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다음 날 오전, 하후세가 의방.
밤새 투약과 치료를 병행하던 세 사람의 얼굴에 안도의 미소가 올라왔다.
내력을 거둔 무윤은 긴 숨을 뿜어냈다.
“약 기운 때문인지 독기가 더 퍼지지 못하고 한곳에 몰렸습니다.”
선우가영은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쓸어 냈다.
“휴! 그럼 확실히 고비는 넘겼네요. 이제 독을 중화시키는 처방을 같이하면, 시간은 걸리겠지만 회복될 거예요.”
“고생하셨습니다.”
“아녜요. 방주께서 투약 이후 미세한 변화를 시시각각 알려 주셔서 처방하기가 너무 쉬웠어요. 다행히 약도 잘 맞아서 다행이고.”
마음이 다급한 가주 하후종인이 나섰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건가?”
공야성은 확신을 담아 말문을 열었다.
“독이 잡힌 이상 생명엔 지장 없고, 환각 성분도 줄어들고 있으니 정신도 금방 돌아올 겁니다. 완치는 대략 서너 달 보시면 되고.”
“허! 그게 정말인가?”
“환자가 안정만 잘 취하고 약만 잘 드시면 틀림없습니다. 이제 세가 의원들도 파악할 수 있을 테니까 살펴보라고 하시죠.”
“크흠! 그래도 되겠는가?”
“당연히 그래야죠. 이젠 그분들이 치료해야 하니까요.”
“뭐라? 당장 그대들이 없어도 된단 말인가?”
“그 판단은 여기 의원들께서 하실 겁니다.”
“……!”
하후가 의원들의 진찰이 끝나자, 의방 한적한 곳에 무윤과 가주가 따로 자리했다. 정중한 감사의 인사 후에 하후종인은 화두를 돌렸다.
순간 서슬 시퍼런 광망이 눈가를 스쳐 갔다.
“그사이 호위 송자균이란 놈을 조사해 봤네.”
“뭔가 있던가요?”
하후종인은 짧은 말에 답을 담아냈다. 아픈 가정사를 길게 풀어 내고 싶지 않으니.
“역시 그쪽이었네.”
무윤도 대놓고 물을 일이 아니다.
“생각은 정리되셨습니까?”
“선을 넘었으니 끌 일이 아니지. 바로 매듭을 지을 생각이네.”
“잘 마무리하시기 바랍니다.”
하후종인은 진중함을 시선에 담아 무윤을 마주했다. 이제부터 물어볼 얘기는 그래야 했다.
“묻고 싶은 게 있네.”
“어떤?”
“앞으로 뭘 할 건가? 여기 침주에서, 그리고 강호에서 말일세.”
하후가는 처음부터 같이 갈 상대로 정한 곳. 우선 답이 명확한 것부터 꺼냈다.
“침주 일은 더 설명할 게 없습니다. 지금까지 해 온 게 답이니까요.”
하후종인은 작심한 이상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침주 최고 가문의 가주로선 가장 중요한 일.
“그 말은 곧 여기서 무가로 커 갈 생각은 없다, 이렇게 받아들여도 되겠는가?”
“하후가가 든든히 받쳐 주면 그럴 일이 있겠습니까?”
“알겠네. 그럼 강호엔 뜻이 있는가?”
“답이 쉽지 않네요.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하나둘 인연의 고리가 엮이고 있어서.”
“허허! 자네라면 그렇겠지. 낭중지추(囊中之錐)란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니.”
“그래서 요즘 고민이 많습니다.”
하후종인은 가장 묻고 싶은 말을 꺼냈다.
“그럼 내 염치없지만, 가주로서 돌리지 않고 묻겠네. 자네와 같이하는 게 우리에게 좋을까? 아니면 지금 이대로가 좋겠나? 물론 침주가 아니라 강호 일을 말함일세.”
그 답은 무윤도 해 줄 수 없다. 다만 적어도 침주에선 동료가 확실해진 이상, 스스로 판단하게끔 알려 줄 건 있다.
“짐작하시겠지만 세상이 시끄러워질 거 같습니다.”
“서북쪽 정, 사 분쟁 얘기는 들었네. 여파가 어디까지 미칠지 나도 걱정일세.”
“그 이면에 뭐가 더 있어 보입니다.”
“……들은 게 있는가?”
무윤은 소문 조작을 포함해 그간 있었던 일을 가능한 한 상세히 알렸다. 형산에 도백파 유진을 전하는 것까지. 그래야 뇌양과 침주의 안전을 위해 같이 움직일 수 있으니까.
또 같이 동참한다면 뇌물도 건넬 생각이다. 절대자를 배출해 본 적이 없는 하후가가 가장 목말라 하는 것.
‘주인 없는 절대무공 하나면 확실한 내 편으로 만들 수 있지.’
