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하오문 지부 앞 광장.
호남 지부장 연대광이 단상에 올랐다.
서서히 좌중을 훑어보는 시선엔 오만 가지 감정이 공존했다. 흥분과 기대, 설렘은 물론 불안과 두려움까지. 수천 명이 모였고 장사와 인근의 주요 무가도 빠짐없이 참석했다.
‘비무가 묘책이었어.’
하오문 행사가 아닌 비무 참관이 명분이라 무가들도 주저할 게 없기에 벌어진 일. 물론 가주급 등 상징적인 존재들은 빠졌지만, 구색은 충분히 갖춘 셈이다.
긴 숨을 뽑아낸 연대광의 허리가 깊게 숙여졌다.
“이런 누추한 곳을 찾아 주셔서 뭐라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소이다.”
좌중의 고성이 터져 나왔다.
“거 빤한 얘기는 잽싸게 넘어갑시다.”
“그럽시다. 여기 왜 왔는지 다 아실 텐데.”
“하오문 일이야 소문도 다 났으니 짧게 해도 될 게요.”
연대광은 가볍게 미소 지었다. 자신도 바라던 바.
“드릴 말씀도 사실 별로 없소이다. 빨리 끝내고 비무로 넘어가지요.”
“거 시원해서 좋구려.”
“저희가 공식적으로 세상에 알릴 건 두 가지입니다. 우선 은월청요검을 찾은 건 다 아실 겁니다.”
“진본이 맞긴 한 게요? 크흠! 워낙 말들이 많아서…….”
“본문의 이름을 걸고 말씀드리죠.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의 판단을 강요하진 않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요?”
“지금 보여 드릴 경지가 초절정밖에 안 되는데, 어쩌겠습니까? 무턱대고 믿어 달라 할 수도 없고. 다 실력이 안 되는 저흴 탓할 일이죠.”
“크크! 어째 말에 뼈가 있는 거 같구려.”
“사실이니까요. 그리고 두 번째는 은월단이란 무력 조직을 만드는 건데…….”
그때 무림맹 호남 지부장 호윤광이 앞으로 나섰다.
“크흠! 그 건에 대해선 무림맹의 공식 입장이 내려왔소이다. 먼저 듣고 말씀하시구려.”
“무림맹이면 당연히 그래야지요. 말씀해 주시지요.”
호윤광은 사도련 호남 지부장 천기풍에게 전음을 보냈다. 이미 며칠 전 같이 나서기로 합의한 상태.
-이제 그쪽 차례외다.
-아니! 우린 듣기만 하겠소.
-응? 같이하기로 해 놓고서 이제 와서 무슨 소리요?
-어제 지시가 내려왔소. 얘길 듣고 보고부터 하라고.
-……허! 그것참!
-이번 일은 미안하오. 내 나중에 술 한잔 사리다.
사도련 지부장 천기풍의 입가에 야릇한 미소가 스쳐 갔다.
‘크크! 혼자 망신 좀 당해 보시게.’
사실 사도련에서 온 지시는 없다. 어제 비천문에 사전 통보하러 갔다가 들은 말 때문에 스스로 뺀 것이지.
무림맹 지부장 호윤광은 짐짓 헛기침을 흘렸다.
“크흠! 본 맹은 하오문이 과거의 약속을 잊지 않길 바라오. 다시는 강호 단일 조직으로 가지 않겠다는 맹서(盟誓)를.”
“당연하지요. 어찌 그걸 잊겠습니까?”
“한데 인원의 적고 많음을 떠나, 은월단은 전 지부에서 무인을 뽑아 단일 지휘 체계로 간다고 들었는데 맞소?”
“그렇습니다.”
“그럼 강호의 모든 이들이 귀문을 의심할 수밖에 없소. 해서 본 맹은 당장 이 일을 유보하길 바라오. 물론 하지 말라는 게 아니라 우리와 논의한 후에…….”
“지금 의심과 논의라 하셨소이까?”
“크흠! 쓸데없는 말싸움은 피하는 게 좋지 않겠소? 보는 눈도 많은데.”
연대광은 티 나게 눈을 멀뚱멀뚱 떴다. 이 말을 하고 싶어 입이 얼마나 근질근질했는지 모른다.
“아니! 고작 상단 호위대 기백을 뽑는 그런 일도 무림맹과 논의하란 말씀이오?”
호윤광의 눈이 동그래졌다.
“……바, 방금 뭐라 하셨소? 상단 호위대?”
“그렇소이다. 은월단은 강호가 아닌 상단 호위를 위해 만들 조직이외다.”
“……?”
이후 연대광은 좌중을 향해 거침없이 말을 쏟아 냈다. 아인(牙人) 기반 상거래 정보 사업까지 세세히. 말은 차분했지만, 그 속엔 평생의 한과 울분, 통쾌함이 가득 담길 수밖에 없었다.
