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얼마 후, 악양 외곽 숲속.
나유양은 지그시 미소 지었다. 맘 같아서야 정중히 예를 갖추고 싶지만 좋아할 자가 아니다. 진정을 담은 말이 최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은혜를 입었네. 자네 사부께도.”
“저도 많이 배웠습니다.”
“허허! 이 사람아! 그게 비교가 되는가.”
비교할 수가 없다. 목숨 빚은 물론.
‘십 년을 해맨 염왕귀랑도, 그 길을 찾아 줬거늘.’
염왕귀랑도의 원류라 할 수 있는 만하적운도(晩霞積雲刀). 무윤이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운 도가(道家)의 무리를 너무도 쉽게 풀어 줬다. 거기에 도법 전체에 대한 나름의 해석까지.
핵심을 짚어 낼 뿐 아니라 간단명료한 풀이에 입을 쩍 벌린 게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러다 작은 깨달음에 들 수 있었고.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고개가 절레절레 저어진다.
‘마치 이걸 만든 무륜 님 같았지.’
그렇게 여길 정도로 무학 이론에 통달한 자, 그것도 서른이 안 된 나이인데.
이런 제자를 키워 낸 도인도 경외감이 든다.
야율혁 또한 생각은 비슷했다.
‘마공을 그렇게 분석하다니.’
매번 도가 무리를 배우는 게 미안해 마공 이론을 간략히 알려 줬었다. 한데 그때부터 빗발친 질문과 의문이 하루를 지날 즈음, 문득 든 생각.
‘조사란 분이 마공도 남겨 놓으셨나?’
물론 억측인 걸 자신도 안다. 아주 초보적인 물음부터 시작해 차근차근 답변에 꼬리를 물어 계속 이어진 의문이었으니까. 한데 그게 더 경악을 가져온다.
‘며칠 만에 나와 논쟁할 정도가 되다니.’
마음속으론 나름 자부심이 있었다.
‘무공에 있어 나만 한 천재는 없을 거야.’
실제 천마교 내에선 그게 사실이었는데. 새삼 중원이란 곳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각인시켜 준 자.
다만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
‘직접 겨뤄 봤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아직 내력의 반만 회복한 상태. 돌아가기에도 벅차다.
‘어쩔 수 없지. 교로 오면 그때.’
그 마음에 말문이 열렸다.
“이제 출발할까 싶네.”
“며칠 더 있다 가시는 건 어떨지. 시간은 충분하다면서요.”
이제 교의 민감한 사안이 아니면 대략 털어놓을 사이는 된다. 야율혁은 개인적인 일이라 굳이 감추지 않기로 했다.
“가다가 생길 변수도 있고, 사실 동생 일이 좀 있네.”
“……여동생이라는 분?”
“빨리 안 가면 그 아이 신상에 중요한 일이 벌어질지 몰라. 오빠로서 그 전에 꼭 가야 하네.”
야율혁 개인에 대해선 일부만 들었다.
‘교주의 둘째 아들이지만 서자(庶子) 출신, 그 때문에 저 자질에도 소교주 경쟁에서 불리한 거라고 했지.’
또 여동생이 한 명 있다는 것도.
그때 나유양의 입가에 작은 한숨이 흘렀다. 야율혁이 말을 안 해 자신은 이미 끝난 걸로 알던 일.
“허! 아직도 그 논의가 매듭이 안 됐단 말인가?”
“미리 말씀 못 드려 죄송합니다.”
“가문 일이니 이해는 하네. 한데 서린이 일이라 안 묻기도 뭐하군. 어찌 될 거 같나?”
야율혁은 가문 내의 역학 관계도 있어 말을 가릴 수밖에 없다. 드러난 사실만 알리기로 했다.
“서린이가 아직 결정을 못 내렸습니다.”
나유양의 언성이 갑자기 높아졌다.
“허! 그게 무슨 소리야! 목숨이 달린 일이거늘. 무조건 못 하게 해야지.”
“제가 말렸습니다만 ……아마도 저 때문에.”
“그 아이 속을 어찌 모를까. 하나 오라버니를 돕는 게 어찌 소수마공뿐이겠나. 이번에 가면 잘 설득하시게. 빙정을 쓰는 건 너무 위험하네.”
“그래야죠.”
순간 무윤의 눈이 커다래졌다.
‘소수마공? 빙정?’
껴들 상황이 아니지만, 두 말이 가져오는 정황이 있다. 과거부터 극음지체를 만들기 위해 시도됐던 방식 중 하나.
‘빙정을 이용해 극음지체로 만들고 소수마공을 익힌다? 이런 미친놈들!’
극음지체는 무(武) 자체로만 보면 신이 내린 신체, 하지만 또한 음양의 조화가 깨진 몸. 극의를 넘어서지 않는 한 오래 살 수 없다.
다만 태생 자체가 극음지체면 대부분 천부적인 자질을 타고나기에 일정 나이까지 잘 버티면, 강호에 한 획을 긋는 일대종사가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하지만 아닌 신체를 빙정이나 독, 약으로 강제로 바꾸는 건.
