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같은 시각, 의방 앞에서 서성이던 진서연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행장을 갖추고 죽립을 눌러쓴 채 막 밖으로 나오는 이. 만나 줄지 몰라 어떻게 말을 꺼낼까 고심하고 있었는데 정면으로 마주쳐 버렸다. 상대도 자신을 알아본 상황.
몸 상태를 먼저 묻고 싶지만, 자존심을 건드릴 수 있다.
“어디 떠나시나요?”
남궁사현의 굳게 닫혀 있던 입술이 잘게 떨렸다.
“가 볼 데가 있다.”
“사천에서 오대세가 회합이 있다던데 거기?”
“내가 갈 일은 없어졌다.”
“그럼 어디?”
“먼 곳이다. 오래 걸릴 거야.”
남궁사현은 앞으로 일을 고민하다 섬서의 전쟁 분위기를 전해 듣는 순간, 그곳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이유는 세 가지.
‘연사구, 놈한테 진 건 치열함이 없어서였어. 그걸 전쟁터에서 끌어낸다.’
또 한순간 무너져 내린 명성을 회복하기엔 전쟁터만 한 곳이 없다. 그리고 마지막 이유, 섬서는 아버지가 있는 청해와 가깝다. 당시 시간이 없어 다 배우지 못한 것들.
‘이번에 가면 모든 걸 얻어 낸다.’
무의 천재라 불렸던 아버지는 당시 현경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런 이의 가르침을 한동안 받는다면.
‘다시는 이런 굴욕을 당하지 않는다.’
그 생각에 결정한 행로다.
진서연의 눈빛이 깊어졌다. 이제 에둘러 물어야 할 때.
“어딜 가시기에? 아! 그때 아버님 일로 멀리 간다고 하셨는데 그것 때문에?”
순간 남궁사현의 몸이 움찔했다. 적절한 답이 딱 떠오르질 않았다.
‘뭐라고 하지?’
그녀에겐 알릴 수 없는 일들. 그렇다고 아무 말 없이 가면 도망치는 것처럼 보인다. 자존심이 용납지 않는 일. 잠시 고민 끝에 적당한 말을 골랐다.
“그 일은 다 확인했고 이번엔 내 일로 간다.”
“그럼 아버님 일은 어떻게?”
“별거 없었다. 아무 일 아니야.”
“그럼 어디로? 멀리면……. 청해나 뭐 그쯤 되는 덴가요?”
순간 남궁사현의 눈이 잘게 떨렸다. 알고 했을 리 없는 말이지만 제 발 저린 건 어쩔 수 없었으니.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면 그럴 수도 있겠지.”
직감이 전한 확신에 진서연의 눈가가 아련해졌다.
‘청해에 가는 게 맞아. 그런 거라면…….’
몇 년을 같이한 이의 말투와 몸짓에서 느껴지는 감은 분명 그렇게 말한다. 순간 갈등이 일었다.
‘솔직히 물어볼까?’
그래도 한때 자신에게 진정을 다했던 사람. 지금이라도 말릴 수 있다면 그러고 싶다. 하지만 잠시나마의 생각을 바로 거둬들였다. 한번 말을 꺼내면 주워 담기는커녕 어디까지 흘러갈지 모르는 상황.
‘다들 위험해진다. 우리도 이 사람도.’
그래도 마지막 말엔 진정을 담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한 말과 함께 고개가 깊숙이 숙여졌다.
“돌아오시면, 다시 남궁으로 뵐 수 있기를…….”
“응? 뭐 그거야…….”
할 말을 끝내고 뒤돌아선 여인의 걸음이 서서히 어둠 속으로 사라져 갔다. 마지막 말이 가슴에 콕 박힌 자의 시선은 한동안 그곳을 떠나지 못했고.
얼마 후, 그래도 사내의 발길은 떨어졌다.
* * *
반 시진 후, 하오문 지부.
무윤과 연사구, 진서연 세 사람이 따로 자리했다.
연사구는 진서연을 힐끔거리고는 말끝을 흐렸다.
“그것참! 우리 일 때문에 따라가 볼 수도 없고, 누구 붙일 사람도 없고. 몰래 잡아다 족치는 것도…….”
“그건 안 돼요. 죽인다 해도 절대 말할 사람도 아니고 오히려 꼬리만 잘라 버리는 꼴이에요.”
“서북쪽으로 가는 방 어르신이나 양 형님한테 부탁하기도 그렇고.”
“정, 사 대전이 벌어지는 판에 남궁의 치부를 사파에 알릴 순 없죠. 그게 더 일이 커질 수도 있는데.”
“그럼 어떡하죠? 달리 생각나는 게 없네.”
무윤은 답을 내렸다.
“그냥 감춰 둔 패로 두자. 상황을 보면 조작은 한 곳에서 시작했겠지만, 지금은 여러 세력이 다 이용하고 있어. 계속 남궁에 있던 자라 뭘 안다 해도 일부분일 거야. 게다가 우리 계획대로 밀고 나가기로 한 이상 당장 큰 의미도 없고. 지켜보다가 필요하면 그때 활용하자고.”
