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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라 불린 내 친구-129화 (129/161)

129화

무윤과 연사구의 설명이 끝나고 나서도 한참 동안 질문이 쏟아졌다. 연대유의 눈동자는 뭔가에 홀린 듯 제 갈 길을 못 찾았다. 그래도 드는 확신 하나.

‘허! 강호가 뒤집어지겠어. 도가 문파들은 더욱이.’

당대 도가의 종주는 누가 뭐라 해도 무당, 그 뒤를 화산, 종남, 점창 세 곳이 좇고 여타 중소 문파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한데 과거 중원 도가의 종주였던 도백이 나타난다면. 그것도 절반이나 되는 무공과 사라진 진경까지.

놀랐던 가슴이 이젠 흥분으로 쿵쾅거렸다.

‘형산파가 그리되면 여기 형주도 위상이 달라지지. 우리 지부 또한.’

그 생각에 무윤을 힐끔거리는 눈빛이 활활 타올랐다.

‘무조건 가까워져야 한다. 어떻게든.’

동년배 중 강호 최고라 할 무공은 물론, 침주 시전을 장악할 만큼 상술도 뛰어난 자, 거기에 저 엄청난 보물을 형산에 주고 나면 가질 지위까지.

이런 자와 보조를 맞춰 이 일만 잘 마무리 짓는다면.

‘형주에선 아무도 우릴 못 건드린다.’

한편 기도 안 찬 당서하는 그저 떠오른 생각을 농담 삼아 툭 내던졌다.

“더 놀랄 게 있으면 지금 해 주면 안 될까? 혹시 곤륜 것도 있다거나. 아니면 그 여휘란 자 것이라던가.”

절반은 찔리는 소리다. 단호하게 선을 그을 때.

“말도 안 되는 소리. 이게 다라고 보시면 됩니다. 몇 개 더 있는데 놀랄 만한 건 없어요.”

“크크! 하도 놀라서 이젠 그 말도 못 믿겠네.”

연사구의 큰 목소리가 좌중에 흘렀다.

“자! 이제 그 얘긴 그만하고, 숙부님! 할 일부터 논의하시죠.”

“아! 그래야지. 그래, 뭐부터 하면 되겠니?”

“지금이야 동태만 잘 살펴 주세요. 이놈이 건허 도사를 만나 봐야 다음 계획을 세우니까.”

“알았다. 티 안 나게 알아서 잘하마.”

“부탁드려요.”

잠시 후, 얘기가 마무리될 즈음, 무윤의 발길은 형산파로 향했다.

중원 오악(五岳) 중 하나로 꼽히는 남악형산(南岳衡山).

준엄한 산세와 기이한 칠십이 개의 봉우리를 가진 곳으로 그 수려함은 오악 중 으뜸으로 꼽힌다.

그 기슭을 따라 오르던 무윤의 걸음은 어느새 형산파가 위치한 자개봉(紫蓋峰)에 다다랐다.

여기까지 올라와 본 건 처음이라 시야에 들어온 산야가 절로 경탄성을 짓게 한다.

‘역시! 괜히 오악이라 불리는 게 아니야.’

솨아아! 촤라라!

산 따라 흘러내리는 상수(湘水)의 물기가 바람의 힘으로 사방으로 치솟아 만들어진 자욱한 운무로 유명한 곳. 그 물안개가 흩어져 만든 비경이 장관을 이룬다.

저 멀리 북쪽으로는 거대한 동정호가 어슴푸레 웅장함을 드러내고, 불교와 도교가 함께 융성한 곳답게 수많은 암자, 사당, 도관이 듬성듬성 그 역사를 알린다.

물보라가 만든 은빛에, 우거진 녹림의 푸름이 겹쳐져 현묘함을 더하는 봉우리들.

그 하나하나를 눈 가득 담아 내는 발걸음이 빠를 수가 없다.

문득 씁쓸한 미소가 입가에 흘러내렸다. 오악 중 제일 남쪽에 위치한 형산은 일 년 내내 무성한 산림이 수려함을 잃지 않는 곳이건만.

‘이런 풍광을 매일 보고 살면서 아웅다웅 싸우다니.’

만년 설산이 가득한 신강의 산야도 아름답지만, 색이 달랐다. 짙푸른 하늘과 저 멀리 아득하게 보이는 사막의 지평선은 장엄함과 동시에 처절하리만치 비장한 감흥을 줄 때가 많았다. 무인의 기상에 어울리긴 하지만, 이곳처럼 흐뭇한 미소를 연신 띠게 하진 않는다.

그때 저 건너편 숲속에서 고성이 들려왔다.

“이보시오. 건허! 계속 그 주장을 한다면 우린 건천 도장과 뜻을 같이할 수밖에 없소이다.”

“추 장로, 그래서 중재안을 내지 않았소. 외부에서 전인을 받되 형산의 속가제자로 인정하겠다고.”

