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캉! 콰앙! 콰쾅!
폭풍같이 터져 나오는 검세와 섬뜩한 쇳소리. 그 격렬함이 끝없이 이어지는 일진일퇴의 공방을 알렸다.
형형색색 빛이 어우러진 기의 파편이 사방에 흩날렸다.
난전의 치열함에 뿌려지는 핏방울이 좌중 모두의 손에 땀을 맺히게 한 지도 한참.
지켜보던 사람들의 탄성이 연이었다.
“허! 저럴 수가!”
“헉! 저리 위험한 수를!”
“휴! 보기만 해도 살이 떨리는구먼.”
“저건 생사투나 다름없어.”
“이를 말인가. 난 대충하다 우열만 가릴 줄 알았는데!”
“허! 진 소저가 달리 보이는구먼.”
무수한 검영이 난무하고 대기를 울리는 파공성이 허공을 가득 메워 가자, 사람들의 눈가에도 서서히 불꽃이 일기 시작했다.
어느새 하나둘씩 단상에 다가섰다. 누가 시킨 게 아니다. 그저 조금이라도 더 선명히 보고 싶은 마음이 그리했다. 하나둘씩 늘어나는 상처에도 아랑곳없이 비무에 몰두하는 두 사람의 눈빛이 그렇게 만들었다.
비무 내내 가슴을 뛰게 하고 온몸을 짜릿하게 하는 모습.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누구의 시선에도 여인은 없었다. 오직 일렁이는 기파 사이를 처절하게 뚫어 가는 무인의 몸짓만 눈가에 아른거렸다. 이기고자 하는 열망의 두 무인만 시야를 가득 채웠다.
당서하의 초조한 전음이 무윤을 향했다. 가장 묻고 싶은 말.
-서연이, 괜찮을까?
무윤도 딱히 답을 내릴 수 없다. 이런 혼전 상황에선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니까. 다만 확신을 담아 해 줄 말은 있다.
-진 조장은 지금 자기 한계를 알아보려고 저러는 겁니다. 그걸 파악하면 물러서든, 승부를 보든 판단할 겁니다.
당서하의 불안이 다소 가라앉았다.
-그럼 아직은 버틸 여력이 있다, 이거네?
-예, 근데 거의 한계라 곧 결정할 겁니다.
당서하는 그 말에 문득 궁금해졌다.
-넌 누가 이길 거 같은데?
서연의 실력이 급성장하는 건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안다. 하지만 아직 양사준에겐 무리라고 생각했는데, 무윤의 말에 뭔가 담긴 듯해서 한 질문.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다만?
-흑룡의 판단에 따라 승부가 갈릴 겁니다.
-판단? 어떤?
-지금 내릴 모양이네요.
-……?
쾅! 카앙! 휘리릭!
줄지어 경력을 쏟아 내던 양사준의 미간이 좁혀졌다. 무인의 직감이 알려 준 경고.
‘끌면 안 되겠어.’
분명 절체절명의 상황으로 몰아가 승부를 낼 기회가 수차례 있었다. 한데 손발이 어지럽고 쓰러질 듯 휘청거리다가도 간발이 차이로 도격의 그물을 벗어난다. 처음엔 운이라 생각했지만.
‘이 정도 반복이면 운이 아니라 실력이지.’
방어를 짓뭉개고 들어간 칼날이 승부에 종지부를 찍을 순간마다, 기이할 만치 묘한 동작들이 도격을 아슬아슬하게 흘려 냈다. 의도된 초식이나 훈련된 동작으로 절대 볼 수 없는 움직임. 그렇다는 건.
‘본능적인 동작이야. 타고난 천재라더니 역시!’
보타문 최고의 기재란 말이 헛소리가 아님을 절감했다. 한데 문제는 그런 움직임이 갈수록 잦아지고, 이치를 몸에 품은 듯 부드러움을 더해 간다는 것. 물론 턱 끝까지 올라온 숨소리와 흔들리는 검 끝은 내력이 한계에 다다랐음도 알린다.
여력이 충분한 자신이 조금만 더 세게 몰아붙이면 제풀에 떨어져 나갈 상황. 하지만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다.
‘내력 차이로 이기고 싶지 않아.’
그녀와 자신이 바라는 건 진정한 승부. 그러자면 역류회원도의 초식으로 승부를 내야 의미가 있다.
그 결심 담은 안광에 불꽃이 일었다. 다소 위험 부담이 있더라도.
‘승부를 본다.’
그 마음 담아 극한으로 올린 내기가 전신을 내달렸다. 폭풍 같은 기세로 정면을 파고들었다.
슈우욱!
진서연의 눈이 번득였다. 상대의 질주한 몸에 실린 경력의 여파가 경종을 울린다. 직감했다.
‘승부!’
