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닷새 후, 일행이 묵는 장원.
휙! 슈욱!
“검이 너무 올라갔어!”
“응?”
“팔만 신경 쓰면 어떡해! 무릎 뒤 위중혈(委中穴)에 더 내력을 올려야 뻗는 방향이 일체가 되지.”
“아우! 누가 몰라! 아직 거기 아프다고!”
“그러게 며칠 더 있다 하자니까 고집은. 좀 쉬었다 해.”
연사구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미 온몸은 땀범벅이다.
턱!
“아우! 상처가 욱신거려서 영 맘대로 안 되네.”
무윤의 손이 연사구 어깨에 올라갔다.
“급하게 생각할 거 없어. 너야 입문공 은월십이검(隱月十二劍) 초식은 며칠이면 숙달해. 다 은월청요검식 안에서 풀어낸 건데.”
연사구는 뜨겁게 달궈진 숨을 뿜어냈다. 눈빛엔 열기가 가득 서렸다.
“후! 알지. 근데 내가 이제 전체 문도의 사부가 되는 거잖아. 그 생각하니까 가만있을 수 없더라고.”
“자식! 이제야 이 사부 맘을 좀 알겠구나.”
“아니라고 하고 싶다만, 가르칠 생각으로 해 보니 정말 다르네. 보여 주는 게 끝이 아니잖아. 틀리면 고쳐 주고 상대의 특성도 파악해야 하고. 그걸 고민하다 보니까 생각이 정말 많아져.”
“그건 좋은 현상이고. 사부가 돼 가는 과정이니까. 다만 부담이 앞서면 안 좋은 거 알지?”
“머리야 알지. 근데 마음은 답답해. 내가 너무 급한 건가?”
“그 정도 욕심이야 나쁠 거 없지. 근데 잘하겠다는 생각 말고 해 주고 싶은 그 마음만 떠올려. 난 그게 최고더라.”
“그렇겠지?”
“내가 한두 명 가르쳐 봤냐. 믿어라.”
“하긴!”
정원 한쪽에서 바라보던 당서하가 피식거렸다.
“참 별일이네. 두 놈이 안 싸우고 저러다니.”
진서연은 이미 침주에서 여러 번 본 모습.
“비무 땐 욕이 날아다니는데 끝나면 저래요. 연 당주도 배울 땐 진지하더라고요.”
“하긴! 가르치는 놈이 아무리 대단해도 저런 자세 없이 그 경지에 오를 순 없지.”
“그나저나 벌써 시작하는 건 무리 같은데.”
“저놈 눈 봐. 빛이 반짝반짝하잖아. 하오문을 자기가 책임진다고 생각하니까 저럴 수밖에.”
“이해는 가요. 나라도 저럴 거 같으니까.”
두 여인과 하후진도 연사구가 터트린 일의 전모를 들었다. 그 일 때문에 죽을 뻔했고, 단주 각운이 두 여인에게 당분간 무윤과 같이 움직이도록 지시한 상황이라 알아야 각자 대처하니까.
그때 하오문의 계획과 무공에 대해서도 세세히 들었다.
당서하는 문득 궁금한 게 떠올랐다.
“참! 하오문에 줄 무공이 두 개라고 했지?”
“예. 입문용 은월십이검(隱月十二劍), 중급용 청요단월검(靑雲斷月劍).”
그때 다른 편에 있던 하후진이 무윤 앞으로 나섰다. 이미 검식을 교정하기로 마음을 굳힌 이상 끌 이유가 없다.
“내 검, 봐줬으면 한다.”
무윤의 눈이 살짝 커졌다. 저 말은 곧 가문을 나오겠다는 뜻.
“마음 굳힌 거냐?”
“결정은 예전에 했잖아. 이번 일 때문에 빨라진 거지.”
그래도 마지막으로 물어야 했다.
“검만 고치고 가문에 남는 건? 나오면 돌아가기 힘들어.”
“날 모르냐?”
“……알았다.”
“바로 시작했으면 하는데.”
“벌써? 몸은 괜찮아?”
하후진도 무윤이 연사구에게 어떻게 했는지 대략 안다.
“심법부터 손볼 거잖아. 운기는 가능해.”
무윤은 싱긋 미소 지었다. 이미 수백 번 대련하면서 문제점과 개선책은 거의 파악해 뒀다.
“언젠간 그럴 줄 알고 살펴 뒀다. 심법부터 교정하고 초식은 움직일 수 있을 때 다듬자. 한 달 안에 끝날 거야.”
“그래? 그럼 당장 하자.”
“하여간 두 놈 다 급하기는. 알았어. 방으로 들어가자.”
그때 눈이 커다래진 당서하가 뛰어왔다. 강호의 금기를 깨트린 대화로 들려서다.
타닥!
“야! 너희 도대체 뭔 짓을 한 거야?”
“뭐가요?”
당서하가 추론할 수 있는 상황은 빤했다.
