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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라 불린 내 친구-124화 (124/161)

124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잠시 후, 남궁사현의 말이 끝나자 좌중이 술렁거렸다. 그럴 만한 말이니까.

“이게 뭔 소리야? 연사구와 비무를 하겠다니?”

“그러게. 둘이 뭔 일이 있나? 아니면 남궁이 하오문과 안 좋은 일이라도?”

그때 남궁사현의 커다란 음성이 좌중에 흘렀다.

“분명히 말씀드리지만, 이 일은 가문과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럼 왜 나선 게요?”

“연사구, 저 친구와 못다 한 승부가 있어서 나섰을 뿐입니다.”

“응? 승부라니? 언제 겨뤄 본 적이 있단 말이오?”

“예. 그때 승부를 가리지 못해 나선 겁니다.”

좌중의 놀란 음성이 여기저기 터져 나왔다. 남궁사현은 신룡 중에서도 최고로 꼽히는 셋 중 하나.

“뭐야! 연사구가 그 정도였어?”

“그러게. 이제 갓 초절정인 줄 알았는데.”

“야! 이거 둘이 싸우면 볼만하겠는데.”

“근데 연사구가 받아들일까? 이런 공개 비무면 남궁사현이 작심하고 할 텐데.”

“큭큭! 그래도 빼긴 어렵지. 그랬다간 개망신인데.”

“아니지. 예정된 비무가 있으니 핑곗거리는 있지 않나.”

“아무튼 일이 재밌게 됐어. 크크!”

연사구의 성난 전음이 남궁사현을 향했다.

-너 뭔 속셈이야?

-그때 약속하지 않았나. 다음에 만나면 결판내기로.

-그 얘기가 아니잖아! 나중에 우리끼리 하면 되는데 여기서 왜 나섰냐고? ……혹시 위에서 시킨 거야?

-아니! 가문 사람들 표정 안 보이나? 아무 얘기도 안 하고 나왔다.

거짓이 아니다. 남궁의 장로, 소가주 남궁명은 물론 모두의 놀란 표정이 알려 주니까. 모를 땐 묻는 게 답이다.

-그럼 뭐야?

-끌고 싶지 않았을 뿐, 다른 이유는 없다.

연사구의 입가에 비릿한 웃음이 짙어졌다. 예전 싸움 이후 남궁사현에 대해 조사한 게 좀 있다. 언제 붙을지 모를 위험한 상대였으니까.

-이 새끼가 어디서 구라를 까! 요즘 가문에서 숨죽이고 살면서 일절 티도 안 내던 놈이 갑자기 이러는 게 나 때문이라고? 어디서 씨알도 안 먹힐 소릴 나불대! 너 여기가 어떤 자린 줄 알지? 솔직히 까! 아니면 거절이야.

-네놈이 이기면 더 도움 될 텐데, 자신 없나?

-보면 몰라? 우리 목적은 이미 달성했어. 긁을 거면 좀 괜찮은 걸 찾아보든가.

남궁사현은 에둘러 속내를 털어놨다.

-떨쳐 버리고 싶은 게 있다.

-그게 뭔데?

-여기까지! 안 할 거면 관두고.

-……?

연사구도 촉이 오는 게 있긴 했다.

-진 조장 일 같긴 한데 이상하단 말이지. 걱정돼서 나선 거면 비무를 말리지, 왜 나랑? ……둘 사이가 틀어졌나?

남궁사현의 깊어진 눈엔 차디찬 한기가 흘렀다. 굳은 결심 하나가 부른 의지의 표현.

‘이젠 서연이에 대한 감정을 끊어 낸다. 완전히 떨쳐 버린다.’

청해에서 아버지 남궁천우를 만난 이후, 수많은 번뇌와 고민, 갈등,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욕망에 휩싸였었다. 앞으로 벌어질 아버지와 가문의 갈등. 또 최고의 무인, 최강의 세력을 만들고 싶은 아버지의 꿈.

