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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라 불린 내 친구-115화 (115/161)

115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솔가지 흔드는 여린 산바람 소리만 깊은 숲속에 흘렀다.

사라라!

‘누굴까.’

노년의 무인, 양호승은 제자를 살피는 자를 뚫어지게 주시했다. 머리와 몸 이곳저곳을 살핀 지 거의 일각.

만법귀일의 불심이 담긴 낭랑한 진언, 중생의 고통과 번뇌를 벗어나게 해 주고 두려움을 없애 준다는 불음(佛音), 양호승은 고승이랍시고 자처하는 수많은 중놈을 봐 왔다. 하지만.

‘이 정도 진언 소리는 들어 보지 못했어.’

거기에 제자를 살피는 손길, 풋 내음 가득한 봄 향기처럼 청량하고 싱그러운 기운이 넘실댄다. 한없이 부드럽고 온화하다. 제자의 표정 또한 손길이 스칠 때마다 편안해진다.

‘도가 쪽 같은데.’

의문투성이지만 살피는 자 또한 진중한 표정. 기다릴 때다.

얼마 후, 무윤이 손을 거두자마자 질문이 날아들었다.

“어떤가?”

마인의 반응까지 봤고 또 들었지만 묻긴 해야 한다.

“이자의 사부십니까?”

“그러네. 내 손으로 거두고 키운 아이일세.”

무윤도 상대가 궁금하긴 마찬가지지만, 대략 짐작되는 상황. 스승이 알아야 할 것 정도는 먼저 말해도 된다.

“마공을 익혀 생긴 광기는 아니고. 약물 중독이라고 보는 게 맞겠습니다.”

“약물? 앵속 같은 거 말인가?”

“그것도 있고, 아무튼 사기(邪氣)가 깃든 여러 약을 복용한 거 같습니다.”

양호승은 마른 침이 꿀꺽 삼켜졌다. 무엇보다 궁금한 것.

“치료는……. 가능하겠나?”

“전 의원이 아닙니다. 다만 이런 자를 살핀 경험이 있는데, 너무 오래 중독됐습니다. 저로선 확신 못 하겠네요.”

“아주 용한 의원이라면?”

이제 상대를 확인해야 할 때.

“한데 누구십니까?”

“이 아이의 사부라 하지 않았나. 못 믿는가?”

“그리 보입니다. 다만 이 자는 방금 몇 사람을 죽인 마인이기도 하지요. 전 신중히 처리해야 합니다.”

순간 양호승의 눈에 서늘함이 잠시 스쳤다.

“……자넨 누군가?”

“먼저 밝히시지요. 따라온 건 그쪽입니다.”

“먼저 말하시게. 보아하니 강호 경험도 적지 않아 보이는데 자넬 위해 그러는 걸 모르겠나? 날 알면 내 선택 폭은 좁아지네.”

“죽이기라도 하시겠다는 겁니까?”

양호승도 도와준 이에게 그러고 싶지 않다. 이럴 땐 상황을 알리는 게 최선.

“십여 년 전 산적과 싸우다 갑자기 사라진 제자일세. 내가 거둬 키워 자식 같은 놈이지. 한데 저 모습으로 나타났네. 자네라면 어찌하겠나?”

무윤의 눈이 깊어졌다. 마주한 눈엔 분명 진정이 담겼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도 이해가 가고. 우선 상대를 추측해 볼 때.

‘악양으로 향하는 초절정 끝자락 무인. 사기는 없지만, 정파는 확실히 아니다. 사파 무인일 거야.’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역시 비천문. 하지만 지금은 언급해서 좋을 게 없다. 중재안을 꺼내 들었다.

“저도 이자에게 궁금한 게 있습니다. 깨워서 묻고 판단했으면 합니다만.”

양호승도 반대할 이유가 없다. 모든 결정은 그 후에 하면 되니까.

잠시 후, 수혈을 풀어내자 사르르 떠진 눈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 여긴?”

“정신이 드느냐?”

“사, 사부님?”

아까완 달리 초점이 확실한 눈동자. 안도의 긴 숨을 내쉰 양호승의 손이 제자의 온몸을 어루만졌다.

사사삭!

눈이 촉촉이 젖어 들고 얼굴엔 살포시 미소가 떠올랐다. 그저 떠오르는 한마디.

“……고생했다.”

“……?”

두 사람의 해후가 한동안 이어지고 난 후, 양호승은 질문을 쏟아 냈다. 하지만 이내 머리를 절레절레 저어 댔다. 속 깊은 한숨만 암담한 심사를 알렸다.

“허! 십이 년이거늘!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니.”

답답한 건 양중건이 더했다.

“사부님, 정말 세월이 그리 흘렀습니까?”

“그리됐단다.”

“어찌 된 건지? 전 그때 수망산 산적과 싸우다 쓰러진 것밖에는…….”

“그보다 이제 머리는 맑은 게냐?”