“진이 너! 가문의 심법을 저놈에게 알려 준 거야? 들키면 어쩌려고 그런 짓을 해! 그리고 무윤 너도 마찬가지. 그걸 들으면 어떡해!”
연사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심법 몰라도 저놈은 고쳐요. 초식도 물론이고.”
당서하는 우선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럼 심법을 가르쳐 준 건 아니란 말이지?”
“물론”
그래도 당서하는 버럭 했다. 해선 안 될 일이니까.
“야! 근데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하고 그래! 화경이니까 기운을 잘 읽는 건 알겠어. 그래도 심법을 모르고서 뭘 고쳐? 그러다 큰일 나는 거 몰라?”
“왜 나한테 그래요? 따질 거면 저놈한테 해야지.”
당서하의 의아한 시선이 무윤을 향했다. 생각 없이 그럴 놈이 아닌 건 안다. 하지만 아무리 화경이라도 강호의 상식을 벗어난 일.
‘그래도 이건 위험해.’
그 마음이 결국 의구심만 남게 했다.
“이게 뭔 소린지 설명해 줄 수 있어?”
헐레벌떡 뛰어올 때부터 예견한 질문.
“제 기운이 특이해서 타인의 기운을 잘 읽습니다. 화경 이전에도 마인을 판별한 걸 보면 아시겠죠?”
“그건 알지. 그래도…….”
“정확히 말하면 심법과 초식을 고친다기보다, 전 몸에 최적인 운기 경로와 초식을 찾아서 알려 줍니다. 그걸 익힌 자가 다시 역으로 심법과 검식에 적용하는 거고요.”
“……엎치나 메치나 같은 얘기 아냐?”
“다릅니다. 심법을 고쳐서 익히는 게 아니고 몸이 원하는 걸 찾은 다음 그걸 반영하는 거니까. 즉 검법에 몸을 맞추는 게 아니라 몸에 검법을 맞추는 거죠.”
“말은 알겠어. 근데 결국 심법을 모르고 고치는 건데 안 위험하다고?”
이럴 땐 싱긋 웃는 수밖에 없다.
“지켜보시면 알 겁니다.”
“……!”
옆에 따라온 진서연의 표정은 모호했다. 며칠 전 무윤이 바라타나티암 심법을 살피던 기억 때문이다.
‘내 몸의 흐름을 완벽히 알아냈으니까 그 미세한 차이를 짚어 낸 거지. 근데 그렇다고 심법구결 없이 교정이 가능할까?’
무인으로서 가질 수밖에 없는 호기심이다.
두 여인은 하후진을 유심히 살피기로 마음먹었다.
한편 무윤의 눈빛도 깊어져 갔다. 하후진과의 대화를 굳이 감추지 않은 이유가 있다.
앞으로 닥칠 많은 위험은 불 보듯 환한 일. 거기에 자의 반, 타의 반 엮여 있는 네 사람.
‘세상에 나서기로 한 이상, 나와 같이 있다 보면 위험은 더 커진다. 이 기회에 조금이라도 도와주고 싶은데.’
야접 사건에 대한 미안함까지 더해진 마음이다.
기간은 충분하다. 치료할 한 달 외에도 침주까지 왔다 갔다 하자면 최소 대여섯 달.
한데 가르침에도 선이 있다.
연사구에겐 이미 스승이나 마찬가지이고, 하후진은 검을 고쳐 달라고 했으니 가릴 게 없다. 진서연도 심법을 세세히 전하면서 곁들이면 되고. 문제는 단 한 명.
‘당서하!’
자신의 가장 큰 장점이야 몸에 맞춘 무공의 교정. 한데 자기 무공에 있어선 강호 최고의 고집쟁이로 불리는 당가다. 대련이나 조언이면 모를까, 가르치는 것 자체부터 거부하는 이들.
‘본인이 원하지 않으면 나설 이유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되지.’
강호의 금기, 절대 넘으면 안 될 선이다. 선의로 도와주려다 악의로 돌아올 수도 있는 사안.
그렇게 생각하고 말았는데, 최근 한숨이 늘어나는 그녀에게서 느낀 게 있다.
‘세 사람을 보면서 자존감이 많이 상했어.’
연사구와 진서연은 초절정, 한참 어린 하후진도 비슷한 경지다 보니.
한데 두 번이나 자신과 엮여서 죽을 위기를 겪은 여인. 이번에 가장 많이 다친 것도 그녀다. 넷을 보호하기 위해서.
아직도 뇌리에 선연히 박힌 당시 그녀의 모습이 있다.
‘그 눈빛!’
처음 현장에 도착했을 때 죽음 직전의 급박한 상황에도 다른 이를 살피던 그녀의 눈동자. 그 절절함과 불꽃같던 정광이 아직도 가슴을 아리게 한다.
그런 무인이라 혹시 하는 마음에 하후진에게 관심을 갖게 한 것.
