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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라 불린 내 친구-114화 (114/161)

114화

꽃 너울 넘나들던 바람이 피바람이 된 지 한참.

공포에 떠는 광마인의 발이 진언에 잠시 묶인 찰나, 폭풍같이 터져 나온 검세가 분노 담아 짓쳐 들었다.

슈우욱!

“감히 마물들이 어디서!”

“카라락!”

내려친 검격에 마인의 손이 절로 올라오는 순간, 서슬 시퍼런 칼날이 팔뚝에 정면으로 틀어박혔다.

푸욱! 우둑!

“카악! 칵칵!”

이지를 상실했어도 고통의 감각은 본능인지, 팔을 당겨 박힌 칼날을 빼낸 마인의 몸이 뒷걸음질 쳤다.

차착!

하지만 그것도 잠시, 충격에 주르르 밀려난 몸이 다시 광기 담아 목표를 향해 돌진했다. 분노의 흉성을 드러낸 눈자위에 불꽃이 일었다.

차라락!

성난 연사구의 입이 한껏 비틀어졌다.

“뭐야! 검기에도 안 잘려?”

내력의 팔 할 가까이 쏟아부은 일도양단의 검격인데, 고작 팔뚝 살 두 치 정도 베어 냈을 뿐.

꽉 깨문 입술이 끝까지 말려 올라갔다.

“그래. 어디 한번 해보자고!”

그때 당서하의 날카로운 고성이 들려왔다.

“전력을 다할 때는 가슴이나 목을 노려! 그래야 몸을 움츠린다고!”

“아까 다 말했잖아요!”

“근데 왜 객기 부려! 검기 한 번에 안 된다니까! 주변에서 공격하다 기회를 노리라고!”

“아우! 잔소리 그만! 그냥 한번 해 본 걸 가지고.”

“이 새끼가 정말! 지금이 그럴 때야! 똑바로 해! 진이는 시킨 대로 잘하잖아!”

“알았어요! 조심할 테니까 그쪽이나 신경 써요!”

“너만 잘하면 돼. 우리야 이게 한두 번이야?”

“…….”

당서하와 진서연은 마인 수십과 맞닥뜨려 본 멸마단원. 초절정 무인도 일격에 광마인을 쓰러트릴 수 없음을 잘 안다.

우선 일 장 내외 간격에서 마인 주변을 끊임없이 회전하며 발을 묶어야 한다. 이후 쾌속한 움직임으로 눈을 현혹시키다가, 수시로 전력 다한 일격을 쏟아 낸다.

그렇게 조금씩 몸에 혈선을 만들어 피를 빼내야 한다. 광기의 근원은 뇌, 힘은 피에서 나오니까.

당서하는 끊임없이 검기를 쏟아 냈다.

슈우욱! 쇄애액!

입가엔 희열 담긴 미소가 흘렀다. 초절정이 된 이후 첫 전장.

‘진기가 막힘이 없어.’

항상 전신을 옥죄며 근육을 경직시키던 마인의 광기도 한결 덜해졌다. 발끝 또한 춤추듯이 너울거리면서도 빠름을 잃지 않는다.

‘빨리 잡고 서연이에게 간다.’

자만이 아닌 자신감이자 동료의 의무다. 상대적으로 신법이 뛰어나 두 마인을 상대하는 진서연은 공격 대신 발을 묶는 데 주력하고 있으니까.

유성처럼 궤적을 그린 검에 다시 힘을 더했다.

쉬이익! 휘릭!

처음 울린 무윤의 진언 때문인지 생각보다 마인의 움직임이 둔했다. 빛 가득 두른 검과 마인의 팔은 쉴 새 없이 부딪쳤다.

카앙! 캉! 서걱! 파팟!

마인의 혈흔은 점점 더 늘어만 갔다. 여기저기 찢어진 누더기 사이로 핏물이 꾸역꾸역 새어 나왔다. 발끝이 점자 무뎌져 갔다.

잠시 숨을 돌린 시선이 하후진과 연사구를 향했다. 싱긋 미소가 바로 올라온다.

‘둘 다 마인은 처음인데, 저 정도면 됐어.’

이제 남은 건 한 사람.

멍하게 있던 마인을 흥분시킨 무윤이 막 숲으로 도망치듯 내달렸다. 당서하는 싱거운 웃음과 함께 고개를 돌려 버렸다.

‘저놈을 왜 걱정해.’

그렇게 고개를 돌리려는 찰나, 아찔할 정도로 쾌속한 신형 하나가 눈가를 스쳐 갔다. 그 방향은 숲속.

파파팟!

순간 눈이 번득였다. 눈이 좇기 힘든 빠름. 전율을 부를 정도의 초고수다.

‘괜찮을……. 후! 내가 뭔 생각을 하는 거야. 화경인 놈인데.’

