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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라 불린 내 친구-134화 (134/161)

134화

이틀 후, 침주 망산(莽山)의 한 동굴.

슥! 스슥!

한 자 한 자 정성을 다한 글이 겸백(기록용 비단)에 가득 찰 무렵, 씁쓰레한 미소가 무윤의 입가에 흘렀다.

‘정성 들여서 일부러 못 쓰는 게 더 힘드네.’

자신, 아니 무륜의 회고록을 쓸 때는 괜찮았다. 서체만 대충 바꿔서 쓰면 되니까. 한데 은야문 태상이었던 도천의 기록을 위조하려면 달필이어선 절대 안 된다. 무인인 자의 글씨처럼 보이려면 한마디로 개발새발이어야 하니까. 그게 몇 배나 더 힘이 들었다.

또 글을 다 쓰면 먹이 마르기 전에 내력으로 열을 가해 흐릿하게 지우고, 마른 후에도 퇴색되도록 정밀한 작업을 해 줘야 한다.

천 년의 세월을 그 안에 넣어야 하니까.

그러길 한참, 문득 휘저은 목의 우둑 소리가 시원함을 알렸다.

‘이제 서류는 다 된 거 같고.’

다음 챙겨야 할 것들.

우선 형산파에 가져갈 도백파 무공과 진경. 그리고 소림에 줄 불경과 멸마단주 각운에게 전할 불광어기무(佛光於氣舞), 관음십팔무(觀音十八舞). 여휘가 남자의 춤을 살펴보기 위해 만든 것들인데 그 심법이 소림의 것이 돼 버린 두 무공도.

거기에 무당에 전할 도경까지 챙기면 끝이다.

이제 다음은 여휘가 모아 둔 절대무공을 살펴야 할 때. 예전엔 대충 훑어보고 관심 있는 몇 개만 꺼내 봤었다. 도백파 것을 제외하고 대략 백여 개 정도.

그중 현존하는 정, 사 문파의 비전이 약 절반. 남궁, 팽가, 당가 등 정파는 물론 사파의 지존 격인 독고가의 무공도 눈에 띈다.

‘이것들은 묻어 두면 되고.’

지금은 꺼낼 이유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랬다간 해당 문파와 적이 될 게 빤한 일. 물론 이 중 전해지지 않은 게 있다면, 나중에 활용한 일이 생길지 모르지만.

우선 그것들부터 추려 내고 나머지 것들을 살폈다.

남은 오십여 개 중 전해지지 않은 것으로 추정되는 건 약 서른 개 정도.

그중 정, 사 가문 무공이 근 칠 할, 나머지는 중도 성향이나 개인 무공들. 우선 세밀히 살핀 건 역시 사문 없이 만들어진 개인 무공들이다.

‘이건 꺼낸다 해도 탈 날 게 거의 없지. 물론 확인은 철저히 해야겠지만.’

강호의 모든 정보를 알고 있는 게 아닌 이상, 전승되고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하오문을 통해 꼼꼼한 사전 점검은 필수.

아직 줄 곳은 물론 어떻게 쓸지 확정하지 않은 상태라, 지금은 내용 파악만 하면 된다.

얼마 후, 서른 권을 대략 훑어본 무윤은 문득 엉뚱한 상상에 실소가 절로 흘렀다. 절대의 무공 서른 개가 주인이 없는 상황.

‘이걸 세상에 다 알리면 어떻게 될까?’

생각할 필요도 없다. 고금제일 여휘의 무공 하나보다도 더 큰 광풍이 강호에 휘몰아칠 닥칠 것이다. 오직 하나면 기회를 잡기 어렵지만 서른 개면 누구나 욕심을 낼 테니까. 강호에 그 어떤 무인일지라도.

무윤은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스스로 강호를 혼란에 빠트릴 생각이 없는 한, 절대 지켜야 할 원칙.

‘꼭 필요한 곳에만, 그것도 몰래 전한다.’

얼마 후, 가지고 갈 것들을 다 챙긴 무윤의 시선은 청옥상을 향했다. 마지막 남은 일.

‘이제 천마신공을 살펴볼까.’

여휘가 남긴 글대로 청옥상 밑에 천마신공이 있는 건 오자마자 확인했다. 이제 다른 준비가 끝났으니 세세히 살펴볼 때.

문득 여휘가 남겼던 말이 떠올랐다.

[혹시 몰라 춤추는 청옥 조각 아래 천마신공 전부를 넣어 두었다. 지금 교주란 놈은 돌대가리라 무심(無心)으로 만든 내 천라무(天羅舞) 안에 그 길을 넣어 가르쳤지. 네가 마음만 먹는다면 남긴 것과 천라무로 저들의 길을 인도할 수 있다는 소리다.]

그리고 마지막에 덧붙인 말.

