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담벼락 넘어가는 햇살이 오물거리며 석양을 불러올 즈음.
손에 묶인 여러 가닥 은빛 선이 허공을 가르며 소나기처럼 뿌려졌다. 살랑인 바람 속삭임에 간지러운 듯 흐느적거린다.
화라락!
드높게 뿌려진 은선(銀線)의 휘어짐이 또 다른 바람을 부른다. 옥 구르듯 맑은 소리가 아래로 깔리면서 정원 가득 퍼져 간다.
사라락! 사사삭!
따라 흔들리는 손도 바람 속삭임에 춤을 췄다.
양손의 은선이 펄럭이는 무복 자락 따라 허공에 넘실거렸다. 은선에 부서지는 햇살이 모두의 눈을 부시게 한다.
춤을 처음 보는 당서하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야! 멋진 춤이네. 언제 저런 걸 배웠대?”
진서연의 미소가 의미심장해졌다.
“오래됐어요. 눈여겨보세요. 보기 힘든 춤이니까.”
“그래? 알았어.”
한 걸음 짚어 뗀 발이 바닥을 쓸어 갔다. 여인네 발길처럼 사뿐사뿐 발이 날아다닌다. 부드러운 무릎과 허리 놀림에 물결처럼 몸이 덩실거린다.
스르륵!
단아하고 정갈한 춤사위에, 휘날리는 무복 자락과 빛에 싸인 은선이 당서하의 눈가를 아른거렸다. 탄성은 이럴 때 나온다.
“하! 멋지네!”
부드러운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손의 흩뿌림, 장중하면서도 무겁지 않은 몸놀림이 연이었다.
사락! 휘릭!
풀어 헤친 머리처럼 유려한 선이 하늘에 아롱졌다. 지나간 자리엔 흐드러지게 핀 백합 꽃송이처럼 은선에 부서진 햇살 향기가 바람에 넘실거렸다.
서서히 놀려지는 몸이 빨라져 갔다. 허공을 가르는 몸과 흩날리는 줄은 물 위에 춤추는 학의 날갯짓을 떠올렸다. 하늘에 뿌려진 줄은 날개를 휘저어 하늘로 날아올랐다.
화라락!
당서하의 눈이 몽롱해져 갔다. 남자의 춤이라 여겨지지 않는다.
‘아름다워.’
어느새 춤사위는 눈앞에 물결치는 잔잔한 파도로 넘실거렸다. 힘차게 허공에 뿌려진 줄이 하늘거리는 승려의 장삼을 떠올리게 한다. 하늘 향해 팔 벌린 날갯짓은 천지를 연결하려는 몸짓 같다. 그 허공을 가르는 팔에 뿌려지는 줄은 소나기 같다.
하후진의 탄성이 연이었다. 무윤의 춤을 보는 건 오랜만이다.
“하! 예전하고 달라.”
“그럼! 침주에 있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지.”
“언제 저렇게 는 거지? 화경에 올라서 그런가?”
“여동생이 준 선물이란다.”
“응? 뭔 소리야?”
“지금은 보기나 해. 나중에 알려 줄게.”
“……?”
몇 개의 춤사위가 허공을 가르고, 디딤과 돋움의 발길이 빨라질 무렵, 매인 곳 없이 떠돌던 바람이 몰려들었다. 무복 자락 팔락이다 허공에 뿌려진 은선 따라 세찬 바람이 됐다. 부드러움 떠나간 자리에 빠름이 찾아들었다.
휘이익! 휘릭!
유려한 발 디딤새도 더욱 빨라졌다. 휘도는 춤사위는 풀어 헤친 머리처럼 하늘에 은선을 뒤흔들었다. 흔들림에 따라온 바람이 사방으로 은선의 울림을 흩뿌렸다.
휘이익! 스르릉!
그때 미소로 가득 찼던 당서하의 눈에 의아함이 깃들었다.
‘저 선? 혹시?’
허공 가득 뿌려지는 은선, 그 은백색이 그려 내는 무수한 선의 궤적이 너무나 눈에 익다. 그려 내는 선이 심상에 있는 그 어떤 것을 콕 꼬집어 낸다.
‘호연십팔편(浩然十八鞭)!’
혹시나 하는 마음이 서서히 확신이 되어 갔다. 편법에서 파생된 호연십팔검, 그 배움에 편(鞭, 채찍)이 빠질 수 없다. 수없이 허공에 휘저은 편의 궤적, 그 심상의 선과 은선이 겹쳐진다.
그렇게 쳐다보길 한참, 두 눈이 불타올랐다.
‘투로가 맞다.’
이젠 의심의 여지가 없다. 다음에 펼쳐질 편의 궤적을 떠올리면, 곧바로 진홍빛 석양에 아롱지는 은선이 그리 펼쳐지니까.
의아함이 물밀듯 밀려 온다.
‘어떻게?’
추측이라고 해 볼 수 있는 건 하나뿐.
‘수련하는 걸 보긴 했어.’