화경 무인의 장점 중 하나. 설사 적보다 한 수 아래라도 피하고자 맘먹으면 어렵지 않다. 몸의 통제가 완벽하고 자신의 공간을 장악하기에.

또 추적한 이의 신법 또한 무윤에 못 미친다. 신법이 가장 약하다고 매번 떠들어 대는 놈보다도.

‘알아서 하겠지.’

굳은 믿음과 함께 다시 전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한편 지켜보던 좌중에선 탄성이 터져 나왔다. 다섯 덕분에 몸을 피한 산적 열댓 명이 더해진 백여 명.

“저것 보게, 우린 이제 살았어. 하하하!”

“그러게. 저분들 아니었으면 우린 다 죽은 목숨이었는데.”

“암! 구사일생이 따로 없어. 하늘이 살펴 주신 게지.”

“허! 그나저나 대단해. 저 흉측한 마인들이 꼼짝도 못 하다니.”

“그러게. 저 검기 보게. 다들 초절정 같네.”

“그러니 저 마인들을 거침없이 몰아붙이는 게지. 틀림없네.”

“근데 다들 나이도 젊어 보이는데.”

“게다가 여인이 둘 아닌가.”

“한데 저 여인 말일세. 날아다니는 것이 꼭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구먼.”

“내 눈에도 그리 보이네. 어찌 저리 고울까.”

그때 하북 하오문 몇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 젊은 친구, 어디서 본 거 같은데?”

“누구?”

“저기 입에 욕지거리 씹어 대는.”

“어! 저건!”

“아는 사람인가?”

“맞다! 연사구! 그 친구가 틀림없네.”

“뭐? 정말?”

“내가 호남 연락책 아닌가. 몇 년 전 모습 그대로야. 저 걸쭉한 입담도 그렇고.”

“허! 그럼 그 말이 다 사실이구먼.”

“하하하! 혹시나 했는데, 거기다 우릴 구해 주러 오다니.”

몇 사람의 시선이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은 채주 곽양을 째렸다.

“크흠! 아까 우리 통행세가 얼마라고 했지?”

“이십 문. 한 푼도 못 깎아 준다고 했지, 아마.”

“지금도 그러려나?”

“달라고 하면 줘야지. 대신 누구한테 이르고 말야. 크크!”

움찔거리는 산적 두목의 등이 확연히 보였다.

한편 입을 꾹 다문 하북 지부장 파운걸의 심사가 복잡해졌다.

‘허! 그것참!’

머리카락 바람에 휘날리며 마인을 두들겨 대는 연사구. 격한 싸움 중에도 쏟아 내는 욕지거리가 속을 후련케 한다.

“아우! 이 마인 새끼! 내가 십 초안에 못 끝내면 성을 간다. 난 한다면 하는 놈이야! 이 호로새끼, 아니 마인 새끼야!”

아랫입술을 짓씹은 채 서리서리 뻗쳐오른 기운을 연달아 쏟아 낸다. 바람 탄 도약과 겹겹이 울리는 기의 파동은 무인의 기상을 한껏 뿜어낸다. 광풍이 몰아치는 격전에도 차가운 눈매는 냉정함을 알린다.

어릴 때부터 간혹 봐 온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오직 사나운 기세를 마음껏 뿜어내는 한 마리 야수만 눈 가득 들어온다.

‘잘 컸구나.’

하오문도로서 자랑스러운 마음이 심장을 벅차오르게 한다.

하지만 파운걸은 뜨겁게 달궈진 숨을 길게 뿜어냈다. 식히려 함이다. 솟구쳐 오르는 이 격정은 여기에서만 느껴야 한다.

굳을 결심을 다시 떠올리고는 속으로 읊조렸다.

‘살아남으려면 우린 숙여야 한단다. 그게 우리 숙명이야. 다만! 너는, 너만은 지금 모습대로 가거라. 널 보는 게 우리의 위안이 되도록. 그리 당당하게 커 가거라. 그거면 됐다.’

그 진정을 담은 눈가에 다시 불꽃이 타올랐다. 하늘에 시퍼런 벽력을 맘껏 쏟아 내는 이를 바라볼 땐 그리될 수밖에 없다.

그렇게 피에 절은 전장이 마무리될 즈음.

숲속에서 마인을 쳐다보던 무윤의 눈이 깊어졌다. 신기심의공이 전해 준 마인의 기운. 침주에서 자신을 공격했던 서문가 무인을 떠올리게 한다.

‘근데 비슷하면서도 달라. 훨씬 정제된 느낌, 딱 그건데.’

소문을 터트린 의원 장동백과 선우가영은 공야의숙에 상단전 마단이 두 개라 했다. 실패한 뇌호단(腦護丹)과 부작용을 거의 없앤 상령단(上靈丹).

‘상령단, 그걸 많이 복용한 건가?’

그걸 확인하는 게 이 숲으로 끌고 온 또 다른 이유다.