[너라면 잘 결정하겠지. 그냥 묻어 둘지, 꺼내서 전하든지, 그럴 가치도 없어 밟아 죽이건 말이다.]

그 말대로 내 눈으로 천마교를 살펴보고 판단해야 한다.

무윤은 다시 청옥상을 밀어내고는 옥함에서 천마신공을 꺼내 들었다.

스륵!

순간 무심코 옥함 바닥을 보던 무윤의 눈이 커다래졌다.

‘서신!’

천마신공을 꺼낸 그 밑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서신. 이틀 전에는 담긴 것만 확인하고 꺼내 보진 않아서 몰랐었는데.

내용은 물론 여기에 남긴 이유도 궁금했지만 우선 그 자체만으로 벅찬 희열이 올라온다. 여휘가 남긴 말이 또 있다니. 놀랐던 가슴이 이젠 흥분으로 쿵쾅거렸다. 바로 싱그러운 웃음도 따라 올라왔다.

‘이번엔 또 뭐로 사람을 놀라게 하려나.’

흥분과 긴장 가득한 손이 조심스럽게 겸백을 들어 올렸다. 역시 여휘 놈의 필체다.

[이 글을 봤다는 건 결국 후손 놈들하고 뭔가 일이 생긴 거겠지.]

입가에 피식 웃음이 흘렀다.

‘그래, 결국 그렇게 됐단다.’

[여기에 따로 글을 남긴 건, 강호의 길로 가더라도 후손 놈들과 엮이지 않는다면 전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라 그리했다.]

의아함이 올라오게 하는 말이다.

‘천마신공 말고 뭘 또 남겼다는 말이냐?’

그 의문은 바로 풀렸다.

[이 밑에 있는 흑철을 잘라 보면 빙정으로 만든 함이 있을 게다. 그 안에 있는 팔찌에는 내 분노의 기운으로 만든 초극기(超克氣)가 담겨 있느니라. 너도 알겠지만 멍청한 놈들이 만든 마정(魔精)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지.]

무윤의 눈이 부릅떠졌다.

초극기는 여휘가 초인의 무공 삼 단계에 올랐을 때 생성했던 기운이다. 천지 만물과의 교류를 시작하면서 원하는 기운만을 모아 만든 초인만의 기공.

‘그 초극기를 팔찌에 담았다니? 어떻게?’

[당시 교주 놈 때문에 엄청 짜증이 났었다. 멍청한 놈이 몇 번을 알려 줘도 천라무 오의를 못 깨닫지 뭐냐. 해서 생각하다 분노의 초극기를 마기와 비슷하게 만들어서 가르쳤더니 금세 알아먹더구나.]

피식 웃음이 흐른다.

‘허허! 그 성질에 고생 좀 했겠구나.’

남을 가르치는 자체를 싫어했던 놈인데 그런 것까지 만들었다면 얼마나 짜증이 났었을지 눈에 훤히 보인다.

[다 끝난 후에 초극기는 버릴까 했는데 마침 귀한 운석을 구해서 그걸로 팔찌를 만들어 안에 봉인해 두었지. 한데 생각해 보니 네가 후손 놈들을 어찌하건 이게 도움이 되겠더구나. 모든 마기를 압도하는 기운이니 말이다.]

초극기는 현경을 넘어야 생성할 수 있는 절대의 기운, 한데 생사경에 이른 놈이 만든 것이면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걸 차고 신기심의공 내력을 운기하면 몸에 흐르고, 거두면 다시 팔찌로 들어갈 게야. 몸에는 절대 쌓이지 않는다. 영성이 깃든 운석이라 몸에 흡수하는 건 나도 쉽지 않았으니까. 한데 너에게는 그게 더 좋겠지. 필요할 때만 꺼내 쓸 수 있으니.]

놀람 어린 눈이 한순간 멍해졌다.

‘마기를 압도하는 기운을 필요할 때만 꺼내 쓴다?’

[놈들 꼬락서니가 맘에 안 들면 네놈 성질에 어떻게든 나설 터. 놈들을 밟아 죽이건 도와주건 이게 도움이 될 게다. 단 체기성강(體氣成罡)과 일 단계 초인 지경에 들지 않았다면, 초극기에 휘둘릴 수 있으니 그 전에는 절대 쓰지 말거라.]

지금은 막 그 단계를 넘어섰으니 이건 문제가 안 된다.

[이 초극기 또한 신기심의공 기반으로 만든 것, 두 기운을 잘 조화시키면 몇 가지 효과가 있을 게야. 더 강해지는 건 물론이고, 마인을 제압하거나 또는 반대로 초극기로 도와줄 수도 있다. 해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될 게다.]

이 외에도 운기 방법 및 조심해야 할 몇 가지 내용이 나열돼 있었다.

