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대표들의 시선이 염화성과 서류를 번갈았다.
“아니 왜 그래요? 뒤에 뭐가 있기에……. 헉! 이런 방법이 있었다니!”
“가만! 은월단을 만들되 이 아인(牙人) 사업 보호를 전담시키고, 먼저 하오문을 공격하지 않으면 일절 강호 일엔 나서지 않는다?”
순간 은월단을 반대하기로 굳게 마음먹었던 파운걸이 벌떡 일어났다. 들뜬 목소리에 희열이 담뿍 흘렀다.
“그래! 이러면 되는 것을! 크하하하! 괜히 속을 끓였어. 큭큭!”
연사구의 내력 올린 음성이 내실을 휘저었다.
“어때요? 그러면 지랄할 새끼 아무도 없죠?”
“그래, 사구야. 상거래 호위 부대인데 어떤 무가가 시비를 걸까. 정말 좋은 안이구나. 하하! 정말 잘 생각했어!”
연사구와 무윤이 짜낸 해법의 핵심.
강호가 아닌 상업 조직을 보호하기 위한 무력 조직. 어느 상단이건 자체 호위대는 있기 마련. 그렇다고 상단을 강호 무가라 칭하지 않는다. 자신들 보호에만 무력을 사용하니까.
물론 이 틀을 깨고 나오면 무가라 할 수 있지만, 그건 안 하겠다고 세상에 선언하면 된다. 그래도 은월단이 전체 하오문을 하나로 묶을 매개체인 건 변하지 않으니까.
안휘 지부장 장중만은 너털웃음을 흘려 냈다. 모두가 하고 싶은 질문을 꺼내 들었다.
“허허! 사구야. 어찌 이런 기막힌 생각을 다 했느냐?”
“저 혼자 한 건 아니고 같이 머리 싸매 준 친구들이 있어요.”
“아! 그 네 친구 말이냐?”
“예.”
“허허! 좋은 친구를 뒀구나.”
한동안 내실을 휘저은 격정이 가라앉을 즈음, 흥분에 올라갔던 고성은 사라졌지만, 모두의 얼굴은 부푼 희열로 벌겋게 상기됐다.
가장 걱정했던 문제가 사라진 이상, 자잘한 논의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이견이 없는 안이 도출되자, 파운걸의 시선이 주변을 둘렀다.
“자! 이 정도면 마무리된 거 같은데 혹시 이견 있으신 분?”
그때 연사구가 손을 들었다.
“아직 말씀 안 드린 게 있어요.”
“이 건으로 말이냐?”
“아뇨. 다른 겁니다.”
“말해 보거라.”
“도천 조사께서 남긴 무공이 또 있습니다.”
“뭐라? 그게 무슨……?”
“은월청요검 입문, 중급 무공을 찾았어요.”
다시 연사구의 설명이 한동안 이어진 후, 좌중은 또 격랑에 휩싸였다. 이전의 내용도 충격적이지만 서로가 지니는 가치가 다르다.
아인 사업과 호위 은월단은 강호의 압박 없이 스스로 커 나갈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라면, 두 무공은 하오문도는 물론 하류층 구성원 누구에게나 절대무공으로 갈 길을 열어 줄 수 있다. 즉 구성원 모두에게 꿈을 주고, 그걸 통해 하오문을 제 문파처럼 아끼고 성원하게 만들 수 있다.
연대광의 눈엔 핏발이 서고 흥분된 가슴은 세차게 떨려 왔다.
그가 가장 바랐던 게 이것이니까. 소림과 무당을 경외시하는 세상 사람들처럼, 적어도 하오문 구성원에겐 그런 존재가 돼 주고 싶었던 꿈. 그 기반이 오늘 만들어졌다.
문득 아들을 바라보던 눈이 파르르 떨려 왔다. 여러 지부장에 둘러싸여 환하게 웃는 오늘만큼 자랑스럽게 보인 날이 또 있을까. 가슴이 뭉클해졌다.
‘고맙다, 아들아.’
또 그 고마움 담은 시선은 천정으로 향했다. 그 위에서 듣고 있겠다고 한 이들이 있다.
‘다들 정말 고맙구나. 내 이 은혜는 절대 안 잊으마.’
* * *
회의실 지붕 위.
“이 정도면 잘된 거 같은데.”
“그러게요.”
입을 삐죽인 당서하의 시선이 무윤을 향했다. 내용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야! 미리 말 좀 해 주지. 그럼 쓸데없는 걱정은 안 했잖아.”
“죄송합니다. 저놈이 못 하게 했어요.”
“그래? 우리까지 놀라게 하려고 그랬나?”
“그게 아니라 나름 열심히 짠 안이지만 대표들이 어떻게 나올지 모르니까요. 설레발 떨고 싶지 않다고.”
