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마지막 승부.
간격을 좁힌 두 검격이 매섭고 날카롭게 번득였다. 귀를 울리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허공을 갈랐다.
쇄애액! 슈욱!
정면으로 치달은 둘의 검이 맞닥뜨리는 순간, 폭풍과 같은 기의 파편이 사방으로 비산했다. 검강과 검기의 파편에 연달아 공기가 터지며 대기에 구멍이 났다.
쾅! 카앙! 파팟! 채앵!
거대한 강기의 기운에 연사구의 검이 두 동강이 나는 순간, 회심의 미소를 떠올리던 남궁사현의 눈이 부릅떠졌다. 등줄기를 서늘하게 내리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이놈이! 검을 일부러 놨어.’
손에 전해지는 미미한 충격이 알렸다. 부딪치기 직전 놈이 검을 놓았음을. 한데 그 자각과 동시에 자유로워진 놈의 주먹이 호선을 그리며 눈앞에 들이닥쳤다.
슈우욱!
무인의 본능이 남궁사현의 뇌리에 경종을 울렸다.
‘위험해!’
아직 강기를 거두지 못한 상태. 급히 신형을 물리는 찰나, 부족한 내력 탓에 살짝 동작의 흐름이 끊겼다.
휘릭!
순간 연사구의 눈이 번득였다.
‘기회!’
무윤에게 강기의 고수를 상대할 방법을 배울 때 나눈 대화가 있었다.
-지금 네 수준에서 강기의 수발이 원활한 고수는 대책 없는 거 알지?
-어떡하든 도망쳐야지. 안 되면 손이 발이 되도록 빌거나.
-그래. 그래도 그 이하는 어떻게든 해 볼 방법은 있으니까 연습해 보자고.
-알았어. 근데 핵심은 역시 강기를 거둬들일 때 틈을 노리는 거겠지?
-물론. 강기도 검기와 똑같아. 발현 후 거두기 전까진 내력 전환이 힘들지. 그 틈을 노려서 역공하는 게 최고야.
-해 보자고.
남궁사현이 강기를 꺼낸 순간 흠칫했지만, 오히려 기다리던 단 한 번의 기회가 왔음을 직감했다. 그 순간 이글거리던 눈빛에 희열 가득한 열기까지 더해졌다.
‘큭큭! 그딴 걸 강기랍답시고 꺼냈다 이거지.’
강기에 놀란 건 그도 마찬가지. 하지만 농밀함은 물론 강기 끝의 여린 떨림은 그 한계도 여실히 보여 줬다. 무윤에게서 수없이 봤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조악함이 눈에 훤히 들어왔다.
‘그런 강기에 대응하는 건 수없이 연습했다.’
그 자신감에 선택한 승부수다.
나는 듯 몸을 틀어 물러나는 놈의 얼굴로 주먹을 내질렀다.
슈우욱!
온 힘이 실린 이 주먹에 이어진 연환 공격, 거기에 모든 것이 결정된다. 간신히 강기를 비켜 냈다고는 하나, 충격에 울혈이 올라올 정도로 내상을 입은 상태. 놈이 강기를 추스르고 내력을 운용하면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
하체에서 올라온 힘이 그 마음 다해 팔꿈치와 손목을 넘어 주먹 끝에 모였다.
남궁사현이 얼굴로 다가오는 주먹을 피해 급히 고개를 돌리는 순간, 또 다른 주먹이 가슴을 향했다.
남궁사현의 경악성이 터져 나옴과 동시, 몰아치는 거대한 바람 소리와 함께 주먹은 빈틈을 뚫고 명치에 정확히 틀어박혔다.
“헉!”
퍽! 빠각! 두둑!
“커억!”
엄청난 격통에 남궁사현의 머릿속은 하얗게 변했다. 숨이 가빠지고 눈동자가 멍해지던 시선이 연사구를 좇았다.
‘이, 이런 치졸한 수에…….’
하지만 생각은 더 이어지지 않았다. 등 언저리에 느껴지는 둔탁한 충격에 왈칵 피가 솟구쳤다.
퍼퍽!
“쿨럭!”
비릿한 혈향이 입가에 느껴지고 몸이 절로 숙여지자 또다시 허공을 가른 주먹이 연달아 내질러졌다.
슈우욱! 퍽! 우둑! 퍽!
“크윽! 커억!”
회전한 발이 무너지던 등짝 위를 찍어 내렸다.
빠각!
“우욱!”
남궁사현의 멍하게 풀린 눈이 이미 의식의 반은 빠져나갔음을 알렸다. 무너진 무릎이 몸을 축 내리려는 찰나.
“그만!”
다급한 고성과 함께 장로 남궁재영이 단상 위로 날아들었다.
휘리릭! 탁!
연사구의 앞을 가로막고는 참담한 음성을 흘려 냈다.
“끝났네. 그만하게.”
“……!”
승부는 결정됐다.