여휘는 마지막 글에 소회를 풀어 냈다.

[남기기는 했다만 내 마음도 그리 편치는 않구나. 어쨌든 안 쓸 상황이 최선이겠지. 잘 결정하기 바란다.]

얼마 후 놀람이 가라앉은 무윤의 생각이 깊어졌다. 갑자기 생긴 또 하나의 힘.

‘내 선택에 따라 여러 가지로 활용할 수 있는데.’

또다시 여휘가 남긴 소중한 선물. 하지만 쓰지 않을 때 가장 좋을 기운.

그렇게 한참 생각이 많아질 즈음, 복잡한 시선이 청옥상을 향했다. 여휘가 두 팔 벌려 춤추는 모습이 오늘따라 아련하게 다가온다. 속 깊은 한숨이 절로 흘렀다.

‘여휘야, 너도 그걸 바라겠지? 천마신공도 팔찌도, 그냥 묻어 두는 거.’

그 판단을 내린다는 건 곧, 필요악이더라도 천마교가 세상에 있어야 할 존재라는 걸 뜻한다. 무윤이 관여할 필요가 없는 상황.

자신의 바람이자 여휘 또한 그런 마음인 건 자명한 일.

문득 횃불이 흔들리자 천설청옥, 푸름 가득 담은 조각에 투영된 빛이 잔상을 만들었다. 여릿여릿 반짝이는 불빛이 반사되자 조각 속의 입이 열리는 듯했다.

그리고 환청으로 들려오는 목소리.

-세상이 그러면 어찌할까. 네 마음 가는 대로 하는 수밖에. 그리하면 그만인 것을.

물론 마음속 염원이 만든 상상이지만, 무윤의 입가엔 환한 미소가 담뿍 담겼다.

‘그래. 네놈 말이 백번 맞지. 알았다. 그리하마.’

무윤은 횃불에 일렁이는 여휘의 청옥상을 한없이 응시했다. 두 자 크기의 작은 조각이지만 하늘 향해 두 팔 올린 그 가슴이 한없이 넓어 보인다.

‘고맙다, 친구야.’

시간이 지날수록 잔잔한 웃음이 더욱 짙어져 갔다. 횃불에서 스러져 간 불꽃이 동굴 가득 따스함을 더했다.

팔찌를 시험해 보느라 예상보다 이틀이 더 흘러갔다.

닷새 후, 형주 형산파.

대소사를 논의하는 운정각엔 형산파 주요 인물들이 다 모였다. 장로들과 일대제자 오십여 명, 노년의 학도 십여 명까지.

자리에 앉은 일대제자들은 흥분된 모습으로 수군거렸다.

“이보게. 그자가 온 게 확실한가?”

“나도 궁금해서 알아봤는데 지금 장문인실에 있다더군. 곧 내려올 걸세.”

“하면 진짜란 말이군?”

“장문인과 건허 사숙께서 확인했다 들었어. 그러니까 우릴 다 불렀겠지.”

“하! 도백파 진경, 그것도 세상에 없던 것들이 오십여 개라니. 난 지금도 꿈인가 싶네.”

“왜 아니겠나. 봉문 상황이라 마음만 답답했는데 이런 좋은 소식이 있을 줄이야. 이게 다 원시천존이 보살펴 주신 덕이지. 하하!”

일반 무인 출신의 일대제자 소태봉이 눈을 껌벅였다.

“사형! 도백의 진경이 귀한 건 알겠는데 그게 이렇게 들뜰 일입니까?”

“그럼! 중원 도가의 뿌리라 할 수 있는 도백의 진경 원본, 그것도 오십여 개면 우린 당장에 정통성이 확보되네. 그뿐인가? 이 기회에 봉문도 빨리 풀 수 있지.”

“헉! 봉문까지요?”

“그 귀한 걸 세상에 알린다는 명분이 생기지. 이제 알겠나? 왜 다들 이러는지.”

“아! 그렇군요. 참! 근데 누가 그 귀한 걸 준다는 겁니까?”

“기다려 보세. 곧 나올 테니.”

그때 장문인 건수가 안으로 들어왔다. 뒤이어 건허와 역용한 무윤까지.

장문인 건수는 흐뭇한 표정으로 좌중을 향했다.

“크흠! 이 엄중한 시기에 좋은 일을 알리게 돼서 본 장문인도 기쁘기 그지없소이다.”

마음이 급한 장로 건영이 나섰다. 진경을 확인한 건 장문인과 건허 둘뿐이다.

“장문사형, 정말 도백의 진경이 맞습니까?”

“허허! 난 확신하네. 하나 진경은 여기 양현각 학도들이 검증해야겠지. 해서 만든 자리일세.”

흥분으로 들뜬 좌중의 시선에 열기가 가득 서렸다.

무윤의 계획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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