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곽호산의 동굴 연구실.
공야성의 설명이 끝나 갈 무렵, 선우가영의 빛나던 눈이 점점 더 깊은 색을 더했다.
“실혼단을 과다 투여했을 때 나오는 증상하고 같네요. 정신착란처럼 보이게 해서 독살 흔적을 감출 때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에요, 거기에 신경 독까지 써서 확실하게 죽이려 한 거 같고.”
“우리가 만든 약을 써 볼까요? 아니면 다른 처방이라도?”
“공야의숙이 만든 신경 독은 여러 가지라, 어떤 건지 파악한 다음에 처방하는 게 최선이겠죠. 그럼 아직 골수에 미치지 않았다니 완치도 가능할 거예요.”
“짐작 가는 독이라도?”
“그게 짚이는 건 있는데, 아시겠지만 신경 독 반응은 아주 미세해서 들은 것만으론 확신을 못 하겠어요. 공야 총관께서 좀 더 알려 주시면…….”
무윤과 눈짓을 주고받은 공야성이 나섰다.
“당장 약을 써야 할 상황이라 시간이 없어요. 왔다 갔다 하다가는 때를 놓칠 겁니다.”
“……그럼 어떻게?”
“저랑 같이 가시죠. 그게 최선 같습니다.”
한순간 여인의 눈이 멍해졌다. 자신이 목숨을 걸고 약속한 게 있는데.
“예? ……그건?”
“역용하면 누가 압니까? 안 그래요?”
“저, 전 안 돼요. 여길 안 나가기로 약속했는데. 그리고 역용할 내력도 이젠 없고요.”
무윤은 싱긋 미소 지었다.
“아뇨. 내력은 그대로 있습니다.”
“예? 그게 무슨?”
“그동안 운기를 전혀 안 해 보셨죠?”
“그거야 당연히…….”
“전 내력을 없앤 게 아니라 감추기만 했습니다. 대신 내력을 찾으려고 무리하게 운용하면 주요 혈이 막혀서 몸에 마비가 오게 했죠. 한데 물어보니까 그런 적이 없었다고 하더군요.”
그녀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 해 놓았던 안배였다. 만약 도망칠 생각이면 몰래 내력을 찾으려고 노력했을 테니까.
‘근데 전혀 안 했다면 이젠 믿어도 되지.’
곽호산과 이어 주기 전 마지막 확인이 끝났다.
잠시 후, 한동안 복잡한 심사를 감추지 못하던 선우가영의 눈에 어느 순간 불꽃이 확 일었다. 새삼 결심을 곱씹고는 악다문 숨을 크게 흘려 냈다.
“저 내력 없애 주세요! 감추지 말고요. 단전도 부숴 주세요. 영영 못 쓰게!”
기겁한 곽호산이 황급히 앞으로 나섰다. 무슨 마음에서 저러는지 잘 아니까.
“아니! 자네 맘은 알겠는데 그래도 그렇게까지…….”
순간 저만치 떨어져 있던 주손학도 신형을 날렸다.
파팟!
“아니 될 소리! 불가하네! 몸이 어찌 되려고 그런 말을 한단 말인가!”
선우가영의 커진 눈이 파르르 떨려 왔다. 눈가에 서서히 맺혀 가던 물기가 한순간 주르륵 흘러내렸다.
“크흐흑! 크흑!”
그동안 속에 꾹 담아 두었던 그 무엇이 둑 터지듯 쏟아져 버렸다.
저 멀리 어딘가 살아 있을지 모를 오라버니, 선우단엽.
그 때문에 불안했다. 새로운 삶을 살기로 마음먹었던 결심이 흔들릴까 봐.
두려웠다. 오라버니 생각을 할 때마다 뛰쳐나가고 싶은 제 발걸음이.
무서웠다. 가슴으로 믿어 준 이들을 배신하게 될까 봐.
죽음까지 각오했던 마음이건만, 가슴이 틀어박힌 그 응어리는 벼랑 끝에 내몰린 심정처럼 주체할 수 없는 격랑을 때때로 안겨 준다.
그때마다 한낱 가랑잎처럼 팔랑이는 자신의 마음이 죽도록 밉고 싫었다. 보고 싶은 열망을 씹다 뱉고, 살아 있으리란 희망을 아무리 바득바득 우그러뜨리고 찢어발겨도 사라지질 않는다. 그 가녀린 희망이 이젠 피해 갈 수 없는 고통이 돼 버렸다.
그 마음이 내린 결정이다. 더 이상 소소한 바람에도 제 몸 못 가누는 여린 가지가 아니고 싶기에.
지난 몇 개월 속을 터놓고 수많은 얘기를 나눴던 곽호산, 주손학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이 사람아. 그게 어디 이리 해결할 일인가. 마음을 다독이시게.”
“참고 기다리다 보면 다 때가 있는 법일세. 우릴 보시게. 삼십 년을 기다려서 이렇게 만나지 않았나.”