그 사이에서 남궁의 무인으로, 아버지의 아들로서, 또 자신 스스로 어찌 살아가야 할지. 걱정과 욕심이 혼재된 상황이라 답을 다 내리진 못했지만 한 가지는 명확했다. 아버지 남궁천우가 했던 것처럼.

‘강해지는 수밖에 없다. 그래야 가문도 아버지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내 길을 간다. 아직 어떤 길일지 모르지만 그건 가면서 차차 정해도 될 일.’

그러자면 독해지는 게 우선. 가문에서 세력을 만들고, 때론 아버지와 거래도 해야 한다. 그 길을 가자면 할 일, 못 할 일 가려선 안 된다. 한데 그 결심마다 마음을 약하게 하는 훼방꾼이 있다. 내 여인으로 만들 생각은 포기했기에 잊어버리고자 했지만, 아직도 가슴 속을 아리게 하는 여인.

그래서 나섰다. 그녀를 도우려는 게 아니라, 이 자릴 빌어 완전히 정리하려고. 위험해지건 말건 무관심해질 수 있는 자신을 확인하려고. 거기에 자존심을 상하게 한 놈의 응징까지.

한편 연사구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게 뭔지 아니까.

‘은월청요검을 증명하자면 이놈만 한 상대도 없지. 뭐 깨지면 어쩔 수 없고.’

그때 이후 늘어난 실력도 결심을 부추겼다. 좌중을 향해 크게 소리 높였다.

“그렇지 않아도 남궁의 검을 다시 보고 싶었는데, 하겠습니다.”

곧바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역시! 화끈하구먼.”

“그럼 흑룡 비무가 끝나고 바로 하면 되겠군.”

“야! 이거 볼만하겠는데.”

잠시 후.

예정된 첫 비무자 둘이 단상에 올라오자 수군거리는 소리가 연이었다. 승패에 대한 의견은 거의 없었다. 객관적인 실력 차가 확연하니까. 대신 다른 탄성이 여기저기 터져 나왔다.

“허! 저런 미인이라니!”

“거봐! 내 말이 맞지?”

“천상의 미모 어쩌고 할 때 믿지 않았거늘!”

화려한 색감 하나 없는 수수한 옥색 무복, 상대를 향한 깊은 눈빛과 선홍빛으로 약간 상기된 볼, 굳게 다물린 진홍 입술이 또 다른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허! 정말 기품 있는 미모야. 단아한 품격이 느껴지는구먼.”

“그러게. 화려함보다는 봄날 목련 같은 은은한 향기가 있어.”

아직 검을 뽑지 않은 지금, 좌중의 눈에 무인은 없었다.

“이보게, 흑룡! 제발 부탁이니 적당히 하게.”

“상처는 절대 안 되네.”

“심하게 다치면 자네 발 뻗고 자기 힘들 걸세.”

내기 또한 승패보다 초식 수에 많이 걸렸다.

“얼마나 버틸까?”

“그래도 초절정인데 오십 초는 가겠지.”

“난 삼십 초에 걸었는데.”

“나도.”

그때 시작을 알리자마자 여인의 기세가 돌변했다. 휘몰아치는 진기가 검 면에 가득 떨림을 안기는 순간, 들녘의 한 송이 꽃처럼 유유히 서 있던 여인은 대기를 울리는 파공성과 함께 사라졌다. 그 자리엔 단상을 박찬 둔중한 울림만이 굳센 무인의 의지를 알렸다.

타앗! 파팟!

흑룡 양사준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짓쳐 드는 속도와 뿜어진 채 하늘거리는 검기의 기운이 알린다.

‘처음부터 전력으로 달려들어?’

비무가 확정된 상대에 대해 알아보는 건 무인의 기본. 한데 진서연의 천수비화검은 빠름에 환을 섞어 상대와 일정 거리를 두고 공격하는 게 일절이라 했다.

한데 상대의 첫 선택은 예상을 벗어났다.

위이잉!

양사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의아할 뿐 꺼릴 게 아니다.