“뭐 지금은 그 방법밖에 없겠네. 그러자고.”
일단 의견이 모여지자 진서연은 화두를 돌렸다. 앞으로 일정에 대해 궁금한 게 있다.
“참! 침주로 가기 전에 형주 형산파에 들른다고 했죠?”
“예.”
“거긴 지금 봉문했는데, 무슨 일이라도?”
“만나 볼 사람이 있습니다.”
“……?”
무윤의 눈이 깊어졌다.
‘잘하고 있을까?’
장로 건허는 도백파 유진의 도움 없이, 내부에서 개혁해 보겠다고 의지를 표명했었다.
이제 그걸 확인하러 갈 때.
* * *
닷새 후, 호남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 형주.
무윤 일행은 허름한 주막의 깊숙한 방으로 들어갔다. 하오문의 비밀 거점 중 하나.
연사구는 티 나게 큰 한숨을 흘려 냈다.
“참내! 죄지은 것도 없는데 몰래 움직여야 하다니. 이게 뭔 고생인지!”
오는 여정 내내 신분을 감추고 이동했다. 장사(長沙)에서의 비무 결과는 물론, 그로 인해 도인에 대한 궁금증까지 커진 상황이라.
거드름 피우는 게 역력한 모습에 당서하의 입이 비틀어졌다.
“왜? 사방에서 네 이름 가지고 떠들어 대는데 못 나서서 아쉬워?”
“에이! 제가 팔불출입니까. 그냥 편하게 돌아다니다 이것저것 살펴야 하니까 불편해서 그러죠.”
“하긴! 오는 내내 불편해 보이더라. 나서고 싶어서 엉덩이 들썩거리는 걸 본 게 셀 수도 없었지.”
연사구는 짜증스럽게 얼굴을 구겼다.
“그거야 남궁 새끼한테 암수를 썼다고 할 때 그런 거잖아요!”
“난 모르지. 내가 너만 쳐다보고 있던 것도 아닌데.”
“아우! 사람을 뭐로 보고 참내!”
“난 본 것만 얘기한 건데.”
“예이! 관둬요. 말 꺼낸 내가 잘못이지.”
“잘 아네.”
그때 형주 하오문 지부장 연대유가 들어왔다. 연사구를 바라보는 입가엔 흐뭇함이 가득했다.
“하하! 우리 초절정 조카께서 이제야 왔구먼.”
“에이! 숙부님도 참! 그간 잘 지내셨죠?”
“그럼! 네 덕분에 웃느라고 요 며칠 정신이 없었지.”
“크흠! 뭐 그 정도 가지고…….”
“그보다, 내상을 입었다고 하던데. 괜찮아?”
“예, 지금은 멀쩡해요.”
“휴! 다행이구나. 강기와 부딪쳤다고 해서 걱정했는데.”
“참! 인사하세요. 누군지는 다 아시죠?”
연대유의 들뜬 시선이 주변을 둘렀다.
“허허! 강호의 동량들을 이리 보게 돼서 영광이오.”
한동안 인사가 오고 간 후, 연사구의 질문이 시작됐다.
“감숙하고 섬서 상황은 좀 어때요?”
연대유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한마디로 좋지 않아.”
“왜요?”
“우선 비고는 혈교 짓이 분명해.”
연사구는 에둘러 물었다. 소문을 조작한 세력이 암중에서 꾸민 일일 수도 있으니까.
“확실한 거예요? 다른 데서 조작할 수도 있잖아요. 천마교라든가.”
“아니, 확실해. 급하게 만든다고 여기저기 흔적이 남은 모양인데 그걸 찾은 모양이더라. 정, 사 모두 말이다.”
“그래요. 그럼 밝혔어요?”
“아니, 다들 감추고 있지. 혈교에게 속아서 서로 싸우다 죽은 게 수백인데 그걸 어떻게 밝히겠어. 개망신은 물론이고 당장 혈교와 전쟁을 해야 할지 모르는데, 섬서하고 감숙 무인만으로 나섰다간 감당이 안 되지. 그래도 명색이 혈교인데.”
“이해는 가네요. 그래서요?”
“상황이 이러니 우선 화살을 서로에게 돌렸어. 그동안 쌓인 게 많았잖냐. 어쨌든 이번 일로 서로 물어뜯을 핑계는 생긴 게지. 한데 상황이 혈교 무마용 정도로 끝날 거 같지가 않구나.”
“왜요?”
“비고 확인에 참여한 문파가 너무 많아서 국지전 양상이 벌어졌어. 각자 원한들이 생긴 상태라 대표 무가들 말이 먹히질 않는 모양이야.”
커다란 전쟁의 근본 원인은 물론 내재한 갈등이 커서지만, 그 시작은 아주 작은 불씨인 경우가 허다한 법. 더구나 불씨가 여러 개라면 더욱이.
고개를 갸웃거리던 당서하가 나섰다.