두 사람의 진심 어린 충고는 끊임없이 계속됐다.
그러길 한참,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무윤은 공야성에게 전음을 보냈다.
-우린 밖으로 나가야겠다.
발걸음을 죽이고 살며시 동굴 밖으로 나오자마자, 무윤의 성난 눈썹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았다. 공야성을 한 대 패주고 싶은 마음에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야! 이 새끼야! 큰일 날 뻔했잖아!”
공야성은 눈을 멀뚱멀뚱 뜰 수밖에 없다.
“그, 그러게. 주 숙부도 그런 거 같지?”
“저걸 보고서도 몰라?”
“거참! 이상하네. 평소엔 가까이 가지도 않던 분인데.”
“아우! 널 믿은 내가 바보지. 까딱 잘못했으면 싸움 붙일 뻔했잖아!”
“야! 나도 왔다 갔다 본 건데 그럴 수 있지!”
“이게 뭘 잘했다고 큰 소리야!”
이럴 땐 말 돌리는 게 최고다.
“그나저나 걱정이네. 두 사람 다 보통이 아닌 거 같은데.”
“별수 있냐. 우린 모른 척하는 수밖에.”
“휴! 그래야지.”
잠시 즐거웠던 목표는 머리에서 싹 지워야 했다.
얼마 후, 선우가영이 진정되자 두 사람은 슬며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곽호산은 셋이 논의한 결과를 알렸다.
“선우 의원은 가기로 했네. 다녀오시게.”
차분하게 진정된 그녀의 모습이 보이자 무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죠. 얼굴만 역용하면 문제없으니까요.”
“자네가 같이 가니 걱정은 없네만 그래도 잘 부탁하네.”
“알겠습니다.”
선우가영이 가지고 갈 것들을 챙기는 사이, 공야성이 무윤에게 물었다. 오자마자 하후천기 일로 다른 걸 물어볼 정신이 없었다.
“참! 가서 별일 없었어?”
“뭐 여러 가지.”
“얘기해 봐. 서신 가지고는 잘 모르겠더라고.”
알릴 만한 것들을 추려서 차근차근 풀어 내길 한참, 남궁사현과 도기를 뿌리는 마인 얘기로 접어들었을 때.
의낭(醫囊)을 챙기던 선우가영의 놀람 어린 눈이 한순간 멍해졌다.
‘제대로 된 도기(道氣)를 뿌리는 마인! ……설마!’
세차게 떨리는 몸은 흥분과 불안을 동시에 알렸다. 무윤이 말한 정황이 알려 주는 것.
‘오라버니가 연구하던 것과 비슷해.’
자신을 진정으로 생각해 주는 이들에게 이제 못할 얘기는 없다 여겼는데.
‘만약 오라버니가 그 세력에 있는 거라면.’
평생을 같이하기로 마음먹은 이들과 적이 될 수도 있는 상황. 아직 확실한 것도 아닌 그저 추측이지만, 뇌리를 때리는 직감은 그럴 거란 예상을 부추긴다.
그 짧은 순간 오만 가지 상상이 뇌리를 휩쓸 수밖에 없다. 그중 가장 큰 고민.
‘말해야 할까?’
양쪽 모두를 가슴에 담은 그녀이기에, 커진 눈은 불안하게 떨릴 수밖에 없다. 그러길 잠시, 선우가영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굳은 결심 하나가 심중의 걱정과 불안을 억눌렀다.
‘얘길 안 하는 건 날 믿어 준 이들을 속이는 거야. 그럴 순 없어. 또 알려야 무슨 방안이라도 같이 찾을 수 있고.’
오빠 선우단엽을 위해서도 맞는 결정이라 여겨졌다.
불안과 두려움을 깊고 장중한 숨으로 몰아내고는 떨리는 말문을 열었다.
“그 도기 자세히 설명해 주시겠어요? 기운은 어떤지? 느껴지는 약 성분이 있었는지, 하여간 뭐든 다 부탁드려요.”
“……왜 그러시는지?”
휘몰아친 격정을 다스리고 마음을 굳혔지만, 파르르 떨리는 입술은 어쩔 수 없었다.
“제 오라버니가 가장 집중했던 연구가 있어요. 마기의 부작용을 선기(禪氣)로 제어하는 건데. 말씀하신 게 아무래도…….”
“……?”
얼마 후, 모든 정황을 파악한 선우가영은 복잡한 심사를 가득 담아 긴 한숨을 뿜어냈다. 결심은 했지만 말 하나하나에 신중해야 할 때.
“저희 선우가의 숙원은 마공의 해악을 없애서 세상에 내보내는 거였어요.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르다 보니 그 취지도 사라지고 오히려 혈교 마공을 더 발전시키는 데 앞장선 게 사실이에요.”
“그리 들었습니다만.”
“근데 오라버니는 그 숙원을 풀고 싶어 했죠. 그래서 연구하다가 찾은 방법이 선기나 도기 같은 맑은 기운으로 부작용을 없애는 거였어요.”
