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하후진이 일어나 가만히 고개 숙였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선은문 소문주님.”
악양에서 열흘 정도 같이 있었으니 누군지 안다. 또 어떤 자인지, 어떤 목적으로 내려왔는지도. 여기저기 떠드는 소리는 무인이 아니어도 다 들릴 판인데 모른 척이라니.
송각은 얼굴을 살짝 들이밀었다.
“미안하네만 난 자네 얼굴밖에 기억이 안 나는군. 분명 하후가 소가주 옆에서 몇 번 본 거 같은데.”
“맞습니다. 하후진이라 합니다.”
“그런가. 근데 듣자니 마인을 상대했다면서? 보통 실력이 아닌 모양이지?”
“전 옆에서 거들기만 했습니다.”
“그래도 웬만큼 하니 살아 돌아왔겠지. 참! 근데 자네 소가주는 이런 자네를 왜 소개도 안 했지? 이거 나중에 만나면 한 소리 해야겠군그래.”
하후진의 미소가 제 색을 발했다. 거기엔 송각에 대한 고마움도 약간은 섞였다.
‘일찍 털어 버리게 해 주네.’
시작이 반인데 그 반을 열어 준 고마움이다. 이젠 홀로서기를 보여야 할 때.
“제가 서자라 천기 형님께서 그리하셨습니다.”
송각의 목소리가 한층 커다래졌다.
“아! 자네 서자였나? 그래서 그런 게로군.”
“예.”
“좋은 형님을 뒀어. 자네가 힘들어할까 봐 감춰 준 거 아닌가. 요즘 세상에 안 그런 적자(嫡子)들이 허다한데 말이야.”
“예, 좋은 분이십니다. 한데 이유는 그게 아닙니다.”
“뭐라? 그럼?”
“제게 굴욕을 주려고 일부러 그러신 겁니다.”
순간 좌중 모두가 웅성거렸다.
“저게 뭔 소리야?”
“이 사람아, 뭔 소리긴. 대놓고 자기 형을 까는 소리지.”
“야! 그래도 소가주에다 형인데, 다들 있는 데서 저런단 말이야?”
“쌓인 게 많은 모양이지. 커다란 가문이야 빤하지 않나.”
“에이! 그래도 이건 아니지. 저 친구 다시 봐야겠어.”
송각은 짐짓 난처한 듯 미간을 구겨 댔다. 알아서 나대 주는데 티 나게 긁을 필요가 없다.
“이런! 내가 쓸데없는 얘길 꺼냈군그래.”
“아닙니다. 못할 얘기도 아닌데.”
“허! 그래도 다 있는 데서는 좀 그러지 않나?”
“예? 저를 위해 그런 건데 뭐가 어떻습니까?”
“……자네를 위해서?”
하후진은 좌중을 천천히 돌아봤다. 아주 천천히. 이제부터 하는 말은 그대들을 향한 것임을 알리기 위해. 그 눈가엔 이제껏 없던 열기가 가득 서렸다.
가슴 저 밑에서 복받친 한을 아주 담담히, 무심한 듯 흘려 냈다. 이런 의지를 드러내기 위해 필요한 거짓도 섞어 냈다.
“어릴 때 서자인 게 창피해 매번 숨어 다녔는데, 어느 날 형님이 다짜고짜 두들겨 패더군요. 그러고는 왜 맞는 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
“모른다고 했더니 이러더군요. 곪은 건 피고름을 흘려 내서 짜야 된다고, 아픔은 눈물 콧물 다 흘리고 털어 내야지 없어진다고. 감추고 덮고 외면하면 그 속에서 썩어 문드러진다고. 그래서 다 털어 낼 때까지 자기는 건드리겠다고. 자신도 겪어 보지 못한 아픔이라 낫는 법을 모르니 형으로서 할 수 있는 게 이거밖에 없다고. 가장 아프게 건드려 줄 테니 이겨 내 보라고. 그래서 그러신 겁니다.”
“…….”
순간 식당 안이 정적에 물들어갔다. 말뜻을 이해 못 할 자는 없으니까.
그때 한쪽 구석에 있던 자가 서서히 다가왔다.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고요함에 도드라졌다.
척! 처억!
무미건조한 듯 무심한 목소리가 흘렀다.
“그래서? 지금은 이겨 냈다고 떠들어 대는 건가?”
모두의 시선이 쏠리던 즈음, 누군가 격한 탄성을 터트렸다. 사파 신성 여덟 명을 이르는 말.
“헉! 흑룡!”
“마, 맞다. 비천문 양사준!”
“어! 사부 귀원일도 방연극하고 떠난 지 한참 됐었잖아?”
“그러게. 돌아온 모양이야.”
“아! 맞다. 저자도 서자 출신이지?”
