”
무윤은 역용한 얼굴을 원래대로 바꾸고는 가볍게 고개 숙였다.
“오랜만입니다, 도사.”
순간 선청의 눈이 부릅떠졌다. 저 얼굴을 어찌 모를까. 아니 절대 잊을 수가 없다.
“그, 그대였소?”
동시에 무윤을 알아본 자들의 경악성이 연달아 터져 나왔다. 선청과 같이 있었던 일대제자 넷을 시작으로, 침주에서 마인을 판정할 때 봤던 자들.
“천무윤!”
“아! 맞다. 그때 풍세백을 마인으로 판정했던 그자!”
“그래! 뇌양 천가장의 큰아들!”
모두의 소란이 커질 때, 새파랗게 질린 얼굴에 온몸이 벼락 친 것처럼 들썩이는 자가 있다. 무자비한 전율이 건천의 뇌리를 휘감았다.
‘저, 저놈이었다니!’
제자 선운의 일로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트린 그놈이다. 평생을 쌓아 온 명예와 지위를 그 서신 하나로 짓밟아 버린 놈. 존경으로 가득 차야 할 제자들의 시선에 멸시와 차디찬 한기를 심어 준 놈. 한데 그놈이 도백의 유진을 가지고 온 놈이라니.
그 황망함에 멍했던 어느 순간 저 멀리 있는 놈과 시선이 짧게 마주쳤다. 그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아 올랐다.
‘저놈이 나를 노리고!’
의심이 아닌 확신이다. 좌중을 향한 담담한 미소 속에 자신만을 향한 것이 있다. 그건 잔인하면서도 흥겨운 섬뜩함이 분명했다.
그건 곧 유진을 전하면서 자신을 궁지에 몰아넣겠다는 뜻.
순간 머리 위로 퍼런 핏줄이 툭 튀어나왔다. 참을 수 없는 모멸감에 분노가 용암처럼 들끓었다.
‘이놈이 정녕!’
장로직에서 물러나 그동안 골방에 처박혔던 울화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 참을 수 없는 격한 분노가 입술을 짓씹게 했다.
그때 어디서 새어 나왔는지 모를 기이한 불꽃이 눈꼬리를 스쳐 갔다. 자신 또한 이젠 다 사라졌다고 생각했던 그것. 그 광기 담은 귀화의 불씨가 아직도 저 깊은 곳에 남아 기다란 혀를 날름거렸다.
순간 눈 가득 터져 나오는 살기가 심중의 결심을 알렸다.
‘이놈! 내가 당하고만 있을 줄 알았더냐? 너만 없애면! 진경도 우리 것이고, 날 궁지로 몰았던 모든 걸 뒤바꿀 수 있다. 네놈만 없애면 모든 게 해결돼!’
그때 무윤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스쳐 갔다. 건천에게서 흘러나온 기운이 알렸다.
‘약 기운이 골수에 미쳤어.’
그건 곧 도사로서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다는 증거.
이 자리를 만든 목적 중 하나는 공개적인 논쟁을 통해 건천의 입지를 없애 버리려는 것도 있었다. 한데.
‘그럴 필요도 없겠어. 움직일 기회만 만들어 주면.’
저 귀화의 불꽃이 원하는 대로 판을 만들어 주면 된다. 자신은 물론 형산을 위해서도.
그 마음 담은 시선이 선청을 향했다. 바뀔 형산에 가장 적임자로 여겨지는 자. 이제 그에게 힘을 실어 줄 때다. 또 그래야 다급해진 건천이 먼저 움직일 테니까.
반성 없이 악에 받친 도사는 도사가 아니다. 오히려 청정도량을 어지럽히는 괴물일 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