‘시작부터 강공이라! 좋지! 내 장기기도 하니까.’

넘실넘실 요동치는 도기와 함께 일보의 진각이 단상을 또 울렸다.

파팟!

쇄도하는 도격이 공기를 가르자 채찍과도 같은 굉음이 울렸다.

쇄애액!

서로 상대를 가늠하는 부딪침. 강렬한 소리와 함께 도기와 검기의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 나갔다.

카앙! 카아아앙!

진서연은 검격이 막힌 반동을 이용해 반보 물러났다. 예상은 했지만 검을 타고 내려오는 충격이 무릎까지 전해진다. 입이 굳게 다물어졌다.

‘강하다.’

양사준이 흑룡에 오른 건 이미 삼 년 전. 내력에 있어선 역시 한 수 위다. 하지만 이미 예상의 범주에 있던 사실.

진서연은 저린 손목을 털어 내고는 검을 다시 부여잡았다.

‘이 정도면 할 만해. 계획대로 계속 강공으로 간다.’

양사준의 역류회원도는 거친 공방 속에서 더 힘을 발하는 것으로 알려진 도법. 역태극 또한 태극이 근간이라 상대의 힘을 역이용하는 묘리가 초식 여러 곳에 담겼기에 가능한 일.

이런 도법에 내력도 앞선 자라면, 맞닥뜨리는 강공 대신 천수비화검의 장점을 살린 원거리 공격이 적절한 선택이다. 한데 고심하던 서연은 결국 초반엔 강공을 선택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

‘지지 않으려면 장점을 살리는 게 맞다. 하지만 이기려면 적의 강점에서 약점을 찾지 않고는 어려워.’

비무를 결정한 이후 어떻게 싸울지 수없이 고민했다. 이런 비무도 목숨을 건 싸움이지만, 상대를 죽여야 하는 생사투도, 원한이나 은원 때문에 벌어진 비무도 아니다.

오직 상대와의 우열을 가리기 위한 자리. 서연에게 놓인 선택은 비기거나 이기는 전략, 두 가지.

상대는 객관적 실력은 물론 강호의 명성 또한 비교가 안 되는 자. 이런 자와 비기기만 해도 세인들은 자신의 승리로 쳐준다.

어떤 길을 선택할까 고심하던 서연은 어느 순간, 허탈한 실소가 가득 밀려왔다.

‘내가 언제부터 지는 걸 두려워했지?’

얼마 고민하기도 전에 답을 찾았다. 무인의 자존심과 투기, 이기고 싶은 열망 대신 부지불식간에 명예와 세인들의 시선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다.

문득 소검후를 포기한다고 했을 때 검후 능여청이 해 준 말이 절절히 떠올랐다.

-흘흘! 그것도 괜찮지. 스스로 하나를 놓으면 하나를 얻는 법이니. 또 소검후란 자리를 털어 버렸으니 넌 커다란 벽 하나를 덜어 낸 셈이고.

-……벽이라 하시면?

-남들의 시선 말이다. 경지가 올라갈수록 그게 무인의 발목을 잡는 일이 허다하지. 나 또한 많이 고생했느니라.

-예? 검후께서도요?

-지킬 게 많으면 그리되는 법이야. 너 또한 곧 그 벽을 만나게 될 게다. 물론 너라면 잘 이겨 내리라 믿는다.

그땐 절감하지 못했던 말인데, 이제 초절정에 올라 세인의 관심을 받게 되자 그 말씀이 바로 뼛속 깊이 파고들었다.

그래서 내린 결정.

‘이길 각오로 한다. 설사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 마음 다해 단숨에 기세를 올려 검을 쭉 찔러 갔다.

슈우욱!

양사준의 의아함이 짙어졌다.

‘또 정면 대결? 무슨 생각이지?’

