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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라 불린 내 친구-131화 (131/161)

131화

“후우!”

한참이나 격한 숨을 몰아쉰 무윤은 그제야 마음을 정했다. 아니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다.

대신 알릴 건 알리되 모든 방법을 총동원해 확실하게 다짐을 받아야 한다. 힘은 물론 진정을 실은 말까지 모두 꺼내서.

우선 지금은 무력을 드러낼 때. 그 전에 확인할 게 있다.

“혹시 소가주가 제 경지를 언급 안 하던가요?”

“……서신에 썼더군. 자네를 무서운 무인이라고.”

시간이 급한 상황. 길게 끌 이유가 없다.

“이래서 그런 겁니다.”

무윤은 전신에 두른 기세를 허공에 흘려보냈다.

우우웅! 위이잉!

방연극와의 싸움에서 얻은 깨달음. 물론 아직은 그 문을 연 것이지만.

‘공간 장악! 그 묘용을 얻었지.’

서리서리 뻗쳐오른 경력이 하후종인 주변에 무윤만의 공간을 만들어 갔다.

사아아!

장악된 공간 안에서는 그 어떤 움직임도, 내력도, 기파도 통제하는 의지의 장막. 통상 화경 중반에 다다랐을 때 가능한 경지라 알려진 그것.

그 의념의 장막 안에서 힘을 집중할 경우 상대의 웬만한 움직임은 제어할 수 있다. 물론 그 경지에 오르지 못한 하수에 한해서.

그 강대한 기의 장막이 몸 주변을 꽉 채워져 드리우는 순간, 하후종인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순간순간 찌릿하게 몸을 울리고 뇌리에 전율까지 불러오는 이 기운.

‘이 이건! 설마!’

세찬 기의 파동도 없이 그저 전신을 무디게 조여 오는 이 느낌. 다가올 땐 간지러운 바람 속삭임처럼 살랑이지만, 그 온화함에 취해 넋을 놓고 있다간, 어느새 무거운 중수에 온몸이 잠기듯 내 맘대로 손끝 하나 움직이기 어려워지게 만드는 기의 장막.

‘틀림없어. 공간을 장악하는 기의 그물!’

모를 수가 없다. 존경하는 무당의 검선 등 그간 만났던 절대자들이 보여 줬던 것인데 어찌 이걸 잊을까.

그제야 아들의 글이 이해됐다.

‘두려운 무인. 그 말은 내 기준에서 쓴 게야. 나 때문에 차마 바로 적지는 못하고.’

이미 온 내력을 끌어올려 둘러싼 틀을 깨 보려 했지만, 요지부동. 힘을 더하면 할수록 옥죄임만 더 강하게 몸을 구속해 온다.

확실했다. 그 공간 안에서는 시전자의 의지대로 마음대로 변형, 제어할 수 있는 그것.

새파랗게 질린 얼굴에 전신은 부들부들 떨려 왔다. 등골이 오싹해지고 커진 눈은 떨림을 멈출 수가 없다. 많이 봐줘서 초절정 중반 정도로 짐작했거늘. 사실 그것도 너무 심한 추측이라 여겼는데.

‘허! 저 나이에 벌써 화경! 그것도 공간 장악까지 할 정도면 중반까지 간 것인데.’

놀람과 감탄을 넘어선 경악이 점차 현실로 인식될 즈음, 장막처럼 꿈틀거리던 기운이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솨아아! 위이잉!

잠시 후, 하후종인의 멍했던 정신이 돌아올 무렵, 무윤의 고개가 가볍게 숙여졌다. 상황이 급박했어도 어쨌든 무례한 짓이니까. 이제 본론을 꺼낼 때.

“우선 치료가 급하니까 이유부터 말씀드리죠. 왜 나섰는지.”

“크, 크흠! 그, 그래 왜 그런 겐가?”

“제가 가슴으로 낳아 키우는 딸이 있습니다. 소려라고.”

“……소려?”

“그 아이 생부가……. 소가주입니다.”

또 다른 충격이 뇌리를 휩쓸었다. 다시 쿵쾅거리는 가슴이 이젠 머릿속까지 멍하게 만들 지경. 그래도 세차게 떨리는 입은 바로 열렸다. 확인해야 했으니까. 내 친손녀, 그것도 장손의 딸이란 얘긴데.

“지, 지금 천기가 그 아이 생부라고 했나?”

“이제 치료해도 되겠습니까?”

“……하, 하시게. 그런데?”

“나머지 얘긴 끝나고 하시죠. 저도 할 말이 많습니다.”

“……?”

할 말과 물을 게 많은 모두의 입이 꾹 닫혔다.

한 시진 후.

의방 밖에선 수군거림이 더욱 거세졌다.

“들어가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허! 그것참! 가주 형님은 무슨 생각이신 건지!”

“형님! 한 시진이 넘었습니다. 분명 아까 말한 짓을 하고 있을 텐데 더 끌었다간 천기가 어찌 될지 모릅니다.”

약당 장로 하후곽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더는 참을 때가 아니다.