열변을 토하는 아버지를 보던 연사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아주 신나셨어. 웃음 참느라 어쩔 줄 모르시네. 크크!
-문도들도 그러네. 하긴 다들 놀랐겠지.
지역 대표 외엔 모르고 있던 터라 다들 흥분에 들떠 환호성을 질러 댔다.
“야! 그런 사업이 있을 줄이야!”
“큭큭! 그뿐이야. 상단 호위대인데 시비도 못 걸지. 이거 완전 대박인데.”
“가만! 이러면 은월단 수가 많아도 상관없잖아?”
“그러지. 잘하면 나도 들어갈 수 있겠어.”
정, 사 무가에선 온 이들도 술렁거렸다.
“허! 저런 속내가 있을 줄이야!”
“어쩐지! 대책 없이 저럴 리 없다 했더니.”
“어쨌든 강호엔 일체 안 나선다니 걱정할 건 없겠어.”
“워낙 무가 여기저기에 얻어터지니까 아예 상거래 쪽으로 방향을 잡았구먼.”
“근데 그 사업 괜찮은 거야?”
“하오문이야 기반이 있으니 해 볼 만하겠지.”
“하긴!”
무림맹 지부장 호윤광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사도련 지부장을 째려볼 수밖에 없다. 느긋한 표정이 말해 주니까.
‘미리 알고 있었어. 후! 나만 이게 무슨 망신인가.’
좌중의 소란이 잦아들자 연대광은 마지막 말을 꺼내 들었다.
“크흠! 이제 보여 드릴 거 하나만 남았소이다.”
“어떤?”
“보시고 나서 말씀드리지요.”
“……?”
잠시 후, 연사구가 단상에 올라왔다. 사방에 정중히 예를 갖추고는 서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좌중이 수군거렸다.
“뭐야? 은월청요검을 보여 주려나?”
“혼자 올라왔으니 그렇겠지.”
“좀 있다 비무에서 볼 텐데 뭐 하러 저러지?”
“보면 알겠지.”
그 어느 때보다 진중함이 서린 눈빛, 연사구는 좌중의 눈을 차례차례 마주하고는 불꽃같은 정광을 여실히 드러냈다. 그 스스로의 꿈을 풀어 낼 자리. 단 한 치의 소홀함도 있어선 안 된다.
뜨겁게 달궈진 숨이 길게 뿜어진 후, 일보의 진각이 연무장 위를 쓸어 갔다.
사사삭!
움직임에 옷자락이 흔들리는 순간,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검 끝이 허공을 갈라 갔다.
쉬이익! 쉭! 쉭!
물 흐르듯 유려함 속에 간결한 초식이 하나둘 풀어 헤쳐졌다. 햇빛에 반짝이는 검날이 그린 궤적은 좌중 모두에 눈에 선명히 그 투로를 알렸다.
내력을 올린 기미도, 파괴적인 검력도, 섬전 같은 빠름도, 대기를 울리는 경파도 없다. 그저 찌르고 치고 막고 휘두르고 후려치고 비껴가는 검의 모든 공격법이 단순히 펼쳐질 뿐.
좌중이 수군거렸다.
“저게 은월청요검? 근데 어째 영…….”
“그러게. 기본기는 탄탄해 보이는데 절대검공으로 보기엔 좀…….”
“초반이잖아. 더 보자고.”
입문용 은월십이검(隱月十二劍)의 기본 검식이 다 펼쳐진 후, 같은 검식이 다시 반복됐다.
쉬익! 슈욱!
한데 달라졌다. 일절 속도의 변화 없이 간결하게 펼쳤던 전과 달리, 몸은 물론 검에도 빠름과 느림이 혼재했다. 부드러움 속에 쾌속함이, 우직함 속에 춤추듯 유려함이 뒤섞였다.
좌중의 수군거림은 계속됐다.
“흠! 검로에 다변을 싣지 않고 속도에 변을 심었군.”
“쾌과 중을 담은 검일세.”
“보기는 쉬워도 저 속도를 조율하자면 고생깨나 하겠어.”
“응? 절정인 자네가 저 정도 검식이 어렵다고?”
“뭔 소리야! 딱 봐도 기본 검식인데. 애들 수준에서 하는 소리지.”
“엥! 그런 검식이면 지금 왜 하는 거야?”
“그러게.”
세 번째로 검식이 되풀이됐다. 이번엔 확연히 달라졌다.
쉬익! 화라락! 휘익!
비트는 회전과 검 끝의 변화가 가미되자 이제껏 일정했던 검로가 변하기 시작했다. 종과 횡으로 긋고 찌르다가 어느 순간 이전에 없던 검로처럼 변화가 확연해졌다.
휘리릭! 슈욱!
팔짱 끼고 유유히 지켜보던 이들의 시선이 서서히 날카로워졌다. 네 번째 반복될 즈음엔 미세한 검풍이 내력이 실렸음을 알렸다.