“그냥 흐릿하고 멍하기는……. 크흑! 갑자기 머리가…….”

순간 무윤의 손이 다시 수혈을 점했다.

툭! 투둑! 파팟!

양호승의 눈길이 아련해졌다. 이젠 증상이 눈에 확연히 들어온다.

“또 광기가 올라온 게군?”

“예.”

암담한 시선이 숲에 가려진 하늘을 올려다보길 한참, 양호승은 다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우선 물어야 한다.

“혹 더 알아본 것이라도?”

“다행인 게 하나 있습니다.”

“뭔가?”

“대부분 약물 중독으로 생긴 광기라 마공 같은 폭주는 없어 보입니다. 그래도 위험하니까 가둬 놓되, 치료만 잘하면 심해지진 않을 겁니다.”

“회복은 어찌 보는가? 지금은 자네에게 물을 수밖에 없군.”

“장담을 못 할 뿐이지 분명 나아지긴 할 겁니다.”

양호승은 화두를 돌렸다. 제자를 이렇게 만든 놈들을 찾아야 한다. 그러자면 물을 게 있다.

“알겠네. 한데 혹 다른 마인들도 살펴봤는가?”

“예. 대략.”

“내 제자와 비슷한가?”

“아뇨. 저들은 원래 마공을 익혔습니다. 물론 그 후에 여러 약을 실험한 건 같지만.”

양호승의 눈이 번득였다. 새겨들어야 할 말이 있다.

“분명 실험이라 했는가?”

“예.”

“어찌 그리 확신하는가?”

마인이 아까 장사 북쪽의 수망산을 언급한 덕에 이 자가 비천문인 게 거의 확실해졌다. 그래서 실험이란 말은 일부러 꺼냈다. 잘만 하면 비천문이 공야의숙 일을 해결할 조력자가 될지 모른다.

무윤의 목표는 공야성 등 가까운 세 사람이 누명을 벗는 것.

‘우리야 들춰 봤자 해결도 안 되고 셋만 위험해지지.’

한데 약은 분명 공야의숙 것이니 서문가 짓이 분명한 상황.

‘이걸 비천문에 알리면?’

둘 다 장사에 있고 호남 최고의 정, 사 문파인 곳. 수백 년간 앙숙지간인 건 세상이 다 안다. 비천문이라면 반드시 이 일을 파헤친다. 게다가 고위층으로 보이는 자의 제자가 저리됐는데.

이제 확 흘려야 할 때.

“그냥 이것저것 다 먹였습니다. 전혀 상관없는 약재 기운이 뒤죽박죽 섞였으니까요.”

“한데 자넨 의원도 아니라면서 어찌 그리 잘 아는가?”

“치료는 몰라도 살피는 건 의원보다 낫다고 자부합니다.”

이미 보여 준 모습이 있고, 필요하면 끌고 가서 확인해도 될 일.

“그럼 저들 다 실험체였다?”

“거의 확신합니다. 참! 제자분에겐 유독 한 가지 약을 많이 썼는데, 예전에 우연히 살핀 광마인 증상과 거의 유사하더군요.”

“약이 뭔지 아는가?”

“모릅니다. 다만 뇌를 실험한 약은 분명한데 소문에 비슷한 게 있더군요.”

“소문?”

“얼마 전 공야의숙 소문을 아십니까?”

“……아네만.”

“그때 폭로한 의원이 설명한 약하고 증상이 거의 같습니다.”

“뇌령단하고 상령단을 말하는 게군?”

“예.”

양호승은 눈 가득 터져 나오는 살기를 감추지 않았다. 처음 마인을 볼 때부터 짐작은 했었다.

‘서문가가 확실해.’

비천문이 숙적인 서문가를 유심히 살핀 건 당연지사. 아무리 공야의숙 일을 은밀히 진행했다 해도 삼십 년이다. 실체는 정확히 모르지만 짐작하고 있던 일. 게다가.

‘이번에 의숙을 접은 건 마공 연구를 중단했다는 거지. 그럼 실험체들도 폐기하려 했을 것이고. 그 와중에 우연히 탈출한 거 같은데.’

탈출 경위만 빼고는 거의 확신이나 다름없다.

한데 무윤을 바라보는 눈엔 모호함이 더해만 갔다. 말본새는 늙은 여우 같은 자가 너무 쉽게 말을 흘렸다.

‘세밀한 기운까지 알아보는 자. 분명 날 어느 정도 알아챘을 게야. 그런데도 일부러 저런다?’

분명 살핀 기운은 초절정 초반 정도. 저 나이에 놀라운 경지이긴 하지만 자신의 상대는 절대 아닌 걸 알 텐데.

이젠 에둘러 물을 때가 아니다.

“혹 누구 짓인지 짐작 가는가?”

“저야 타지 사람이라 잘 모르죠. 근데 비천문이면 잘 아실 거 같은데.”

양호승은 실소를 감추지 않았다. 이제 말 못 할 이유가 없다.