바람이 귓가를 거칠게 쓸어 대는 순간, 몸과 마음이 선택한 검로가 뇌리에 박혀 들었다.
‘천수비화검의 정수!’
이제껏 보였던 공세 대신, 물 흐르듯 유려함 속에 느림과 빠름을 교차하여 마지막 순간 탄을 더해 쏘아 내는 극쾌의 절초, 탄수비영을 꺼낼 때.
남은 내력 다해 회전에 비틀림이 더해진 검 끝이 허공을 갈랐다.
화라락! 슈욱!
대기를 가른 예리한 기운이 부딪히려는 순간, 양사준의 도가 급변했다. 직선으로 내리꽂히던 도가 사선으로 휘어졌다.
휘리릭!
역류회원도의 절초, 회류무풍은 직선의 우직함 속에 마지막 환의 이치를 담은 환도. 그 변식 아닌 변식의 도세가 둥그런 원형을 그리며 서연의 허리를 갈라 왔다.
쇄애액! 휘이익!
짜릿한 전율이 서연의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생각의 범주를 뛰어넘는 속도와 변화. 이미 바람 탄 기운이 어깨를 파고드는 게 느껴진다.
‘위험해!’
순간 생각을 지워 버렸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 극한 초극의 감각을 깨우려면 지금은 몸에 모든 걸 맡겨야 할 때.
‘믿어야 해. 날.’
그때 기이한 감각 하나가 등골을 타고 올라왔다. 초감각이 발동했음을 알리는 신호. 본능이 시킨 비틀림이 아래로 몸을 회전시켰다.
휘리릭!
바람 탄 몸의 곡선이 도면을 타고 흐르는 찰나. 동시에 호선을 그린 서연의 검날이 상대의 어깨를 찔러 갔다.
슈우욱!
양사준의 격한 숨이 절로 터져 나왔다.
“헛!”
이미 도격은 허리의 요혈을 노리고 가속이 붙은 상태. 몸을 틀었다 하나 따라가면 제압은 가능했다. 하지만 동시에 어깨가 뚫릴 상황. 찰나의 고민 끝에 급히 어깨를 비틀었다.
휘릭!
푸욱! 서걱!
“크윽!”
“우윽!”
두 개의 격한 신음이 토해졌다. 칼날에 허리를 살짝 베인 서연의 신형은 바닥을 구르고, 어깨에 검이 얕게 박힌 양사준의 무릎은 꺾였다.
승부가 결정 났다. 한 줄기 기의 바람이 단상 주변을 스치고 마지막 여파를 전할 즈음, 좌중의 커다래진 눈은 두 사람을 정신없이 번갈았다.
“어, 어떻게 된 거야?”
“누가 이긴 거야?”
“둘 다 쓰러졌는데. 이러면 무승부?”
“상처는 흑룡이 큰 거 같은데.”
“그래도 무승부 아닐까?”
또 다른 의미의 탄성이 연이었다.
“야! 어쨌든 진 소저가 흑룡하고 대등하게 싸운 거잖아.”
“그럼! 한 번도 안 물러섰는데.”
“와! 초절정만 해도 놀랐는데 이 정도일 줄이야…….”
“게다가 흑룡 중에도 수위를 다투는 양사준과 대등한 실력이라니. 허!”
“앞으로 진 소저 명성이 강호에 쩌렁쩌렁 울리겠어.”
“당연하지. 강호 다 뒤져 보게. 저 나이에 저 경지에 오른 여인이 누가 있는가. 내 기억엔 없네.”
“나도!”
그때 급히 양사준에게 다가간 진서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어깨의 상처가 깊지 않다.
‘다행이야.’
진심을 가득 담아 정중히 고개 숙였다.
“마지막 검……. 다 거두지 못해 미안해요.”
양사준은 가볍게 미간을 찡긋거렸다.
“뭐, 저도 마찬가진데요. 참! 허리는 괜찮습니까?”
“살짝 베인 정도라 상처라 할 것도 없어요.”
“하하! 그거 다행이네요. 아니면 평생 욕먹을 뻔했는데.”
이제 승부에 대해 알려야 할 때. 진서연은 좌중을 향해 담담히 말문을 열었다.
“보셔서 아시겠지만, 승부는 제가 졌어요.”
“응? 어째서 그렇소? 상처는 양 소협이 더 큰데.”
“그 전에 이미 승부는 났어요. 다만 양 소협은 마지막에 도를 거뒀고, 저는 미처 그러지 못했죠.”
“아! 그런 거였구려.”
그때 양사준이 나섰다.
“그래도 큰 차이는 아니니 무승부라 해도 됩니다.”
“아뇨. 양 소협이 도를 거두지 않았다면 전 중상이 분명했어요. 더 싸울 수 없을 정도로. 제가 진 게 맞습니다.”