도인이 아니고서 장로까지 오른 추풍원은 속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 할에 달하는 일반 무인을 대표할 수밖에 없다.

“우리 입장도 생각해 주시구려. 우리도 형산이란 자부심으로 살아왔소이다. 한데 형산의 이름으로 제자를 받지 못하면, 우리 후손들은 속가로 내려가란 뜻이잖소. 그걸 일반 제자들이 어떻게 찬성할 수 있겠소이까?”

“허! 정녕 그리 생각하시는 겁니까? 형산이 도가 문파로 완전히 거듭나면 무당이나 화산처럼 존경받는 문파가 되고 속가 또한 지위가 달라질 것이외다. 아니 그렇소?”

추풍원은 실소가 절로 올라왔다.

“크크! 무당과 화산이라 하셨소? 우리가 저들과 비교가 가당키나 하오? 도가의 절대무공도 하나 없는 우리거늘. 또 도학의 깊이는 어떻고? 그건 꿈이외다. 부디 허상에서 벗어나셨으면 하오이다.”

건허의 눈이 더할 수 없이 빛났다.

“곧 허상이 아닌 걸 보여 드리리다.”

“……그게 무슨 말씀이오?”

“어쨌든! 만약 그걸 보여 드리면 우리 제안을 수락하시겠소?”

잠시 생각하던 추풍원의 고개가 저어졌다.

“그래도 불가하오. 설사 하늘에서 절대무공이 뚝 떨어져 세가 커진다 해도 우리가 쫓겨나는 꼴은 매한가지요. 나 혼자라면 모르겠으나 내 제자를 그리할 수는 없소이다.”

“허! 마음을 굳히신 게요?”

추풍원은 안타까운 마음에 진정을 실어 냈다.

“이보시오, 건허. 나도 속과 겉이 다른 건천 도장은 싫소이다. 하나 이 주장을 계속하면 우리도 살고 봐야지 않겠소? 다른 건 다 동의할 테니 제자 선발만큼은 물러서 주길 바라오. 크흠! 난 이만 가 보겠소이다.”

“……!”

잠시 후, 추풍원이 떠난 후에도 건허가 한참을 움직이지 않자 무윤은 슬그머니 기척을 냈다.

“여기서 뵙는군요.”

“응? 자네가 어찌?”

“만나 뵈러 올라가다가 소리가 들려서…….”

“허허! 다 들은 게로군.”

“어쩌다 보니 그리됐습니다.”

잠시 멍한 시선을 하늘로 향했던 건허는 속 깊은 한숨을 토해 냈다.

“이거 민망하구먼. 큰소리 땅땅 쳐 놓고서는 이 모양이니.”

“저들로서는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잃을 건 눈에 보이고 얻을 건 먼 나중인데.”

“그렇지. 하나 지금 아니면 기회가 없네. 도백 유진이 알려지면 저들은 더 안 나가려고 할 테니까.”

무윤의 생각도 깊어졌다.

‘어디까지 나서야 할까?’

당초 원한 건 유진을 전하고 은인의 지위를 확보하는 것뿐, 문파 일에 껴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한데 그건 도백의 뜻이 온전히 전해진다는 전제하에서다. 이러다가 또 건천이 주도하는 형산이 된다면.

‘그럴 바엔 유진을 무당에 줘 버리는 게 낫지. 그 꼴은 못 본다.’

그 생각에 문득 궁금한 게 생겼다.

“마단의 책임이 있는데 건천 장로는 그대로 있는 겁니까?”

“아닐세. 장로직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결정됐지.”

“근데 아까 그분께선 건천 도장을 언급하던데요?”

“아직도 실리파 내에선 가장 목소리가 크다네. 제자들이 주요 보직에 포진하고 있으니까. 이번 일로 세가 줄어들 걸 염려해서인지 다들 똘똘 뭉치더군.”

무윤의 미간이 더 조밀해졌다. 이런 상황에 명분론에 치우친 건허에게만 맡겨 놓아서는 앞날이 빤해 보인다.

‘유진을 넘겨도 저들 손에 놀아날 거 같은데.’

또 가장 큰 목적은 본가인 천가장의 안전을 위해 형산을 아우르려고 한 것인데, 건천과는 죽은 제자 선운의 서신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돼 버린 상태.

거기에 답답한 건허를 보고 있자니 짜증까지 확 올라온다. 결국 고민 끝에 불쑥 떠오른 생각.

‘그냥 전면에 나서 버려?’

처음엔 조작 세력을 찾기 위한 기반 때문에 벌인 일인데 상황도 많이 달라졌다.

‘전쟁이 커지면 호남도 무사하리란 법이 없지. 또 어떤 큰 세력과 적이 될지도 모르고. 그럴 바엔 이참에 아예 형산을 휘어잡아 버릴까?’

한번 떠오른 생각은 점점 더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다 결정을 내렸다.

‘내 우군으로 만든다. 형산을 위해서도 나쁠 게 없는 일이고.’