짧은 정적 후 내력을 풀어 버린 연사구는 남궁사현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급히 내상을 다스려야 할 상황. 하지만 꼭 해야 할 말이 있다.
터억!
아직 의식이 남아 있는 놈에게 다가가 가만히 읊조렸다.
“강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네놈이 이겼다.”
핏물 섞인 분노가 자조적인 말을 뱉어 냈다.
“쿨럭! 가, 강기!”
“그 전엔 공격할 틈을 전혀 못 찾았다. 어떻게든 버텨서 무승부로 끝내 볼까 했지. 한데 어떤 놈이 그러더군. 조악한 강기만큼 실전에 위험한 게 없다고. 그래서 모험을 한 거야.”
허망함 가득한 쓴웃음이 입가를 헤쳤다.
“큭큭! 쿨럭! 내 탓이로구나.”
연사구는 얼굴을 들이밀고는 바라보는 눈 가득 불꽃을 담았다. 이 말을 하고 싶어 온 것이니까.
“그래. 내가 이긴 게 아니다. 너 스스로 진 거지. 하지만 다음이 있다면! 그땐 오늘 같지 않을 거야. 기대해도 좋아.”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통한의 울분을 알렸다.
“그, 그 말, 꼭 기억해 두마.”
“그러는 게 좋을 거야.”
남궁사현이 의식을 잃음과 동시에 좌중의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가장 격한 반응은 역시 하오문도들. 껑충껑충 뛰면서 서로를 얼싸안고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와! 이거 정말, 내가 본 게 틀림없지?”
“그럼! 우리 은월청요검이 남궁의 검을 이겼어. 천하제일가의 검을! 우하하하!”
“세상에! 내가 이런 걸 다 보게 될 줄이야!”
“안 되겠어. 나도 은월단 선발 비무에 참여해야지.”
“응? 넌 배운 지 얼마 안 됐잖아?”
“나야 기본 검식부터 해야지. 그게 딱 좋으니까.”
“하긴! 에라 모르겠다. 나도 참여해 볼래. 까짓것 밑져야 본전이잖아.”
“그나저나 연 당주, 정말 대단해. 신룡을 꺾다니.”
“크크! 이젠 연 당주도 신룡이지. 그것도 수위급으로.”
“당연하지!”
연대광은 벅찬 환희에 이지러지는 얼굴을 간신히 다잡았다.
‘크흠! 이러면 안 되지.’
지금은 그래야 했다. 단상을 내려가며 눈을 찡긋거리는 아들. 그 자랑스러운 놈에게 지금 보일 건 기쁨의 눈물과 격정이 아니다. 격전 내내 사시나무처럼 떨렸던 몸도 감춰야 한다. 땀이 흥건히 맺힌 손과 등 뒤도. 지금은 오직 하나. 온 세상 가득 비추는 따스한 햇살 같은 미소, 그것만 전해야 한다.
그래야 아들이 안다. 격전 전에도, 그 후에도 언제나 믿고 있었다는 걸. 그 마음 담아 한결같이 지켜봤다는 걸, 그게 아버지로서 지금 해야 할 최선이다.
한편 들뜬 하오문과 달리 다른 곳 모두의 심사는 복잡해져 갔다.
착잡한 마음을 가눌 수 없는 개방, 앞으로 미칠 여파를 심사숙고하는 무림맹과 사도련 및 정사의 무가들.
무거운 표정 이면에 각자의 입장을 떠올리는 남궁은 물론, 꽁지 빠지게 떠나가는 서문진성과 모관평도.
휘돌아 흘러가는 격류의 물결처럼 장원 주변에 한바탕 회오리바람이 불어닥쳤다.
앞으로 강호에 벌어진 풍운을 예고하듯이.
* * *
나흘 후, 하오문 지부.
번져 가는 석양이 어슴푸레 어둠을 몰고 올 즈음, 조촐한 술판이 벌어졌다. 양사준이 내일 떠나는 무윤 일행을 위해 술을 싸 들고 와서 갑자기 벌어진 자리.
이런저런 얘기가 오가다, 의아해진 양사준이 물었다.
“진 조장은 어디 갔어? 안 보이네?”
“어디 갔는데 좀 늦을지 몰라요.”
“그래? 그럼 올 때까지 술 마셔야겠네. 마지막인데 인사는 해야지.”
“참내! 매일 와 놓고서는 무슨 인사를 또 해요?”
“그래도 예의가 아니지.”
“언제부터 그런 거 따졌다고. ……가만 혹시?”
“혹시 뭐?”
“매일 찾아와서 진 조장하고 따로 만났잖아요?”
양사준은 눈을 치켜뜨고는 버럭 성을 냈다. 괜한 오해는 사절이다.
“이 새끼가 정말! 나불댈 얘기가 따로 있지. 야! 비무 관련해서 얘기 나눈 거라고. 궁금한 게 서로 많았으니까.”
“아니면 그만이지, 웬 성질?”
“말도 안 되는 얘길 하니까 그렇지.”
