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장내가 정리되고 무윤의 설명이 대략 끝날 즈음, 전 가주 양호승의 고개가 끄덕거려졌다.
“그런 사정이 있었구먼.”
“어쨌든 감춘 게 됐으니 그 점은 죄송합니다.”
“허허! 아닐세. 저의가 있는 것도 아닌데 못 알아본 날 탓할 일이지, 자네가 미안할 건 없네.”
화경인 게 알려진 이상 무윤이 털어놓을 게 여럿 있다. 경지는 스승이 내력을 전해서 그런 것으로, 방연극의 의심을 불식시키기 위해 소문 조작이 의심돼서 가상의 도인을 만든 것까지.
한편 멀찍이 떨어진 두 사람은 연신 떠들어 댔다.
양사준의 손이 연사구의 등짝을 갈겨 댔다. 벌써 여러 대째.
쫙!
양사준은 어이없는 실소가 연신 흘렀다.
“야! 예전에 잔머리 잘 굴리더니 이젠 머리가 돌이 됐냐? 눈치 딱 보고 달려왔어야지, 설설 기어 와?”
“아우! 왜 나한테 그래요! 싸운 놈, 아니 분들이 잘못한 거지!”
“빨리 와서 알렸으면 저 지경은 안됐지.”
“에이! 돈 많은 가문에서 왜이래요! 정원 하나 박살 난 거 가지고.”
“이게 정말! 야! 여기 수백 년 가꿔 온 데라고! 이런 걸 언제 다시 만들어!”
“아! 그만 좀 해요! 정작 따질 건 싸운 사람들이잖아요! 그쪽 보고 물어내라고 하세요!”
“우리 사부 돈 없어.”
“……저놈은 많아요.”
“네가 받아다 주든가.”
“…….”
한데 떠들어 대는 사이사이 남모르게 둘의 전음이 한참 동안 이어졌다. 양사준의 궁금증이 거의 풀릴 정도로.
양사준의 멍해진 눈은 한동안 무윤을 힐끔거렸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지만.
‘내력을 받았다고 화경이 뚝딱 오를 경지는 아니지.’
무인으로서 질투와 부러운 마음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이내 머리를 휘휘 내저었다.
‘하늘만 쳐다보다간 목 부러진다.’
칠 년의 강호 여정 중에 가진 여러 비무와 싸움, 개중엔 진 것도 부지기수. 나보다 잘난 놈 때문에 속 쓰린 건, 이제 술 한 잔에 떨쳐 버릴 정도는 된다. 다만 저놈은 아주 심하니까.
‘오늘은 왕창 퍼야 되겠어.’
다만 그 전에 확인할 게 있다. 약에 중독된 숙부 양중건.
‘돌아가신 줄 알았는데.’
가문 모두가 자신을 멸시하고 천대할 때, 언제나 따스한 눈빛과 보살핌을 주던 이. 숙부는 고아 출신이라 혈육도 아닌데, 오히려 가족으로 느껴졌던 유일한 분이다.
문득 숙부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왜 나한테 잘해 주냐고 물었을 때 그가 한 말.
-나도 외톨이라 어릴 때 너처럼 그랬다. 근데 네 눈빛, 그게 그때 나와 똑같더구나.
-그래서요?
숙부는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았다.
-그냥 눈길이 가는데 어쩌라고? 앞으론 모른 척하랴?
-……!
그런 숙부를 저 지경을 만든 자들. 분노가 용암처럼 들끓었다.
‘절대 가만두지 않는다.’
그곳이 어딘지 짐작, 아니 확신은 든다. 한데 연사구와 대화 중에 뭔가 더 아는 눈치가 느껴진다. 어릴 때 같이 지낸 세월이 알려 준 촉. 그래도 에둘러 물어야 할 때.
-너도 서문가 짓이라 생각하지?
-뭐, 그거야…….
-아는 거 있음 털어놔 봐. 나만 알고 있을게.
연사구도 알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다. 하오문을 위해서도, 양사준을 생각해서도.
‘안 그러면 혼자 파헤칠 형님이지.’
알리되 출처만 안 밝히면 된다.
-공야의숙이 마공을 연구한 건 사실이에요. 그들이 연구한 약하고 비슷한 것도 맞고. 근데 무턱대고 달려들면 안 되는 일인 거 알죠?
-……안다.
-할 거면 철저히 준비하고 해요.
-내가 서문가를 모르겠어?
-그건 아는데 형님 성질도 아니까 하는 소리잖아요!
-이게 혼자 지랄한다고 될 일이냐? 하루 이틀 조사해서 될 것도 아니고. 그럴 일 없다. 가문도 작정한 모양이니까 이번엔 같이해야지.
-……!
전 가주 양호승의 시선이 싸운 두 사람을 번갈았다.
