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천마라 불린 내 친구-112화 (112/161)

112화

당서하는 궁금한 것부터 꺼냈다.

“내 몸도 대략 파악이 돼서 그렇게 한 거야? 아니면?”

“내력 흐름을 자세히 몰라 알려 줄 게 없었습니다. 근데 편법이 원형이란 말에 갑자기 이 줄이 생각난 겁니다.”

“줄이 편처럼 흐느적거려서?”

“생각은 그래서 떠올랐는데 중요한 건 줄이 여러 가닥이라는 거죠.”

“다양한 궤적을 보여 준다?”

“예. 내력 흐름을 비슷하게 하고 여러 줄을 흩날리면, 그 선들이 수많은 궤적을 그릴 거고, 그게 혹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 싶었죠.”

“역시! 그래, 그게 맞아.”

“자세히 설명 좀 부탁합니다. 저도 궁금해서.”

당서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는 말문을 열었다.

“처음엔 여러 궤적에 정신이 없었어. 그러다 편의 투로가 떠오르면서 하나만 선명하기도 하고, 선 몇 개가 뭉치기도 하고. 하여간 그때는 멍했는데 선에서 빛이 나는 순간 확 달라졌지.”

“빛?”

“그래. 빛 때문에 허공에 잔상이 남잖아. 그게 이리저리 겹쳐지니까 생각지 못했던 게 막 떠오르는 거야. 그러다 망아에 들었지.”

이건 전혀 몰랐던 사실. 확인차 다시 물었다.

“그럼 선보다 그 빛이 더 주요한 겁니까?”

“둘 다 같은데. 우선 줄이 사방으로 흩날리니까 내 생각보다 검로에 고정관념이 많다는 걸 알았어. 그래서 궁리하던 중에 빛이 심상에 확 들어오니까 해답이 떠오르더라고. 둘 다 있어서 가능했을 거야.”

“그게 맞겠네요.”

그때 잠시 고민하던 당서하는 결국 묻기로 했다. 당가의 자존심을 약간 죽이더라도 너무 알고 싶은 게 있다.

“너 솔직히 말해 줬으면 해. 절대 뭐라 안 할 테니까.”

“뭔 얘긴데 그럽니까? 겁부터 나네.”

“호연십팔검, 네가 보기엔 어때? 부족해 보여?”

이럴 땐 상대를 마주한 눈빛에 한 점 흔들림도 없어야 한다.

“전 평가할 자격도 없고 또 그럴 만큼 보지도 못했습니다. 다만 이 말씀은 드리고 싶네요.”

“어떤?”

“제 조사님이 이런 말을 남기셨습니다. 당가의 무공은 대단하다고. 완성이라고 하셨죠. 천 년 전에 말입니다.”

당서하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이보다 더한 칭찬이 어디 있을까.

“정말 그러셨단 말이지?”

“예. 근데 당가를 떠나 모든 가문의 무공이 가진 한계는 꼭 감안하셔야 합니다.”

“어떤?”

“잘 아시겠지만 한 사람을 위한 무공이 아니잖아요. 누군 팔이 길고, 다리가 짧고 허리가 길고, 그런 제각기 다른 몸이 문제없이 익히려면?”

“모든 걸 포용하다 보면 모난 부분이 없어진다 이거지? 그 중엔 내게 맞는 것도 있을 텐데.”

“예. 누구나 알지만, 누구도 쉽게 가지 못하는 그 길, 그 한계를 넘어서야 극의까지 가실 겁니다.”

순간 당서하의 굳은 결심 하나가 심중의 걱정과 불안을 억눌렀다. 이 장원에 있는 내내 망설이던 그것.

‘몸에 무공을 맞추는 거. 나도 해 본다.’

가문의 무공을 훼손하는 게 아니다. 단지 자존심만 누그릴 뿐이지. 그렇게 마음먹기로 했다.

“나도 해 볼 수 있을까? 진이나 사구처럼.”

“……제가 뭘 걱정하는지 아시죠?”

“우선 해 보자. 문제가 될 만하면 내가 멈출게. 그리고 내가 어디다 떠들 사람이야?”

