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사구야. 사실 난 걱정이 좀 되는구나.”
“어떤 게요?”
안휘 지부장 장중만은 조심스레 운을 뗐다.
“은월단 말인데, 이번엔 안 만드는 게 좋지 싶다.”
“……어떤 것 때문에 그러시는지?”
“네 아버지 뜻은 잘 안다. 내 꿈이기도 하고. 하지만 당장 만드는 건 내우외환(內憂外患)을 불러올 게야. 외부는 물론이고 내부에서도.”
“외부야 당연하겠죠. 기어 다녀야 할 놈들이 머리를 빳빳이 쳐드는 셈인데.”
“저들은 그 괘씸한 고개를 처박을 방법이 많지 않느냐.”
연사구의 야릇한 미소가 색을 더했다. 저 말은 앞으로 수없이 들어야 한다.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그때마다 어떻게 답할지, 어떤 표정을 지을지 수없이 고민했다. 그래서 내린 답.
‘어떤 세파의 고난도 시름도 비켜 갈 미소. 하지만 말 속엔 차디찬 칼을 담는다.’
그 결심이 내린 첫마디가 흘렀다.
“그런다고 밟아 죽일까요? 버러지가 고개 좀 쳐들었다고? 고작 기 좀 피고 살아 보겠다는 건데?”
장중만의 눈에 당혹감이 서렸다. 전혀 생각지 못한 반응. 직감이 알려 준다.
‘이 아이, 달라졌어.’
무공만이 아니다. 한 치의 두려움도 없는 눈엔 차디찬 진중함만 흐른다. 저 말엔 울분과 분노가 섞여 있을 줄 알았다. 콧김은 씩씩 뿜어져 나오고 성난 눈썹이 하늘로 치솟을 거라 짐작했다. 그러면 숙부로서 점잖게 타이르고 가르치려고 했는데.
불꽃 가득한 눈은 섬뜩하리만치 차갑다. 은은히 흐르는 입꼬리는 억지 미소가 아님을 알린다. 한을 삭혀 낸 목소리는 담담하게 흐른다. 몇 년 전 그 철부지가 아니다.
‘허! 정말 어른이 다 됐어.’
이러면 자세를 바꿔야 한다. 조카가 아닌 대등한 상대로.
그 전에 멋쩍은 웃음 한 번 정도는 날려야 한다. 혀의 싸움에선 상대의 경계심을 푸는 게 먼저니까.
“허허! 사별삼일 괄목상대(士別三日 刮目相對)라더니. 너를 두고 한 말이구나.”
그새 연사구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칭찬이시죠?”
“허! 헷갈려 이놈아!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게야?”
“예전처럼 편하게 말씀하시면 되죠.”
장중만은 피식 웃고 말았다. 기선은 빼앗긴 셈.
“그놈 참! 알았다. 그래 네 말대로 무력단 하나 만든다고 죽이자고 달려들진 않겠지. 그래도 저들은 무조건 밟고 본다. 세게 밟건 약하게 밟건 무조건. 아니더냐?”
“우린 무조건 다치겠죠.”
“무력단이 그럴 가치가 있다고 보느냐?”
“근데 이런 기회 아니면 언제 고개를 쳐들어요? 다음에? 일 년 후 회합에서? 아니면 더 훗날? 그땐 지금보다 나아질까요?”
“우린 준비가 덜 됐어. 그걸 차근차근 만들자는 것뿐이다.”
“그럼 저들도 준비합니다. 그러고 싸우면 유리할까요?”
“최소한이라는 게 있다. 뭐라도 있어야 할 게 아니냐.”
“준비한 게 몇 개 있어요. 가서 까 봐야 알겠지만.”
“준비? 네 아버지가?”
“언제 그런 거 시시콜콜히 얘기하는 분이세요? 그건 모르겠고 저한테 따로 복안이 좀 있어요.”
“뭔데?”
“죄송해요. 가서 말씀드릴게요. 한 방에 빵 터트려야 효과가 있어서.”
“허! 그놈 참! 자신은 있는 게냐?”
“해 봐야죠. 근데 머리 하나는 끝내주는 놈이랑 짜낸 거라 들을 만하실 거예요.”
“누구?”
“그것도 나중에. 그보다 내부는 어떤 거요?”
장중만은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는 말문을 열었다.
“이번 회합엔 삼분지 일 정도가 올 거다.”
“매번 그랬잖아요. 먼 곳이야 위임장 써서 가까운 지부장에게 맡기고.”
“그래. 대략 일곱이 전체 지역 대표라 할 수 있지. 한데 내 듣기론 대부분 무력단에 반대해. 나처럼 외부가 걱정돼서 그러는 이도 있다만 다른 이유도 작지 않아.”
“어떤?”
“너도 예상했겠지만, 두 가지지. 하나는 그걸 만든다고 네가 은월청요검을 다 풀 게 아닌 거고, 또 하나는 크흠! 누군가는 그 조직을 장악할 거 아니냐. 그게 싫은 게지. 실속 없이 뺏기기만 하는 거니까.”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인심을 못 얻었나?”