몇 번의 설왕설래 끝에 양사준의 승리로 의견이 모였다. 하지만 진서연을 패배자로 생각하는 이 또한 없었다.
그만 한 실력과 기개를 보여 준 비무. 또 앞으로 세상에 그 이름을 떨칠 무인임을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으니까.
여인이 아닌 무인으로서 서연의 비상, 그 날갯짓이 이제 시작됐다.
잠시 후, 또 다른 비무자 둘이 단상에 올랐다.
한데 비무를 앞둔 남궁사현은 다른 이유로 착잡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복잡한 심사를 가득 담은 눈빛이 절로 드러날 정도로.
‘아직은……. 어려운 것인가?’
이 비무를 하고자 했던 근본적인 이유. 그게 흔들렸다. 양사준의 도에 서연이 다칠 그 순간, 자신도 모르게 신형을 날릴 뻔했다. 일부러 뒤에 멀찍이 있었기에 망정이지, 앞에 있었다면 바로 뛰어들었을 자신을 자각했다.
그제야 알았다. 잊자면, 떨쳐 버리자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옅은 한숨을 내쉬고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았다.
‘조금만 더 시간을 갖자.’
그때 이죽거리는 전음이 귓전을 때렸다.
-뭐 하나만 묻자.
-……짧게.
-나야 솔직히 다치지만 않으면 잃을 게 없어. 져도 너 같은 놈한테 진 건데 변명거리도 되고. 근데 넌 아니잖아. 잃을 거밖에 없는데 왜 나섰지?
남궁사현의 입꼬리가 자연스레 올라갔다. 나선 이유엔 연사구도 큰 몫을 했다. 굳이 감출 얘기도 아니라 속을 드러냈다.
-나와 싸운 걸 떠들고 다닐 네놈 생각하니까 잠이 안 오더군.
-크크! 역시! 그거였나. 근데 알다시피 난 떠들지 않았어.
-어쨌든 내 자존심이 용납지 않아. 너 같은 놈하고 비겼다는 게.
-나 같은 놈? 아! 그쪽은 귀하신 몸이고 난 천한 출신이다?
-맘대로 생각해라. 난 사실을 말했을 뿐이니까.
-뭐, 알았어. 나도 네가 싫은 건 마찬가지니까.
-피장파장이니 됐군. 이제 시작하지.
-그래, 참! 자신 있어서 나섰겠지?
-물론.
-나도.
남궁사현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때도 다 안 꺼냈다만 지금은 또 달라졌지. 널 상대로 다 꺼낼 필요도 없을 정도로.’
청해에 갔을 때 아버지 남궁천우에게 전해 받은 심득이 있다. 또 반 갑자 내력을 늘린 지금도 아직 다 흡수하지 못할 정도로 귀한 영단까지.
거기에, 나선 이유가 또 있다. 아직 가문 그 누구에게도 실력을 보이지 않았다. 오대세가 회합에서 터트리고 본격적으로 가주 경쟁에 뛰어들 생각이었는데.
‘전 하오문이 다 모였으니 여기가 더 효과가 크지.’
결심을 굳힌 의미심장한 시선이 연사구를 향했다. 그 화려한 비상을 위한 제물로 선택한 놈. 그러자면 확실히 밟아 줘야 한다.
‘대신 죽이진 않으마. 그 정도 아량은 베풀어 주지.’
잠시 후.
상대를 마주한 연사구의 입가가 양쪽으로 휘어져 올랐다. 남궁사현 주변에 은은하게 퍼지는 기의 파동, 전신에 두른 기세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당연히 다 꺼내지 않은 게 분명한데도.
‘하! 저 새끼! 정말 달라졌네. 자신 있게 나설 만해.’
스스로 생각해도 몰라보게 늘었지만, 무인의 직감은 상대도 그 이상임을 알린다. 등골이 오싹해지고 온몸의 털이 바짝 서 버릴 정도로.
하지만 입가엔 비릿한 웃음이 감돌았다. 강해진 건 인정하지만 두려움은 없다. 저 정도 기운은 수없이 상대해 봤으니까.
‘너보다 한참 잘난 새끼한테 이골이 난 나야.’
목을 크게 휘저으며 검을 다시 꼬나 잡았다. 그렇게 의지를 다지고 들불처럼 진기를 일으켜 짓쳐 들려는 순간.
무윤의 다급한 전음이 날아들었다.
-사구야, 저 새끼 수상해.
-……뭐가?
-동굴에서 만난 그 수장 놈하고 기운이 비슷해.
연사구의 눈이 한순간 멍해졌다. 황당 그 자체인 말에 반문이 절로 나왔다.
-뭔 소리야? 저 새낀 남궁이야. 거기다 직계라고.
-그러니까 수상하다는 거지.
-……!
뜨악한 표정은 이럴 때 올라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