“……!”

본인의 의지. 이러면 힘닿는 데까지 돕는다. 정말 그래 주고 싶은 무인이니까.

그때 하후진의 아쉬운 탄성이 흘렀다.

“하! 그거 생각할수록 정말 아깝네.”

“뭐가?”

“줄이 곡선이 아니고 직선이면 검에도 적용될 거 아냐. 나도 지금 이것저것 바꿔서 머리가 복잡하거든. 뭔가 떠오르는 것도 있고. 저게 검로와 비슷하면 딱 좋은 데 아쉬워.”

무윤의 얼굴에 웃음꽃이 번졌다.

“된다.”

“응? 뭐가?”

“내력 성질을 조절하면 직선도 가능해. 길이도 검에 맞추면 되고.”

하후진의 눈에 불꽃이 일었다.

“야! 바로 하자.”

“자식! 급하기는. 알았어. 사실 나도 궁금해.”

“다른 게 있어?”

“네 내력하고 초식은 대략 알잖아. 어설프게 아는 당 조장님하곤 다르지. 그 차이가 어떨지 해서.”

가만있을 연사구가 아니다.

“그럼 내가 먼저지. 나만큼 날 잘 아는 놈이 너잖아.”

“순서 따질 게 뭐 있어. 연달아 하면 되지.”

“뭐 그건 그러네. 알았다. 진이 먼저.”

진서연도 슬며시 껴들었다. 이런 거라면 빠질 수 없다.

“마지막에 저도……. 제 내력도 대략 알잖아요.”

그때 당서하가 버럭 했다.

“야! 이 언니가 벽을 깬 이 순간에 딴짓을 해! 제대로 축하도 안 하고서는. 이것들이 정말!”

“…….”

내실로 들어가는 그때, 무윤을 바라보던 당서하의 시선이 아련해졌다. 지난 며칠의 행동이 알려 주는 사실.

‘일부러 그랬어. 날 도와주려고.’

그 이유도 알기에 어떤 의심도 없이 고마움만 가슴을 저려 온다.

야접과 결전 당시 오자마자 마주쳤을 때 무윤의 눈빛. 모를 수 없다. 멸마단 대원들과 전장에서 나눴던 그 색이 분명한데.

‘내가 당문이라 조심스럽게 도와준 거야.’

초롱초롱한 시선이 가볍지 않은 설렘으로 떨린다. 이미 두 번의 전장에서 알았다. 무인의 등을 내맡기며 같이 갈 동료란 건.

한데 방금 하나가 추가됐다. 선의 가득 담긴 마음 씀씀이가 코끝을 알싸하게 간지럽히는 순간.

‘친구, 그리고 동생.’

평생을 같이할 친구이자 동생이 됐다. 나머지 셋 또한.

삶의 굽이굽이 같이 걷는 길이 즐거움이 될 이들.

내 가슴이 휑하면 다가와 잠깐이라도 푸른 하늘을 넣어 줄 벗.

잠시 터놓고 의지해도 나약하다 타박하지 않을 친구.

이들이라면 그저 믿음으로 같이 가면 된다.

그 결연한 결심이 눈 가득 반짝일 때, 연사구의 고성이 울렸다.

“뭐 해요, 안 들어오고! 축하해 달라며.”

당서하가 가장 기분 좋을 때 생각나는 것.

“……술 없냐?”

“갈무리부터 해야지, 미쳤어요? 아직도 정신이 멍해요?”

“말짱해.”

“하긴 원래 좀 그랬지.”

“뭐! 이 새끼가 정말!”

“어! 그렇게 성질내다 깨달음 날아가요!”

“……!”

결국 다음 날부터 줄을 이용한 수련이 시작됐다.

이레 후, 악양 인근 산길.

나뭇가지 넘나들던 바람이 풀잎 살짝 흔들어 봄 향기를 전했다.

대주 정원의 흐뭇한 시선이 떠나는 이들을 향했다. 장사(長沙)로 향하는 다섯을 배웅하기 위해 온 걸음.