“이놈아! 이게 어디 그런 문제야. 장사꾼 셈이 그렇다는 게지.”
“그럼 셈을 맞춰 주면 되죠.”
“……어떻게?”
“그것도 가서…….”
그때 무윤의 다급한 전음이 연사구를 향했다.
-고개 너머에 뭔가 이상해.
-뭐가?
-백여 명 넘게 사람들이 있어.
-무인들?
-다는 아니고 일부. 표국이나 산적 같은데, 그보다 주변에 사기(邪氣)가 느껴져. 마기 같기도 하고.
-뭐? 얼마나?
-가 봐야 알겠어.
-알려야 할까?
-그게 좋겠어. 상황을 모르니까.
-알았다.
잠시 후, 연사구의 말에 장중만은 고개를 갸웃했다. 강호의 상식이 그리 만들었다.
“이 언덕 너머 구릉 말이냐?”
“예.”
“여기서 백 장 떨어진 곳의 사기를 느껴? 아무리 초절정이라도 그게 가능해?”
“고개 넘으면 아시잖아요. 우선 움직이시죠.”
“……?”
무공은 고작 일류지만 강호의 숱한 풍상을 겪어 온 장중만. 그 날카로운 시선은 나머지 넷을 향했다. 이 또한 강호의 상식이 만든 행동. 노인과 여자를 조심하라는.
연사구가 그냥 친구라고만 소개한 이들. 다들 죽립을 푹 눌러썼지만 처음 볼 때부터 무윤을 빼고는 예사롭지 않았다.
‘혹시 저 중에? 조심해야겠어.’
느긋하던 모두의 발걸음에 긴장이 가득 실렸다.
사사삭!
* * *
고개 너머 구릉.
채주와 표두 간의 옥신각신이 계속됐다.
“허! 곽 채주. 왜 이러시오? 하루 이틀 본 사이도 아니거늘.”
“케헴! 그래서 하는 소리잖소. 이 정도면 많이 깎아줬지.”
“표국 행렬에 따르는 이들이야 두 당 동전 다섯 문 아니오. 한데 이십 문을 내라니?”
“이보시오! 황 표두. 장사 하루 이틀 하오?”
“무슨?”
“개인 자격으로 표국을 따를 때야 그렇지만, 저들 하오문도는 서른이 넘소. 당연히 단체로 봐야지.”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요! 하오문이 한 문파라면 모를까, 저들은 여러 지역에서 오다 동행했을 뿐인데.”
“에이! 황 표두, 소식이 늦구려. 이번에 뭐 하나 만든다고 다들 떼로 가는 거잖소? 이 앞에도 그리했다니까.”
“허! 그것참!”
“아니면 표국은 빠지시오. 직접 협상하지 뭐.”
“어떻게 그런단 말이오? 이미 약조한 일이거늘.”
그때 하북 하오문 지부장 파운걸이 굳은 얼굴로 나섰다.
“호령산의 호걸들을 뵈오이다. 하북 지부장 파운걸이라 하오.”
“아이고! 딱 맞게 나오셨네. 바쁘실 텐데 빨리 끝냅시다.”
“앞에 간 문도들도 그리했다 하셨소?”
“당연하잖소. 아니면 내가 왜 이럴까.”
엷은 한숨을 내쉰 파운걸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오면서 했던 결심이 굳은 대지처럼 더 단단해졌다.
‘무력단은 절대 안 돼. 반드시 막아야 한다.’
확정도 아닌 안건, 그것도 고작 수십 명인 무력단 하나다. 한데 정, 사도 아닌 산적들이 저리 나오는 판인데.
참담함에 끓어오르는 분노는 장사에 있는 연대광을 떠올리게 했다.
‘눈에 빤히 보이는 일이거늘, 어찌 그런 무책임한 일을 벌인단 말인가. 거기다 소문까지. 내 절대 가만있지 않으리라.’
하지만 눈앞의 일이 먼저다. 화를 억누르고는 중재안을 냈다.
“채주께서 잘못 아셨소이다.”
“내가 뭘?”
“우린 못 만들게 하려고 가는 중이오. 그럴 일은 없을 거외다. 다만 우린 지역별로 왔으니 산채의 법도대로 열 문씩 내겠소이다. 어떻소?”
“크흠! 그건 좀 그런데. 열다섯 문이면…….”
그 순간.
퍼억! 우두둑! 빠각! 우둑!
“크아악!”
“커억!”
“어떤 놈이……. 케엑!”
“크르르르!”
“크르륵! 카르르르!”
산채 일행 뒤편에서 비명과 타격 음이 난무했다.
채주 곽승의 고개가 획 돌아갔다.
“어떤 새끼가 감히 호령채를 건……. 헉!”
순간 모두의 눈이 부릅떠졌다.
“저, 저건!”
“마, 마인이다!”
“헉! 정말! 눈깔이 돌아간 게 광마인이 틀림없어!”
“시팔! 이게 뭔 난리야!”