지금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 * *
열흘 후, 장원 내 연무장.
넷 모두 수련을 개시한 지 닷새.
한껏 흘린 땀을 식히는 두 여인의 시선이 검식을 펼치는 하후진을 향했다.
당서하의 입이 약간씩 벌어져 갔다. 눈가도 파르르 떨려 왔다.
‘아! 또 달라졌어.’
휘익! 사삭! 화라락!
하후가에서 오 년 이상 된 무인이면 누구나 배울 수 있다는 천우구환검(天宇九還劍). 직계로 인정받지 못한 하후진에겐 최선의 선택이라 했다.
그런 검이 물 흐르듯 끊이지 않는 흐름을 자아낸다. 허공을 헤젓는 칼날 선에는 맑게 울리는 검명이 같이한다.
긋는 한 획마다 느껴지는 둔중한 울림, 조금씩 간결해지는 선이 쾌와 중이 섞인 검의(劍意)를 여실히 전한다. 대지를 쓸어내리는 발걸음은 막힘없이 흐르고 한없이 부드럽다. 한데.
‘첫날에는 저러지 않았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지켜봤다. 한데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나날이 발전한다는 그 말이 딱 맞아떨어지는 광경.
그걸 매일 확인하는 다른 무인의 심정은 말할 필요도 없다.
당서하는 쓰린 속을 애써 달랬다. 이럴 땐 당가의 자존심을 떠올려야 한다.
‘저런 중견 무가, 그것도 비전도 아닌 무공이야 문제가 많지. 우리완 달라.’
가무의 편법, 호연십팔편(浩然十八鞭)에서 파생된 자신의 호연십팔검. 수백 년 동안 선조의 지혜와 노력이 결집된 산물이다.
그런 검과 비교 자체가 어불성설이다.
‘내 검법은 이미 완성된 것. 부족한 건 나야.’
하지만 눈이 간다. 욕심이 난다. 뛰어 대는 가슴이 벌렁거릴 때마다 침이 꿀꺽 삼켜진다.
혹시나 하는 그 마음. 무윤이란 존재 때문에 떨쳐지지가 않는다.
‘저놈이라면!’
순간 머리를 휘휘 내저었다.
‘아니지. 나는 당가의 무인!’
이래선 안 된다. 절대 스스로 당가의 권위를 떨어뜨릴 순 없다. 어떻게 지켜 온 자존심인데. 수많은 선조의 피와 땀으로 지켜 온 것인데.
그렇게 마음을 다독일 즈음, 하후진의 격한 숨이 끝을 알렸다.
“하아! 이제 몸에 좀 익은 거 같다. 어때?”
“뭘 물어? 네 몸이 알 텐데.”
“풋! 하긴! 참, 이제 초식 교정은 끝난 건가?”
“부상 때문에 내력을 극한까지 못 올려 봤잖아. 그때 변화만 살펴보면 돼.”
“그건 며칠 후라야 될 거 같은데.”
“조바심 내지 마. 큰 틀은 다 잡았으니까 이대로 가면 돼.”
“알았다. 네놈이 그러면 믿어야지.”
“야 인마! 나 말고 네 몸을 믿어야지.”
“그게 그 소리지.”
이번엔 무윤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좀 쉬고 있어. 이번엔 나도 몸 좀 풀자.”
하후진의 눈이 살짝 커졌다. 매번 뒷산에 가서 수련하던 놈이라 연무장에 나서는 건 처음이다.
“웬일이래? 우리 기죽인다고 몰래 하던 놈이.”
무윤은 품에서 줄 몇 가닥을 들어 올렸다. 백색과 투명함이 섞여 발하는 영롱함이 꼭 햇살에 반짝이는 포말 같다. 소려가 남긴 선물.
“이거 해 보려고.”
하후진은 눈을 껌벅였다.
“그게 뭐냐? 은을 꼬아 만든 선 같기도 하고. 귀해 보이는데.”
“누가 줬어. 선물로.”
“……그걸로 뭘 하는데?”
“보면 안다.”
“……?”
모두의 시선이 무윤에게 쏠릴 즈음.
잠시 줄을 매만지던 손이 스르륵 하늘로 향했다.
그 손 따라 풀어 헤쳐진 여러 가닥 은빛 선이 허공에 흩뿌려졌다.
촤라락!
연사구의 눈이 번득였다.
“새로운 춤인가?”
“그러게. 줄로 추는 건 처음 보는데.”
“저 줄은 뭐야?”
“몰라. 선물받았대.”
“……?”
순간 진서연의 눈이 더할 수 없이 빛났다. 이젠 저 춤의 진면목을 너무도 잘 아니까. 한데 침주에서 몇 번 본 이후론 처음.
가슴이 쿵쾅거린다. 호기심 더한 눈은 감길 줄 모른다.
‘어떤 춤일까?’
고요한 정적만이 가슴 휘저은 흥분을 알렸다.
천마라 불린 내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