그러자면 반드시 선결돼야 할 게 있다. 티 나게 우려의 표정을 드러내고는 운을 뗐다.

“이런 상황이면 유진을 전해도 그 뜻이 이어질까 걱정됩니다만.”

건허의 눈이 부릅떠졌다. 등골이 서늘하다 못해 얼어붙는 소리.

“헉! 그게 무슨 소린가? 아니 되네. 뭘 어찌하면 되겠나? 방안을 알려 주시게. 내 무조건 그리할 테니.”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

무윤의 설명이 이어지고 얼마 후, 건허의 웃음이 더할 수 없이 환해졌다. 오히려 자신이 은근슬쩍 권하고 싶었던 일이었으니까.

“허허! 나야 환영일세. 오히려 부탁하고 싶었거늘. 그리하지.”

“그럼 준비가 끝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알겠네. 가능한 한 빨리 부탁함세.”

“알겠습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가는 건허에겐 지금껏 잃어버렸던 싱그러운 미소가 들어앉았다.

‘허허! 복이 저절로 굴러 들어오다니.’

무윤의 답답한 속마음을 어느 정도 짐작하는 데다, 그 의도와 제안이 형산에 해가 되지 않기에 거리낄 게 없다.

흥이 더해진 콧바람이 그동안 쌓인 근심을 실바람에 훌훌 실어 보냈다

잠시 후, 하오문 비밀 거점.

“그러니까 쉽게 말해서 형산을 먹겠다 이거지?”

“어째 말이 좀 그렇다?”

“엎치나 메치나 그게 그거지. 안 그래?”

“서로 좋은 사이. 이런 좋은 말도 있잖아.”

“뭐 하여간 나쁘진 않네. 건천 같은 새끼한테 유진을 넘기는 건 나도 정말 싫거든.”

“그럼 나 혼자 침주에 다녀올게. 빨리 움직여야 하니까.”

“그래라. 후딱 갔다 오면 한 엿새면 충분하겠지?”

가서 은야문 도천과 무륜의 기록까지 만들어야 한다.

“그 정도 걸리겠지. 서류도 만들……. 아니 가지고 오려면 들러야 하니까.”

“침주에서 멀어?”

“뭐 조금.”

연사구의 눈이 게슴츠레 떠졌다.

“거기 나도 가 보면 안 될까?”

“거의 다 깠다니까.”

“어쨌든 남은 게 있다는 거잖아.”

“별거 없다니까.”

“미안한데 그 말은 정말 못 믿겠다.”

“이 새끼가 누굴 거짓말쟁이로 아나.”

“응. 딴것은 몰라도 그건 그래.”

“……!”

무윤은 혼자 침주로 향했다.

이틀 후, 침주 청호방.

두 팔 활짝 벌린 아이가 쪼르르 달려왔다. 작은 입가엔 부푼 꽃망울처럼 웃음꽃이 활짝 폈다.

타다닥!

폴짝 뛰어 안기자마자 가슴에 머리를 폭 기대어 댄다.

“아빠! 히잉! 보고 싶었어요!”

무윤에게 유일하게 억지 미소가 사라지는 순간.

“아이고! 우리 소려. 그새 한 뼘이나 자랐어. 이러다가 금방 숙녀 되겠네.”

“정말! 그렇게 많이 컸어요?”

“그럼! 삼촌들이 말 안 해 줬어?”

“삼촌들 요즘 바빠요. 묘예 고모도.”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르르 몰려들 왔다. 앞선 묘예의 앙칼진 음성엔 반가움이 물씬 배어났다.

“야! 연락 자주 하라니까 내 말을 씹어!”

“뭔 소리야? 사구가 매번 알렸다던데.”

“참내! 그것도 서신이라고 보내? 매번 잘 있다, 이게 끝인데.”

“그랬어?”

악무길이 가볍게 미소 지었다.

“그래도 남궁사현하고 싸운 건 길게 썼더라. 석 장이 넘게 강기가 어쩌고저쩌고 적었어. 하여간 안 다쳤다니 다행이고.”

무윤은 가장 궁금한 것부터 꺼냈다. 적운문주 설도승이 죽은 게 이곳에도 전해진 상황.

“참! 적운문은 어때?”

뒤에 있던 공야성이 앞으로 나왔다.

“진짜 초상집 분위기지 뭐. 하후가는 물론이고 우리 눈치 보느라 정신이 없지. 우리도 혹시나 해서 그쪽 살피느라 바빴고. 걱정할 건 없는 거 같다.”

“다행이네.”

“그보다 하후천기 소식은 못 들었지?”

“응? 악양에서 먼저 출발했는데 뭔 일 있어?”

“지금 의식 불명이야. 오는 도중에 의원이 독을 쓴 모양이야.”

“독?”

“자세한 건 나도 모르겠고 소문으론 위중한 거 같던데, 알아봐야지 않겠어?”

“……!”

소려의 친부인 이상, 화급을 다투는 일이라면 그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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