당초 악양에서 과거의 절대 무공 얘기를 꺼낸 건, 소문 조작의 근거를 뒷받침하고, 형산에 도백의 유진을 전할 때 사전 정황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갑자기 과거 무공 수십 개가 쏟아지면 오히려 의심만 할 테니까. 거기에 추가로 다른 무공을 꺼내는 건 상황에 따라 판단하려고 했었고.
한데 전쟁 상황이 목전에 다가온 이상, 특히 침주와 뇌양의 안전을 위해선 이제 적극 활용할 필요가 있다.
단 가장 유념해야 할 것.
‘도백파 유진 외에는 몰래 전해야지. 세상이 알면 난리가 날 테니까.’
물론 하후가에 지금 건넬 건 아니다. 이후 하는 걸 봐서 결정할 사안.
놀람과 경악에 휩싸였던 하후종인은 한동안 꺼낼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러길 한참, 옅은 한숨과 함께 멍하니 허공을 향했던 시선을 거둬들였다.
“허! 강호란 힘으로 말하는 세상이거늘, 그동안 너무 평온하긴 했네. 그간의 역사가 말해 주지 않나. 오랜 정적 후엔 반드시 거대한 폭풍이 몰아닥쳤던 것을. 오십 년의 고요함이 너무 길긴 했어.”
“준비할 시간은 있을 겁니다.”
세상 얘기가 한참을 더 오고 간 후, 화두를 돌리려던 하후종인의 눈이 더할 수 없이 빛났다. 도백파 유진 얘기에 놀란 가슴은 아직도 여운이 가시질 않는다. 이런 말을 할 땐 아들도 써먹어야 한다.
“혹시 진이 놈이 말 안 하던가?”
“어떤?”
“우리 가전무공도 일부 도가에 뿌리가 있네. 진이 놈이 익힌 천우구환검(天宇九還劍)도 그렇지. 봐줄 때 참고하라고 하는 말일세.”
밑밥을 깔 때다.
“그렇지 않아도 악양에서 유심히 봤는데, 조사님이 남기신 것 중에 참고할 게 있어 보이더군요.”
“……그러면 혹시?”
“더 살펴보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절대지경까지 갈 무공이라.”
하후종인은 절로 침이 꿀꺽 삼켜졌다. 이제 무윤을 알기에 저 말뜻이 뭔지 모를 수 없다.
‘줄 생각이 없으면 언급 자체를 안 했을 자야. 향후 우리 행동을 보고 결정하겠다는 뜻.’
이럴 땐 체면이고 뭐고 없다. 가주로서 달려들고 볼 일.
“그런가? 그럼 잘 살펴봐 주시게. 부탁하네. 참! 필요한 게 있으면 뭐든지 말하고. 언제든 말일세.”
“알겠습니다. 전 그럼 형주로 가 봐야 해서 이만.”
“그러게. 나머지 일은 다녀와서 논의하세나.”
“예.”
정문을 나서는 무윤의 발걸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적운문도 그렇고 하후가도 이 정도면.’
침주에서 이루고자 했던 건, 시전 상거래에서 상생의 사업 구조를 보여 주는 것. 그래서 무력 싸움으로 인한 갈등은 최소화하는 게 목표였는데, 다행히 별 탈 없이 마무리됐다.
물론 강호 일은 다르겠지만.
* * *
침주 외곽 동굴로 돌아가는 길.
선우가영의 표정이 확실히 한결 편해 보인다. 이제 물을 때가 됐다. 아픔을 쓸어내린 그녀를 위해서 반드시 해야 할 질문을.
“오빠는 어떤 분입니까?”
순간 선우가영의 몸이 움찔거렸다. 이미 예상하고 있던 질문이지만, 대답 여하에 따라 많은 게 달라질 수 있는 상황. 결심한 건 오직 하나.
‘가능한 한 사실대로. 그게 서로에게 최선이야.’
무윤을 향한 눈에 솔직함을 더했다. 문득 하려는 말 때문에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어릴 땐 참 친했는데 의원을 천직으로 결심하고 나서는 너무 미워서 한동안 오라버니라 부르지도 않았었죠.”
“……?”
“한마디로 의술엔 천재였어요. 그것도 입이 떡 벌어질 만큼. 그런 사람이 옆에 있으면 어떤 자괴감이 드는지 잘 아시……. 아! 모르시겠구나.”
“……저도 못 하는 거 많습니다.”
“그런가요? 전 잘 모르겠던데.”
남의 속을 꺼내고 싶을 땐, 내 속도 보여 주는 게 좋다. 특히 못난 과거 얘기처럼 허술한 구석을 드러내면 경계심은 더 옅어지는 법. 지금은 그렇게 그녀를 도와줄 때다.
“저도 과거에 마인으로 몰렸던 건 들으셨죠?”
“예, 대충 듣긴 했는데.”