하지만 궁금할 뿐이다. 상대해 주면, 확실한 차이를 보여 주면 그만이다. 몸 가득 끌어올린 내력이 대해를 흐르듯 몸속을 헤집었다. 거침없이 흐르던 힘이 폭풍 같은 기세로 뿜어져 나왔다. 그래도 방심은 금물. 누구나 감춰 둔 한 수는 있기 마련이니까. 예상치 못한 변화를 주시하고는 벼락같이 쇄도했다.

슈우욱!

대기를 가르는 바람 소리와 함께 다시 도와 검이 맞부딪쳤다.

콰쾅! 카캉!

부서진 파편이 사방으로 흩날릴 때, 양사준의 도기가 비산하는 검기 사이를 뚫고 들었다.

쉬이익!

진서연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각오는 했지만, 상대의 힘에 기선을 제압당한 꼴.

‘그래도 물러나지 않아.’

내력을 있는 대로 끌어올려 앞으로 짓쳐 들었다. 검 면을 이용해 도격을 흘려 내고 다음 연환 공격을 펼칠 작정. 목표를 정한 검격이 매섭고 날카롭게 번득였다.

슈우욱!

양사준의 도격 또한 물러섬 없이 대기를 갈랐다.

쇄애액!

거센 칼날의 부딪침에 귀청을 찢는 폭음이 울렸다. 시퍼런 기운이 사방으로 흩뿌려져 몰아치는 바람처럼 사방을 갈랐다.

파파팍! 화라락!

충격에 잠시 밀렸던 진서연의 발끝이 다시 앞으로 나섰다. 찌르던 검을 베기로 전환해 어깨를 노리고 쏘아 들었다. 웅혼함을 실은 도 또한 하늘을 베는 칼질로 짓쳐 들었다.

쾅! 콰앙!

불꽃이 튀고 서슬 퍼런 칼바람이 연신 단상에 휘몰아쳤다.

휘이익! 쇄애액! 콰쾅!

긴박한 일진일퇴의 공방이 계속될 무렵, 양사준은 갈수록 의아해졌다. 한두 번 강공은 이해하겠는데.

‘왜 장점을 버리고 계속 이러지?’

선명한 도기가 진서연의 몸을 스치길 수십 차례. 찢어진 무복 자락도 서서히 그 수를 늘려 가는데도, 상대의 집요한 눈은 물러서지 않을 것임을 알린다. 그렇다고 기선을 제압한 것도 아니고 그저 버틸 뿐인데.

연이어 터진 섬광에 공간이 일그러지고, 베인 옷깃과 잘린 머리카락도 그 수를 늘려 갔다. 물러섬 없는 공방은 점점 더 빠르고 격렬하게 이어졌다.

그렇게 수십 초가 더 지나갈 무렵, 양사준은 불현듯 깨달았다. 무수한 검영에 깃든 여인의 의지가 알렸다.

‘이 여자, 죽자고 달려드는 거야. 날 이기려고.’

원한 관계도 아니고 둘 다 연사구를 도우려고 시작된 비무. 말은 격하게 했지만, 그저 화려한 싸움만 주야장천 보여 주다가 적당한 때에 우열만 가릴 생각이었는데.

한순간 방심에 목숨이 날아갈 상황을 자처한다. 이기기 위해서. 자신의 강점 속에서 약점을 찾아내려고. 그 투혼을 깨닫는 순간 전율과 쾌감이 짜릿하게 밀려들었다.

핏기가 살짝 보이는 여인의 꽉 다문 입술과 혈선이 그어진 살갗의 핏방울이 눈에 아롱졌다.

순간 양사준의 눈가에 더할 수 없는 열기가 서렸다. 여인이 피워 낸 검 끝의 일렁임이 무인의 혼을 부추겼다.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미소가 입가를 스쳐 갔다.

‘그걸 원한다면! 해 주지.’

이제 눈앞엔 쓰러트려야 할 무인만이 존재했다. 진정한 무인으로 상대해 주길 원하는 이. 그런 이에게 다른 건 필요 없다.

투지와 투혼이 담긴 도를 맘껏 뿌려 주면 된다.

절로 끓어오르는 열기가 내려치는 도에 가득 담겼다.

쇄애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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