“감숙과 섬서 무가들은 누구보다 혈교나 천마교를 잘 알잖아요. 자중지란(自中之亂)을 벌이다간 저들이 침략할 걸 알 텐데 적당히 하다가 끝내지 않을까요?”
“맘이야 그럴 텐데 눈앞에 사형제들이 죽어 가는데 조절이 쉽게 되겠소. 화산과 종남 장문인들이 나섰는데도 더 커지는 모양이외다. 당분간은 어쩔 수 없을 거 같소.”
“휴! 속사정이야 알겠는데 그러다 혈교가 침략하면 어쩌려고 그러는지.”
“최근엔 혈교도 많이 약해졌다고 알려졌으니까 못 그럴 거라 믿는 마음도 있을 게요.”
“정말 그럴까요?”
“누가 알겠소. 청해 산속에 웅크린 놈들인데.”
“……!”
한참 더 서북쪽 얘기가 오고 간 후, 연사구는 급한 화두를 꺼내 들었다.
“참! 형산파는 좀 어때요?”
“봉문 상태라 정보가 적긴 한데 내부 사정이 복잡한 모양이다.”
“어떤?”
“너도 알겠지만 형산파는 세 세력으로 나뉘어 있지. 팔 할이 도가인데 실리파 오 할, 명분파 삼 할, 그리고 외부에서 들어온 무인이 이 할 정도 차지하지.”
“그런데요?”
“이번 마단 사건으로 명분파가 주도권을 잡긴 했는데 세가 작아서 개혁 작업이 난항인 모양이야. 실리파와 일반 무인 쪽에서 거부하고 있다.”
“쟁점이 뭔데요?”
“두 가지인데 우선 제자 선발 문제야. 명분파에서 앞으로 도가 제자들만 받겠다고 하니까 일반 무인들이 반발하는 거지.”
“그 사람들 입장에선 그러겠네요. 자기들 무공을 전할 제자를 못 받는 건데. 다른 건?”
“형산파는 다른 도가 문파와 달리 여러 사업을 직접 하고 있지. 크흠! 사실 그중엔 사파나 할 만한 것들도 적지 않고. 한데 명분파가 그걸 속가로 다 떼 내자는 게야. 그럼 수입이 줄어드니까 다른 쪽에선 반대하는 거지.”
무윤의 미간이 좁혀졌다. 완전한 도가 문파로 거듭나기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조치들이다. 한데.
‘삼백 년을 그렇게 해 왔는데 한 번에 바뀔 수 있을까?’
어떠한 명분과 실리도 현실을 벗어나선 무익해지는 법.
이건 도백파 유진을 전한다고 해서 바로 없어질 문제가 아니다. 또 일반 무인들 입장도 충분히 이해가 가고.
‘건허 생각부터 들어 보자.’
또 그 전에 할 게 있다.
‘지부장에게 알려야지.’
당초 도백파 유진을 세상에 알리는 건, 일 년 정도 후로 생각했었다. 기록은 물론 직접 익힌 걸 보여 주는 게 최고니까.
한데 서북쪽 상황이 급변한 이상, 혼란을 줄이려면 가능한 한 빨리 세상에 꺼내야 한다. 물론.
‘원래 내재한 갈등이 있으니 정, 사 간의 싸움은 어차피 벌어지겠지. 하지만 소문을 악용해 키우는 건 줄일 수 있다.’
그래서 연사구와 논의 끝에 유진을 전하자마자 곧 알리기로 생각을 바꿨다. 그러자면 형주 지부장에겐 먼저 알리고 협조를 구해야 한다. 그 참에 일행들에게도 알리고. 어차피 몇 달 후엔 알게 될 일이니까.
연대유도 있는 자리라 연사구가 화두를 열기로 했다.
“숙부님도 여러분한테도 알릴 게 있어요.”
“우리도? 뭔데?”
“형산파에 들르는 이유.”
그동안 궁금했던 연대유의 눈이 번득였다. 다짜고짜 형산파에 대해 소상히 파악해 달라는 서신만 받았으니까.
“허허! 이제 알려 주는 게냐? 왜 그런 게야?”
“무윤 이놈이 형산파에 뭘 좀 넘기려고요.”
“넘겨? 뭘?”
“도백파 무공하고 도경요.”
모두의 눈이 한순간 멍해졌다. 이해할 수 없는 말에 영문을 모를 땐 그럴 수밖에.
한참 기억을 되짚던 당서하는 눈을 껌벅였다.
“도백파라면, 내가 아는 건 그것뿐인데.”
“아마 그거 맞을 거예요.”
“……뭔 소리야? 그 도백은 천 년 전에 멸문한 문파……. 헉!”
순간 모두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제야 생각났다. 연사구가 악양에서 했던 말이. 또 무윤의 조사란 분도.
당서하는 혼란스러운 머리를 휘휘 내저었다.
“그 도백이라고?”
“예.”
“……뭐가 있는데?”
“아주 많대요. 도백의 무공 근 절반 정도. 아! 진경까지.”
부릅뜬 모두의 시선은 절로 한 사람을 향했다.
천마라 불린 내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