“하긴! 사구한테는 이만큼 큰일도 없지. 그래도 저 덜렁대는 놈이 그랬다니까 영 어색하긴 하네.”
무윤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흘렀다.
‘연습 많이 하더니 잘했네.’
발표 내용은 물론 표정과 동작 하나하나까지, 혼자 밤새워 연구하고 다음 날 무윤 앞에서 해 보고 교정하고를 수없이 반복한 결과였다.
앞으로 연사구가 하오문을 휘어잡으려면 무력은 한 부분일 뿐.
‘지도자, 그 역량을 보여야 저들이 따르지.’
모든 걸 스스로 풀어내고 해결해 가는 과정 없인 지도자도 없다.
오늘은 그걸 보인 첫 자리.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흘렀다.
어쨌든 첫 단추는 잘 꿴 거 같다.
그때 당서하의 시선이 진서연과 하후진을 번갈았다.
“그럼 여긴 됐고. 우린 일어나자. 약속 시간 늦겠어. 사구 저놈 늦는 건 어쩔 수 없고.”
마인과 조우했던 청한 표국 대표두 황세웅이 정식으로 초청한 식사 자리에 가야 한다.
엉거주춤 따라나서는 모습이 하후진의 심사를 알렸다.
“휴! 전 그런 자리는 처음이라 어떡해야 할지…….”
당서하는 가볍게 미소 지었다. 가기로 한 이상 이젠 도울 때.
“미안해. 내 마음대로 결정해서.”
“아! 아녜요. 여러 번 거절하셨잖아요. 그쪽이 통사정하니까 어쩔 수 없이 그러신 거 잘 알아요. 그냥 제가 어색해서 그런 거죠.”
“그래. 사실 나나 서연이도 그런 자리는 별로야. 근데 더 거절하면 표국을 무시하는 게 되거든.”
진서연도 내키지 않는 건 마찬가지. 언제나 그렇지만 힐끔힐끔 이상야릇하게 쳐다보는 눈길을 참아 내는 건 역겨운 일이다. 하지만 약속한 이상 가야 할 자리.
하후진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너무 부담 갖지 말아요. 말은 언니 혼자서 다 하니까.”
무윤의 손이 하후진의 어깨에 걸쳐졌다.
“사구 놈도 끝나는 대로 보낼게. 그럼 넌 입 열 시간도 없어.”
“휴! 알았다. 참! 너는 뭐 하려고?”
무윤은 진언 소리와 함께 곧바로 숲으로 사라져, 사람들을 구한 영웅은 넷으로 알려져 있다.
“가 볼 데가 있어. 다녀와서 보자.”
“그래.”
두 여인을 따라가던 하후진은 깊은 한숨을 쉬어 냈다.
‘이제 시작인가?’
그에겐 남다른 의미로 다가오는 자리.
‘강호인으로 남을 만나는 첫 자리.’
이제껏 가문에서 공식적으로 외부인을 만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자신은 서자(庶子), 그것도 천덕꾸러기였으니까.
어쩌다 밖에서 사람들을 만나도 대충 둘러대기 급급했다. 그저 하후가 식솔인 것처럼.
한데 오늘은 달라질 첫 행보다.
침주에서 무윤을 처음 만났을 때 흠씬 두들겨 맞고 나서 들었던 말이 있다.
-너부터 살아야 뭘 하더라도 하겠지.
이제까진 살기 위해 감췄다. 무윤이 처음 그랬듯 자신 또한.
하지만 이젠 달라질 때다. 무윤이 지금 하듯.
‘제대로 살아 본다. 날 위해서.’
그 첫걸음인 이 자리부터 반드시 유념할 게 있다.
‘서자, 그 족쇄부터 걷어 낸다.’
하후가 사람인 것도, 하녀의 자식인 것도, 그 어떤 것도 달라질 수 없다. 태생이니까.
아버지의 아들인 것도 물론.
가문을 떠나기로 맘먹었지만 어쨌든 하후가주의 아들. 감추다 들키면 본인은 물론 가문, 아버지도 욕되게 한다. 잔정은 물론 대놓고 아들이라 인정해 주지도 않는 아버지. 하지만 이젠 그 스스로 안다.
‘그게 날 위한 최선이라 여기셨지.’
부친의 애정이 가문에 드러나는 순간,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버지도 자신도 너무 잘 안다. 그렇다고 서러움과 서운함이 평생 가시지도 않을 것이고, 그런 방법이 최선이냐며 절규하고 싶은 마음은 지금도 굴뚝같다. 하지만, 이젠 적어도 미워하지 않을 자신은 있다. 가주란 직책에 있는 자의 고뇌와 의무를 커 가면서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응어리진 한을 씻어 내진 못해도 가만히 묻어 둘 순 있게 됐다.
달라질 건 오직 하나.