“쉿! 이 사람! 큰일 날 소리.”
“흡!”
순간 당서하의 표정이 우뚝 굳어 버렸다.
‘방연극!’
급히 시선이 주변을 훑었다. 양사준이 문제가 아니다. 그의 스승 귀원일도 방연극은 화경의 절대자. 그것도 천하 십 대 고수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 자. 그도 여기에 있는지 파악하는 게 급선무.
양사준이 일어난 자리를 살피던 어느 순간, 직감이 뒤통수를 짜르르 울려 댔다. 지금은 아무도 없지만.
‘술잔이 두 개야. 나갔다는 얘긴데. ……그일까?’
속한 문파도 없으면서 혈혈단신 혼자의 힘으로 절대자가 된 입지전적인 무인. 정, 사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지만.
‘비천문 전 가주와 친구라고 했지. 그 인연으로 서자인 양사준을 제자로 들였다고 했고.’
하후진의 의아한 시선이 양사준을 향했다.
“누구신지?”
“귓구멍 막혔나? 다들 떠들어 줬잖아.”
“……흑룡?”
대답 대신 양사준의 시선은 귀찮은 날파리 보듯 송각을 향했다.
“할 말이 남았나?”
송각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광견(狂犬)! 이 새끼가 언제?’
장사의 광견이라 불리던 놈. 정, 사 가릴 것 없이 들이박고 난리를 쳐 대니 붙여진 별명. 어릴 때 놈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적이 있다. 물론 그 벌로 양사준 또한 다 보는 곳에서 그 아버지한테 배나 더 터졌지만. 어쨌든 서자인 데다 비천문에서도 내놓은 놈이라 언젠간 손보려고 했는데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그러다 풍문으로 들려온 소식.
‘방연극의 제자가 되고, 흑룡이 돼 버렸지.’
방연극 또한 강호의 광견이라 불린다. 배알이 뒤틀리면 정, 사, 마교 가릴 것 없이 들이박으니까.
‘그 사부의 그 제자.’
이젠 건드릴 수 있는 자가 아니다. 목숨을 걸지 않는 한 물러나는 게 최선.
“크흠! 뭐 잘 아는 사이도 아니라. 이만 가 보겠소.”
송각이 막 돌아서려는 찰나.
“참! 넌 그때도 나 보고 서자(庶子) 어쩌니 했었지?”
“그, 그건 다 옛날 일…….”
양사준의 느린 손이 서서히 송각의 어깨에 올라갔다.
척!
“그럼 다 옛날 일이지. 근데 생각해 보니 너무 미안하더라고. 늦었지만 사과할게.”
“아, 안 그래도…….”
“아냐. 천한 출신보고 천하다고 한 건데 내가 너무 심했지. 무릎 꿇고서 울고불고 싹싹 비는데도 두들겨 팼으니. 살려 달란 소리 수십 번은 들은 거 같은데. 참!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네. 그게 사람 새끼가 할 짓이야? 완전히 미친 개새끼지. 안 그래?”
“……!”
“참! 그때 거기도 세게 걷어찼었는데 괜찮아? 구실은 제대로 하지?”
양사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 얼굴이 새빨개진 자의 신형이 밖으로 내달렸다.
타다닥!
좌중엔 폭소가 터져 나왔다.
“큭큭큭! 저 달려가는 것 좀 보게. 얼마나 창피했으면.”
“그러게. 왜 나서 가지고는. 쯧쯧!”
“참내! 아무리 어려도 명색이 정파 소문주가 사파한테 살려 달라고 빌어? 싹수가 빤하다 빤해!”
한껏 웃어 젖힌 소리가 가라앉을 즈음, 양사준은 재차 물었다.
“이제 대답해 봐. 떠들어 댄 이유.”
하후진은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술을 뗐다. 처지만 비슷할 뿐 모든 게 달라 보이는 자. 의도는 몰라도 말 돌릴 생각은 없다.
“참을 일도, 이겨 낼 일도 아니더군요.”
“그래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그만큼 떠들어 댔을 뿐입니다.”
“큭! 그 새끼, 말은 뻔지르르하게 하네.”
하후진은 악다문 숨을 흘려 냈다. 이젠 터지더라도 쉽게 물러날 생각은 없다.
“초면인데 새끼라, 무례하시군요.”
양사준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나선 이유가 따로 있다.
“나 원래 그런 놈이야. 그러려니 해. 그보다 사구 놈은 어디 갔어?”
그때 답은 뒤쪽에서 흘렀다.
“오자마자 왜 엄한 애를 잡고 그래요? 그 성깔 참! 하나도 안 변했네.”
장난기 가득한 양사준의 입이 비틀어졌다.
“큭큭! 딴 새끼도 아니고 네놈이 그런 말을 해?”
