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천마라 불린 내 친구
나흘 후, 단주 각운의 임시 장원.
장사(長沙)에 있던 연대광이 회담장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악양으로 달려오자, 대주 정원이 장원으로 은밀히 데리고 왔다.
아들과 만나는 자리.
아들을 잘 아는 아버지의 첫마디는 이랬다.
“은월청요검, 진짜겠지?”
연사구는 눈을 부라렸다.
“아니! 아들이 이렇게 다쳤는데 오자마자 첫마디가 그거예요?”
“중상이면 날 보자마자 호들갑 떨었겠지.”
연사구는 어깨의 상처를 들춰 보였다.
“이거 보라고요. 진짜 죽을 뻔했다니까요.”
아들의 상세가 왜 안 궁금할까. 아버지인데. 다만 오면서 대주 정원에게 상세히 들었다. 이미 수십 번 안도의 한숨도 내쉬었고.
“아무는 거 잘 보인다. 그보다 원래 검식 전부 있었던 게지?”
“예, 그땐 왜 속였는지 아시죠?”
“이놈아, 그건 그렇다 치고, 도인 얘기는 어떻게 된 거냐?”
“……그것도 아시잖아요.”
순간 연대광의 미소가 그윽해졌다. 걱정도 되지만 지금은 아들에게 꼭 해 주고 싶은 말이 있다.
“잘했다.”
“……예?”
“잘했다고. 다시 말해 주랴?”
“와! 웬일이세요? 혼낼 줄 알았더니.”
진심에서 한 말이지만 너무 기가 살아서 좋을 게 없다.
“너 혼자 결정한 거 아니잖아. 같이 했겠지.”
“뭐야! 그래서 잘했다고 한 거예요?”
“아무튼! 대책은 있는 게냐?”
“뭐 급히 결정한 거라 아직……. 근데 아셔야 할 게 있어요.”
“뭐냐?”
연사구는 무윤과 상의한 대로 모든 걸 알렸다. 하오문도 이 일에 휘말려 있고, 또 향후 조작의 선봉에 서야 할 곳. 그걸 진두지휘할 자에게 감출 건 없다.
연대광은 듣는 내내 놀람과 격정, 우려에 수시로 표정이 바뀌었다. 특히 무윤이 화경이란 말엔 몇 번이나 되묻기도 했고.
얼마 후, 생각을 정리한 연대광의 눈이 더할 수 없이 빛났다.
‘이런 기회는 다시없다.’
수백 년 동안 풀 방법조차 찾지 못했던 하오문의 숙원.
‘개방처럼 강호의 일원으로 당당히 인정받는 것.’
또한 자신의 꿈이기도 하다. 자식들에게 대대손손 자랑스럽게 물려줄 수 있는 기반. 그걸 만들어 내는 게 평생의 염원.
그런 연대광의 복안.
‘우린 개방처럼 단일 조직은 어려워. 지역별 연합체이되, 강한 결속력을 가진 형태. 그게 답이다.’
정보를 다루는 두 집단, 개방과 하오문은 유사하면서도 극명한 차이가 있다.
가장 큰 차이점.
개방은 다른 문파처럼 구성원 자체가 방도다. 거지 중 가입한 자 전부가 방도니까. 해서 구성원 전체를 보호하고 먹여 살린다. 그래서 강호 전체라도 굳건한 단일 조직이 가능한 형태.
반면 하오문은 구성원인 하류층의 대변자와 조력자일 뿐, 먹여 살리고, 보호하는 건 문도에 한정된다. 한데 정보는 그 구성원 전체에서 나오고.
그 차이가 여러 가지 한계를 만든다.
과거 하오문도 개방처럼 단일 조직이었으나, 구성원의 결속력이 없어 매번 여기저기에 치이고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상위 권력층은 혈연관계로 상속되지만, 나머지 문도는 가입과 이탈이 빈번하다 보니 충성심은 기대할 수도 없었으니까.
한마디로 단단한 뿌리가 없는 가지라 바람 잘 날 없었던 셈.
연대광은 그 한계를 너무도 잘 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지역별 연합체. 물론 지금도 그렇지만 가장 큰 차이가 있다.
‘강한 결속을 유지시켜 주는 요인, 그것만 있다면.’
그게 절대의 무공과 그걸 증명해 줄 무인이다. 거기에 더해.
‘혈연과 출신에 상관없이 능력만 있으면 그걸 배울 수 있게 천명하면.’
그러면 약점을 강점으로 바꿀 수 있다.
‘하류층 누구라도, 나도 그런 무인이 될 수 있다는 꿈을 꾸게 된다. 그것만 확실히 보장해 주면 이보다 큰 충성심과 결속력은 없어.’
그런 연대광에게 기회가 왔다. 수십 년 후에나 아들 연사구에게 그걸 바랐는데, 당장 모색할 방안이 눈앞에 생겼다.