마인은 공격 대신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끌고 오기 위해 뿌렸던 분노의 기운을 온화함으로 바꾸자 벌어진 일.

마인의 초점 잃은 눈동자는 뭔가에 홀린 듯 제 갈 길을 못 찾았다. 숲 여기저기를 헤매길 한참.

무윤의 진언이 다시 입가를 흘렀다.

“나무 아미다바야 다타가다야 다디야타 아미리 도바비아미리다 싯담바비 아미리다 비가란제 아미리다 비기란다가미니 가가나 깃다가례 사바하!”

죄업과 업장을 소멸하고 왕생정토를 비는 진언. 이성을 찾게 만들기 위한 선택.

낭랑한 울림, 그 그윽함이 아득히 먼 곳, 아득히 먼 시간 속에서 들려온 북소리처럼 은은하게 심장의 고동을 감싸 안는다.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의 해탈을 위해 울리는 진언. 진흙 속에서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아름답게 꽃을 피우는 연꽃처럼, 그 고결함이 어둠에 갇힌 마인의 심연을 가만히 쓰다듬는다.

점차 마인의 눈동자가 초점을 찾아가던 즈음, 무윤의 미간이 좁혀졌다.

‘누구지? 하필 이때에.’

지금처럼 온 마음 다한 진언엔 치열한 격전만큼 내력이 소모된다. 한데 느껴지는 기운은 초절정 끝자락 정도로, 여유 부릴 상대가 아니다.

무윤은 아쉬운 한숨을 흘려 냈다. 조금만 더하면 잠시라도 이지를 회복할 거 같은데.

‘어쩔 수 없지.’

그렇게 진언을 마무리하려는 찰나, 양호승의 걸음이 서서히 마인을 향했다. 애잔함이 가득한 눈가가 파르르 떨려 왔다.

“중건아! ……나를 알아보겠느냐?”

순간 멍했던 마인의 눈가에 서서히 잔물결이 일었다. 조금씩 초점을 찾아가던 눈동자도 떨림을 더해 갔다. 거의 광기가 가라앉을 즈음 그리운 이의 영상이 눈가에 아롱졌으니.

어느새 양호승의 입가도 이지러지기 시작했다. 이제야 알았다. 자신을 알아본다는 걸. 고아인 그를 거둬 자식처럼, 제자로 키워 온 사부를.

“그래. 나란다. 네 사부란다.”

이제야 마인에서 양중건이 된 사내, 이제야 눈앞에 있는 사부를 알아본 제자. 하지만 그뿐, 아무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뭔지 모를 아픔에 저절로 무릎이 무너져 내렸다.

털썩!

정신이 혼미할 정도로 아연해진 말문이지만, 언제 열어 봤는지 생각도 안 나는 입이었다. 뭔지 모를, 이해할 수 없는 한이 가슴 저 밑에서 복받쳐 오르지만, 지금은 열어야 한다. 떨리는 입술을 오므려 답해야 한다.

얼마 만에 불러 보는지,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기억에도 없는 그 말.

“사, 사부님?”

사부의 눈에 작은 이슬이 맺혔다. 똑 떨어진 눈물 한 방울이 속 깊은 회한을 알렸다.

“그래. ……오랜만이구나. ……살아 있었어. 크흑!”

의아함 담긴 멍한 시선만 사부를 쫓는다.

“왜 그러시는지? ……여기는?”

“……기억이 없는 게냐?”

“……?”

몽롱한 기억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리길 한참, 주마등처럼 십 년 전 그때 상황이 눈앞을 스쳐 갔다.

‘산적과 싸우다 쓰러졌는데. ……어떻게 여기에?’

기억이 없다. 그럼 물어야 한다. 입술이 잘게 떨려 왔다.

“제가 왜 여기…….”

순간 뇌리를 뒤흔든 격통에 절로 머리를 감싸 안았다. 또다시 광기가 혀를 날름거렸다.

“크윽! 머, 머리가!”

무윤의 진언이 다시 흘렀다. 근본이 된 마음을 깨닫는 무량수여래 근본 다라니.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야 아미 다바야 다타아다야 알하제 삼먁삼못다야 다냐타 옴 아마리제 아마리도 나바베 아마리다 삼바베 아마리다∼∼!”

“크아아악!”

감내할 수 없는 혼란에 머리를 부여잡던 양중건이 풀썩 쓰러져 내렸다.

투욱!

양호승의 시선이 무윤을 향했다. 물을 수밖에 없다.

“어찌 된 겐가?”

“이지가 돌아온 게 아닙니다. 진언으로 잠시 광기를 억제했을 뿐.”

“……그럼?”

“잠시 잠자게 하시죠. 살펴봐야 알겠습니다. 본인도 그게 좋을 거 같고.”

“……!”

양중건을 들쳐 업은 두 사람이 더 깊은 숲으로 향했다.

사사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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