“오! 그럼 사심은 전혀 없다?”
“이 새낀 다 알면서 놀리고 지랄이야. 진 조장이 어디 그런 데 관심 가질 사람이냐. 크흠! 물론 그런 미인하고 자리라 내 말이 길어진 건 있지. 뭐 그것도 사심이라면 할 말은 없고.”
연사구는 피식 웃고 말았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헤어지기 아쉬워 해 본 농이니까. 이제 궁금한 걸 알아볼 때. 민감한 사안이라 말을 에둘렀다.
“그나저나 가문에 계속 있을 거예요? 아니면?”
양사준은 하후진을 대놓고 쳐다보고는 묘한 미소를 입가에 드러냈다.
“역시 내가 있을 곳은 아니야. 근데 많이 털어 냈다. 저놈하고 비슷한 심정이라고 보면 돼.”
짧은 몇 마디 말에 다 담아내기는 쉽지 않은 질문. 하지만 이 말만큼 적절한 답도 없어 보였기에 꺼낸 말이다.
“그럼 또 떠난다고?”
“그래야지. 사부 일도 있으니까 같이 서북쪽으로 가 보기로 했다.”
무윤은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방연극은 조작한 세력도 함께 찾아보기로 하고 가는 길이니.
“어차피 놈들은 곧 모습을 드러낼 거라, 너무 깊게 파지 않으셔도 됩니다. 대략 파악이 되면 그때 같이 움직이시죠.”
“걱정 마. 나나 사부나 항상 우리 몸부터 챙기니까.”
그때 연대광이 다급한 표정으로 달려왔다.
타닥!
“헉헉! 결국 일이 터졌다.”
“뭔 일인데 호들갑이에요? 전쟁이라도 났대요?”
가쁜 숨을 몰아쉰 연대광은 급히 말문을 열었다.
“가짜 천마 비고, 아니 여휘의 가짜 비고 때문에 감숙(甘肅) 천수(天水) 부근에서 큰 싸움이 벌어졌어.”
감숙은 청해와 섬서의 중간 지대.
무윤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이제 시작인가?’
소문이 돈 지도 벌써 반년이 훌쩍 넘어갔으니 뭔가 벌어질 때가 되긴 했다.
“무슨 일입니까?”
“여휘의 무공이 있다는 지도가 그 근처에서 나왔어. 천수 북쪽 산속이라는데, 거길 차지하겠다고 정, 사 간에 다투다가 싸움이 일파만파 커졌다. 섬서 정파와 사파 대부분이 나서서 비고 근처에서 수백이 죽었어.”
감숙엔 거대 문파가 거의 없어 섬서의 무가들이 이 지역까지 깊숙이 관여해 왔었다. 곧 감숙의 분쟁은 섬서의 일이나 마찬가지.
“비고는 어찌 된 겁니까?”
“암동에 무공은 없고, 온갖 독에다 기관진식만 깔려 있었다는구나. 나중에야 최근에 만든 걸 알고 가짜란 걸 알았지만 이미 싸움은 끝난 후였고.”
“누구 짓인지 알아냈습니까?”
연대광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물론 양쪽 다 혈교를 의심하긴 해. 한데 그동안 쌓인 앙금에다 이번에 서로 죽여 댔으니 그 원한이 오죽하겠어. 나중에 밝혀진다 해도 이 일과는 별개로 둘 간의 전쟁이 벌어질 수 있어. 휴! 이제 폭발할 때가 되기도 했지.”
근 오십 년에 가까운 강호의 평화, 그동안 정, 사 모두 큰 싸움 없이 규모를 키워 왔기에, 시점을 모를 뿐이지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누가 건드려 주기만을 바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상황이니까.
바로 짚어야 할 게 있다.
“무림맹과 사도련 입장은 어떻습니까?”
“이제 막 논의를 시작했으니 두고 봐야지. 한데 이번 싸움에 정파에선 화산과 종남, 사파에선 종리가와 혈영문이 앞에 섰어. 섬서 최고 세력이 다 나섰으니까 그 주변 세력도 가만있을 수 없지. 만약 전쟁이 벌어지면 확전된다고 보는 게 맞을 게다.”
“……!”
화로 안의 불꽃이 계속 밖으로 넘실대면 언젠가는 옮겨붙기 마련.
지금의 강호가 딱 그런 형국. 아직 정확한 내용을 다 알 순 없지만, 누군가 불씨를 확 키운 이상 번진다고 보고 대처해야 할 상황.
속 깊은 한숨이 절로 흘렀다. 그 오랜 세월, 수십 년마다 되풀이돼 왔던 일.
‘강호가 존재하는 한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한데.’
그걸 바라는 이도 있지만, 문제는 원하지 않는 이들도 말려들 수밖에 없다는 것.
지금은 그저 그 불길이 내 주변에 옮겨붙지 않길 바랄 뿐.
오늘따라 먹구름 풀린 밤하늘이 더 스산해 보인다.
천마라 불린 내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