“허허! 정말 다행이야. 다들 멀쩡히 회복해서 저리 가니.”

팽중호의 웃음엔 따스함이 가득 담겼다.

“회복뿐입니까. 서하는 벽을 넘었고 서연이도 달라진 거 같던데요.”

“그러게 말일세. 그 싸움이 약이 된 모양이야.”

“참! 다른 친구 둘도 만만치 않던데요.”

한 달 동안 수시로 들른 터라 수련하는 걸 여러 번 봤다.

“연 당주야 저번 일로 알았지만 하후진 그 친구도 대단하더군. 나이도 그리 어린데.”

팽중호는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그 친구와 천 방주가 동갑입니다.”

“천 시주는 빼야지. 이젠 나도 가늠이 안 되는 무인인데.”

“어디까지 갔는지 정말 궁금한데, 혹 단주님이 말씀 없으셨습니까?”

“허허! 그리 궁금한가?”

“들으신 게 있군요?”

“가시기 전에 그러시더군. 감당 못 할 일이 생기면 무조건 먼저 찾아가라고.”

“……무조건이라. 참 애매한 말씀이네요.”

“그래도 하나는 확실하지.”

“어떤?”

“천 시주가 있는 한, 우리 대원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그러네요.”

멀어져 간 이들이 시야에서 사라질 즈음, 두 사람도 발걸음을 돌렸다.

이틀 후, 장사에서 삼십여 리 떨어진 산길.

“난 밤이 딱 좋아.”

“그래? 난 한낮이 더 좋던데.”

연사구와 하후진 대화에 당서하가 껴들었다.

“뭔 얘기야?”

“참! 당 조장님은 언제가 좋아요?”

“뭐가?”

“무윤이 놈 은선 가지고 수련하는 때요.”

“아! 그 얘기였어? 한낮엔 은선이 그리는 검로가 잘 보이고 밤엔 은선 빛 잔상이 잘 보여서?”

“예.”

“난 석양 질 때. 둘 다 적절히 섞였을 때가 생각이 잘 떠오르더라고.”

진서연의 궁금한 시선이 무윤을 향했다.

“저 말 어떻게 생각하세요?”

“각자 필요한 게 달라서 그런 거겠죠. 은선 자체는 초식, 잔상의 크기와 밝기는 내력 상황을 보여 주니까.”

“그러네요. 전 요즘 내력 운용에 집중하는데, 밤에 보는 게 좋더라고요.”

소려의 선물, 은줄로 하는 수련법 효과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다들 호들갑 떨기에 충분할 만큼.

내력을 담아 초식과 비슷하게 은줄을 뿌리는 건 검로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 주는 정도뿐. 한데 상대의 내력 흐름을 느낀 대로 줄에 담아 빛으로 뿌려 내면, 내력의 강약, 빠르고 느림에 따라 빛의 크기, 밝기가 달라졌다.

‘내력 운용의 변화를 눈으로 확인하는 셈이지.’

무윤이 생각해도 획기적인 방법. 단 명확한 한계가 있다. 해당 심법을 정확히 알아야만 큰 도움이 된다는 것. 아니면 그저 영감을 주는 정도뿐.

하후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세상에 이런 수련법이 있을 줄 누가 알겠어.”

연사구는 커다란 웃음이 절로 흘렀다. 셋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효과를 본 자신이니까.

“누가 아니래. 난 그 빛만 보면 어떻게 내력 운용을 하면 좋을지 막 떠오른다니까.”

은월청요검은 무윤이 만든 검법. 연사구와 똑같은 내력 운용이 가능하기에 벌어진 일.

“야! 그건 너만 그렇지. 우린 아니잖아.”

“저놈하고 좀만 붙어 다니면 너도 그렇게 되잖아.”

무윤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후진은 그렇다 치고 두 여인의 반짝이는 눈빛은 감당할 수 없다.

“야! 너야 내가 심법을 아니까 그런 거고. 왜 다른 사람까지 바람 넣고 그래!”

“그냥 해 본 소린데 성질까지 낼 건 없잖아.”