“그간 비슷한 연구가 많았지만, 충돌이 나서 실패한 걸로 아는데. 부작용이 주는 대신 마공도 약해져서요.”
“맞아요. 그래서 오라버니는 마공과 선기를 별도로 운용하는 데 중점을 뒀어요. 그 방법 중에 마공은 하단전에, 선기는 외공처럼 몸에 쌓는 게 가장 효과가 있었어요.”
“몸에 말입니까? 그래도 하단전 내력이 흐르는 혈도와 충돌할 텐데 그건 어떻게 막습니까?”
“그게 가장 관건이었죠. 혈도는 완전히 구분할 수 없어서 적게 영향을 미치는 약재를 주로 연구했죠.”
이런 방법은 무윤이 가장 많이 연구한 분야이기도 했다. 몸을 주관하는 중단전의 무공을 완성하기 위해선, 하단전 내력과 분리 및 조화는 반드시 극복해야 할 과제였으니까.
‘난 그 답을 처음부터 중단전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찾았지. 하지만 다른 건 완전하지 못했는데.’
물론 다른 방법도 일부 효과는 있었다. 다만 절대지경까지 가기에는 부족했기에 접었을 뿐.
“진전이 있었습니까?”
“당시엔 거기서 막혔어요. 무엇보다 약재가 너무 비싸고 구하기도 어려워서 더 연구할 수가 없었죠. 다만 오라버니는 갈 길은 찾았다고 했어요.”
“어떻게?”
“몸에 내력을 쌓아 가면서 경지를 올리다가 중단전을 열면 가능하다고 봤어요.”
무윤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가능한 방법이지. 한데 중단전을 열 정도면 화경에 올라야 하는데 거기까지 가기도 어렵지. 정말 특이한 기공을 찾는다면 모를까.’
여휘가 화경 이전에 중단전을 열 방법을 찾지 못했다면, 무윤 또한 신기심의공을 완성하는 건 불가능했던 일이다.
이제 구체적인 질문으로 넘어갈 때.
“근데 제가 들은 도인하고 어떤 점이 비슷한 건지?”
“혈교에서 도망치기 얼마 전에 우연히 영기 가득한 하수오를 구했어요. 오라버니가 마지막에 만든 심법하고 그걸 몇몇 마인한테 집중적으로 투여했는데, 그때 현상하고 거의 유사해요.”
“자세히 말씀 부탁드립니다.”
“마공과 충돌하지 않지만 선기도 몸에 내재화되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 밖으로 사라져 버려요. 대신 그동안은 마공의 부작용이 확 줄어들었죠. 그때 밖으로 나가는 기운 때문에 그걸 봤다는 분도 도가 무공을 익힌 걸로 착각했을 거 같아요.”
선우가명 말에 일리가 있어 보인다. 마인들이 도가 무공을 그 경지까지 수련했다고 보긴 어렵다.
“부작용은 어느 정도 줄어듭니까? 또 시간은?”
“약 성분과 투여량에 따라 다르지만, 처음엔 문제가 있던 마공도 극한으로 올려도 괜찮았어요. 마기도 외부로 전혀 안 느껴질 정도였고. 다 사라질 때까지 시간은 두세 달 정도예요.”
순간 무윤의 눈이 번득였다. 그 말에 유추할 수 있는 것.
“그럼 그동안은 더 강한 마공을 쓰거나 익힐 수도 있겠네요. 게다가 마인인 걸 감추기도 좋고.”
“그렇죠.”
“혈교도 알고 있습니까?”
“모를 거예요. 오라버니하고 저만 알고 있었으니까.”
이후로도 많은 얘기가 오고 간 후, 선우가영을 바라보는 모두의 눈에 애잔함이 깊게 스쳐 갔다.
‘말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
직접적인 원한은 없지만 적이 될 가능성이 농후한 세력, 그곳에 오라버니가 있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솔직하게 모든 걸 털어놓은 여인. 그 속에 얼마나 많은 고뇌와 불안이 깔려 있을지 눈에 훤히 보일 수밖에.
곽호산은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살아 있는 게 우선 아니겠소. 나머지는 차근차근 풀어 가면 되오이다.”
주손학도 말을 덧붙였다.
“초조해지면 불안만 커지는 법. 이럴 땐 마음을 굳게 먹고 기대와 희망을 떠올리는 게 최선이지. 나도 그리 버텼다오.”
또다시 두 사람의 충고와 격려가 이어질 즈음, 무윤과 공야성은 슬그머니 밖으로 향했다.
사사삭!
선우가영의 오빠란 자에 대해 묻는 건 나중에 해도 된다.
지금은 세 사람이 각자의 아픈 상처를 서로 보듬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다. 슬픔과 아픔은 나누면 나눌수록 줄어드는 법이니까.
그것도 서로를 아끼는 사이라면 더욱이.
오늘따라 까만 밤하늘에 동그랗게 그려지는 달무리 빛이 따스함을 더했다. 희망이라는 염원을 담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