“뭐 해! 빨리 튀어!”
“야! 이 새끼들아! 뭐해! 빨리 막아!”
“당주! 눈이 삐었소? 저거 안 보여요? 광마인이라고요! 막긴 뭘 막아!”
연신 거친 괴성과 함께 피를 뒤집어쓴 악귀는 여섯. 한데 그 짧은 순간 오십이 넘던 산적들 절반이 피떡이 돼 버렸다. 시시덕거리며 흥정을 보던 중이라 후방 경계는 전혀 없던 상황.
“카르르르!”
“카륵! 칵칵!”
“살려 줘! 케엑!
“제, 제발! 커억!
사방에 흩어진 핏방울이 대지를 가득 적셨다. 비명을 토하고 주저앉은 이 하나 없다. 기괴하게 꺾인 팔다리가 사방에 흩어진 채, 사지 잃은 몸뚱이만 바닥에 펄떡거린다. 고성과 괴성이 뒤섞인 아비규환. 삽시간에 목불인견(目不忍見) 그 자체의 지옥도가 대지에 그려졌다.
멀찍이 물러나 있던 표국 일행에서도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저, 정말 마인이야!”
“헉! 광마인! 그것도 여섯이나!”
이십여 장 떨어졌지만 눈 가득 들어온 모습은 악귀가 틀림없다. 넝마나 다름없는 옷 사이사이 절은 피고름이 딱지가 된 살갗, 눈동자 없는 눈알엔 시퍼런 광망만 번뜩인다. 입가에 흥건한 피를 핥아 내는 혀는 턱까지 날름거린다. 솟구치는 피를 받아먹으려 입을 헤 벌린 자까지.
일행에 있던 한 노인이 이글거리는 안광을 뿜어냈다. 의아함이 가득했다.
‘한 놈도 아니고 여섯이 동시에 나타나?’
호남 최고의 사파, 장사 비천문의 전 가주, 홀로 먼 여행길에 돌아오다 참극을 접한 양호승의 시선이 주변을 훑었다.
‘광마인이 떼로 몰려다닐 리 없다. 분명 누군가 이 근처에 풀어놓았어.’
이성이 완전히 사라진 광마인은 그들끼리 죽이고 물어뜯는다. 그런 악귀가 사이좋게 돌아다닐 리 만무한 일.
그때 언덕 저편에서 달려오는 다섯이 시야에 들어왔다. 앞선 자의 외침이 사방에 쩌렁쩌렁 울렸다.
파파팟!
“이 악귀들이 어디서 감히! 당장 멈추지 못해!”
“야! 폭주하면 무조건 물러나. 괜히 건방 떨지 말고. 알았어!”
“아우! 몇 번째 말해요. 그만!”
“너 때문에 그러잖아! 나대면 죽는다!”
“옙!”
짓쳐 드는 당서하의 시선이 홀로 멍하게 있는 악귀를 향했다.
‘강기를 쓰는 광마인이라.’
이미 무윤에게 광마인 상태를 듣고 작전은 세운 상태. 한데 의아했다.
-뭐? 넌 저자만 맡겠다고?
-나머진 넷이서 충분히 제압합니다. 저자 빼고.
-가장 온순해 보이는데?
-광기가 덜 할 뿐, 저도 힘깨나 써야 합니다. 손끝에 강기가 너울거려요. 저자는 숲으로 유인할게요. 다 보는 데는 그러니까.
-알았어.
한편 나설지 말지 망설이던 양호승의 발이 멈춰 섰다. 사파인 그가 협을 내세울 이유는 없다.
‘지켜보자.’
그렇게 시선이 다시 광마인에게 향한 지 한참, 한 마인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눈이 서서히 커져만 갔다. 어느 순간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마인의 턱선이 눈 가득 들어왔다.
‘낯이 익어. 어디서 봤었나?’
안력을 높인 눈에 점점 더 가늘어질 즈음.
“옴 아모카 미로자나 마하모나라 마니바나마 마바라바라 말다야 훔~~!”
악을 멸하는 진언, 멸악취 다라니. 신기심의공 내력이 가득 담긴 준엄한 울림은 온 산야에 나직이 깔려 들었다.
우우웅!
순간 두려움이 몰고 온 경련이 악귀들의 몸을 휘감았다. 절로 뒷걸음질 치다 쥐어 짜낸 괴성이 공포를 씹어 댔다.
“카아악! 카악!”
“쿠르륵!”
멍하니 있던 한 마인의 고개가 뭔가에 홀린 듯 들쳐지던 순간.
양호승의 온몸이 벼락 친 것처럼 들썩였다.
‘너는!’
경악 어린 눈이 한순간 멍해졌다. 믿기지 않은 현실에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중건아! 네가 어찌!”
십여 년 전, 갑자기 사라진 제자 양중건, 그가 눈앞에 있다.
피 칠갑을 둘러쓴 마인의 모습으로.
순간 격동하는 가슴은 대지를 박차게 했다.
파팟!
천마라 불린 내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