‘정말 만에 하나 성공할 뿐이지.’
한데 저들도 모를 리 없다. 그럼에도 가문까지 나서고 본인도 고민한다는 건.
‘여동생이 특이한 신체인가?’
어쨌든 그 목적이 소수마공을 익히는 거라면 미친 짓이다. 물론 안 그러고도 익힐 방법을 아는 무윤 입장에서는.
그러다 문득 떠올랐다. 구슬을 받은 야율혁이 했던 말.
‘그때 여동생이 천설청옥 빛을 좋아한다고 했었지.’
그건 본인 스스로 그럴 욕심이 있다는 뜻.
이러면 나설 수밖에 없다. 그래도 천마교인 중엔 가장 가까운 사인데.
“제가 낄 일이 아닌 건 아는데, 얘기가 좀 아닌 거 같네요.”
야율혁의 눈에 의아함이 서렸다.
“무슨 소리지? 아니라니?”
“여동생분의 목적이 뭡니까? 극음지체? 아니면 소수마공?”
이 정도는 알려도 괜찮다.
“자네, 월음지체(月陰肢體)라고 들어 봤겠지.”
“그거야 음기가 강한 여인의 신체……. 그럼 여동생분이?”
월음지체 또한 희귀하긴 마찬가지.
“그래. 극음지체보다 못해도 음기 무공에 최적화된 신체지. 자질도 나 못지않고.”
“그럼 지금도 강한 무인이 될 수 있는데 왜 굳이?”
“비교가 안 되지. 소수마공은 세상에 알려진 가장 강한 여인의 무공 아닌가. 교에도 이백 년 동안 나온 적이 없지. 천 년 동안도 두세 분이었고. 그걸 익히면 어찌 되겠나?”
“아! 오라버니를 돕는다는 게?”
가문 내 사정은 굳이 얘기할 이유가 없다.
“내 사정이 절박한 것도 큰 이유네.”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다.
“월음지체만 해도 여인으론 견줄 신체가 거의 없잖습니까. 소수마공이 아니더라도 극의에 다다를 길은 많을 텐데.”
“그래도 월음지체는 가능성이 상당히 높지. 그래서 동생도 고민하는 거고.”
순간 무윤의 눈이 번득였다.
‘아까 가문의 논의도 언급됐었지.’
사정을 다 알진 못해도 가문 입장이야 대략 감이 왔다.
‘서녀(庶女)니까 되면 좋고 죽어도 그만이라 이거겠네.’
할 말은 이것뿐.
“미친 짓입니다. 못 하게 하셔야죠.”
“아네. 한데 그 아이도 무인이네. 욕심이 있어. 그게 문제지.”
“목숨을 건 도박입니다. 확률도 별로 없고.”
“휴! 수없이 얘기했네. 한데 다른 것도 아닌 소수마공일세. 남들은 그런 기회도 없고 자신에게만 선택권이 주어졌네. 무인으로서 욕심이 안 날 수 없지.”
생각지도 않은 고민이 생겼다.
‘언질을 줄까 말까?’
나중에 천마교에 가서 판단할 수 있으면 지금 고민도 없다. 하지만 시일이 촉박한 상황.
잘 풀어내면 이 남매는 완전히 내 편이 된다. 반면 일이 어떻게 꼬일지도 모르고. 긁어 부스럼일 수 있다. 굳이 안 꺼내도 서로의 신뢰는 문제없기도 하고.
그래도 고민이 깊어지는 이유. 그건 소려 때문이다.
‘연이 닿으면 빙옥섬수의 후인을 만들어 주려고 했는데.’
한데 정파나 다른 곳에서 후인을 찾기엔 문제가 있다.
‘외형상으론 소수마공하고 같아서 오해받기 십상이지.’
결국 전하려면 천마교가 최선, 거기에 자질도 있는 여인.
무윤은 한참을 고민하다 결정을 내렸다. 위험부담이 있지만, 지금은 적당히 알려서 못 하게만 하고, 차후 가서 판단할 기회가 또 있다.
무엇보다 마음이 그러고 싶다.
‘소려에게 보여 주고 싶어. 이 세상에도 빙옥섬수가 있는 것을.’
그 마음이 내린 결정. 무윤에겐 선택이 아니라, 이 세상에 온 자신이 소려를 위해 해야 할 과제처럼 느껴진다. 꺼내고 볼 일이다.
“빙정 말고도 다른 길이 있습니다.”
“……다른 길? 그게 뭔 소린가?”
무윤의 시선이 두 사람을 번갈았다.
“소수마공도 원류가 따로 있습니다. 염왕귀랑도처럼.”
순간 경악 서린 두 사람의 눈이 한순간 멍해졌다.
‘지, 지금 뭐라고……?’
‘원류가 따로 있다! 소수마공이?’
몽롱하게 홀린 듯했던 야율혁의 눈빛이 금세 타올랐다. 황당함의 극치인 말, 하지만 뱉은 자가 무윤이다.
‘근거 없이 이럴 자가 아니다!’
며칠 동안 보여 준 모습, 그게 황당무계함을 확신으로 만든다. 격한 흥분에 숨이 솟아올랐다. 우선 확인부터.