“이제 의심은 다 풀렸으니 됐고. 두 사람 얘기가 가볍게 안 들리는구먼. 도인을 가장한 마인에다, 천마 소문을 조작하는 이들이라니.”
방연극은 짐짓 헛기침을 흘렸다.
“크흠! 자네도 알겠지만 내 역류회원도는 역태극의 이치를 품은 터라 웬만한 도가무공은 딱 보면 알지.”
“시비 안 붙은 도가 문파도 거의 없고.”
“그거야 궁금하니 찔러본 게지. 어쨌든 그런 나도 다 처음 보는 무공이었네. 도기(道氣) 또한 무당 말코 놈들 못지않았고.”
“허! 그것참! 극마에 이른 마인이 도가의 깨달음까지 얻은 경우야 간혹 있었지. 한데 절정, 초절정 마인 여럿이 그 정도 도기를 뿌리다니 당최 알 수가 없구먼.”
“정상적인 방법은 아닐 게야. 도기를 얻자면 마공 수련보다 몇 배 더 시간을 쏟아야 하고, 또 마기와 도기는 상극 아닌가.”
“그럼 자네 생각은?”
“당초에도 선단(仙丹) 같은 약이라 생각했는데 여기 소문을 들어 보니 아무래도 맞는 거 같으이. 한데 놈들이 혈교 같지는 않았어. 나중에 혈교 주변을 살폈는데 전혀 못 봤거든.”
한편 방연극이 얘길 시작할 때부터 무윤의 눈은 더 할 수 없이 깊어져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얘기니까.
‘동굴에서 본 자들과 연관이 있다.’
악양예관 동굴에서 싸웠던 자들의 수장. 마기만 없었을 뿐, 그 자에게서 느낀 기운이 방연극의 설명과 거의 같다.
‘도기 같으면서도 뭔가 이질감이 느껴졌었지.’
또 다른 이유.
‘그들도 청해 쪽. 게다가 천마교에 침투할 정도로 큰 세력에 중원 전체를 노리는 것도 같고.’
완전한 확신은 아니지만 감은 그렇다고 알린다.
‘설사 같은 곳이 아니더라도 무조건 연관됐어.’
방연극 덕에 놈들의 꼬리 하나는 찾았다. 하지만 어디 있는지, 누구인지 전혀 모르는 상황. 또 저들을 쫓는 것에서 교란하기로 작전을 바꾼 이상, 당장 가 볼 일은 없다.
또 대신 알아봐 줄 자가 옆에 있고.
‘방연극은 어차피 조사할 테니까, 정보 교류를 핑계로 엮으면 된다.’
그때 양호승의 시선이 무윤을 향했다.
“자넨 마단 기운도 파악해 봤으니 어찌 생각하나?”
이제 엮어야 할 때. 마침 선우가영에게 들은 게 떠올랐다.
“혈교에서 오랫동안 그런 선단을 연구하긴 했습니다.”
방연극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 소문이야 수없이 많았지만 확인된 건 없다. 한데 단언하는 투로 말하다니.
“자넨 확신하듯 말하는군. 이유가 있겠지?”
“우연히 죽기 직전인 혈교 의원을 만났는데 그때 상세히 들었습니다. 죽는 마당이라 그런지 술술 알려 주더군요.”
“그래? 혹 들려줄 수 있는가?”
“보안만 지켜 주신다면.”
“내 이름을 걸지.”
“알겠습니다.”
선우가영에게 들은 걸 간략히 전하고 대화가 오고 가길 한참, 무윤을 바라보는 방연극의 생각도 깊어졌다.
‘광기를 잡는 데 탁월한 기운을 가졌어. 게다가 은월청요검을 전한 이상 하오문은 이자에게 모든 정보를 제공할 테고. 무조건 같이할 자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이만 한 우군이 없다. 그러자면 상황부터 알리는 게 순서. 단 가장 중요한 건 빼야 한다. 무조건.
‘가령이가 정말 천살천음지체일지도 몰라. 그 가능성은 절대 알려선 안 돼.’
천살천음지체. 천살성과 천음지체를 동시에 타고난 여인을 말한다. 하늘이 내린 무의 체질, 천음지체에 인간의 의지와 상관없이 살육의 광기를 타고난 천살성이 더해진 여인.
이제껏 세상에 알려진 이도 단 둘뿐이다. 한 여인은 천마교의 소수마후로, 또 다른 이는 혈교의 혈수나찰로.
그 두 여인의 손에 죽어 간 중원의 무인은 수천 명. 오백 년이 넘었음에도 아직도 두려움과 공포, 그 자체로 남아 있는 존재들.
그 신체인 게 알려지면, 그날로 강호의 공적이 된다. 영원히.
문득 후회와 아쉬움이 밀려들었다.
‘유심히 살펴봤어야 했는데. 휴!’
천살의 광기는 어떤 계기가 있기 전까진 깨어나지 않는다. 죽음의 위협이나 그만 한 위기 상황이 아니면.