좁은 장원이라 한곳에서 같이 수련할 수밖에 없었다. 무윤도 여러 번 주변에 있었고. 하지만.
‘이상해. 편이 없어서 검만 봤는데.’
검로는 편 궤적의 일부분일 뿐 분명 다르다. 검이 가능한 편의 투로만 따왔으니. 한데 은선은 보여 준 적도 없는 편의 궤적을 대부분 그려 낸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당장이라도 달려가 묻고 싶다. 한데 지금은 그럴 수 없다. 아니 그래선 안 된다.
‘잡힐 거 같은데.’
은선을 보다 머릿속에 풀어 헤쳐진 수많은 검로, 그동안 잡힐 듯 말 듯했던 초절정의 실마리, 그걸 끄집어낼 것 같은 무인의 직감이 발길을 잡아챈다.
가슴이 떨려 온다. 혈관과 심장, 맥박을 달구는 열기가 온몸에 휘몰아친다.
지금은 지켜봐야 한다. 단 한 번의 눈 깜빡임도 없이 뚫어지게.
춤사위는 더 빨라졌다. 곧게 뻗은 팔이 허공을 갈랐다. 거센 바람에도 제 팔다리인 양 허공을 활개 쳤다.
휘리릭! 화라락!
한동안 춤사위가 더 이어질 무렵, 바람에 흩날리는 은선을 보던 이들의 눈이 점점 더 커져 갔다.
연사구의 말문이 절로 열렸다.
“저거, 은선 자체에서 빛이 나는 거 맞지?”
“그러게. 아까까진 햇빛에 비쳐서 그랬는데 지금은 아닌데.”
“빛이 더 진해지는데.”
“내력을 주입한 모양인데. 검기같이.”
“야! 그 빛깔 참 곱다.”
하후진은 문득 의아함이 생겼다.
“……설마 저거 강기는 아니겠지?”
“에이! 설마 저런 얇은 줄이 그걸 버티겠어?”
“하긴!”
그때 점점 그 빛을 더해 가던 은선이 어느 순간 세차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바람 소리 더한 울림이 정원가득 기의 파동을 전했다. 손끝 여린 놀림에도 바람 따라 나부끼며 웅혼한 기운을 마음껏 뿌려 댔다.
우우웅! 위이잉!
하후진의 놀란 입이 다시 열렸다. 조금씩 몸을 옥죄던 뭔가가 이젠 살갗을 아려 온다. 예전에 무윤이 펼쳤던 그 기운과 동일한 느낌.
“저거, 강기 아냐?”
“어째 기운이……. 그런 거 같지?”
“맞는 거…….”
그때 진서연의 전음이 두 사람의 귓전을 때렸다.
-조용! 언니가 심상에 든 거 같아요.
-……!
넋 없이 바라보는 시선, 몽롱한 눈빛, 전신에 새어 나오는 기운이 알렸다. 망아에 들었음을.
연사구는 입만 삐죽여 하후진에게 전음을 보냈다.
-뭐냐? 난 아무것도 안 떠오르는데.
-나도. 저 은빛 기운 말고는.
-여자라 그런가? 춤에서 느끼는 게 다른 가 보네.
-그나저나 저놈 멈추게 해야지 않겠어? 자꾸 기운이 세지는데.
-그러자. 아니면 당 조장 깨겠어.
연사구가 막 전음을 보내려는 찰나, 어깨춤 너울거리던 손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왔다. 몸을 옥죄던 기운도 사라져갔다.
스르륵!
세차게 팔락거리던 무복 자락이 완전히 잦아들 즈음.
무윤의 입가에 포근한 미소가 겹겹이 쌓여 갔다. 우선 당서하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생각보다 잘됐어.’
작정하고 벌인 일. 숲속에서 소려가 남긴 줄로 춤을 추다 문득 떠오른 게 있었다.
‘여휘 놈이 천라무로 천마신공을 가르쳤다고 했지. 어떻게 했을까?’
여휘의 천라무는 살피기만 했을 뿐 해 보진 않았다. 그렇게 고심하다 어렴풋이 감이 왔다.
‘춤에다 기운을 실어 전했거나, 보여 줬거나 둘 중 하나겠지.’
그러다 당서하가 떠올랐다. 수십 번 옆에서 호연십팔검을 펼친 터라 기운은 익숙했다. 거기에 더해진 생각.
‘편법에서 검이 유래됐다고 했지. 그럼 이 줄에 그걸 담아 보면?’
그 생각이 부른 춤사위였는데 잘 들어맞은 거 같다. 물론 나중에 잘 설명해야 하지만.
거기에 또 하나 미소 짓게 하는 것.
‘소려가 남긴 선물이 또 있었어.’
줄에 내기를 넣어 본 건 오늘이 처음. 조심스럽게 기운을 올리다 어느 순간 알았다. 강기도 버틸 수 있는 줄이라는 걸.
물론 소려는 무기로 이걸 만든 게 아니다. 의심할 여지없는 확신이다.
‘저 은색 빛, 그걸 보여 주고 싶었던 게지.’
