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얼마 후, 침주 하후 전장.
무윤과 공야성을 보고 잠시 반색하던 장주 하후모인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소식을 들은 게로군.”
“어떻게 된 겁니까?”
“침주에 다 올 때쯤에 동행했던 의원 놈이 이상한 독을 쓰고 사라져 버렸네. 허! 십 년을 넘게 같이한 자가 그럴 줄은 상상도 못 했지.”
“상태는 어떤지?”
“휴! 자네에게 감출 건 없겠지. 몸은 이상이 없네만 의식이 전혀 없어. 내당 의원들 말로는 사기(邪氣) 가득한 독이 머리를 계속 잠식해 들어가서 며칠을 넘기기 힘들 거라 했네.”
무윤의 눈이 깊고 무겁게 가라앉았다.
“어떤 독인지 알아냈나요?”
“인근 의원까지 다 불렀는데도 파악 못 했네. 알려진 독은 아닐세. 허! 시간만 있다면 당문이라도 부를 텐데 정말 아쉬워.”
상세에 대해 이것저것 묻던 어느 순간, 공야성의 눈이 번득였다.
“그 정도면 몸은 전혀 이상 없단 말이네요?”
“그러네. 아주 멀쩡하다더군.”
“저, 잠깐 둘이 얘기 좀 하고 오겠습니다.”
“……?”
무윤과 밖으로 나온 공야성의 눈이 깊어졌다.
“본래 살상용 독은 어느 한 곳에 집중된다 해도 그 근처에 퍼지기 마련이지. 한데 증상이 저런 건 아무래도 독 보다는 강한 환각 성분이 원인 같다.”
“그럴 수 있겠지. 근데 너라면 고쳐 볼 수 있겠어?”
“독이 골수까지 퍼졌으면 늦은 거고, 만약 환각 성분이 주원인이라면 해 볼 방법은 있다. 게다가 아무래도 증상이 공야의숙에서 만든 실혼단(失魂丹) 종류 같기도 해.”
“실혼단?”
“가영 누님이 사야홀에 있을 때 공야의숙 연구 자료를 봤잖아. 그때 알려 준 것 중 하나야.”
“그럼 방법이 있어?”
“환자를 봐야 알지. 어쨌든 만약 실혼단이면 방법이 있을지 몰라. 그동안 곽 숙부하고 가영 누이, 나랑 셋이서 마공 치료약을 몇 개 만든 게 있는데 그게 도움 될 수도 있고.”
“우선은 봐야겠네.”
“그래야겠지. 근데 진찰은 몰라도 치료에 나섰다간 우리가 다 덤터기 쓸 수 있는 거 알지?”
“지금은 방법이 없잖아. 만약 하게 되면 미리 잘 얘기하는 수밖에. 난 이번 일 모르는 척했다가 잘못되면 소려 얼굴 볼 자신 없다. 넌?”
“인마! 나야 의원인데 너보다 더하지.”
“그럼 가자고.”
“……!”
* * *
얼마 후, 하후세가 가주실.
“자네들이 살펴보고 싶다고?”
가주 하후종인은 의아한 시선을 감추지 않았다. 말은 수도 없이 듣고 관심도 많았지만 직접 대면은 처음인 자들.
무윤은 공야성을 가리켰다. 아직도 신분은 감춘 상황.
“이 친구는 사공연이라 하는데, 의원입니다. 혹 도움이 될까 해서요.”
가주 하후종인의 눈이 깊어졌다.
‘왜 나섰을까?’
이미 다른 의원 모두 포기한 상태. 여차하면 모든 걸 뒤집어쓸 수도 있는 상황인데 나선 이들의 의도가 짐작이 안 된다. 하지만 달리 의심되는 저의도 없다.
문득 하후천기가 미리 보낸 서신에 적은 글이 떠올랐다.
-아버님, 가서 자세히 말씀드리겠지만 무윤은 정말 무서운 무인입니다. 아버님도 반대하시는 건 알지만 여곽 상단 인수 건은 절대 추진해선 안 됩니다. 가문의 존망이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일이라 먼저 연락드립니다. 반드시 그리하셔야 합니다.
무윤을 누구보다 싫어하던 아들이 쓴 글. 또 아들과 동행했던 동생 하후천욱이 해 준 말도 있다.
-야접과 같이 싸우면서 소원했던 둘 사이가 많이 풀어졌더군요. 이젠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그간 정황을 돌아봐도 나쁜 의도라 보긴 어렵다. 그러다 문득 무윤이 궁금해졌다.
‘무서운 무인이라? 어디 살펴볼까?’
우우웅!
그렇게 한동안 무윤을 살펴보던 어느 순간, 하후종인은 남모를 침음을 삼켰다. 은근히 기운을 풀어 살폈지만 느껴지는 게 없다.
‘허! 아무것도 안 읽히다니. 도대체?’
초절정 끝자락에 다다른 자신인데도. 물론 들은 대로 내, 외공을 함께 익히는 특별한 기공 탓일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의 온갖 풍상을 다 겪은 노년의 무인이 느끼는 직감은 달리 말한다. 거기다 아들이 아버지인 자신의 경지를 대략 알면서도 전한 말.