손녀가 천음지체인 건 오 년 전 우연히 알았다. 하지만 자신을 알리지도 않았고, 농사꾼으로 평범하게 사는 모습이 보기 좋아 고심하다 살피기만 했었다.
한데 가족이 몰살당한 정황을 알아보다 우연히 듣게 됐다. 무공이라곤 익히지도 않은 여인이 광기에 빠져 산적 수십을 찢어 죽였다는 걸.
그제야 천살천음지체을 떠올리게 됐고, 전력을 다해 찾으려 한 건데.
‘저들은 이제 알겠지. 설사 아니더라도 천음지체인데 분명 마공을 익히게 할 게고.’
그럼 희대의 마녀가 탄생하게 된다. 자신의 손녀가 그리된다.
‘절대! 그럴 순 없지.’
이제 적당히 알리고 협조를 구할 때.
“사실 내 동생의 후손 몇이 있었네. 그들은 날 모르지만 유일한 혈육이라 몰래 살펴 주고 있었지. 한데 삼 년 전에 가 보니 산적에게 다 죽고 손녀 아이는 다른 이들에게 잡혀갔더군.”
양호승이 조심스레 물었다.
“……자네 때문인가?”
“아니. 내 혈육인 건 세상에 나밖에 모르네. 외진 곳에서 농사짓고 살던 이들이라 돌봐 주는 것도 무탈한지 살피기만 했어. 또 나 때문에 잡아갔으면 벌써 무슨 연락이 있었겠지.”
“그렇겠군. 한데 농사꾼인 여아를 왜 잡아갔단 말인가?”
“후! 아무래도 천음지체 같네. 나도 몰랐네만 추적하다 보니 그런 거 같더군.”
“허! 저들이 그걸 알고 잡아간 게군.”
“그럴 걸세. 한데 마공을 익힌 놈들이 잡아갔으니 할 짓이야 빤하지. 해서 몇 년을 찾으러 돌아다닌 걸세.”
“……내가 도울 게 있겠나? 뭐든 말하게.”
방연극의 시선이 무윤을 향했다.
“자넨 조작한 놈들 때문이라도 하오문과 밀접하게 연락하겠지?”
“그래야죠. 혹 손녀분 소식 때문에?”
“그러네. 내가 하오문에 부탁하는 것보단 낫지 않겠나. 대신 나도 그 조작한 놈들 찾는 걸 돕지. 어떤가?”
“다른 것도 아니고 손녀 일인데 당연히 그래야죠. 알겠습니다.”
“고마우이.”
이후로도 계속된 논의는 늦게야 끝이 났다.
무윤이 떠나자 전 가주 양호승은 친구에게 물었다.
“어찌 보는가?”
“봤으면서 뭘 묻나.”
“세상이 시끄러워지겠군.”
“얼마 안 걸릴 게야.”
강호의 오랜 경험이 알린다. 어쨌든 출신이 정파인 자.
“너무 가까이는. ……안 좋겠지?”
“좋은 인연이면 됐네. 욕심은 화일세.”
“……!”
* * *
하오문으로 돌아오는 길.
제 발 저린 놈이 먼저 입을 열었다.
“참! 아까 진이 놈이 거짓말을 천연덕스럽게 잘하더라. 깜짝 놀랐지 뭐냐. 어떻게 했냐면…….”
“말 돌리는 거 보니까 미안하긴 한 모양이지?”
“뭐 그래도 일은 잘됐잖아. 그럼 된 거지.”
“야! 이 새끼야! 뒤질 뻔했다고!”
“지랄! 내가 못 본 줄 알아! 잘만 싸워 놓고서는 뭘!”
“하여간!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연사구는 말 돌릴 건수가 또 있다.
“참! 그 새끼들 동굴 놈들하고 한패 같지?”
“거의.”
“그럼 혈교 비밀 조직 아닐까? 청해에서 혈교 몰래 그 정도 세력을 쌓는 건 거의 불가능인데.”
“그럴 수도 있고, 아니면 협력 관계든가.”
“아무튼 그쪽 정보 좀 얻어 봐야겠네. 방 어르신 일도 있고.”
“티 안 나게 조심해. 그러다 너희 하오문……. 말 안 해도 알지?”
“하!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내 밥줄까지 가르치려 드네. 너 내가 호구로 보이냐?”
“아까는.”
“…….”
그때 지나가던 대로 주변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려왔다.
“뭐? 그럼 은월청요검이 가짜란 말이야? 그 도인도?”
“그런 얘기가 있더라고.”
“에이! 하오문 이름으로 세상에 알린 건데 설마…….”
“나도 설마 했지. 근데 들어 보니까 영 엉터리 같지도 않더라고.”
“뭔 소린데 그래?”
“그게 뭐냐면…….”
둘의 발걸음이 멈춰졌다.
천마라 불린 내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