강기가 뿜어질 때 나는 은백색의 영롱한 빛, 그게 소려의 또 다른 선물이다. 빙옥섬수의 푸른빛에 대한 화답의 표시. 그 마음도 짐작이 간다. 천설청옥의 푸름이 잔뜩 서린 피리는 과거의 추억으로, 은백색의 맑고 깨끗함이 서린 이 줄은 새로운 세상에서 밝게 살아가라는 뜻.
그런 마음이 담긴 소중한 줄. 이걸 무기로 쓸 생각은 추호도 없다. 이 빛깔에 피를 덧칠하다니, 용납이 안 된다.
‘소려도 내가 그럴 걸 아니까 이리한 게지.’
아련한 시선이 허공을 향했다. 이 빛을 알아보고 환하게 웃는 자신, 그걸 상상하며 살포시 미소 지었을 그녀가 눈가에 아른거린다. 가슴이 따스해진다.
‘고맙다. 잘 간직하마.’
어둠 덜 깃든 저녁 하늘이 들뜬 마음 담아 선홍빛으로 벌겋게 달아올랐다.
* * *
두 시진 후.
석양 따라온 별빛이 제 색을 드러낼 즈음.
깨우침을 찾은 당서하의 머릿속은 비어짐에 고요해졌다. 기쁨의 눈물 한 방울만 뺨 따라 또르르 흘렀다.
‘이제야……!’
은은한 설렘으로 다가오던, 빛나는 선이 건네준 무념무상. 저절로 눈이 감기고 일순 떠오른 상념은 심연을 불렀다.
얽혀 있던 구결들이 하나둘 풀려 가며 연이어 다른 구결을 불러오길 한참, 녹아들던 깨달음이 거대한 흐름처럼 뇌리를 휘돌다가, 어느 순간 한 줄기 빛처럼 뇌리를 관통했다.
그 광휘의 빛을 가슴에 다 담아낼 즈음, 맑아진 머릿속과 새털처럼 가벼워진 몸이 알렸다.
‘벽을 깼어.’
얼마 후, 격정을 가라앉힌 눈이 주변을 훑다 가만히 한 곳을 향했다. 고개가 절로 숙여졌다. 의문이 가득했지만, 지금은 진정을 담아 감사를 전해야 할 때. 한마디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고마워.”
“아닙니다. 전 길만 인도했고, 찾아낸 건 본인입니다. 축하드립니다.”
연사구가 입을 삐죽였다.
“야 인마! 이럴 땐 그냥 웃어. 그런 말이 상대를 더 미안하게 하는 거 몰라? 누가 봐도 네 덕분인데.”
무윤은 단호히 고개 저었다.
“도운 건 맞지만 스스로 깬 겁니다. 이제 아실 텐데요?”
당서하도 일부 짐작은 간다. 하지만 듣는 게 먼저.
“해 줄 말이 있지?”
무윤도 궁금한 게 있다. 이 방법이 당서하 외에도 쓰일 수 있는지. 그걸 알자면 우선 자세히 알려야 한다. 이후 그녀 말도 들어 봐야 하고.
“제가 호연십팔검 진기 흐름을 대략 파악한 건 아시죠?”
“네 기운이라면 그랬겠지. 여기서 수십 일 같이했는데.”
“아까 춤은 그 흐름을 제 몸에 담은 다음 편법처럼 은선을 뿌려 본 겁니다. 아! 오해는 마세요. 그런다고 전 심법을 파악할 순 없습니다. 흐름만 흉내 낼 뿐이지.”
당서하는 명확히 알고 싶었다.
“그 흉내가 도대체 어디까지야? 진이 저놈 교정하는 거 보면 심법을 다 아는 거 같던데.”
이 오해는 확실히 불식시켜야 한다.
“그게 말이나 됩니까? 옆에서 기운만 훑어보고 심법을 안다면 천하제일은 따 놓은 당상이겠네요.”
“그럼 넌?”
“전 몸의 반응, 정확히 말하면 운기나 초식을 펼칠 때 몸이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정도만 압니다. 거기에 내력 흐름을 더해서 어떤 동작과 운기를 몸이 가장 좋아하는지, 그걸 찾아서 알려 주는 거죠. 더도 덜도 말고 이게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답을 미리 아는 게 아니라, 그 반응을 보고 답을 찾아간다 이거네?”
“예.”
“근데 몸의 반응은 어떻게 알아?”
“여러 가지인데, 심장과 혈류 반응이 가장 티가 납니다. 근데 사람마다 다 달라서 오래 지켜봐야 파악됩니다. 사구나 진이는 그래서 쉽게 고치는 거고. 아니면 어렵습니다.”
그제야 당서하도 얼추 이해가 갔다.
‘그럴 수 있겠어.’
더 고수인 자가 상대를 파악하듯, 남보다 더 세밀하게 살필 뿐이다. 그게 특히 몸에 집중된 것이고.
이제 자신에 대해 물을 때다.
깨달음 이후엔 대략 짐작되는 그것.
천마라 불린 내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