‘무서운 무인. 설마 그게 내게도 그렇다는 뜻일까?’
하후천기는 우선 생각을 접기로 했다. 지금은 아들이 생사기로에 서 있는 상황. 게다가 그간 나름대로 무윤을 파악한 것도 더해졌다.
‘능력도 없으면서 선의나 보이자고 나설 인물은 아니다.’
하후종인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탁!
“쉽지 않은 결정일 텐데 이렇게 선뜻 나서 주다니, 아비로서 정말 고맙네. 함께 가 보세나.”
“예.”
가주 하후종인을 따라 의방으로 들어갈 즈음, 주변을 둘러보던 무윤의 눈에 의아함이 서렸다.
하후천기가 있는 방 앞을 둘러싼 무인들. 복장으로 보아 호위들이 분명한데 그중 한 명에게서 시선이 간다.
나름 괜찮은 영단을 복용한 기운이 느껴지는 자. 평상시라면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일이지만.
‘이상하네. 이런 위중한 시기에 왜 굳이?’
영단의 효과는 복용 후 편안한 상태에서 오랫동안 운기 하는 게 최고. 한데 개인 호위라면 지금은 그럴 시간이 부족할 텐데.
하지만 약간 의아할 뿐, 이상한 기운도 전혀 없는 평범한 영단. 더 신경 쓸 게 없다.
잠시 후, 의방 안.
공야성이 하후천기를 세세히 살피길 한참, 역시 옆에서 신기심의공으로 조사하던 무윤의 눈이 번득였다.
‘공야의숙에서 만든 게 확실해.’
공야의숙의 시험 대상이었던 장사 비천문의 양중건. 그자에게서 느꼈던 약 기운 중 하나와 일치했다.
바로 전음을 보내자, 이미 짐작하고 있던 공야성의 고개도 살짝 끄덕여졌다.
전음을 쓸 수 없는 공야성이라 둘은 잠시 밖으로 향했다.
“어떤 거 같아?”
“늦진 않았어. 골수까진 안 미쳤다.”
“그럼?”
“먼저 하나 묻자. 네 기운 말인데, 저 환각 성분 더 안 퍼지게 할 수 있지?”
“환각 성분이야 잠시 묶어 두거나 한곳에 모을 수 있지. 근데 독은 안 되는 거 알잖아?”
“이 독은 환각 성분 따라 파고들거든. 그거면 더 나빠지진 않을 거야. 다음엔 우리가 만든 약을 써 봐야지.”
“완치 가능성은?”
“투약해 봐야 알겠지만 가능하지 싶다. 근데 정신 차리는 건 금방일 텐데 완치는 오래 걸릴 거야.”
이제부터 생각이 깊어진다.
“가주한테 어디까지 알리지? 다른 건 괜찮은데 공야의숙을 밝히면 서문가 짓인 걸 알리는 셈인데. 또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설명하는 것도 문제고.”
“그러게. 쉽게 생각할 게 아닌데.”
물론 공야성을 밝히지 않고도 알릴 순 있다. 하지만 공야의숙을 알리는 순간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 감이 오지 않는 상황. 게다가 사이가 별로라 해도 어쨌든 서문가와 인척인데.
그렇게 생각이 많아질 즈음, 문득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아까 그 호위에게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신기심의공을 쏘아 보내고 얼마 후 의아함이 가득 밀려왔다.
‘왜 저렇게 떨지?’
표정은 담담하게 보이지만, 심장은 쿵쾅거리고 급격히 휘도는 혈류는 긴장했음을 알린다. 너무 과도할 정도로.
좀 더 세밀히 살피던 어느 순간 무윤의 눈에 찰나의 섬광이 스쳐 갔다.
‘저자, 뭔가 있어.’
그렇게 의심이 확신으로 바뀔 무렵, 기다리다 못한 가주 하후종인이 밖으로 나왔다.
타악!
“크흠! 말이 길어지는 거 같은데 혹 알아본 거라도?”
어떻게 설명할지는 결정하지 못했지만, 치료 방법이야 확정된 상황.
“방안을 찾긴 했습니다.”
“오! 그런가, 어떤?”
“사기를 진정시킨 후에 약을 쓰는 방법인데, 물론 장담할 순 없는 일이라 결정은 가주께서 내리셔야죠.”
“들어가서 내당 의원들과 같이 논의해 보세.”
잠시 후. 공야성의 설명이 한참을 이어지고 난 후, 약당 장로 하후곽의 눈썹이 매섭게 꿈틀거렸다.
“허! 내력 기운으로 머리에 있는 사기를 몰아내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게 얼마나 위험한지 정녕 모른단 말인가? 조금만 힘 조절이 잘못돼도 뇌혈관이 터지거늘. 게다가 의원도 아닌 자네가 그걸 한다고? 절대 불가하네.”
반발은 이미 예견된 상황. 단호함은 이럴 때 필요한 법.
“그럼 저희도 방법이 없습니다. 한데 장로께선 대안이 있습니까?”