‘내 생각만 바꾼다.’
시선을 거부하고 외면하는 것이 곧 스스로 족쇄임을 인정하는 것. 그저 스스로 당당해지면 된다. 남의 시선에 신경 안 쓰면 된다.
이것이 가문을 박차고 나오는 가장 큰 이유.
그러자면 심중의 두려움과 곧 닥쳐올 냉소와 모멸은 지금 머릿속에서 밀어내야 한다. 가슴 속 뜨겁게 달궈진 숨이 뿜어졌다.
‘진이야. 넌 할 수 있어.’
마음속에선 이미 홀로서기가 시작됐다.
* * *
잠시 후, 장사(長沙) 시내 중심가의 백화 반점.
가장 유명한 음식점 중 하나라 식당 안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이 층 창가, 딱 봐도 가장 좋은 자리임을 알 수 있는 곳으로 일행이 향했다.
청한 표국 대표두 황세웅의 입이 연신 웃음을 지어 댔다.
“하하! 이리 초대에 응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근데 연 대협께선?”
“하오문 회의가 아직 안 끝났어요. 좀 늦을 거예요.”
“아! 알겠습니다. 그럼 식사는 어떻게?”
“먼저 한다고 얘기했어요.”
“예, 그럼 주문은 어떻게 할까요? 여긴 제가 자주 와 봐서 추천할 만한 게 있긴 한데.”
“우리 다 처음이에요. 부탁드릴게요.”
“알겠습니다. 그럼.”
음식 주문이 끝나자 대표두 황세웅은 짐짓 헛기침을 흘렸다. 이미 주변 모두의 시선이 쏠린 상태. 이들이 누군지 알음알음 식탁 건너 다 알려졌다.
목숨을 지켜 준 이들이라 속을 터놓기로 했다.
“솔직히 번거로운 걸 싫어하시는 거 같아서, 제 마음 같아서는 조용한 곳으로 모실까 했는데. 크흠!”
당서하는 가볍게 웃어 보였다.
“국주님 입장이야 다르겠죠. 이해해요.”
“그리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사실 저흰 규모가 작아서 이번 일이 표국을 알릴 기회기도 하기에 국주님께서 그만. 아! 그래도 직접 오신다는 건 제가 간신히 말렸습니다.”
“왜요? 오셔도 괜찮은데.”
“이건 비밀인데 나이 드시더니 술이 들어가면 말이 많으시거든요. 밤새 붙잡혀 계실지도 몰라서. 하하!”
“호호! 그럼 저하고 딱인데. 나중에 기회 되면 꼭 한잔하자고 전해 주세요.”
순간 좌중의 쑥덕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정말 들은 대로 젊네.”
“그러게. 황 표두가 없었으면 못 믿었을 거야.”
“가만! 저 여자는 당가 출신이라 했고 다른 여인은 보타문이라 했지?”
“그래. 근데 놀라지 말게. 나이가 서른하나밖에 안됐어. 근데 초절정이란 말이지.”
“뭐! 그렇게 어리다고?”
“그뿐인 줄 아는가? 엄청난 미인이라고 소문이 자자하더군.”
“정말? 근데 죽립 때문에 보이질 않네.”
“식사할 때 벗겠지. 그때 보세나.”
“참! 저자는 하후가라며? 초절정은 아니고.”
“절정 끝쯤 된다더군. 근데 저 사람도 이제 스물여덟이야. 놀랍지 않나.”
“야! 하후가가 그 정도 무가였나?”
“아니, 저자만 특출 난 거겠지.”
좌중의 설왕설래는 끝없이 이어졌다.
일행의 식사가 어느 정도 끝나 갈 무렵, 삼 층에 있던 한 사람이 이 층으로 내려왔다.
착착!
두리번거리는 척하다가 눈을 껌벅거렸다.
“가만! 이게 누구더라?”
장사에서 서문가 다음 정파 무가인 선은문의 소문주, 송각은 떨떠름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이놈이 절정 끝이라고?’
악양 정사 대전 당시 하후가와 같은 조에 편성돼서 몇 번 같이 싸웠었다. 물론 시위하는 정도라 전투라 할 건 없었지만.
그때 본 하후진은 전장에 나서지도 않았던 놈이고 서자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한데 그런 놈이 마인을 처단한 고수로 칭송받다니.
위에서 놈인 걸 알자마자 불쾌해졌는데 짜증 나는 일이 더해졌다.
‘감히 이딴 놈을 보느라 내게 관심을 안 가져?’
장사 두 번째 정파 무가의 소문주인 자신인데. 평소 같으면 여기저기서 일어나 고개 숙일 자들이 빤히 자신을 보고서도 딴 데 정신이 팔려 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를 수밖에.
그 홧김에 나선 자리다. 놈을 망신 주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