“그러세. 내가 앞장설 테니 따라 들…….”

그때 가주 하후종인의 웅혼한 음성이 흘렀다.

“다들 들어오시게.”

“예! 가주!”

파팟! 파파팟!

드르륵!

앞서서 문을 열고 들어선 이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어안이 벙벙한 입이 떠듬떠듬 열렸다.

“처, 천기야! 어, 어떻게?”

“하아! 쿨럭! 숙부님, 저 괜찮습니다.”

타다닥!

하후곽은 한동안 조카의 눈과 몸 여기저기를 살피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차도가 느껴진다.

“괘, 괜찮은 게냐? 정신은 맑은 게야?”

“머리가 아픕니다. 잠시 깨어난 거라 또 잠들 거라고…….”

하후곽의 시선이 무윤을 향했다.

“그 시술을 한 겐가?”

“가주께서 허락하셨습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지만 물어야 했다.

“하, 하면 앞으로 어떻게?”

“잠시 사기를 눌러서 정신을 차렸을 뿐입니다. 빨리 약을 쓰지 않으면 또 심해질 겁니다. 어쩌시겠습니까? 하지 말까요?”

“아, 아닐세. 미, 미안하이.”

“사과는 됐습니다. 걱정하신 마음에 그런 건데.”

“고맙네. 하면 내 도울 게 없겠는가?”

“왜 없겠습니까? 이젠 이 친구와 논의하시죠.”

“알겠네. 그리하지.”

무윤은 문득 생각난 게 있었다.

“참! 혹시 세가에 있는 영약이 있으면 갖다주시겠습니까? 쓸 건 아니고 보기만 하면 됩니다.”

“보기만? 이보게, 소가주 일인데 뭘 못 내놓겠나. 다 가지고 올 테니 맘껏 쓰시게.”

“아뇨. 지금 영약은 독만 됩니다. 참고할 게 있어서 부탁드린 겁니다.”

“……?”

하후가 사람들이 모두 나간 후, 방에는 네 사람만 남았다.

안색이 파리한 하후천기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하아! 고, 고맙네. 이 은혜는…….”

“인사는 쾌차하면 그때 받기로 하고. 그보다 어떻게 된 겁니까?”

“자, 잘 모르겠어. 저녁 식사 후 바로 정신을 잃은 것밖에는.”

“듣기로는 내당 의원이란 자가 그랬다고 하던데.”

하후천기의 입매가 세차게 떨렸다. 누운 채로 세찬 고갯짓이 이어졌다.

“그, 그럴 리가. 사헌, 그분은 내가 의숙부라 부르는 분일세. 날 동생이나 조카처럼 아끼시는데, 절대 그럴 리 없네.”

가주 하후종인이 나섰다.

“그럼 생각나는 건 없느냐?”

“그 시간에 마차에 들어온 건 호위들밖에는…….”

몇 가지 질문이 더 이어진 후, 하후천기는 다시 의식을 잃어 갔다. 가주 하후종인의 시선이 저절로 무윤을 향했다.

“괜찮겠나?”

“환각 기운을 너무 오래 억누르면 반발해서 더 안 좋습니다. 제가 알아서 조율하죠.”

“알겠네. 내 자네만 믿겠네.”

이제 다음 대화를 이어 갈 시점.

“그럼 아까 얘기 더 해 볼까요?”

“그래 주시게.”

무윤은 유선과 하후천기 사이에 대해 아는 모든 것을 그대로 알렸다. 하후태가 기루에서 벌인 작태는 물론 그 후 유선이 어떻게 떠나갔는지도.

하후종인의 아련한 시선이 천정을 향했다.

“허!”

가슴이 턱 하니 막혀 멍한 눈만 허공을 좇을 뿐. 복잡한 심사를 가득 담은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일이 있었구먼.”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이미 제 딸인 아이입니다. 어쩔 수 없이 밝히긴 했지만 죽은 어머니도 유언으로 남겼습니다. 절대 알리지 말고 제 딸로만 키워 달라고. 왜 그랬는지 아시겠죠? 소려가 이걸 알면 어떻게 될지.”

“허! 지금은 뭐라 할 말이 없네.”

“아뇨. 앞으로도 할 말이 없어야 합니다. 만약 이게 소가주나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는 날에는. 분명히 말씀드리죠. 그날로 저와는 원수지간이 될 겁니다.”

이제 하후종인이 물은 건 하나밖에 없다.

“그 아이에겐, 평생 감출 생각인가?”

“제가 친부가 아닌 건 소려도 아니까 언젠가 묻겠죠. 그땐 사실대로 알릴 겁니다. 유선이 일 몇 개는 감춰야겠지만. 물론 그 아이 결정이 뭐건 전 따를 거고.”

한참을 생각하던 하후종인은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알겠네. 그리만 해 준다면 평생 나만 알고 있겠네. 다만 한 가지 부탁이 있네.”

“뭡니까?”

“자네가 알아서 잘하겠지만, 그래도 도울 게 있다면 언제든 말해 주겠나? 못난 할아비로서 부탁함세.”