“나 아니면 누가 사실대로 이런답니까?”
“호! 벽 깼다고 이젠 고개 빳빳이 쳐드네.”
“이 형님이 머리가 나빠지셨나. 나 예전에도 그런 거 기억 안 나요?”
“그때보다 더 쳐들었어.”
“헛소리 좀 그만해요! 그나저나 웬일이래?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 다 나서고? 못 본 사이에 얼굴만 두꺼워졌나?”
대답 대신 양사준의 전음이 연사구를 향했다.
-사부가 널 좀 보잔다.
-엥! 그분이 왜? 여기 계세요?
-조용한 곳으로 가셨다. 따라와.
-……나 밥도 안 먹었는데.
-후딱 처먹고 연우정 뒤편으로 와. 늦으면 알지?
-근데 왜요? 나 잘못한 거 없는데.
-나도 몰라. 와서 물어봐. 너 처죽일 거 같진 않았어.
-……혼자 가야 되겠죠?
-저놈은 끌고 오든가.
-누구?
-거짓말한 새끼. 하후진이라 했던 놈.
-……쟤 거짓말할 놈 아닌데.
-했어. 물어봐.
-……?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면 오라고 해.
잠시 후, 양사준이 나가자마자 연사구는 음식을 마구 입에 넣어 댔다.
우걱! 쩝쩝!
“아우! 이 맛있는 걸 이렇게 먹어야 하다니! 시팔!”
“왜 그래?”
전음으로 답할 때.
-저 형님 사부가 저 좀 보자네요.
-방연극이 같이 왔구나. 근데 왜?
-몰라요. 성질 더러운 노인네라던데 잽싸게 먹고 가야죠.
-괜찮겠어? 무윤이한테 알리는 게 어때?
-별일 아니래요. 성질은 저래도 속일 사람은 아녜요. 어릴 때 엄청 친했거든요.
-……너랑 그럴 만하다.
-뭐 그건 나도 인정. 참!
연사구의 전음이 하후진을 향했다.
-너 거짓말한 거 있냐?
하후진이 움찔했다.
-……뭔 소리예요?
-아까 형님이 그러던데. 너 거짓말했다고.
-……!
-정말이구나?
-천기 형님이 하지도 않은 말을 지어 댔어요. 사실은 무윤이가 내게 했던 건데. 저 입방아 한 방에 막으려면 그게 최고 같아서. 근데 어떻게 알았지?
-궁금하면 같이 오라고는 했는데. 아서라. 내가 물어볼게.
-……같이 가 볼까요?
순간 연사구가 버럭 했다.
“됐어! 이 새끼야! 거기가 어디라고 따라와! 나 엄청 쫄린 거 안 보여!”
“……!”
깜빡했다. 연사구가 초조할 땐 막 먹어 대는 걸.
* * *
얼마 후, 한적한 숲의 정자.
연사구는 눈을 멀뚱멀뚱 떴다.
‘무슨 뜻이지?’
인사가 끝나자마자 방연극이 대뜸 한 말.
-그 도인을 믿느냐?
도인이야 가상으로 지어낸 인물. 방연극이 뭘 들어서 저러는지 감이 안 온다. 에둘러 물어야 할 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방연극은 제자를 향해 짜증을 드러냈다.
“말귀는 알아먹는 놈이라며?”
“사부 말이 짧은 건 생각 안 합니까? 근데 뭔 얘기예요? 나도 좀 압시다.”
다시 방연극의 시선이 연사구를 향했다.
“네놈이 만났다는 그자, 진짜 도인이라 보느냐?”
“예, 틀림없습니다. 왜 그러시는지?”
“한 번 봤다면서 어찌 확신하느냐?”
“한 번이지만 며칠 같이 있었습니다. 도가 기운도 확실하고, 보인 모습 어디에도 의심할 여지는 없었습니다만.”
“도가 기운이야 나도 흉내는 낸다.”
“은월청요검도 아무 대가 없이 주셨습니다.”
“그 어떤 것도 없었단 말이냐?”
“그냥 세상과 하오문을 위해 잘 쓰라는 말씀밖에는.”
잠시 고개를 갸웃하던 방연극은 담담히 말을 풀어냈다.
“내 개인적인 일이 있어 세상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다 해괴한 놈들을 봤지.”
“어떤?”
“마인인데 도가 무공을 제대로 익혔다. 도인이 마공을 익힌 게 아니라, 도가 무공도 같이 익힌 마인이란 말이다.”
“……천마교나 혈교도 도가무공을 연구하잖습니까?”
“이놈아! 제대로 익혔다 하지 않았느냐! 무당 말코 도사 놈들 못지않게. 이제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
그러면 해괴한 놈들이 맞다. 어안이 벙벙할 정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