“어쨌든 말은 가려서……. 누가 온다.”

“……?”

잠시 후, 다른 길과 합쳐지는 오솔길 저편에서 대여섯 명이 다가왔다.

연사구의 눈이 살짝 커졌다.

“어!”

“아는 사람?”

“안휘 지부장님이셔. 회의 때문에 오시는 모양이네.”

“……!”

연사구를 알아본 자가 황급히 달려왔다. 놀란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타다닥!

“너 사구…… 맞지?”

“예, 지부장님. 몇 년 만인데 딱 알아보시네요.”

안휘 지부장 장중만은 덥석 잡은 손을 연신 매만지고는 눈물을 글썽거렸다.

“아이고 이놈아! 어디 있었어? 갑자기 사라져서 얼마나 놀랐던지!”

“시끄러울 땐 숨는 게 최고죠. 헤헤!”

순간 장중만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정말 묻고 싶었던 말.

“그거……. 정말이지?”

“그럼요. 보여 드려요?”

그때 따라온 하오문도들의 말문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정말 연 대협이다!”

“들었지? 은월청요검이 진짜래!”

“와! 우리 하오문에도 이런 날이 오다니!”

“우리 깔보는 놈들 이제 다 죽었어!”

어느새 연사구를 둘러싼 이들의 환호성이 숲속에 가득 찼다.

네 사람은 슬며시 자리를 물러났다.

사사삭!

한참을 바라보던 하후진은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예상은 했지만 보자마자 저 정도라니. 장사에 가면 난리가 나겠다.”

“그러게.”

당서하의 미간은 오히려 좁혀졌다. 앞으로 연사구에게 닥칠 일 때문이다.

‘난 말리고 싶은데.’

동료였다면 하지 않을 생각. 연사구의 꿈이 뭔지 아니까. 하지만 동생이라 여긴 이후론 내내 신경이 쓰인다.

잠시 생각하다 결론을 내렸다.

‘말릴 수 있는 건 저놈밖에 없지.’

그놈을 향해 말문을 열었다.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게 좀 그렇긴 한데.”

“……왜 또 무섭게 그럽니까?”

“딴 건 그렇다 치고, 은월단 조직 논의에서 사구는 빼면 안 될까?”

“왜요?”

“하오문은 한 문파가 아니라 완전히 독립 체제잖아. 각 지부가 삼백 년 동안 각자 커 왔어. 이름만 같이 쓸 뿐 연합체라 할 수도 없지. 근데 절대무공 하나 생겼다고 갑자기 무력 조직 하나를 만든다? 그게 쉽게 될까?”

“난관이 많겠죠. 그래서요?”

“그냥 저놈이 걱정돼서 하는 소리야. 솔직히 난 조직 만들지 말고 사구가 그냥 상징적인 존재로 남았으면 해. 그럼 문도 누구나 사구를 보면 저렇게 좋아하겠지. 근데 조직이 생기면? 다 남인데 분쟁은 필연적으로 생길 거고 그 중심에 저놈이 있게 되겠지. 그럼 지금처럼 저놈이 웃을 수 있을까?”

생각이 비슷한 하후진도 슬쩍 운을 뗐다.

“솔직히 내 생각도 그런데, 넌?”

두 사람 마음을 모를 수 없다. 하지만 연사구와 수없이 얘길 나눠서 안다. 지금은 가야 할 때란 걸. 이럴 땐 그저 환한 웃음이 답이다.

“저놈이 하고 싶다는데 어떡합니까? 자기 꿈이라는데.”

진서연도 솔직한 마음을 꺼냈다.

“저도 헷갈리는데, 지금은 그냥 응원할래요.”

“왜?”

진서연은 연사구를 가리켰다.

“보세요. 저렇게 활짝 웃는 거 본 적 있으세요?”

“……!”

그제야 알았다. 평소와는 다른 웃음인 것을.

연사구의 꿈은 이제 시작.

친구는 옆에서 같이 지켜봐 주면 된다.

그러다 도울 수 있으면 좋고. 둘이 고민하다 만든 해법처럼.

천마라 불린 내 친구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