다섯 번째 검기 두른 칼날이 허공에 잔상을 남기고 날카로운 파공성이 좌중의 귓전을 울릴 즈음, 자그마한 경탄성이 좌중에 흘렀다. 대부분 초절정 이상의 고수들.
“허! 기본식에 응용 방안을 정말 많이 담았어.”
“그뿐인가. 보통 쾌, 중, 환을 섞어 가르칠 때 초식 단위로 수련시키는데, 저건 거기에 열두 초식 전부를 연환으로 펼치면서 단계를 올릴 수 있게 했어.”
“그러게 말일세. 그 정도 기초 검식은 그리 흔하지 않은데.”
“저리 기본기가 탄탄하니 절대검공이 된 걸지도.”
“하면 이제부터가 진짜겠지.”
“지켜보세나.”
한데 선명한 검기를 뽑아내던 초식이 마무리되자, 연사구는 가만히 검을 거둬들였다. 움직임을 멈춘 발은 시연이 끝났음을 알렸다.
사라락! 척!
“응? 뭐야? 이게 끝이야?”
“저게 절대검공이라고?”
“뭔 소리! 말도 안 되지!”
그때 단상에 올라온 연대광의 목소리가 사방을 쩌렁쩌렁 울렸다.
“방금 보신 건 은월청요검이 아니오이다.”
“응? 그럼 저건 뭐고 왜 한 거요?”
“천 년 전 태상이신 도천께선 은월청요검이 비전이라 모두에게 전수하지 못함을 아쉬워하셨습니다. 해서 입문용 은월십이검과 다음 단계인 청요단월검(靑雲斷月劍)을 전하셨는데 최근에 하늘이 도와 찾게 됐습니다.”
“헉! 그럼 저게?”
연대광은 가슴을 쭉 내밀고는 불꽃같은 정광을 보였다. 그래도 가슴은 쿵쾅거리고 눈가는 파르르 떨려 왔다. 문도들에게 알려 줄 이 순간을 얼마나 고대했던가.
“예. 보신 건 입문용 은월십이검입니다. 앞으로 하오문도 누구나 일정 자격만 갖추면 배울 검이기도 하지요.”
순간 눈이 화등잔만 해진 문도 하나가 소리쳤다.
“무, 문도면 다 가르쳐 준단 말입니까?”
“삼 년 이상 된 문도 누구나 원하면 배울 수 있소. 단, 조건이 하나 있소.”
“……어떤?”
“이걸 배운 자는 자의로 문도를 그만둘 수 없소. 이유는 알 게요. 절대검공 은월청요검을 익히기 위한 입문공이라 유출을 막아야 하니 말이오.”
다른 문파에선 너무나도 당연한 일. 그동안 하오문엔 자체 무공이 없어 탈퇴가 있었을 뿐. 결국 제한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저, 정말 그것뿐입니까?”
“이미 대표 회의에서 가결된 사안이라오. 난 알릴 뿐이외다.”
순간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와! 그럼 나도 배울 수 있는 거잖아!”
“야! 내가 그런 무공을 배울 수 있다고! 이게 꿈이야? 생시야?”
“정말 저걸 배우면 절정, 초절정, 아니 화경도 가 볼 수 있다 이거지?”
“인마! 네 실력에 무슨! 중급까지만 노려 봐!”
“그게 어디야! 그것만 제대로 익혀도 초절정인데.”
“야! 당장 내 동생 데리고 와야겠다. 그 자식 무공 배우고 싶어서 난리였는데.”
“하! 절대무공이라니! 아직도 믿어지지가 않아.”
연대광의 눈가에 촉촉한 물기가 올라왔다. 절로 떠오른 미소가 시원한 바람을 불러 가슴을 일렁였다. 얼마나 바랐던 순간인지 모른다. 평생의 염원, 꿈, 열망이었던 일.
그 실체를 만들고 문도들에게 알린 오늘, 그 벅찬 헐떡거림이 다시 가슴을 울렁이게 만든다.
하지만 연대광은 고개를 휘휘 내저었다. 문도들만 있다면 밤새라도 이 기쁨과 환희를 만끽하겠지만, 자축의 모습이 길어지면 오히려 반감을 만든다.
‘이럴 때가 아니지.’
수천의 군중이 원하는 건 따로 있으니까.
“오래 기다리셨소. 단상을 정리하는 대로 바로 비무를 시작하겠소이다.”
그때 단상 아래에서 내력 실린 커다란 음성이 울렸다.
“비무에 앞서 제안할 게 있소이다.”
연대광의 눈이 가늘어졌다. 일이 잘 마무리될 시점에 나타난 자. 경계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그대는 누구신가?”
“남궁사현이라 합니다.”
“……?”
순간 모두의 놀란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정파의 신룡 열 명 중 수위를 다투는 자.
그런 자가 흑룡의 비무에 난데없이 나서다니.
모두의 눈빛에 의아함이 가득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