“멍청한 짓 많이 했습니다.”
이전 무윤이 했던 일들을 담담히 풀어 내자, 시간이 지날수록 여인의 잔잔한 웃음이 짙어져 갔다. 실소를 자아낼 수밖에 없는 내용보다, 얘기를 꺼내 부담을 덜어 준 그 마음이 더해져서다.
“그러셨군요.”
“참! 오빠란 분은 저같이 멍청한 구석 없던가요?”
“왜 없겠어요. 한번 고집부리면 끝까지 가는 성격이라 나중에 호되게 당한 적이 많죠.”
“그건 저하고 비슷하네요.”
여인의 입가에 씁쓸함이 스쳐 갔다.
“휴! 사실 그 고집이 화근이 됐어요. 오라버니 꿈은 가문이 혈교에서 독립하는 건데, 위험하다고 다들 반대했거든요. 근데 그걸 밀어붙이다가 가주 자리를 노리던 숙부가 모함까지 섞어서 혈교 수뇌부에게 알렸죠. 그때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우린 도망치게 된 거고.”
자연스레 말문이 트인 두 사람은 소소했던 과거부터 재밌었던 일까지 스스럼없이 얘기를 한동안 풀어 냈다. 티 한 점 없는 맑은 웃음이 점점 그녀의 입가에 짙어져 갔다. 그러길 한참, 선우가영은 문득 의아함이 떠올랐다.
‘왜 안 묻지?’
오빠가 어떤 사람인지 등의 일상적인 질문은 수없이 많았지만, 정작 궁금해할 약이나 연구에 대해선 자세한 질문을 가리는 게 역력했다. 바로 확신이 들었다.
‘내가 먼저 꺼내길 기다리는 거구나.’
선우가영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저 그 연구 말인데 주로 쓴 약은…….”
무윤은 싱긋 웃음과 동시에 말을 잘랐다.
“아니, 그건 됐습니다.”
“예? 중요한 얘기는 하나도 안 했는데요?”
“아뇨. 다 하셨습니다. 전 충분히 들었어요.”
“……그게 무슨?”
이럴 땐 상대의 시선을 있는 그대로 마주해야 한다.
“전 그저 가영 누님이 오빠란 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습니다. 만약 언젠가 만나게 된다면 동생이 해 준 얘기를 들려주는 것만큼 오빠가 좋아할 게 있을까요? 그래서 여쭌 겁니다. 다른 건 필요 없어요.”
“……!”
온 마음을 다 털어놓은 이에게 할 질문은 이거면 된다. 그래야 내 마음도 전하니까.
선우가영은 갑자기 가슴이 싸하게 아려 왔다. 이내 잔 떨림이 눈가를 어지럽히다 눈물 한 방울이 뚝 떨어졌다. 무윤의 말뜻을 왜 모를까.
‘날 인정해 준 거야. 가까운 사람으로.’
곽호산과 주손학이 그랬듯이, 무윤 또한 자신을 아끼고 보듬고 같이 살아갈 사람으로 인정한다는 말이다.
그 따스한 온기가 가슴을 감싸더니 어느새 울렁임을 더했다. 문득 옆에 있는 공야성의 은은한 미소가 눈 가득 들어왔다. 같은 마음임을 알게 해 주는 무언의 몸짓. 파도처럼 다가오는 아련한 감정의 해일이 마음을 쓸어내린다. 역시 입가의 몸짓으로 화답했다.
‘고마워요. 정말!’
그 아련함이 한참 동안 가슴에 물결로 휘몰아칠 즈음, 파르르 떨리는 눈은 오직 한 가지 결심만을 마음에 남겼다. 그 마음에 파고든 격랑은 진심 어린 영혼을 부추겼다. 꽉 다문 입가엔 굳은 의지가 가득 배어 나왔다.
어떤 화려한 미사여구(美辭麗句)도 지금 이 감정을 담을 수 없다. 그저 마음이 시키는 말을 입안으로 읊조렸다.
‘저도 함께할게요, 평생!’
이젠 훌훌 털고 새로운 세상을 볼 자신이 생겼다. 따스함과 포근함으로 나약해진 마음을 어루만져 준 덕에, 이젠 내 의지로 모든 걸 새롭게 풀어 가면 된다. 가까운 이들과 함께.
일렁이는 시선이 능선을 넘어 저 멀리 날아오르는 작은 새 한 마리를 향했다. 여린 가지 하나 꺾고 하늘로 훨훨 날아오른다. 그 모습에 담아 두었던 찌꺼기가 하늘로 훨훨 흩뿌려진다.
지저귀는 새 소리에 막혔던 가슴이 뻥 뚫어진다.
먼 산줄기 포개져 일렁이던 아침 햇살이 손을 흔든다.
부푼 가슴을 달구는 건, 새로운 삶을 살아갈 희망이다.
천마라 불린 내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