“소려를 위한 일이면 언제든 그러겠습니다.”

“그거면 됐네. 고마우이.”

이제 화두를 돌릴 때. 이 얘기까지 나온 이상 더 감출 게 없다.

“그리고 이 약의 출처, 알 거 같습니다.”

순간 하후종인의 눈에 섬뜩한 광망이 일었다.

“어딘가? ……서문가?”

“공야의숙에서 마단을 연구한 거, 아십니까?”

“그 소문이 진짜 같긴 했는데 사실이었군.”

무윤은 비천문 양중건 일을 소상히 전하고는 말문을 이었다.

“그래서 거기서 연구한 실혼단의 일종이 확실합니다.”

하후종인은 얘기 내내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었다.

“후! 역시 그런 것인가! 다 내 책임이구먼.”

이제 마지막 일만 남았다. 약당 장로 하후곽이 보여 준 영단을 확인하고 얻은 확신이 있다.

“제 생각에 범인은 따로 있는 거 같습니다.”

“뭐라? 짐작 가는 놈이 있는가?”

“송자균이라는 자, 은밀히 살펴보시죠.”

“그자는 이 아이 호위인데. 어째서?”

“제법 괜찮은 영단을 최근에 먹었더군요. 한데 살펴보니 귀 세가 것이 아닙니다. 못해도 은자 기백 냥은 될 거 같던데.”

“호위가 그만 한 돈은 없을 텐데 이상하긴 하군. 하나 그것만으로 의심하기에는…….”

“나름 귀한 그걸 며칠 전에 먹었더군요. 이십사 시간 소가주를 호위해야 할 이 와중이면 온전히 녹여 낼 수도 없을 텐데.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하후종인의 눈이 번득였다.

“언제 도망칠지 모를 자의 선택으론 제격이로군.”

“제 생각도 같습니다.”

“……!”

그렇게 화급한 사안은 우선 일단락됐다.

한 시진 후, 침주 외곽 곽호산의 의방으로 향하는 길.

눈치를 보던 공야성이 슬며시 말문을 열었다.

“크흠! 가주란 자 입이 무거워 보이더라.”

“부지불식간에 열리는 게 입이야.”

“어쩔 수 없었잖아. 대책이나 잘 세워 보자고.”

공야성에게 뭐라 할 일이 아니다. 쓰린 마음에 생트집 잡아 봤을 뿐이지.

“미안하다. 소리 질러서.”

“싱거운 놈. 별소릴 다 한다. 내가 그 입장이라도 그랬어.”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고.”

공야성은 도착하기 전에 할 말이 있었다.

“참! 그보다 가영 누님 말인데.”

“왜?”

“천기 그자 진찰을 해 보게 하면 안 될까? 그쪽으론 누가 뭐라 해도 최고잖아. 확실하게 하자면 그게 좋을 거 같은데.”

무윤의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맞는 말이긴 한데, 굳이 위험하게 그럴 필요가 있나?’

공야성은 아무리 세밀한 증상이라도 정확히 못 전할 놈이 아니다. 더구나 혈교 출신인 선우가영이 노출되면 안 된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데.

“내가 네 실력을 모를까 봐? 돌리지 말고 까. 왜 그래?”

“아냐. 그래도 헷갈리는 부분이 있어.”

“정말 그래서야?”

“뭐, 사실 다른 이유도 좀 있고.”

“뭔데?”

“나야 이름만 안 밝히면 이대로 살아도 되잖아. 뭐 과거 원한이야 잊어버리면 그만이고. 근데 세 분이 저러고 있으니 어떻게든 방도를 만들어 주고 싶어서. 셋 다 역용하면 누가 알겠어.”

무윤의 고개도 금방 끄덕여졌다.

‘이들을 완전히 복권시키는 건 사실 불가능이지. 오대세가가 그 엄청난 과오를 다 인정해야 하는데.’

그럴 바엔 공야성 말대로 차선책을 찾는 게 답일 수 있다.

“그래, 생각해 보자.”

공야성은 말이 나온 김에 덧붙였다.

“참! 근데 요즘 곽 숙부님 눈치가 이상해. 가영 누님을 쳐다보는 게 영…….”

“……그쪽으로?”

“그래. 좋아하는 거 같더라고.”

“가영 누님은?”

“뭐, 싫지 않은 거 같긴 한데. 잘 모르겠네.”

“얼마나 같이 붙어 있었는데 그것도 몰라?”

“이거 웃긴 새끼네! 야! 다른 건 몰라도 넌 나한테 그런 말 할 자격 없지.”

“내가 왜?”

“넌 여자 볼 줄 모르잖아. 나보다 훨씬.”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질 않지만, 문득 생각난 게 있다.

“원래 제 앞가림 못 하는 놈이 중매는 잘 서는 법인데. 어때? 우리가 나서 볼까?”

“가만! ……그럴까?”

“해 보자.”

“그래! 하자.”

“참! 그 전에 하나 확인할 게 있다.”

“뭔데?”

“가 보면 알아.”

“……?”

즐거운 목표가 하나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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