“그 말……. 사실인가?”
“제 조사께서 빙옥섬수란 걸 만드시고, 무륜께 선물로 주셨는데 마후란 분께 전해졌지요. 한데 그분께 맞춘 무공이라 이후 이어지지 못했습니다.”
“그 얘긴 갑자기 왜?”
“얼마 전에 혈교 여인이 소수마공이란 걸 펼치는 걸 봤죠. 근데 그게 빙옥섬수의 변형, 아니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무공이더군요. 보자마자 얼마나 열이 받던지. 후!”
무윤은 말하는 내내 눈썹이 계속 하늘로 치솟았다. 치민 부아가 그리 만들었다. 또 꾸민 상황을 이해시키려면 필요하기도 하고.
두 사람은 황당함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엉터리? 강호 역사상 최고의 여인 무공이? 그럴 리가.’
그때 야율혁은 바로 문제를 찾았다. 무윤이 잘못 알고 있다.
“혈교엔 소수마공이 없어. 이제껏 나온 적도 없고. 자네가 본 건 아마도 흉내 낸 엉터리가 맞을 걸세. 우리 교에 있는 건 그렇지 않네.”
“같을 겁니다. 마후가 전한 게 맞고 역혈과 빙공을 섞어서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놨지만 원형은 빙옥섬수가 맞아요.”
이건 천마교도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 야율혁은 매섭게 뜬 눈을 꿈틀거렸다.
“그럴 리 없네. 자네가 착각한 게 틀림없어. 소수마공과 그 빙옥섬수란 건 다른 게 분명해.”
“우선 그렇다고 치죠. 지금이야 저도 증명할 방법이 없으니까. 구결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야율서린에겐 교주 특명으로 소수마공이 이미 주어졌다. 그래도 딸이라 미리 보고 결정하라는 아버지의 배려.
또한 야율혁도 그 구결 상당 부분을 안다. 동생과 같이 연구했으니까.
“구결은 내가 대략 아네.”
“그래요? 그럼 맞춰 보시죠.”
“그러지. 그딴 엉터리와 다른 걸 금방 알 것이네.”
한데 구결을 비교한 지 반 각 후, 무윤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더 할 필요 없겠는데.”
“…….”
유구무언(有口無言)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잠시 후.
땅이 꺼질 듯 한숨을 내쉬던 야율혁은 정말 묻고 싶었다.
“그 빙옥섬수에 비해…… 정말 엉터리던가?”
“위력은 얼추 맞췄는데 나머진 다 엉망입니다. 그중 가장 큰 차이가 뭔지 아십니까?”
“어떤?”
“빙옥섬수는 운영할수록 시전자의 몸을 좋게 만듭니다. 애초에 조사께서 만든 목적이 강한 무공이 아니라 마후께 드릴 선물이었으니까요. 몸과 천지 만물의 조화를 이뤄 내는 현경까지 바라볼 수 있게 하셨죠.”
“그럼 소수마공은?”
“시전자의 몸을 갉아먹으면서 힘을 냅니다. 자연지기와 완벽한 조화를 못 이루면 극음지체도 결국엔 못 버팁니다.”
“그 말은?”
“전력으로 사용하면 몇 년 내 진기가 고갈돼 죽습니다. 가서 기록이 있다면 살펴보세요. 제 말이 맞을 테니까.”
이미 기록은 세세히 살폈다.
“소수마공을 드러낸 이후 이야기는 일절 없었네.”
“일부러 안 적었겠죠.”
이제 야율혁이 할 말은 빤하다. 하나뿐인 동생 일인데 염치고 뭐고 없다.
“그 빙옥섬수, 어떻게 안 되겠나?”
“우선 못 하게 해야 하니까, 빙옥섬수 초반 구결과 운기법을 적어 드리죠. 해 보면 동생분도 제 말을 믿을 겁니다.”
“저, 정말 그리 해 주겠나?”
“동생분 말고는 비밀입니다. 알려지면 전 평생 숨어 살 수밖에 없어요.”
“암! 말해 뭐하겠나. 내 목숨을 걸지.”
“바로 적어 드리죠.”
“……고맙네. 지금은 이 말밖에는.”
“단 지금은 사람부터 살려야 하니까 알려 드리는 거고, 다 전할지는 동생분을 보고 결정하겠습니다.”
“물론 그래야지. 참! 언제쯤 올 생각인가?”
형산 일은 어느 정도 마치고 가야 한다.
“반년 후 정도, 늦어도 일 년 안에는 꼭 가겠습니다.”
“알겠네. 연락은 정한 그곳으로 하면 되고. 가능한 한 빨리 와 주길 바라네.”
“노력하겠습니다.”
무윤이 구결을 적어 주고 얼마 후, 둘은 천마교로 향했다.
한편 장원으로 돌아온 무윤은 밤새 또 적어 내려갔다.
이번엔 은월청요검 초급과 중급.
소림에 이어, 하오문, 그리고 천마교까지.
천 년 전 무공이 서서히 이 세상에 나오기 시작했다.
천마라 불린 내 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