바로 무윤 덕분에. 형산파 얘기도 들었다.
‘낭중지추(囊中之錐)라, 멀지 않은 시기에 화경인 게 밝혀지게 돼 있어. 그때 하오문과 친구고 강한 연대가 있는 게 알려지면.’
그걸 기반으로 꿈을 앞당길 수 있다.
이제 첫발을 내디딜 때.
“방주와 같이 보자꾸나. 할 얘기가 많겠어.”
“……어떤 거요?”
연대광이 복안과 난제를 설명하고 얼마 후, 연사구의 눈이 빛을 발했다. 어떤 놈은 아버지의 난제를 쉽게 풀 방법이 있다.
“어려울 게 없네요. 시간은 걸리겠지만.”
“……?”
잠시 후, 무윤과 두 부자가 따로 자리했다.
연대광은 우선 정중히 예를 갖췄다.
“정말 고맙네. 이런 인사는 안 하기로 했지만, 이번엔 할 수밖에 없군.”
“아닙니다. 좀 더 신중했으면 좋았는데. 죄송합니다.”
“이 정도면 좋은 경험이지. 그보다 지금 밖은 난리가 아닐세.”
“상황이 어떻습니까? 대략 듣긴 했는데.”
“우선 천마 소문은 다른 내용이 터져 나왔으니 설왕설래하고 있네. 한데 악양 부근은 자네 기록이 나오면 이쪽으로 기울 분위기야. 무공까지 같이 언급됐으니 신빙성이 더 가니까. 다만 먼 곳은 사실 확인이 어려우니 달리 생각할 수도 있겠지.”
“그 정도면 다행이네요.”
이제 상대를 미안하게 만들 때. 연대광은 아들을 힐끔거리고는 말을 이었다.
“한데 그래서 더 걱정인 게지. 크흠! 조작하는 자들이 정말 있다면 저놈이 목표가 될 테니.”
연사구가 급히 껴들었다.
“말씀드렸잖아요. 그건 내가 결정한 거라고. 왜 이놈한테…….”
연대광은 단 한 치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자네가 반대했으면 이놈도 안 했겠지. 안 그런가?”
무윤도 슬슬 감이 왔다. 어쨌든 은인이나 마찬가지인 자신에게 대책이 아닌 책임부터 따질 때는 그만 한 이유가 있다.
“하실 말씀이 있으시군요?”
“먼저 묻겠네. 혹 방안이 있는가?”
“문제는 두 가지죠. 절대무공을 가졌는데 지킬 힘이 없어 보이고, 도인에 대해서 저놈만이 안다는 거.”
“그래서?”
“우선 형산파 일에 저놈도 엮어서 은인이나 봉공(奉公)으로 만들까 합니다. 그런 뒷배가 있으면 절대무공 때문에 유독 공격받을 리는 없죠.”
“그렇겠군.”
“또 도백파 유진을 발표하면서 제가 도인으로 나설 겁니다. 그럼 저놈보다 형산 쪽에 더 시선이 가겠죠. 소림과 개방에도 자료를 넘기고 잘 아는 것처럼 꾸밀 거고. 그때가 되면 굳이 저놈을 주시할 이유가 없을 겁니다.”
연대광은 남몰래 침음을 삼켰다. 시간이 문제일 뿐 저 정도면 해결책이 된다. 미안하게 만들 거리가 없어졌다.
‘이러면 솔직하게 가는 게 최고다.’
연대광은 진정을 담은 눈으로 상대를 마주했다.
“크흠! 미안하네. 사실 부탁할 게 있어서 말을 좀 돌렸네.”
“어떤?”
“이번 기회에 호남은 물론 전체 하오문의 염원을 풀어 볼까 하는데, 자네 도움이 꼭 필요하네.”
“염원이라면?”
“당당한 문파로 거듭나는 거 말일세.”
“방안은 있으신지요?”
“뚜렷한 대책이 없었는데 이번에 생기지 않았나.”
“은월청요검이겠군요.”
“자네도 알겠지만 삼백 년 전 문주께서 은월청요검을 각 지부에 푸셨지. 지부장 혈족과 고위층은 대부분 익히고 있어. 한데 원본이 나온 데다 사구 이놈이 그걸로 초절정인데 난리가 안 나면 이상하지.”
“그럼 어떻게?”
연대광은 한참 동안 하오문의 현실을 차분히 풀어내고는 말을 이었다.
“해서 매년 열던 회합을 다음 달로 앞당겨 장사(長沙)에서 모이기로 했네.”
“안건은?”
“정례 사항에 두 개를 추가했네. 우선 은월청요검 진위 여부를 밝혀야지. 이놈이 먼저 시연을 보이고 지도 비무를 하기로 했네. 이건 확정이나 마찬가질세.”
“다음 건?”
연대광의 눈이 빛을 발했다. 난제이자 도움을 요청할 일.