“지금은 딱히 없지만 그래도 위험한 걸 아는데 어찌 허락한단 말인가?”
“전 여러 번 그렇게 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허! 보자 보자 하니 이자가 정말! 의원도 아닌 자가 자꾸 왜 나서는 게야! 그리고 소가주 일에 자네들이 왜 이러는 겐지 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네. 혹 다른 저의라도 있는 거 아닌가?”
갑론을박이 반 각을 넘어갈 무렵, 결심을 굳힌 가주 하후종인의 눈이 다시없이 빛났다.
“다들 물러가 있게. 두 사람과 얘기하고 싶네.”
“가주 아니 형님! 절대 허락해선 안 되는 일이오이다.”
가주의 내력 실린 단호한 고성이 방안에 흘렀다.
“나가 있으라는 말 못 들었는가!”
“……!”
엉거주춤 모두가 방을 나가자, 하후종인은 속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하네. 도우려고 온 자네들인데 민망한 꼴을 보였어.”
“아닙니다. 모두가 걱정해서 하는 말인데 논쟁은 당연합니다.”
이미 의학적 논의에 있어 공야성이 밀리지 않는 건 확인한 상태. 하지만.
‘이해할 수가 없어. 왜 이렇게까지 나서는 건지?’
그 의구심을 떨치지 않는 한 허락할 자신이 없었다. 하후종인은 진심을 담은 시선 그대로 둘을 마주했다. 그 마음 담은 깊고 장중한 숨이 뿜어져 나왔다.
“후! 우리 솔직히 터놓고 얘기해 보세. 여기서 한 말은 나 혼자만 알고 있겠네.”
“알겠습니다.”
“도대체 이 위험한 일에 왜 나선 겐가? 난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모르겠어. 그걸 알지 않고는 결정할 수가 없네.”
“다시 말씀드리지만, 그 어떤 사심도 없습니다. 소가주를 살리는 것 외에는.”
핏기 하나 없는 아들의 얼굴을 보던 하후종인은 자신도 모르게 격앙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왜 자네들이 그러냐고? 쓰러진 게 진이라면 이해가 가. 자네와 친구니까. 한데 저놈은 자네와 원수처럼 지내던 아일세. 그런 놈을 구하자고 이리 무모한 짓을 하는데 내가 어떻게 자네들 말을 곧이곧대로 믿겠나? 안 그런가?”
그때 유심히 하후천기를 살피던 공야성이 표정이 우뚝 굳어졌다. 의원의 직감이 알린 경고.
‘안 좋다. 더 늦으면 돌이킬 수 없어.’
그 마음 담은 다급한 시선이 무윤을 향했다.
“무윤아! 시간이 없다. 독이 급속히 퍼질 모양이야. 지체하면 큰일 나!”
무윤의 세차게 떨리는 눈이 마음의 격동을 알렸다. 공야성이 저럴 정도면 위급한 상황은 분명한데.
‘소려를 알리면?’
언젠가 소려를 내어 줘야 할지 모른다. 가족이니까, 혈육이니까. 그러긴 죽어도 싫지만, 평생 씻을 수 없는 한이 되어 가슴을 후벼 파고 가슴은 멍울로 그득하겠지만, 그건 어떻게든 자신이 감내하면 된다. 하지만 그 어떤 것보다 주저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
‘저놈이 유선이를 어찌 대했는지 소려가 알면? 평생 한이 될 텐데. 혈육이 증오의 대상이 돼 버릴 텐데.’
그 걱정에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그때 다시 공야성의 격한 고성이 방안을 울렸다.
“이놈아! 정말 시간이 없단 말이다! 어떻게 좀 해 봐!”
무윤도 더는 참지 못했다. 공야성을 향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보고 어떡하라고! 알리라고? 너 그러다 나중에 소려가 잘못되면 책임질 거야!”
알릴 수밖에 없는 걸 인정하고 내뱉은 울분이다. 그래야 답답한 속이 조금이라도 풀릴 거 같았으니까.
“야! 이 새끼야! 그래도 살리고 봐야지! 이러다 죽으면? 무슨 낯짝으로 소려를 봐! 당장 말해!”
“난 못 해! 그럴 거면 네가 해!”
“이 새끼가 정말! 야! 아버진 내가 아니라 너라고, 너!”
“그러니까 못 하겠다고!”
“……그럼 내가 말한다. 나중에 딴소리하면 가만 안 둬!”
멍한 하후종인의 시선이 두 사람을 왔다 갔다 했다.
‘이게 무슨?’
아들이 위험한 지경이란 말에도 정신을 못 차리겠는데 알아듣지 못할 고성이 수없이 오가니, 부여잡고 있던 정신이 흩날릴 판이다.
더는 참지 못한 하후종인도 고성을 터트리고 말았다.
“이 사람들아! 도대체 무슨 소릴 하는 게야! 또 이 아이는 어떤 거고! 정말 급하단 말인가?”
“……!”
지금 모든 일에 우선해야 할 건 하나뿐이다.
천마라 불린 내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