“허허! 날 알고 있었는가?”

“아닙니다. 아까 제자가 수망산이라 해서 찔러본 건데 맞나 보군요?”

“아! 참! 그랬었군. 그러네. 난 전 가주 양호승일세. 이제 자네 차례네.”

무윤은 정중히 예를 갖췄다.

“말학 천무윤이 인사드립니다. 근데 제 상황이 의도치 않게 박쥐처럼 돼 버려서 소개하기 참 애매하네요.”

“어째서?”

“가문은 뇌양의 작은 정파 무가인데, 지금은 침주에서 흑도를 이끌고 있어서요.”

“뭐라? 어쩌다가 그리됐을꼬?”

“고향 친구 놈 술수에 마인으로 몰려 도망 다녔습니다. 그때 침주 흑도에 숨어들었죠.”

무윤은 조작에 대한 내용과 본실력을 제외하고는 사정을 이해할 만큼 알렸다. 실력은 도인 스승에게 배운 것으로 하고.

이 정도 알려도 될 만한 자로 보였으니까.

양호승은 오랜만에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허! 그것참! 기구한 거 같으면서도 또 한편으론 잘된 거 같고. 이런! 미안하네. 남의 일에 이러면 안 되는 것인데.”

“아닙니다. 덕분에 스승님을 만났으니 딱 맞는 말씀이죠.”

양호승은 그제야 다른 자들이 떠올랐다.

“참! 근데 여긴 무슨 일로 왔는가? 또 그자들은?”

이것도 가릴 얘기가 아니다. 또 슬며시 부탁할 것도 있고.

“나이를 떠나 다 친구들인데 하오문 친구 일로 잠시 들렀습니다.”

“하오문?”

“연사구라고 아까 걸쭉하게 떠들던 놈입니다.”

“아! 은월청요검 전수자라는 친구?”

“예.”

세세한 설명이 끝나고 나서도 이런저런 얘기가 한참을 오고 갔다. 얼마 후, 양호승의 빛나던 눈이 점점 더 깊은 색을 더했다. 오랜 강호의 경험이 알려 준다. 무공 외에도 깊은 혜안을 보여 주는 자.

‘보통 인물이 아니야. 다행히 정파에 치우치지도 않았고. 가까이 지내서 나쁠 게 없으리라.’

이제 일어나야 할 때. 제자부터 가문에 감춰야 한다. 서문가에서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니까.

“가 봐야겠네. 오늘 인사는 다음에 꼭 하지. 언제 찾아오지 않겠나?”

엮을 땐 매듭을 꽉 조여야 한다. 부탁할 건 아직 말도 못 꺼냈다.

“참! 해 보면 아시겠지만 당분간 제자분 정신을 들게 하는 건 약으로 어려울 겁니다.”

“뭐라? 그럼 어찌해야 하는가?”

“제 기운으로 몇 번 정화시키고 나면 좋아질 겁니다.”

“허! 그래. 그럼 도와줄 수 있겠는가?”

“한 열흘 머물 거 같은데 그동안 들르겠습니다.”

“정말 고맙네.”

“근데 몰래 갔으면 합니다. 아시다시피 제 입장이 그래서.”

양호승은 품에 있던 패를 건넸다.

“내 일러 놓을 테니 이걸 보이면 은밀히 다닐 수 있을 걸세.”

“알겠습니다.”

“그럼 가 보겠네.”

비천문이 정말 조력자가 될지 지금은 알 수 없다.

그저 씨앗만 뿌렸을 뿐이니까. 다만 잘 자란다면 모를 일이고.

무윤은 급히 일행 쪽으로 신형을 날렸다.

파파팟!

‘산적 시체 중에 적당한 걸로 바꿔야지.’

양중건도 죽은 것으로 해야 말끔히 끝난다.

잠시 후, 숲속에서 무윤이 보낸 전음에 당서하의 눈이 번득였다.

‘이거 뭔가 있는데.’

여섯이나 되는 광마인이 동시에 나타난 상황. 거기다 무윤이 방금 알려 준 약물 중독까지. 의원 장동백이 퍼트린 소문을 포함해 온갖 의문이 동시에 솟구친다. 이럴 땐 물어야 한다.

-짐작 가는 거라도 있어?

당서하에게 공야의숙 일을 알릴 순 없다. 의심을 가지고 혼자 조사하다간 그녀만 더 위험해진다.

-말씀드린 게 답니다. 우선 정리부터 하시죠.

-……알았어.

답은 그렇게 했지만 당서하의 머릿속은 점점 복잡해져 갔다.

‘서문가 짓일까? 만약 그렇다면?’

소문이 사실이란 가정하에, 그녀의 마음을 가장 짓누르는 것.

‘그럼 우리도?’

멸마단원 이전에 당가의 무인인 그녀.

소복하게 떨어지는 햇살이 오늘따라 살갗을 아려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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