“아직은 나와 일부 생각이네만, 무공이 인정되면 인원을 선발해 은월단이라는 무력대를 만들까 하네. 그렇게 되면 삼백 년 이후 처음으로 단일 부대가 편성되는 셈이지.”
하오문 입장에선 절대 작은 일이 아니다. 그렇다는 건.
“아주 작심하셨군요.”
“이런 기회가 또 언제 오겠나. 한데 이게 간단치 않은 사안이라 자네 의견을 들었으면 하네. 또 부탁도 있고.”
“의견이라면?”
“은월단을 반대하는 곳도 적지 않네. 정, 사 모두 좋아할 리 없고 또 각자 실익도 별로 없는데, 괜히 불똥 튈 일이 될까 봐 그러지.”
“그럴 수 있겠네요. 그럼 어떻게 하시려고?”
“논의하다가 정 안 되면 규모도 줄이고 선발된 단원에게 가능한 은월청요검을 많이 전하려고 했네. 익힌 자 대부분이 고위층이라 그래도 욕심이 날 테니까.”
“그것도 방법이네요.”
“한데 이건 시작이고 내 목표가 뭔지 아는가?”
“어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일정 자격 이상이면 배울 기회를 주고 싶네. 그래야 문도도 늘어날 거고 아까 말한 대로 구성원 모두가 꿈을 가질 수 있지.”
취지야 알겠지만 의아한 말이다. 절대무공을 아무에게나 풀면 그 가치는 줄어드는 법. 은월청요검은 전, 후반부 총 팔 단계. 이를 등급별로 제한해도 대상을 한정하지 않으면 수십 년 후엔 어디까지 퍼질지 모른다. 게다가 내부 반대도 빤히 보이는데.
“아무나 푼다고 하면 대표들이 가만있겠습니까?”
“당연하지. 그래서 자네에게 부탁하려는 거네.”
“어떤?”
연대광은 핵심을 꺼내 들었다.
“입문 무공을 따로 만들어 줄 수 없을까? 그걸 거쳐서 은월청요검으로 넘어가게. 자넨 그 오의도 다 알고 무공도 잘 만드니 말일세.”
순간 연사구를 째려볼 수밖에 없다. 연대광이 저런 걸 알 방법은 하나뿐이니까.
“너지?”
“빤한 걸 왜 물어.”
“너무 뻔뻔한 거 아냐?”
“너도 좋은 일이잖아. 하오문이 결속되면 너 팍팍 밀어줄 건데.”
입가에 피식 웃음이 흐른다.
맞는 말이다. 또 부탁이 아니더라도 두 번째 안건을 듣자마자 발 벗고 도와주고 싶었다. 침주에 내가 벌인 일이나 연대광의 이번 일 모두 같은 생각에서 출발한 거니까.
‘못 가진 자에게 꿈을 주는 일.’
입문 무공이라 해도 능력만 되면 절대무공을 배울 기회, 그게 눈앞에 있다면 무인을 꿈꾸는 하류층 누구에게도 희망을 줄 일이다.
거기에 일이 잘되면 두 부자가 하오문 전체를 주도한다. 그 뒤에 내가 있는 셈이고. 활용할 일이 부지기수. 거기에 하오문의 전신인 은야문을 만든 소려.
‘당당한 후인들의 모습을 보면 좋아하겠지.’
입문 무공은 어려운 일도, 아니 만들 것도 없다.
원래 은월청요검은 소려의 반려자에게 주려고 만든 무공. 상대가 어떤 자일지 몰라 수준에 맞게 따로 만들어 둔 게 있다.
초급과 중급 두 가지. 줄 바에야 두 개를 다 건네는 게 낫다.
‘입문만 가지고는 간극이 너무 커, 중급까지 해서 세 단계로 배우게 하면, 은월청요검 가치도 지킬 수 있다.’
바로 연대광에게 시선을 돌렸다.
“회합이 한 달 남았다고 하셨죠?”
“그러네.”
“그때 보여 주는 게 가장 좋겠네요.”
“응? 그렇기는 한데……. 그 안에 만든다는 소린가?”
연사구는 눈썹을 매섭게 휘날렸다. 아무리 무윤이라도 이건 아니다.
“야! 기초 무공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 얼렁뚱땅 만들 생각일랑 집어치워! 시간 걸려도 좋으니까 잘 만들라고. 알았어!”
“난, 만들 생각 없는데.”
“……뭔 소리야? 방금 회합에서 보여 준다고…….”
“이미 있다. 입문하고 중급 두 개가.”
“……?”
잠시 후.
입이 쫙 찢어진 두 사람을 뒤로하고 무윤은 장원 밖을 향했다.
상처를 치료하던 천마교도 둘은 오늘 떠난다. 매일 밤에 가서 무공과 조작에 대해선 여러 얘기를 나눈 상태.
향후 천마교에 갈 일정만 조율하면 된다.
어둠에 묻혀 간 신형이 산야에 스며들었다.
사사삭!